序                         文

 

서기2008년 봄이다. 양력2월10일, 우리나라 국보1호 숭례문이 불에 탔다. 역사의 증거물이 또 피해를 입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없을 수 없는 일들일 것이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고 역사는 흐른다. 

2월25일에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이명박)이 취임하여 열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 경제 환경이 너무 좋지 않은 상황이다. 세계적으로 곡물 파동, 에너지 파동이 예측되고, 모두가 살기 힘든 상황이어서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20세기 독재자중 한 명인 쿠바의 카스트로가 며칠 전 권력을 놓았다. 1월에는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죽었다. 북한의 김일성과 더불어 악명을 날리던 자들이었지만 그들도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북한은 아들 김정일의 세습으로 아직도 굳건한 독재 공화국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1)!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 세거지를 밟을 수도 없는 나라에 우리는 역사를 이어가며 살아간다. 아직도 저 북한 땅에서 살아가는 종중(宗中)2)들, 나의 종형제들을 그리면서 더 많은 역사적 자료와 증거들을 담고 싶으나 그렇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올 해, 우리 정선이씨도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 같다. 1월3일에 이장곤,이현웅,이병문씨와 2월14일에 이필곤,이영곤,이현섭,이만수씨와 만났고 그리고 이기철씨와 연락하며 우리 종중들의 접촉이 시작되어, 그동안 통합적인 교류를 못 해 왔던 우리들이 旌善李氏의 姓氏아래 또 다른 획을 그을 준비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번에 사직공파 세보를 제작하는 이장곤(34세)씨와 그 매제(성교진)의 노력으로 2006년 가승보를 만든 본인과 연결되고, 온라인상으로 “정선이씨 草家”를 운영하며 남다른 애정을 쏟아온 이현웅(35세)씨의 활약으로 종중들이 하나, 둘, 연결된 것이 이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즈음에 제작인의 부탁을 받고 족보의 흐름을 요약, 정리 하였으나 자료의 수집과 시간의 제약 상 충분하고 만족한 집필을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문중(門中)3)마다 가승보나 파보를 만들 때에 우리 후손들이 첨삭, 수정해 간다면 대동보 제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韓國의 250餘 姓氏 中 귀화성이 136개에 이르는데 이 중 대부분(130개)은 中國이 근원이며, 나머지 6개중에 우리 旌善李氏와 花山李氏는 베트남에서 왔다.4) 이 내용은 또 우리와 한 형제인 화산이씨 와의 관계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의 근거는 대부분 정선이씨 무인보(戊寅譜)와 화산이씨의 족보 및 국내 족보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1. 씨족의 본원: 시조(始祖) 이양혼(李陽焜)과 그 뿌리

다음의 내용은 우리 족보의 “교지(交趾)5)사적(事蹟)”에 주로 근거하였다.

우리의 시조는 이양혼(李陽焜)6), 자(字)는 元明, 安南國 南平王 휘(諱)7) 건덕(乾德)의 第三子로 송나라8) 휘종9)때 국난10)을 피하여 경주로 와서 적(籍)을 하였다11).


1) 안남국(安南國)

 현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약칭:베트남)인 이 나라 국민들은  기원전 2천 년 전 반랑국의 흥왕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긴다. 이 반랑국에 이어 어우락 왕국이 세워졌고 이 나라는 중국 진나라에 의해 합병되어 남비엣(남월,南越, Vietnam의 기원)의 한 부분이 된다. 이 남비엣은 기원전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되어 그 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는다. 안남(安南)이라는 명칭은 679년 당대(唐代) 중국이 하노이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둔데서 시작된다. 이후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반랑국에서 안남에 이르는 시대이다.12)

이후 베트남은 최초의 독립 왕조를 갖게 된다.

서기939년 중국 원정군에게 승리를 거둔 응오꾸엔이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왕조를 세우며, 이후 딩(Dinh), 레(Le)왕조에 이어 리 왕조(Ly, 李 王朝)13)가 리꽁우언(이공온)에 의해 만들어져 200여 년간 왕조를 이어갔는데 旌善李氏의 始祖(이양혼)와 花山李氏의 始祖(이용상, 화산군)는 베트남의 최초장기 집권왕조인 ‘리 왕조’의 왕자들이었다.

