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촌


영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예()를 숭상했던 선비문화의 중심지이며,

선비촌이 조성되어 있는 순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던 회헌 안향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비촌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비의 정신과 태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일대에 건립되었다.

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며,

그들의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4가지 구역으로 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마을공동체 형태로 구성하여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각 가옥별로 거주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맞는 가옥 규모에 여러 가구의 생활도구를 전시하였으며,

선비의 일상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직, 간접체험 공간을 제공하였다.




영주 선비상


우리 고장 영주는 예로부터 학식과 인품을 고루 갖춘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뒤 퇴계(退溪)이황(李滉)선생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을 받게 되면서

350 여년간 4천여명의 유생들을 길러 낸 유학의 발상지 이며 선비의 본 고장입니다.

평소 유교 이념을 바탕 삼아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학문에 힘쓰고,

스스로의 인겪을 닦아,마음과 행실을 곧고 바르도록 선비 정신을 실천하여 왔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상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이 도입한 해동추로지향(海東鄒魯之鄕)이라는 명성에 맞게

선비사상을 진작시키고자 이곳에 선비촌을 재현하면서 선비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죽계루(竹溪樓)





경렴정(景濂亭)

 

소수서원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있는 정자로 유생(儒生)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다.

1543(중종 38)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 하나이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頥)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 첫 글자인 ''자를 취했고 회험(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 '()'자를 취해서 붙인 것이다.

 현판을 들여다보면 경림서와 초서로 된 두편액이 있는데,

해서는 퇴계(退溪) 선생의 글씨이고,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글씨이다.

서원 유생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시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각집으로 합각지붕을 하고 있다.

호박 주추에 두리기둥이 아름답게 된 마루바닥에 계각 난간을 돌렸다.

서원 경내와 외부 자연풍경을 이어주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을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이 걸려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정자는

시공을 뛰어넘어 호연지기를 기르던 유생들의 풍취가 묻어난다.  







지락재(至樂齋)

 

지락재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의 공간이란 뜻을 지닌 건물로

일명 높은 곳을 우러러 보는 공간이라 하여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심취했으리라.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를 모두 4천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 갔다고 한다








소수서원(紹修書院) - 사적 제55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서적, 토지, 노비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사액)받았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와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유불(儒彿) 문화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숭유억불 사상의 영향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원 입구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의젓한 적송군락을 따라가면 맑고 맑은 죽계수(竹溪水)를 만난다.

시냇가에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와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翠寒臺)와 경자바위가 있다.

경렴정(景濂亭)과 지도문(志道門을 지나 만나는 서원 경내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통은 전당후묘(前堂後廟), 즉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배치가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이 동쪽이 강학공간, 서쪽이 제향공간이다.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독특한 배치로 지어졌다.

서쪽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을 따른 것이다.  




2019 풍기인삼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