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유럽에서의 시간들이 내게 많은 고민을 던져줬던 모양이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것을 표현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우연찮게 소식을 접한 일본여행.
재일동포 유접지 답사 및 민족학교 교류방문이었다.
장소는 후쿠오카지역.
내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건 아내의 휴가였다.
멋지게 혼자서 여행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떠나 해방감(?)을 만끽하게 하는 것...ㅋㅋ
아주 좋은 조건에 좋은 의미의 여행일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가 넌지시 던졌는데
바로 "콜"한다.
근데 의도치 않게 나까지 가게 되었다.
해방을 던져주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남편이 족쇄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도 되었지만
나에겐 좋다. 얼마만에 둘이서 여행을 가는 것인지...
일본여행을 이렇게 사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후쿠오카 하카타 항에 도착하니 억쑤같은 비가 내린다.
차안에서 도시락 까먹고, 아... 이건 초등학교 6학년에 수학여행, 경주 천마총을 방문했을때를
그 기억과 비슷한데? ㅋㅋ
2003년인가 확실치는 않지만 재일동포들의 고국방문이 처음 허용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재일동포들의 삶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2009년 독립영화 '우리학교'를 다시 접하게 된다.
가슴 뭉클함을 비롯해 복잡한 감정이 오갔다.
이번 일본여행을 앞두고 다시 한번 영화를 보고 여행준비를 하고 대한해협을 건넌다.
기타규슈 오리오지역에 있는 조선초중고급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교장선생님에서부터
선생님들, 지역 원로선생님들께 손수 교문까지 나와주시며 반겨주신다.
영화 '우리학교'에서 봤는 것보다 훨씬 좋은 시설의 학교다.
원래 연못이었던 곳을 재일동포들의 모금과 노력으로 학교를 짓고 조선인으로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생을 다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정부와의 투쟁...
학교로 들어가려는 순간 멀리서 고급생 여학생이 지나가며 큰소리로
"반갑습니다"한다. 그 소리에 우리가 더 반가웠다.
지금 우리는 분단이 현실화되어 통일에 대한 생각들이 저멀리 멀어져가고 있는데
일본 동포사회에서는 아직도 피부로 분단을 느끼고 있기에
하루 빨리 통일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학교 곳곳에 녹아져 있다.
초급학교 3학년 교실. 담임선생님이신 이대미선생님께서 더 긴장을 하고 계시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학생들이 우리를 많이많이 기다렸단다.
선생님은 연신 웃음이 가득하다.
이 웃음.. 어디서 봤더라?...
그래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에서 봤다. 미소와 눈빛 다시 내게로 와서 영혼을 맑게 해준다.
초급4학년(?) 국어시험시간이다. 엄하게 시험감독을 하고 계시는 이 학교 여직동맹 위원장님..ㅋㅋ
학생수가 초,중,고 합쳐서 211명이란다.
한번 입학하면 거의다 고급학교까지 졸업을 하고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로 진학을 한다고 한다.
가족이다. 그들은 가족이다. 함께 사는 법을 아주 어려서 배우고 있었다.
1년의 목표를 학생들 스스로가 세우고 교실 뒤에 스스로들 결의를 한다.
근데 너무 밝은 표정들이다. 놀랍다. 즐겁게 배우고 지내고 있구나~~~
하교후의 사교육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ㅋㅋ
일본에서 나서 이제 재일동포 4세쯤 되는 아이들에겐
일본어가 더 쉽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인. 우리말을 잊지 않고 지키려는 노력이
학급 시간표에 고스란히 녹여져 있다.
정신이 가장 맑을 때 국어시간이 있다. 초등학교까지는 이렇다고 한다.
우리말이 입에 익는 중급학교에서는 시간표가 조금씩 달라진다고 한다.
역시 시험시간이다. 아주 진지하게...
그 옛날 시험시간이 생각난다. 필통도 세우고, 가방도 세우고 말이지...
어딜가나 다 똑같은가? ㅋㅋ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다.
피나는 우리만 지키기 노력. 우리말 경쟁표.
하루에 일본말 안 쓰기.. 쓰면 저렇게 빨간 딱지 붙는다. 그래서 나중에 상도 주는 모양이다.
우리는 학교전부터 '영어마을'이다 해서 영어배우기 바쁜데
우리말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와 아주 대조적이었다.
해외에서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 자제가 전쟁인듯 하다.
차별과 멸시를 이겨내기 위해~~~
분조장의 한마디. 우리로 치면 분단장. 아주 작은 분단장에게도 리더쉽이 넘친다.