2) 리(Ly)왕조와 우리 시조(양혼)의 뿌리

송나라 眞宗 대중상부 3년 경술년(1010)14),  고(故) 남평왕 여환(黎桓)의 차자(次子), 교지군왕 여지충(至忠)이 26세였는데 포악무도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송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청했고, 교지(交趾)의 대교(大校)15) 이공온(李公蘊 Ly Cong Uan, 송 태종 옹희2년 을유생, 985년)이 이를 축출하고 유후(留後)를 맡았다. 이어 송나라로부터 특진 검교태부를 제수받고 정해군 절도사와 관찰처치등사와 안남도호 겸어사대부상주국에 임명받았으며 교지군왕(交趾郡王)과 추성순화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4년엔 동평장사로, 5년에 개부의동삼사를 더하고 익대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7년(1014)에 보절수정공신으로, 천희(天禧) 원년(1018)에 남평왕에 진봉하고 2년에 검교태위를 더하였다. 천성(天聖) 6년(1028)에 44세로 별세16)하니 이 분이 리 왕조의 시작인 태조(太祖)가 되는데 정선이씨 시조 양혼의 고조부가 되시며 화산군의 6세 선조가 되신다.17)

이공온께서 별세하자 아들 덕정(德政)이 검교태위 정해군 절도사 안남도호 교지군왕이 되었고 그 후 1032년에 동중서문하평장사, 경우(景祐) 연간에 검교태사, 보원元年(1038)에 남평왕에 진봉되었고 지화2년(1055)에 별세하니 2代 임금 太宗이다.

이어 송나라는 아들 일존(日尊)에게 특진 검교태위 정해군 절도사 안남도호를 제수하고 교지군왕에 봉하였다. 宋 가우9년(1064)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더하고 신종(神宗)이 즉위하여 남평왕에 진봉하고 희령元年에 개부의동삼사를 더하였다. 2년(1069)에 일존은 점성국(占城國, 베트남 남부) 토벌을 빌미로 자칭 황제라 칭하고 시조 공온을 높여 태조신무황제(太祖神武皇帝)라 하고 국호(國號)를 대월(大越)이라 했는데 희령5년(1072)에 죽으니 이 분이 3대 임금 성종(聖宗)이다.

이어 아들 건덕(乾德)이 즉위하였는데 철종원년(1086) 동중서문하평장사, 2년(1087)에 남평왕에 진봉하였으며 송나라 8대 휘종 때에 여러 번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를 더하였다. 이후 宋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무역도 활발해 졌는데 1125년부터 송은 금나라18)의 침공을 받게 되며, 이윽고 정강의 변19)을 맞게 된다. 북송의 마지막 왕 흠종까지 잡혀간 이후 그의 동생 고종으로 말미암아 건염(建炎)元年(1127)으로 南宋이 시작되었다. 이즈음을 시조 양혼께서 동쪽 우리나라로 이주 한 때로 보고 있다.20) 소흥(紹興)2년(1132) 60년 재위 후 별세하자 시중 남월왕(侍中 南越王)이 추증되었는데 이 분이 우리 시조 양혼의 선고(先考)21)이시며 4대 임금 인종(仁宗)이다.

아들 양환(陽煥, 시조 양혼의 兄)이 뒤를 이어 정해군 절도사 검교태위에 제수되고 교지군왕이 되었으며 추성신화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소흥8년(1138) 양환이 별세했으니 5대 임금 신종(神宗)이다.

양환이 별세하자 아들 천조(天祚)가 이어갔다. 천조는 화산이씨 시조 이용상22)의 선고(先考)가 되는데 1155년 남평왕이 되고 순희元年(1174) 안남국 왕이 되었으며 2년(1175)에 안남국의 인장(印章)을 받고 3년에 책력(冊曆)을 받았다. 중국이 베트남 왕에 칭했던 교지국왕 대신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봉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6대 임금 영종(英宗)이다.

천조가 죽고(1176) 다음해 아들 용한(龍翰)이 즉위했는데 7대 고종(高宗)이다.

