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진(楊國鎭, 1916년 ~ ?)는 만주국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예편 후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평양 출신이다. 만주국 펑톈에 설치된 봉천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을 때 만주군 육군 중위이자 경리 장교로 복무 중이었다.

종전 후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와 통위부에 참가하였고,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감찰총감을 맡았다. 양국진이 만주에서 귀국할 때 만주군 장교 차림 그대로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들어왔다는 방원철의 증언이 있다.[1]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감찰총감이던 양국진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 [2]

1949년김구가 암살되었을 때는 암살 혐의자인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 재판에 배심재판관에 참여하기도 했다.[3] 당시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으며, 재판의 주심재판관은 원용덕이었다. 이후 양국진은 3군단장과 군수참모부장을 지내는 등 주로 후방에서 근무했다. 1952년 11월초, 육군행정 참모부장(副長) 육군소장 양국진은 제2군단 부(副)군단장으로 인사이동되었다. [4]

4·19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4월에 비리 혐의가 적발되어 구속되었다. 이때 양국진은 자신이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중장 계급이라며 가택수색 및 문초에 불응하는 등 반발했다.[5] 이 사건은 구속된 양국진이 며칠만에 전격 석방되고 사의를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어질 듯한 분위기로 흘러, 제1공화국 정권 차원의 비호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6]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한데 이어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남에 따라 비리 군인으로 체포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국진에게는 징역 10년형이 선고되었다.[7] 혁명재판 후 곧 풀려나 1960년대에 대한식품 사장을 지내면서 군부대에 식품을 공급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