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강의는 2007년 3월 22일,

천호성지 피정 프로그램에서 했던 두 시간짜리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하기 두 달 전이었습니다.)

 

원고 없이 요점만 적어 강의한 것을 다시 글로 옮겨 적은 것인데다가

핵심만 적은 것이라서

실제 강의와 많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잠시 숨을 돌리고,

새해의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강 - 증거자의 삶>

 

'증거자'는 원래 '순교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와

신앙을 증언했지만 목숨을 바치지는 않은 '증거자'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

죽으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증언하고, 동시에 죽음으로도 증언했습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들은

목숨을 바치는 순교는 하지 않더라도

그 믿음이 진리라는 것을 삶으로 증언해야 할 것입니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은 단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고 죽을 것이냐, 안 믿고 살 것이냐의 단순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해가 없는 지금이 더 어려운 시기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다른 사람의 종교적인 선택과 결단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외부의 박해가 없는 요즘엔 자기 자신이 곧 박해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자기 신앙을 가로막는 박해자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스스로 채찍질을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순교자들의 삶을 공부하고 본받아서

우리의 삶을 순교자들처럼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세적인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미신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목표, 목적지는 현세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또는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그 목표는

죽은 다음에 천당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여간에 지금 어떤 고통과 불행 중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그 믿음의 목표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지금의 우리들이 해야 할 증언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의 특징은 '기쁨'에 있습니다.

이 기쁨은 슬픔의 반대말도 아니고,

세속에서 말하는 재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항상 영적인 기쁨,

천상적인 기쁨,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는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본받아야 할 것이 바로 그 '기쁨'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것이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주는 기쁨은

세속의 어떤 재미보다도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용기를 주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줍니다.

 

<조선교구 초대주교 브뤼기에르 발도로메오 주교의 삶과 죽음>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한 후,

조선 교회에는 30여 년 동안 성직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우들은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간절한 청원서를 교황청에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는 나폴레옹과 교황청의 갈등으로

비오 7세 교황이 나폴레옹에 의해 연금 상태로 지내는 중이었고,

교황청은 아무 힘이 없던 때였습니다.

갇혀 있던 교황은 조선에서 온 청원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교황이 교황청으로 복귀한 뒤에

교황청은 조선 교회의 상황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프랑스 천주교의 상황도 비참했습니다.

시민혁명의 후유증으로 성직자도, 재산도 거의 없던 때였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오래 망설였습니다.

돈도 없었고, 선교사도 부족했고, 다른 선교지역에도 할 일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조선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당시 태국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듣게 됩니다.

그는 아직 주교가 되기 전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가 언제 돈으로 일했는가? 하느님의 사업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다.

선교사가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일단 지원자를 모집해 보아라.

다른 선교지역에도 할 일이 많다고 하지만 지금은 조선이 제일 급하다.

다른 지역에서 선교사를 한두 명 빼내면 그저 부족한 정도이지만,

조선은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는 상황이고

이대로 방치한다면 영영 조선 교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상의 모든 상황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래도 지원자가 있겠느냐고 걱정을 하지만, 내가 가겠다.”

이것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 내용입니다.

 

그의 지원이 받아들여졌고,

얼마 후에는 조선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됩니다.

그는 즉시, 당시에 머물고 있던 싱가폴을 출발해서 조선으로 향합니다.

그는 싱가폴, 마닐라, 마카오를 거쳐 중국 남부지역으로 상륙한 다음,

조선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중에 돈도 없었고, 중국말도 할 줄 몰랐습니다.

당시 중국도 천주교를 박해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서양인이 보이기만 하면 잡아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거지로 변장을 하고, 숨기도 하고, 도망도 치면서 계속 갔습니다.

며칠씩 굶거나, 들판에서 노숙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굶주림과 갈증, 도둑과 산적들의 위험, 중국 관헌들의 위험,

그러다 이질 비슷한 질병에 걸려서 먹는 것, 마시는 것도 힘들었고,

걷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착한 사람들의 도움도 가끔 받았지만,

거의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의식을 잃고 시체처럼 버려졌다가 깨어난 일도 많았습니다.

 

그 고난의 기록을 읽다보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만일에 그 당시의 보통의 배를 이용해서 조선에 정상적으로 갔다면,

싱가폴에서 인천까지 한 달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싱가폴에서 만주까지의 행군은 무려 3년이 걸렸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정말 엄청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걸음 한 걸음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걷고 또 걸어서, 만주에 도착한 뒤 토굴에서 숨어 지내면서

조선에 들어갈 방법을 찾다가 뇌일혈로 사망합니다.