용한이 죽자(1212) 그 아들 호참(昊旵, 8대 惠宗)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였다. 계유년(1213) 숙부 화산군, 평해공 군필, 진일조를 三公으로 삼아 국정을 위임했으나 왕의 누나인 소성공주(紹聖公主)와 진일조(陳日照)의 실정(失政)으로 화산군과 군필은 동쪽으로 나왔다.23)

이(LY,李)왕조는 공온으로부터 호참에 이르기까지 모두 8대로 220여년에 이르게 되었다.24)




2. 정선이씨 본관지

현재 강원도 정선(旌善)군(郡)이다.

우리 족보의 정선군 연혁과 ‘旌善郡誌’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3. 정선이씨 파명록(派名錄)

무인보를 기준으로 한 것임, 파조는 16世이며, 이외에 밝혀지지 않은 파들이 있을 수 있음

1) 참군공파(參軍公派), 파조(派祖) 극정(克精,15世 存實의 長子,太宗13,1413,癸巳生)

2) 사직공파(司直公派), 파조(派祖) 극효(克孝,15世 存實의 次子,太宗16,1416,丙申生)

   - 사직공장파(司直公長派), 의(誼, 20世 希天의 長子, 明宗13年,1558,戊午生)

   - 사직공중파(司直公中派), 충수(忠秀, 20世 希聖의 長子, 明宗12年,1557,丁巳生)

   - 사직공말파(司直公末派), 겸(謙, 20世 希賢의 長子, 宣祖23年,1590,庚寅生)

3) 교위공파(校尉公派), 파조(派祖) 극선(克善,15世 存實의 三子,世宗 元年,1419,己亥生)

4) 승지공파(承旨公派), 파조(派祖) 인(仁,15世 興望의 長子,世宗 30年,1448, 戊辰生)

   - 승지공장파(承旨公長派), 두성(斗星, 21世, 宣祖34年,1601, 辛丑生)

   - 승지공중파(承旨公中派), 규성(奎星, 21世, 宣祖39年,1606, 丙午生)

   - 승지공말파(承旨公末派), 추성(樞星, 21世, 宣祖37年,1604, 甲辰生)

5)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派祖) 의(義,15世 興望의 次子,文宗 元年,1451, 辛未生)

6) 선전공파(宣傳公派), 파조(派祖) 예(禮,15世 興望의 三子)



4. 정선이씨 주요 세거지(世居地)및 인구

1) 세거지

가. 함남 안변군(安邊郡) 신아면(新芽面) 중어지리(中漁地里), 하(下)어지리,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상성면(上聖面)일원, 벽성군(碧城郡) 금산면(錦山面) 산산동(蒜山洞), 청계면(淸溪面) 양대리(陽(岱里)25)

나. 분포(分布)상황(狀況) 및 호수(戶數)

강원도 철원군 인목면 승양리 38, 황해도 재령군 삼강면 설산리 15,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일원 30, 황해도 신계군 신계면 일원 25, 황해도 벽성군 금산면 산산동 40, 황해도 재령군 상성면 일원 40, 황해도 재령군 청천면 양대리 40, 황해도 재령군 은룡면 신창리 35, 황해도 재령군 신원면 무학리 25,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고잔리 24, 평북 박천군 동남면 동남동 21, 함남 안변군 안변면 상화산리 30, 함남 안변군 안변면 하화산리 3326), 함남 안변군 신아면 상어지리 4427), 함남 안변군 신아면 하어지리 55 (이상 495호)28)

다. 기타

경기 연천군 삭령면(현,중면) 여척리 일대29) 약30호(2007년 35世 이현웅 국가기록원 토지조사원부 기록으로 확인) 

2) 인구

가. 1985년 통계 3107명, 809가구(이상 남한)

(서울1112,부산238,대구127,인천193,경기469,강원262,충북56,충남146,전북37,전남98,경북210,경남159,제주0명)

나. 2000년 통계 3657명(이상 남한, 통계청)30)

 

5. 족보(族譜) 서문(序文) 상고(詳考)

