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
이승길
11월이 다 가려고 한다. 대다수 나무들은 서둘러 잎을 떨어버리고 겨우살이 준비를 마쳤다. 첫눈이 왔다는 소식도 들리는 걸 보면 겨울이 왔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두 해 전 아내가 들고 온 나무에서 온통 새싹이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밑둥치에서는 분가하려는 새줄기도 하나 힘차게 올라오고 있다. 이국땅이라 계절감을 잃어버린 것인지, 집안 온도가 높아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어리둥절하다.
무릎정도의 크기와 새끼손가락 굵기, 밥숟가락처럼 볼품없는 잎들만 무성한 나무였기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한참을 지난 어느 날 집안에는 이상한 냄새로 가득했고, 아이들은 코를 막고 난리였다. 무슨 영문인가 하여 집안을 살폈다. 아내의 탄성에 이끌려 가보니 야생 나팔꽃처럼 생긴 조그마한 보라색 꽃이 보였다.
두 개가 있었는데 그 작은 꽃에서 난 냄새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서 기어이 코를 갖다 대고서야 사실인 것을 알았다. 약간 구린내 비슷하다고나 할까. 저들도 쑥스러웠는지 잎사귀 속에 꼭 숨어 있었다. 녀석들이 흰색으로 변하여 떨어질 무렵, 가지마다에는 수많은 꽃들이 가득 피어났다.
전령처럼 나타난 한두 개의 꽃을 선두로 몇 번이나 피고 짐이 반복되면서 고약하던 냄새도 그윽한 향기로 느껴졌다. 가지들마다 꽃들로 무성해질 때면 향수를 잔뜩 뿌린 것처럼 온 집안에는 재스민 꽃향기가 진동했다. 강한 방향성(芳香性)으로 인해 고급향료로도 쓰이는 걸 보면 예사 향기는 아닌 셈이다.
밑둥치에서 돋아나던 줄기가 열흘 새 훌쩍 자라 한 뼘 이상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욕심이 생겼다. 나무의 균형이 맞지 않아 뭔가 좀 엉성해 보인다 싶었는데 잘 자라 준다면 제대로 모양이 잡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창으로 비쳐오는 햇살을 따라 이리저리 여린 줄기가 방향을 트는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큰맘 먹고 평소 아끼던 가지 하나를 과감하게 잘라버렸다. 돋아난 새줄기에 기대를 걸어보기 위해서다.
겨울로 접어든 계절에 피운 새순들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지난해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올해 처음 벌어진 일일 게다. 성장을 멈춘 계절에서 보게 되는 얄궂은 일이 아닌가. 계절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중년에 이른 나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행동이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냉기가 가득한 대지에 파종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아까운 씨앗만 버리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그때 할 걸 왜 엄동설한에 앞서 그러느냐고 핀잔을 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생각도 봄이 온다는 전제하에서만 맞는 것이다. 다시 봄이 올 수 없거나 오지 않는다면 파종도 할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겨울이 다가 오더라도 씨앗을 뿌릴 방도를 찾아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재스민의 모습을 보면 자연의 이단아(異端兒)라는 생각이 든다. 순리에 역행하면서 새싹과 새순을 틔우고 있으니 제 정신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상적으로 자라서 꽃을 피우게 된다면 상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셈이다.
나는 어떠한가!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식의 철옹성을 쌓고 스스로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강박관념에 볼모가 되어 예외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나만의 합리성을 위해 억지 논리를 개발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깊숙한 잠재의식 속에 묵직한 옹고집이라도 달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자신만의 일을 찾아 묵묵히 정진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순행하는 경우라도 쉽지 않을 터인데, 어찌 역행하는 경우에랴. 모두가 멈추어도 혼자서는 가야하고, 다들 달려도 홀로 걷거나 쉬어 가야 하는 것이기에 무척 힘들 것이다.
다시 살펴보니 앞서 싹 틔운 잎들이 제법 모양도 갖췄고 색도 올랐다. 밑둥치에서부터 올라온 줄기도 햇살 덕분에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자연의 이치에도 아랑곳없이 자기의 감각대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무성한 입을 가진 어엿한 모습을 기대해 본다. 잘하면 이들 가지가 피운 꽃향기에도 푹 취해 볼 수 있겠다. 상식 하나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중이다.
당선소감
이승길
묘한 기분이 든다. 등단이라! 처음엔 그저 궁금해서 기웃거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문학과는 먼 곳에 있었기에 낯선 느낌은 여전하다. 그 향기에 취해 볼 기회 같은 건 팔자에 없는 줄 알았다. 괜히 샘물만 더럽힐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등단이란 뭇 사람들 앞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선다는 것인데, 사실 그럴만한 각오나 담력을 갖추지 못했다. 아직은 이치도 알아야 하고 하학에도 더 정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와서 마구 오염시킬 샘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근방에라도 있지 않으면 어찌 한 모금의 물인들 얻을 수 있겠는가! 청량감으로 가득한 옹달샘! 한 쪽박만 들이켜도 머리까지 맑아 올게다. 밝은 눈과 함께라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낯선 길이지만 가기로 했다. 어차피 인생은 도전인 것을!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없지만, 갈 수 없는 길 또한 어디 있겠는가. 힘들면 돌아서 가고, 쉬었다가도 기어이 가면 될 것을. 혹시 아는가! 신천지라도 보게 될 행운을 만나게 될 런지.
삶과 인생에 대해 한층 고민되는 밤이다. 문우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프로필
대구대 행정대학원 졸업(부동산학 석사)
수필과 지성 문예아카데미 5기 수료
열린수필 동인
현) 한국공인중개사협회 교수
대구과학대학 부동산과 겸임교수
계명대학교 평생교육원 학위과정 강사
저서: 해법 부동산중개론(법문사. 2006)
부동산 경매론(법문사. 2008)
핵심요약 부동산 경매판례(법문사. 2010)
(주)부동산써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