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근길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달리는 동네 밭사이 소로에서 시작된다.  애조로를 향해 달리다 보면 위로는 비행기가 지나고 길 양 옆으로는 평편한 밭들이 모여 비교적 너른 들판을 연출한다.  제주시 방향으로 형성되는 들판의 능선 위로는 두 개의 인공물이 옅은 구름낀 하늘을 배경으로 비죽이 솟아 있다.  하나는 작게 솟은 롯데시티호텔이고, 다른 하나는 몇 대의 크레인이 함께 서 있는 공사 중인 거대한 드림타워의 회색 덩치이다.  하늘과 맞닿은 능선을 가지런히 메운 풀들을 따라가다 갑자기 불쑥 솟은 드림타워는 생소하다.  그 모습은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이 라나를 구하러 들어갔던 도시 인더스트리아를 떠오르게 한다.  폐허가 된 세상 속 농촌 공동체 하이하바 섬에서 기계문명과 독재의 도시인 인더스트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랬을까?  그러나 우리는 애니메이션의 세상과 현실은 다름을 알고 있다.  세상은 아직 폐허가 되지 않았고, 내가 달리고 있는 이 들판과 멀리 보이는 드림타워의 시내는 그리 멀지도 않고 오히려 얽혀있는 관계이다.  세상은 독재에 신음하지 않으며, 서로가 알아서 자본에 먹고 먹히며 잘 굴러가는 중이다.  독재와 기계문명의 도시 인더스트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저 드림타워의 회색 몰골은, 정말 이름대로 꿈을 실현시켜 줄 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섬 제주는,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에 입도하여 살아 온 지, 만 9년을 넘겼다.  내년 2월이면 만 10년을 찍는다.  10년을 바라보는 제주에서의 삶이지만, 나는 여전히 이방인의 시선을 견지한다.  누군가 감탄하는 맛집에도, 여행객들이 몰려와 탄성을 지르는 풍경에도 시큰둥할 만큼 오래 살긴 했다.  동시에, 제주의 속깊은 무언가를 마음으로 느끼고 익숙해지기엔, 1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다.  그리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너무 빠른 변화가 주는 생소함이 좀처럼 마음이 물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시선을 견지하는 위치가 제 3자라 한다면, 나는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관점에서 이방인이라는 3자적 시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직업적 특성과도 잘 어울린다.  사회의 유지와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의료는 3자적인 위치에 다소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육지에 살면서 느꼈던 가파른 변화를 데자뷰처럼 이 섬에서 다시 느끼며, 내가 서 있는 자리와 시선을 분명히 인지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출근길마다 보이는 너른 들판 능선 위의 저 회색 드림타워를, 꿈이 아닌 불안한 미래로 바라본다.

  내가 애니메이션 속 코난이었다면, 당장 저 들판을 밟고 달려가 라나도 구하고 독재자 레프카도 때려잡아 세계정복의 야욕을 꺾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의 설정은 현실이 아니며, 실제 우리의 현실은 설정과는 무척 다르다.  나는 코난같이 그리 엄청난 힘의 발가락을 가지지도 못했다.  비유가 조금 어색하지만, 기계문명을 숭배하고 독재와 세계정복을 꿈꾸는 독재자 레프카는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한다.  각자의 작은 욕망들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이 지금의 변화를 재촉하고 굴려가는 중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착취하는 사회에서 누군가 나서 맞서는 일은 실체없는 대다수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다.  가만히 있어도 휘말려가는 현실에서 자본은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소수와 불가능한 다수를 구분한다.  개인은 무기력하고, 인민들은 자본의 특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꿈을 가지고 소소하게 실현시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이 섬은, 이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어느 누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짧은 시간에 겪어야만 했던 다수의 불행에 가까운 변화였다. 

   한정된 땅과 규모가 보이는 자본시장이기에 이 섬에서의 변화는 좀 더 뚜렷하게 느껴진다.  더 뚜렷한 만큼, 변화 안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의 표정 역시 분명하고 급격하다.  이 나라는 이제는 노동만으로는 의식주라는 인간의 기본권리를 스스로 챙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섬 안에서 이런 상황은 더욱 분명하게 보이고 느껴진다.  삶의 암담함이 짙게 보이고, 이 섬의 수많은 변화가 대다수의 암담함을 더욱 짙게 만들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보이는 이 섬 곳곳의 수많은 싸움과 저항은 늦겨울 땅을 열고 올라오는 푸른 싹처럼 반갑고 고맙다.  작게 꿈꾸어보고 품어볼 수 있는 작은 희망들이다.  강정해군기지 투쟁, 비자림로 벌목 반대, 제 2공항 반대, 탑동 항만확장 반대, 송악산 휴양지 개발 반대 등등..  반대라는 단어로 점철된 수많은 저항들은 오히려 긍정의 희망으로 빛이 난다.  자본과 도정이 벌이는 그런 사업들은 대다수의 도민들이나 제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득이 되지 않으며, 차라리 지금 이대로 두었을 때 제주의 가치는 더 커지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음이 진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혹과 무감각 속에 변화가 막연하게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또는, 그런 변화 속에서 자신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소수에 포함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안에 머무른다.  작은 공간 안에서 저항들은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나 저항의 가치는 도드라진 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되려 억압받기 쉽고 실제로 억압받고 있다.  변화의 결과가 느껴지는 이방인의 시선에서는 안타깝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이들은 이방인의 시선마저 이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  이방인은 다시 이 섬의 사람들에게서 조금 더 멀어진다.  객관자에 가까운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강요당한다. 

  나는 이 섬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종종 한다.  사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입도하여 적절하게 변화의 운을 거머 쥔 사람이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의사라는 직업으로 돈을 모아 하귀와 외도의 경계 어딘가에 땅을 마련하였다.  개원보다는 마당있는 집이라는 바램을 위해 집을 먼저 지었다.  급격한 변화의 직전에 이룬 로망이라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한 변화 위에서 이 섬 안의 나의 삶이 그리 안정적이지는 않다.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의 당연하고 소소한 불안일 수 있다.  그러나, 직업적 안정감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고, 뿌리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종종 흔들릴 때, 나는 함께 흔들리는 이 섬에서의 내 미래를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섬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행복할 수 있기를 열망한다.  변화 안에서 기회를 잡아채기 보다는 부당한 변화를 거부하며 소소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범부이기를 바란다.  천연의 자연과 그것을 시기마다 누리며, 세상을 공부하는 무명의 노력자로서 이 섬의 바람을 느끼고 싶다.  여전한 이방인으로 이 섬이 겪는 변화의 온당과 부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용하게 비판할 수 있는 시선을 견지하며 살고 싶다.  내 삶의 매 순간, 이러한 열망과 바램이 여전하길 소망한다. 

  에세이라는 주제로 100번째의 글을 썼다.  딱 100번째 까지, 제주에 살며 느낀 것들을 글로 써보자며 시작한 것이 2년 전이었다.  다짐과는 달리 글 안에는 진료실 이야기가 뒤섞여 제주에서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원수련을 할 때 느꼈던 글들도 몇 개 포함이 되었다.  어쨌든 내 느낌으로는, 내가 느낄 수 있는 제주의 일 년 열두 달의 흐름을 거의 담은 듯 하다.  글은 계속 이을 것이다.  누가 읽어주던 말던, 어떤 주제로 쓰던 간에 나는 계속 자판을 두드려 내 생각을 활자화 할 것이다.  그것이 제주에 관한 글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글을 쓰는 터전은 계속 제주일 것이다.  그러길 희망한다.  100번째로, 에세이라는 주제의 글은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