1) 1677년(정사丁巳, 숙종3) 舊序:  후손 生員 이익재(李益材)씀

우리 족보의 最初 (草譜) 서문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우리 정선이씨는 안남에서 시작하여 고려조31)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불행이 중엽에 난리32)로 인하여 족보를 잃어서 뿌리와 파(派)를 널리 구명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스럽다.” 330여 년이 지난 우리에게  선조들이 던져주는 강렬한 恨은 이제 우리 宗中 모두가 공감하는 동시에 향후 과제의 인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엽의 난리” 이후 다행히 8世 연(蓮)께서 피신하시어33) 후계를 이었다. 1677년 당시 선조들의 유서(遺書)들과 문중의 고견에 의거하여 판종부(判宗簿)公(13世,龍)34)이하로는 成人이 되면서 대부분 기록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또 그 이상은 기록상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 주로 우거하시던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 애정동을 근거로 자손들이 번성하여 가지가 뻗어나갔음과 그 시절에도 문중의 단합과 정의 돈독함이 점차 사라져 감을 필자는 아쉬워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1771년(신묘辛卯, 영조47) 舊序: 후손 이정규(李正奎)씀

필자는 족보 편수의 目的을 잘 일러주고 계신다.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을 바로잡고, 항렬(行列)과 차례를 서열(序列)하며, 보지 못한 과거의 아름다운 자취를 볼 수 있고, 대면(對面)하지 못한 천리(千里) 밖의 종족(宗族)들을 대면하는 효과가 있으며, 선조(先祖)를 높이고 宗族을 수합(收合)할 수 있다고 하셨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첨언할 수 있겠는가?

이 서문의 중간에, “우리 李氏는 고려조에 대대로 큰 벼슬을 이어왔으나 귀신에게 아첨하는 때35)를 만나게 되자 영화와 명예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판종부(判宗簿)公(13世,龍)은 지위가 정승(政丞)36)반열(班列)에 올랐으나 먼저 치사(致仕)37)하였고 안렴사(按廉使)38)公(14世,自生)은 벼슬이 높은 반열에 있었으나 명철하여 몸을 보전하는 유풍(遺風)이 또한 높다고 이를 만하다”고 이르며, 우리 정선이씨의 기질과 충절과 능력을 피력하였으며 “ 다만 恨스럽게도 판공부공 이상(1-12세까지)은 증거 할만한 世系가 없으니....”라고 하여 여기서도 상세(上世) 및 중세(中世)에 족보의 잃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1771년)라도 족보를 만들지 아니하면 후일(後日)에 한으로 남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족보 제작의 취지를 전(傳)하면서 애정(艾井) 유적지를 무농정(務農亭, 청주한씨 유적지)과 선죽교(善竹橋,창녕성씨 유적지)에 비교하고, 향후 애정 유적단과 비(碑)의 건립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3) 알봉섭제격(古 甲子로 甲寅年) 舊 序文:  남원인(南原人) 양상우(梁相禹)39)

이 舊 序文에서 李氏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지금 李氏의 선조는 전욱(顓頊)에게서 나와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를 지나왔고, 당(唐)나라 농서(隴西)와 송(宋)나라의 교지(交趾)는 곧 아득히 먼 화려한 후손과 같아서 그 세대를 상고할 수 없다”고 한다. 그 후 동쪽인 우리나라 경주에 온 것과 정선(旌善)을 분관(分貫)으로 삼은 것, 그리고 文科와 武科에 고루 급제하며 후손이 찬란하였는바 13世 龍 以前의 선조들이 덕(德)을 닦았고 종부공(宗簿公)이후부터 그 심은 것을 거두게 되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기록 년대인 ‘알봉섭제격’이 古 甲子로 갑인(甲寅)이면 1854年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후손이 아닌 남원인(南原人) 양상우(梁相禹)는 “애정유적비 비각 발문”도 지었는데 이때를 本人은 병진(丙辰)年(1856년)으로 추정하건대 이 서문을 쓴 시기는 1854년(철종5년)이 될 것이다.

