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버스 출입문이 하나였을 때도 있었지만 어렸을적 기억으론 지금 처럼 본래 버스 문은 앞뒤 두개의 문이 있었다 문은 지키고 요금은 받아야 했기에 앞 차장 뒤 조수라 했었는데 둘 다 남자였다가 월급 이라도 줄이려 고 또는 여성도 사회생활에 서서히 동참하는 시기였기에 앞차장은 여성이 맡았고 주로 돈을 챙겨야 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차장이란 말이 예쁘지 않다 해서 후에는 안내양으로 불리었다 먹고 살기 힘든시기 상급학교 진학은 부잣집 딸래미들이나 드물게 할수 있었고 초등 학교 졸업만 하고 한글만 익혔으면 되었다 하여 누구네 딸은 도시 부잣집 에 식모로 갔네 누구는 어디 공장에 들어갔네 하던 시기였는데 고달프기는 해도 다른 직업 보다는 돈벌이가 쏠쏠했기에 한때 인기가 있었다 뒷문 조수도 지방엔 주로 운전학원이 없었기에 운전기사를 따라 다니며 언젠가는 운전기사가 될 꿈을 꾸는 젊은이가 조수라는 이름으로 수 년간 운전에서 웬만한 자동차 정비까지 배운후 도청 소재지나 대도시에 있는 면허 시험장에 가서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동차가 그리 많지 않던시절 운전기사도 선망의 대상 이었더라 때로는 못된 운전기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렇게 배운 사람은 실력이 남 달랐기에 버스회사 에서도 환영이었고 오랫동안 취업하거나 돈 아끼고 모아서 자기 차 한대 사가지고 시작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었 다 온종일 같은 차량에 함께 다니고 같이 밥먹고 때로는 어느 숙소에 머물 다 보니 정들어서 운전기사나 조수와 결혼하는 안내양도 있었더라 읍내에 방얻어 자취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 버스통학을 하기도 했는 데 그래도 통학생을 위해 아침에 배차를 많이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버스가 귀하다 보니 항상 초만원 이었고 장날이면 다이상 태울곳이 없다고 버스가 서지않고 도망가기도 했고 어떻게 타더라도 트럭위 짐짝은 저리가라 할 정 도로 극 초만원 이었다 사람들의 아우성은 그렇게 생겨나고.... 한명이라도 더 태우려는 버스는 차장 조수 문에 매달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 는데 뒤돌아 매달려 미는것도 그렇지만 젊은 남여가 마주보는 상태에서 몸 을 밀착시키게 되니 거 참 남사 스러워서리 어쨌거나 머리 큰놈들은 그런 상황을 즐기기도 했던것 같다 그 어려운 상황은 운전기사가 지그재그로 두 어번 차를 움직여 주어 문이 닫히고 어색한 침묵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읍내 장날 저녁이면 더더욱 파김치가 되었던 안내양 그러나 그렇게 벌어서 집에 송아지도 사주고 동생들 학비도 보태주고 자신이 시집갈 밑천도 저축 했던 억척스러운 자랑스러운 딸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맡딸은 살림 밑천 이란 말도 있었던것 같다 이젠 안내양 이란 말이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지금 의 젊은 여성에게 그런일 시키면 과연 잘 해 낼수 있을까? (어느 딸은 아버지가 노름해서 잃은 땅 그렇게 벌어서 논 네마지기 사주고 시집 간 딸도 있었더라) **** 한때 통학을 했던 단 기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