그때가 1835년이었고, 그의 나이 43세였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분류되지도 않고,

103위 성인 명단에도 들지 못했지만,

그 어떤 순교자 못지않은 진정한 순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 무엇 때문에 그는 잘 알지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는 조선을 향해

3년 동안 지옥과도 같은 강행군을 했을까요?

조선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순교뿐이었습니다.

부귀영화도, 명예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냥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간 것입니다.

 

<성녀 권진이 아가다의 삶과 죽음>

 

103위 성인전을 읽다보면 대개가 비슷한 내용입니다.

어려서부터 착했고, 열심했고,

지독한 고문에도 꺾이지 않고 신앙을 지키고 순교했다,

라는 내용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103위 성인 중에서 조금 특이한 삶을 살았던 성녀를 소개합니다.

 

성녀 권진이 아가다는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의 딸입니다.

한영이 막달레나는 가난한 양반이었던 권진사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권진사는 부인 한영이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당부하고

자신도 임종대세를 받고 죽었습니다.

남편의 권유에 따라 한영이는 어린 권진이와 함께 신자가 됩니다.

권진사는 신앙 외에는 남겨준 재산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영이 막달레나는 권진이 아가다를 데리고

어떤 가난한 교우 집에 몸 붙여 살았는데 무척 고생했다고 합니다.

권진이 아가다가 13세 때 어떤 가난한 교우 청년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혼례식은 치렀는데, 신랑이 너무나 가난해서 권진이를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권진이는 신랑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에 지원할 무렵 신부들 중에도 지원자가 있었는데,

모방, 샤스땅, 유 파치피코 신부 등이었습니다.

중국인 유 파치피코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님보다 먼저 조선에 입국했는데,

그가 주문모 신부님 다음으로 조선에 온 두 번째 신부입니다.

유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오자,

권진이 아가다 성녀는 그의 식복사로 들어가서 일하게 됩니다.

젊은 여자와 젊은 신부가 한 집에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권진이 아가다 성녀가 굉장히 예뻤다고 합니다.

결국엔 커다란 스캔들이 일어나고 맙니다.

조선 교회 전체를 뒤흔든 큰 추문이었다고 합니다.

 

모방 신부님이 세 번째로 조선에 입국하게 되는데,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미사를 집전한 다음,

조선교구 책임자 권한을 위임받았고, 서둘러 조선에 입국합니다.

모방 신부님이 서울에 도착하자,

신자들이 유 파치피코 신부와 권진이 아가다를 고발합니다.

모방 신부님은 조사 끝에 유 파치피코 신부에게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말하자면 쫓아낸 것입니다.

권진이 아가다는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지내면서

회개와 보속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다른 여자들과 함께 한영이 막달레나, 권진이 아가다 모녀도 체포됩니다.

그런데 권진이 아가다가 너무 예뻐서 포졸들이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포졸들은 권진이 아가다를 감옥에 가두지도 않고 탈출시킵니다.

그 정도로 예뻤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권진이 아가다를 탈출시킨 사실이 바로 사또에게 들통이 나서

포졸들은 모두 처벌받게 되었고,

권진이 아가다는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됩니다.

모질게 고문당하고 심문받고 하는 과정은 다른 순교자와 비슷합니다.

권진이 아가다는 1840년 1월 17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순교할 때의 나이는 21세였습니다.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굉장히 감동적이었다는 것만 전해집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권진이 아가다 성녀는 다른 순교자들과는 달리 이중의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 외부의 박해보다도 교회 내부의 박해가 더 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권진이 아가다와 유 파치피코 신부 사이의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떻든 그런 소문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신자들이 모두 손가락질 하고, 나쁜 년, 죽일 년 하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문보다도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하고 비난했던 신자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렇게 비난받던 여자는 순교자가 되었고, 성녀가 되었습니다.

정말 남의 말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유 파치피코신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자료에서는 그가 조선에 들어와서는 전혀 사목활동도 하지 않았고,

신자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돈벌이에만 집착했고,

젊은 여자 식복사와 추문을 일으켰다가 결국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교우들이 교황청에 청원서를 보낼 때,

그 청원서를 교황에게 가지고 간 사람이 바로 그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신학생 때부터 선교사로 조선에 가겠다고 지원했고,

서품받자마자 바로 조선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먼저 조선에 입국한 뒤에는

사목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03위 성인 중에는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사람이 여럿입니다.