4) 안변파(安邊派) (병진丙辰) 舊 序文:  이상협(李尙浹)씀

우리 정선이씨가 경주(慶州)에서 분적(分籍)된 것이 生員公 우원(遇元,9世)으로부터 이고 그 이후 아름다운 덕을 감추고 은둔하거나, 혹은 지위와 명망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르기도 했음을 시사한다. 특별히 이 서문은 지역별로 대표적인 당시 선조들을 열거하고 계시는데 이른바 해서(海西,황해도)지방에는 정순대부(正順大夫)40)용(龍,13世), 관북(關北)지방에 원종공신(原從功臣) 분(芬,13世), 한남(漢南)지방에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익손(益孫,15世)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우리 정선이씨의 주요 世居地가 바로 이 대표적인 선조들의 관직 수행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甲寅年 족보를 위해 해서(海西)지방41) 종인(宗人)들로부터 합보(合譜)하자는 연락을 받고도 함남 안변군 지역42)의 종친들이 사정상 못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이 안변파의 파보를 별도로 제작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되므로 이 서문의 기록 시기는 병진(丙辰)년 즉, 1856년이 확실시 된다.

5)1938년 (무인戊寅) 序文: 덕수(德水) 이종문(李種文)씀

近世에 와서 해서지방 재령(載寧)을 중심으로 족보를 편수할 때 행근(行根), 종한(鍾漢) 등 종친의 부탁으로 덕수 이종문이 쓰게 됨을 밝히고 있다. 시조는 중국43)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를 관향(貫鄕)으로 했으나 9世 우원(遇元)에 이르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44)에 올랐고 관향을 정선(旌善)으로 하였으며 12世 초(初)45)는 고려 충숙왕(忠肅王)조(朝)에 출사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왕실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다가 끝내 순절하셨으며46) 公의 長子 용(龍)께서 판종부시사를 은퇴하고 평산군47) 주암동에 사신 것, 次子 분(芬)이 안변도호부사48)에 이르렀고 마침내 안변에서 은퇴하여 사신 것49), 龍의 아들 자생(自生,14世)께서 황해도 안렴사(按廉使)로 순행 중의 사건으로  애정 유적지가 생긴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자손들은 先代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고 벼슬하려고 힘쓰지 않으며 문학을 돈독히 숭상해서 지금까지 사족(士族)의 칭호를 잃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는 려말(麗末) 충절(忠節)을 지킨 선조들과 관직을 일신의 영달로 생각지 않고 국가에 대한 봉직(奉職)으로 여기며 수행하다가 은퇴하여 사신 13世 용(龍)과 분(芬) 선조 등의 초연한 면면을 기리는 의미라 본다. 일정치하(日政治下)에 제작된 족보 서문으로 1936년(유조곤돈, 병자년)에 썼다.

 

6. 유적(遺蹟)

1) 애정유지(艾井遺趾)

유적지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다. 애정은 황해도 재령군 북쪽10리(里) 되는 지점에 있다. 고려말엽 자생(自生,14世)께서 황해도 안렴사로 지방을 순행할 때에 이곳에 이르러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골짜기가 넓어서 살 만하다”하니 막하의 손님들이 이곳에 물이 없음을 아뢴 즉, 公이 쑥 두 뿌리가 총생(叢生)하는 곳을 가리키며 “이 곳을 파면 샘물을 얻을 수 있다”하고 즉시 역졸(驛卒)을 시켜 쑥을 뽑아내게 한 후 겨우 몇 자를 파자 맑은 샘물이 용솟음쳐 나오니 매우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公은 임기가 끝나고 이곳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마침내 마을을 “애정(艾井)”이라 이름 하였다.

2) 애정(艾井) 유적비명(遺蹟碑銘)

재령군지(郡誌)에 기록된 애정의 유래(由來)를 시작으로 유적비를 세우는 동기와 목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애정은 세월이 흐름에 벽돌이 마모되고 비에 씻기는 등 자취가 희미해 져가자 선조들은 이가 남의 수치를 당하는 원인이 됨을 인지하여 이 우물을 표시하며 선조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사적을 기록하여 비(碑)를 세우기로 했다. 여기에서 애정의 유래, 아름다운 詩와 그 주인공 되시는 14世 자생(自生)과 公의 아들 15世 존실(存實)과 그의 세 아들50)과 그 후손 數 代를 언급하고 있다. 정조(正祖)4년 경자년(1780), 후손 정규(正奎)가 지었다.