올해가 학교 창립 55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다들 행사 준비하느라 교실을 비우고 있는데 여학생 3명이 있다.
얼굴한번 맞이 않았어도 우리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우리 옆에서 열심히 궁금한 점을 해결해주신 김영태 선생님.
누구의 지시가 아닌 스스로들 즐겁게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여중생.
우리를 환영하는 "V" 날려준다.ㅋㅋ
현재 한국에서는 사문화 되어가는 10.4선언문.
교실복도에 정성스레 적어놓고 지나갈때마다 가슴에 새기고 있다.
이들은 그 선언문이 제시하고 있는 길이 바로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일제시대 강제연행되어 일본에서 노역을 했던 조선인들.. 해방을 앞두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며 목숨을 건 탈출, 그리고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지만, 연합군과 일본군이 설치해둔 기뢰와 거대한 태풍에 가로막혀 버렸다.
고향에 가지 못하고 바다에 둥둥떠 있는 주검으로 해변가로 밀려온 80여명의 조선인들을
수습해 이곳 오다야마묘지에 비석도 없이 안장하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비를 세웠다.
고향을 향한 솟대를 세워놓고 마음만이라도 고향으로 가라며 굿을 하고 있다.
저녁에 학교 선생님들과의 저녁식사. 긴장하던 이대미 선생님과 유치원선생님 원귀애 선생님.
긴장하며 수업했던 속마을 들을 수 있고,
조선대학교 동급생들이 이 힘든 생활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라며 말해준다.
타가와 석탄박물관. 야마모토 가꾸메가 그 당시 광부들의 삶을 그림을 남겨놓았다
.
1860년대 말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과 제철 원료로서 전국의 탄광에서 생산된석탄은 중요한 에너지 원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노동력이 부족하여 조선인 약 67만명을
강제연행해 석탄과 시멘트 공장에 노역을 시킨다.
이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의 수는 정확히 알려진 봐가 없다. 대락 1만명이라고 추정한 뿐이다.
야마모토 사꾸메가 사용했던 물감과 붓 등의 화구.
1988년 강제노동에 동원된 한국인을 위한 위령탑에 국화 한송이 올린다.
이 위령탑이 설치된 돗은 탄괍 내에서 가장 높은 위치라고 하는데
살아서는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살라는 의미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향불에서 피어나는 연기타고 고향을 고히 가소서~.
휴우가(日向)묘지로 향한다.
인근 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은 죽어서도 대접을 받지 못했다.
조선인 주검은 그대로 방치 또는 아무렇게나 버렸졌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 노동자들이 돈을 내고, 밤에 몰래 나가서 휴우가 가문의 묘지에 묻는다.
이 휴우가 묘지의 묘비 주변에는 그들이 키운 애완견, 고양이들을 묻고 이름을 새겨 비석을 세워줬다.
몰래 시신을 묻고 표시나지 않게끔 무덤위에 애완동물처럼 돌을 세웠다.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대접을 받은 조선인들. 그 서글픈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휴우가 묘지에 있는 애완동물 묘와 비석들.
이름없는 비석들 앞에 국화꽃 하나씩 꽂아두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재일동포 2세 황보학선생님댁에서의 홈스테이. 우리는 그날 밤 가족이 되었다.
살아온 얘기 지금 생활의 대한 이야기...
여전히 여기는 식민지 생활에 끊임없는 투쟁, 전쟁의 연속이라 하신다.
어설프게 준비한 학생들의 기념행사. 그들의 마음이 가득담겨 있어 재미있다.
사진은 없지만 나도 객원 팔씨름에 참가.. 반칙왕이 되었다..ㅋㅋㅋ
마지막 행사를 다 마치고 헤어지기 아쉬워 못다한 이야기들을 이대미 선생님과 나누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을 일깨워주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여행지 후쿠오카로 돌아왔다.
밤의 구시다 신사. 꽃등이 예쁘다. 처음 여행의 시작이었던 사적인 여행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다시 배낭을 메고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즐겁다. 신난다. 유후~~~^^
마지막 후쿠오카 돔 야구장. 이범호 선수가 뛰었던 야구장이란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을 마무리 한다.
시작은 작았지만 많은 것을 안고, 얻고 돌아간다.
11월 다시 반가웠던 선생들을 만나러 간다.
못 찍은 사진이지만 마음을 담아 전해야쥐~~~ 내 작은 고마움의 표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