그리고 모방 신부에 의해 중국으로 쫓겨날 때,

그냥 떠난 것이 아니고,

김대건, 최양업 등의 신학생들을 마카오의 신학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 뒤에 자기 고향으로 가서, 착한 신부로 여생을 마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의 삶>

 

제가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무척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서 어떤 집에 재취로 들어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자였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 할머니는 거의 돈 한 푼 없이

아들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그 집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아들이 자라서 장가를 보내야 했는데, 시집올 아가씨가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정말로 가난한 어떤 집과 이야기가 되었는데,

당사자 처녀는 죽어도 그 집으로는 시집을 안가겠다고 버텼습니다.

그러자 처녀의 아버지가 처녀를 두들겨 패서 강제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른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이고,

여기서부터는 제가 직접 보고 겪은 일들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시집온 며느리는 계속 술이나 마시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다 쌍둥이를 낳아놓고 달아나버렸습니다.

아들은 각시를 찾겠다면서 엿장수가 되어 떠돌아다녔고,

계속 술만 마시다가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이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버린 그를 꽃동네에 보냈습니다.

아마 거기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를 잃고 할머니 혼자 쌍둥이를 키웠는데,

아직 걸음마도 못하고 기어 다니던 때에

쌍둥이 중 한 아이가 마루를 기어가다가

마루 밑에 있던 연탄 화덕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남은 아이는 어떻든 그런대로 잘 자랐습니다.

그 할머니의 삶에서 과연 행복이라고 느낄만한 때가 있었겠나 싶을 정도로

고난과 슬픔만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부가 된 뒤에 우연히 마주친 그 할머니의 모습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은 그저 곱게 늙은 할머니라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파란만장한 삶을, 그 한을 어떻게 다 삭였는지...

그 할머니는 손자가 어른이 되어 자립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그러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할머니가 손에 항상 쥐고 있었던 묵주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그 고난을 생각하면,

권진이 아가다 성녀가 받았던 박해를 생각하면,

그리고 이름도 잘 모르는 그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별 탈 없이 그런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이 사실은 가장 큰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

뭘 얼마나 더 큰 행복을 바랄 것이며,

얼마나 더 큰 것을 하느님께 청할 것이 있겠는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조선 천주교가 박해받던 때로 돌아가겠습니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교리를 익히고,

스스로 교회를 만든,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가 조선 천주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박해를 받을수록 신자수가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면 즉시 신고가 들어가고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사형 당하게 되는데,

정상적인 선교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선교활동을 했길래 신자수가 늘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말로 하는 선교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선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고문당하고 사형당하는 것 외에도,

굶주리고 헐벗고, 미움 받고,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평화와 기쁨을 잃지 않았던 그 삶의 모습이

말로 하는 어떤 선교활동보다 더 큰 성과를 낸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포졸은 신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해서,

처형장에서 바로 세례를 받고 함께 순교한 경우도 있습니다.

 

박해시대 때에는 박해 때문에 말로 하는 선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박해도 없고,

인터넷 시대, 정보화 시대라서 말로 하는 선교가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도

그다지 효과가 없습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없이, 말로만 하는 선교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은?

착한 모습?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실한 모습?

그것은 종교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은 바로 '기쁨'입니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거듭 강조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저도 비슷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기쁨을 찾으십시오."

'십자가에서', 또는 '고통에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서, 고통 안에서, 슬픔 안에서,

우리는 기쁨을 찾아야 하고, 기쁨을 얻어야 하고,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에서 엄청난 고통을 보게 되지만,

그 고통 안에 기쁨이 있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권진이 아가다 성녀 뿐 아니라 모든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에서

그들이 누렸던 천상적인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한낱 끔찍한 옛날이야기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기쁨을 얻게 될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천상의 기쁨으로 보답해주실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체험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성당은 재미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다닙니다.

성당은 복이나 빌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다닙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울게 하고 불행하게 해도,

아니면 세속의 즐거움에 빠져보라고 손짓을 하고 유혹을 해도,

하느님이 주시는 그 기쁨을 빼앗아가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2007. 3. 22.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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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  글쓴이 : Fr 송영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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