3) 애정유적 비각(碑閣) 기문(記文)

애정의 비를 세우고 오랜 시일이 흐르매 비바람이 몰아쳐 오래 전하는데 문제가 있으므로 작은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토록 하면서 기록한 애정에 관한 기록문이다. 기록일시가 유조집서(柔兆執徐)인데  古 甲子로 병진(丙辰)년이라면 내용의 정황상 1856년 (철종7년)이 유력하다. 애정 유적비 비각 발문(跋文)과 함께 후손 순흠께서 지으신 애정비각 상량문(上樑文) 또한 1856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7. 정선이씨 씨족사 요약

삼가 동방의 성씨록(姓氏錄)과 가첩(家牒)을 살펴 처음 송나라 때에 개부(開府) 의동삼사(儀同三司)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검교태사(檢校太師) 수사공공(守司空公) 휘(諱) 양혼(陽焜)을 시조로 삼았다.

시조께서는 안남국왕 휘 건덕의 셋째 아들로서 송나라 휘종 때에 난리를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 경주에 터를 잡아 살고 관향을 삼았고51) 고려 명종 26년 병진년(1196)모월 모일에 난적인 최충헌52)의 혹독한 화를 입고는 9世우원께서 처음으로 정선(旌善)을 관향으로 삼았다.

2世 란(蘭)께서 판서(判書), 3世 무정(茂貞)께서 정당문학(政堂文學), 4世 계운(啓運)께서 부사(副使), 5世 번(蕃)께서 시중(侍中), 선(善)께서 태사(太師)를 역임하셨다.

6世孫 義旼53)(?-1196)54)은 고려의종 24년(1170년) 무신정변55) 때 功을 세우고 중랑장과 장군이 되었으며 이후 대장군, 상장군과 중서문하평장사를 거쳐 판병부사(1191)에 이르면서 권력을 잡았으나 병진정변(丙辰政變)으로 兄 희민(羲旼)등 문중(門中)이 해(害)를 당하였는데, 장군 至光(이의민의 第3子)이 최충수와 사소한 원한56)으로 비롯된 이 난리의 기록은 족보 ‘성씨의 본원’에 있다.

시중공의 3족을 멸하려 했으나 다행히 8세 연(蓮,密直使,羲旼의 손자)께서 피신하시어 후계를 이으셨고 9세 우원에 이르러 정선으로 이거(移居)하여 관적(貫籍)을 새로 하셨다.

10世 형규(亨圭, 太學士)로부터 선조들께서는 다시 높은 반열의 벼슬을 하시며 특히 12世 초(初,中郞將)께서 ‘이초의 옥사’의 주인공으로, 14世 자생(自生,中顯大夫 軍器寺尹)께서 애정유적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남기며 고려조의 벼슬을 마지막으로 수행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부분은 전기(前記)한 ‘서문(序文)’들과 후기(後記)한 ‘역대주요인물’을 살펴보기 바란다.

1392년 조선(朝鮮)조(朝)이후의 16世 선조들께서 파조(派祖)가 되셨는데 이 부분은 ‘파명록(派名錄)’에 기재하였다.

영조47년(1771년)의 족보서문에는 조선조부터 ‘영화와 명예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였다.’라고 하셨다. 이는 고려조 중엽에 치명적인 가문의 화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李初 선조처럼 不事二君의 고려조에 대한 忠義가 後代에도 미친 듯하다. 1938년 무인보 서문에도 ‘자손들은 先代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고 벼슬하려고 힘쓰지 않으며 문학을 돈독히 숭상해서 지금까지 사족(士族)의 칭호를 잃지 않는다”라고 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으나 선비로서의 자존감을 가졌던 우리 정선이씨가 근,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근,현대저명인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외에 1938년 무인보 제9권 뒷부분의 종중유사록(宗中有史錄) 등과 세거지 별 각 군지(郡誌)(황해도 신계,벽선,신천,재령군지, 함남 안변군지등)를 참고하기 바란다.

