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데스크] '가마우지'의 망령

송의달·산업부 차장대우

올 8월 LG전자 가전(HA)사업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양문형 냉장고에 들어가는 리니어 컴프레서(냉장고의 냉매압축장치)를 움직이는 전자 칩을 만드는 일본 NEC가 갑자기 10분의 1로 공급물량을 줄이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NEC와의 긴급협상을 통해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LED(발광다이오드)TV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삼성전자와 LG의 부품 구매 담당자들은 틈만 나면 요즘 한국3M공장을 찾는다. DBEF(이중휘도향상필름)라는 LED TV용 핵심 부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다. DBEF를 독점 생산하는 3M에 한국 업계가 구매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최고 수출품인 휴대폰은 더 심각하다. 휴대폰 개당 총비용의 26%를 차지하는 최고가(最高價) 부품인 베이스밴드칩은 물론 센서 칩, 무선 송수신 역할을 하는 트랜시버 등의 국산 채택률은 현재 0%(방송통신위 2009년 국감자료)이다. 원천기술 부재(不在)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휴대폰 생산국인 한국의 실상을 따져보면 제품의 껍데기만 국산인 부끄러운 현실"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은 금속·철강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금속소재 분야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110억달러로 2007년보다 67%나 더 늘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우주항공·정밀화학 산업용 금속소재는 기술력 부족으로 전량 수입해 세계 6위의 철강생산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고 꼬집었다.

요약하자면 우리나라는 세계 9위(올 상반기)의 수출국이자, OECD 30개 회원국 중 연구개발(R&D) 총투자비 기준 6위이지만, 기초·원천기술 수준은 중·후진국과 같은 '불모(不毛) 지대'이다. 이유는 여럿이다. 국내 R&D의 75% 이상을 맡고 있는 민간기업들이 당장 돈 되는 상용기술에 매달리는 데다, 시제품 개발부터 상용화까지 5~10년 걸리는 기초·원천기술은 정부 몫인데도 우선순위가 계속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나라 R&D 예산에서도 기초연구 비중은 16%에 불과하다.

결과는 어떤가? "한국 경제는 가마우지(목에 줄이 감긴 물새)와 같다. 목에 줄(부품소재산업)이 묶여 있어 생선(완제품)을 삼켜도 곧바로 주인(일본 등 기술 선진국)에게 바치는 구조이다."

일본 경제평론가인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 박사가 1989년 질타한 이런 '가마우지 경제'의 망령이 20년이 지난 아직도 한국 산업계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지난해에만 역대 사상 최대인 327억달러의 대일(對日) 무역적자를 냈는데 이 중 부품소재 분야 적자는 209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2001년(103억달러)과 비교해 7년 만에 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수출을 할수록 부품소재 수입이 늘어 진짜 과실은 일본에 넘겨주는 구조가 한층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질병을 초래한 근본 원인은 기초과학·원천기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투자, 열의 부족일 것이다. 1901년 노벨상 첫 시상 후 여태 한명의 한국 과학자도 수상대에 서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다른 나라의 노벨 과학상 수상을 마냥 부러워하고 돈 되는 핵심 기술·부품은 외국에 의존하는 절름발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산업계는 겉만 번지르르한 '짝퉁 선진국' 문턱을 넘을 수 없다.

부품소재 분야는 생산·고용이 전체 제조업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대한민국 산업의 '풀뿌리'이기도 하다. 외화 획득과 고용 창출, 산업구조 선진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수십년 묵은 '가마우지 경제'의 종지부를 찍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