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광해군의 묘에서


조선 왕조 스물일곱명의 임금 중에 조(祖)와 종(宗)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패륜군주로 낙인찍혀

군(君)으로 강등된 두 임금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 후세의 역사는 그 호칭만으로

두 사람을 같은 위치에 두고 폭군으로 부른다. 뭇임금들은 사후에도 능(陵)으로 칭하지만,

이들의 무덤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묘(墓)로 불린다. 생전의 행적에 관계없이 호칭 하나만으로

 인물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이 대저 세상의 인심이니, 이름이든 호칭이든 두고두고 후세에 누를

남겨서는 아니 될 일이다. 연산과 광해 두 이름을 되뇌이며 그들의 묘를 찾아 발길을 나섰다.


연산군의 묘는 도봉구 방학동 북한산 기슭에 있다. 동네 이름조차 ‘학이 날아가 버린

곳(放鶴)이러니, 명당처에 패주를 묻을 리야 있겠는가. 산자락이 급하게 끝맺는 좁은 자리인지라

묘역이 넓지는 못하지만 생각보다 볼품없이 버려진 묘는 아니다. 쌍분의 묘 앞에 마주서면

왼쪽이 연산의 무덤이요, 오른쪽은 폐비당한 그의 부인 신씨(申氏)의 묘다. 그런대로 묘비에

상석까지 갖추고, 문인석과 무인석에 촛대석, 그리고 장명등까지 세워 두었다. 이쯤이면 여느

왕릉엔 미치지 못하지만, 연산군이란 오명에 비추면 과분하게 단장되었다. 묘 앞엔 수령

8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주민들의 지극한 보호 덕분에 아파트숲 사이에서나마 그의 묘를

지켜주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해야 할까.

 

                   서울 방학동 삼각산 기슭에 안장된 연산군의 묘


 
연산군은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세 살 때 모후의 폐비 사건을 당하고

 일곱 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성종의 승하로 제10대 왕에 등극하니 그의 나이 18세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싫어하고 성품이 온후하지 못했다. 12년간을 재위하며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연산은 점차 폭군으로서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자광의 상소로 인해 ‘조의제문’을 구실삼아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능지처참하는 등, 사림파와 눈에 거슬리는

훈신세력까지 제거하면서 많은 희생을 치루었으니 이 사건이 곧 무오사화다.

조정을 장악한 후로는 패륜적인 행태를 계속 보여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주색에 빠지며

심지어 친족을 범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끊이지 않는 탕아로서의 향락에 국고가 바닥나매

백성들에겐 세금을 중과하고 대신들에겐 공신전을 몰수하였다.

이 때 정권 장악에 혈안이 된 임사홍이 모후 윤씨의 폐비 사건 내막을 연산에게 밀고하여 폐출에

관련된 부왕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내시와 궁녀까지 모조리 처형하여 피로 얼룩진 갑자사화를

역사에 기록하였다. 이같은 학정에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옹립하고 반정을

도모하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두 달 후인 1506년 11월 30세를 일기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왕권을 볼모로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그의 이름은 영원한 독재자, 패륜아, 탕자,

 폭군 등의 온갖 악명의 대명사로 끝내 남게 되었다.

 


           죽어서도 남양주 첩첩산중에 갇혀버린 광해군의 묘


 

광해군의 묘소는 남양주시 진건읍 송중리 적성골. 금곡에서 사릉 못미쳐 오른쪽 계곡을

파고들어 외진 고개를 넘어야 하는 깊은 산 속이다. 영락공원묘지 1킬로 전의 인적조차 없는 곳.

 적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이 깊은 산골까지 어쩌다 쫓겨와 묻혔는가. 연산군과는

달리 흉포한 인물도 아니언만, 광해의 묘소는 담장만 둘렀을 뿐 정승의 묘만도 못하고 그저

이름없는 백성들의 무덤에 지나지 못한다. 글자조차 일그러진 묘비가 아니더면 어찌 임금의

묘라 알아볼까나. 빈산에 울어대는 뻐꾸기 울음이 더욱 역사의 흥망과 성쇠를 무상하게 전해줄

뿐, 허허로움이 휩싸고 도는 것을 어쩌랴.


정쟁의 회오리 속에 희생된 비운의 임금 광해군. 선조가 나이 40이 되도록 정비 의인왕후에게서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 임란 중 의주 몽진 길에 후궁의 소생으로 부랴부랴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 후 계비인 인목대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소북파가 세자 책봉 변경을 요구했다.

이런 와중에 선조가 운명하면서 광해군은 자연스럽게 15대 왕좌에 오르니 1608년의 일로 그의

 나이 서른세 살. 광해군은 포악한 연산과는 대비되는 면이 적지 않다. 15년간을 재위하면서

내치와 외치에 철저를 기한 실리주의자였다. 전란으로 타버린 궁궐을 다시 지어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대동법 실시로 민생을 구하는 등, 파탄지경의 국가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무렵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여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비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능란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왜란으로 소원해진 일본과도 조약을 체결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 아래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고,

밖으로는 실리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친명사대주의자들의 저항에 휘말려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으로 위리안치시켜 죽이게 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왕권에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백성들을 학대하는 정치를 펼친 적은 없다. 

위협을 느낀 서인파가 친명주의를 주장하며 능양군의 지휘로 광해군을 폐위시키니 이 사건이

인조반정, 아니 인조반란이다.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진 후

18년 동안 초연한 자세로 연명하다가 66세로 세상을 떴다.


폭정이 아닌 정쟁의 회오리로 밀려나 군(君)으로 강등된 광해. 그는 연산군과는 크게 대비되는

치적을 남겼으면서도 후세에 부끄러운 이름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후마저 연산군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묘소. 하여간 역사는 결과만으로 결론지어 지는 것이 상례다.

두 묘소를 둘러보며 절실하게 와닿는 생각 한 가지. 오늘날의 대통령도 그 명칭을 구별하는 것은

 어떨까. 독재의 만행으로 민중의 저항에 쫓겨났거나,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군주의 폭거를

전횡한 자 등, 정통성을 상실한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구분하는

 것도 역사의 교훈을 위해 필요한 노릇이 아닐까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