범례에 따르면 各 派의 항렬(行列)은 분명하지 못하였으나 종부공(宗簿公,13世,龍)의 16世孫 항렬부터 항렬을 따라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8. 정선이씨 주요인물

1) 역대주요인물

[高麗 朝]

이란(蘭,2世)  판서(判書), 이무정(茂貞,3世) 정당문학(政堂文學), 이계운(啓運,4世) 부사(副使), 이번(蕃,5世) 시중(侍中), 이선(善,5世) 태사(太師), 이희민(羲旼,6世) 시중(侍中), 이의민(義旼,6世) 평장사(平章事),판병부사(判兵部事),시중(侍中)등, 이성순(性純,7世)  상서(尙書), 이지순(至純,7世) 대장군(大將軍), 이지광(至光,7世) 장군(將軍), 이연(蓮,8世) 밀직사(密直使), 이우원(遇元,9世) 국자생원(國子生員) 추봉(追封)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형규(亨圭,10世) 첨의중찬(僉議中贊) 수문전(修文殿)태학사(太學士), 이석덕(碩德,11世) 지의주사(知義州事), 이안(安,12世) 유수(留守), 이경(莖,12世)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이초(初,12世) 중랑장(中郞將), 이우(瑀,12世)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진주안무사(晋州按撫使), 이용(龍,13世) 정순대부(正順大夫)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使), 이분(芬,13世) 부사(府使), 이자생(自生,14世) 중현대부(中顯大夫)로 군기시윤(軍器寺尹), 이존실(存實,15世) 부사(府使)

[朝鮮 朝]

이익손(益孫,15世) 사정(司正), 이숭복(崇福,18世)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장(副將), 이희성(希聖,20世)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대호군(大護軍), 이의(誼,21世) 부호군(副護軍), 이신(信,21世)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겸(謙,21世) 권관(權管), 이백수(白壽,22世) 현령(縣令), 이익정(益禎) 수문장(守門將), 이백록(百祿) 판관(判官), 이득량(得良) 부사(府使), 이정운(正運) 첨정(僉正), 이효백(孝伯) 봉사(奉事), 이상연(尙淵)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만석(萬碩)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종춘(宗春) 첨정(僉正), 이동춘(東春) 절충장군(折衝將軍), 이두성(斗星) 영장(瀯將), 이재윤(載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추성(樞星) 찰방(察訪), 이명선(明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태유(泰裕)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성삼(成三)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동후(東厚) 첨정(僉正), 이병연(秉淵) 첨정(僉正), 이성모(成模) 첨정(僉正), 이행룡(行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2) 근(近).현대(現代)저명인사(著名人士)57)

李潤桓;한학자,예안향교전교, 李仁鎬;전 육군헌병감 예비역준장, 李東珍;안동시장, 李沖植;보사부기획관리실장, 李源章;예비역육군준장, 李源祚;석유개발공사사장, 李相斗;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시립대 교수(작고), 李重春;전 농수산부양정국장, 李源性;서울남부경찰서장, 李昌業;서울대농대수의학박사, 李炳夏;전 국회의원 법무장관 대종회회장, 李家源;전 연세대교수 도산서원원장, 李源康;전 제일은행상무 대종회부회장, 李俊浩;전 외무부아주과장 외대교수 대종회부회장, 李石初;전 안동시의회의장 안동화수회장, 李壽洛;한학자 대구 화수회회장, 李光植;전 고교장 한학자, 李東國;도산양조장 대표, 李宅基;서울성동경찰서장, 李泰魯;서울대법대교수 법학박사, 李壽萬;경주경찰서장, 李昌植;대구전매청장, 李載榮;연세대교수, 李東昇;서울대사대교수 독문학, 李東烈;캐나다 웨스턴온테리오대 교수 교육학박사, 李完裁;영남대교수, 李東英;부산대교수, 李德煥;미 프린스턴대교수 화학박사, 李翰成;군법무관, 李光石;재미 경제학박사, 李金石;동국대교수, 李德熙;재미 의학박사, 李俊植;과기처 공학박사, 李容漢;봉화군교육장, 李根植;의사 의학박사, 李民植;대림대학교수, 李東勳;재미 교수, 李東鎭;강원대교수, 李奉燮;영남대교수, 李宜謙;한전핵연료실장, 李瑀;성신여대교수, 李重華;松安君유적보존회장, 李東俊;전 대한양회회장 퇴계학연구원이사장, 李明敎;아시아과학회장, 李重弘;경방기계대표 공학박사, 李重卓;삼영무역대표 공학박사, 李孝鎭;삼보양조장 대표, 李東洛;대일공무사장, 李大明;주원산업사장, 李容述;경인무역사장, 李承春;대영토건사장, 李明杰;대명공업사장, 李成熙;삼우무역사장, 李相睦;미 일리노이공대교수, 李揆燮; 일성제지대표, 李炳純;삼화방직대표, 李洙鎬;도산면장, 李根必;도산국민학교장, 李容甲;연곡국민학교교감, 李容漢;안동고등학교장, 李炳夏;경일고등학교장, 李璿熙;영가국민학교장, 李寅杰;신성국민학교교감, 李東浣;(주)대승다크론 대표이사, 李中洙;한학자, 李源國;한학자, 李奎鎬;한학자, 李源永;독립촉진회장, 李寧鎬;한학자, 李英子;안동시가정복지과장, 李元圭;안동시도시과장, 李源浚;동양양조장대표, 李源奭;풍산국민학교장, 李世鎬;한학자, 李源晋;전 경북농산과장 상주군수, 李東榮;삼성제약사이사, 李源性;경찰서장, 李東宣;대학교수 박사, 李東厚;한양대교수 의학박사, 李東榮;대구강남병원장 박사 (무순위)58)


9. 결론

[한국성씨의 중국도래 연구]를 쓴 나천수씨는 서언에서 “한국의 성씨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기록은 1454년에 간행한 세종실록지리지라 할 수 있고 가승보적 가계의 기록이 족보로 정착된 것은 조선 숙종(1675-1720재위)때이라 하니 현존하는 족보의 진위여부를 가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역사의 칼바람과 함께한 우리의 족보는 더더욱 기록의 소실이 많아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이상에서 보았듯이 우리 정선이씨의 세가 크지는 않지만 과거 선조들로부터 이어온 면면은 가히 존경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또 6.25전쟁으로 주요 세거지(현재 북한 땅)의 종중들과 관계가 끊기게 되었고, 우리는 그저 묵묵히 앞만 보며 달려오면서 나의 명망을 닦아왔을 뿐, 종중들이 서로 무관심을 깨고 단합된 힘을 모으지 못하였음에 안타까움이 많다.

우리보다 1세기 늦게 이 땅을 디딘 화산이씨의 활동은 그 성과가 뛰어나 베트남에서는 이미 왕족의 후예로서 내국인의 지위에 올랐고, 국내 여러 기록이나 저서들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잘 드러내고 있음은 우리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사료나 기록들, 그리고 활동이 미약하다 보니 충분한 자료의 부족 상황에서 집필한 일부 저서들(“우리역사를 바꾼 귀화성씨/박기현저”, “제국의 후예들/정범준저”, “한국속의 세계/정수일저”등)이 베트남에서 귀화한 리왕조의 후손들로 화산이씨 만을 기록하거나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저 선조들에게 머리를 숙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이던가? 한 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만인지상(萬人之上)에 군림하던 선조의 후예이고, 헤이그 밀사처럼 충절을 위해 목숨을 버린 선조의 후예이다.

숭례문이 불탔으나 그 재건은 또 시작되었다. 우리도 재건할 것이다!

최초(1677년) 舊序의 말미에 언급하셨듯이 우리 후손은 “처음 한 할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그 뿌리를 기억하여 서로에게 해(害)하려는 마음을 두지 않으며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는 지혜를 가지고 가문(家門)의 세(勢)를 더하여야 하겠다.

이번에 나로 하여금 부족하나마 家門의 歷史를 배우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사직공파 세보 제작을 위해 物心兩面 아끼지 않은 34世 이장곤(李長坤) 宗中께 감사한다.




 

西紀 2008年 2月 27日

旌善李氏 司直公(長)派 33世 李燦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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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번에 사직공파 세보 제작에 서문을 정리하신 33세 찬걸님께 정선이씨 종중의 이름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본인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사실에 접근하고자 애를 써 봐서 인지하게된 사실은 年代,地名 諱등 일일이 찾아 기록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본인도 너무너무 많은 고생을 하신 찬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존중을 표합니다

旌善李氏 司直公(長)派 35世 李鉉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