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Anabaptist , 再洗禮派


  재세례파의 가장 큰 특징은 성인세례이다. 재세례파는 세례를 2번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받은 유아세례를 신성모독적인 의식으로 보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 세례를 받는 것만이 유일한 세례라고 보았다. 재세례파들은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행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시민 선서를 하는 것도 거부했다. 재세례파들은 초대 교회의 제도와 정신을 복원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재세례파 운동의 지도자들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와 사도로 인정했다.

재세례파(Anabaptist)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의해 이단으로 화형당하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Anneken Hendriks

ⓒ Jan Luyken /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재세례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성인세례(成人洗禮)이다.

이 운동의 1세대 개종자들은 세례를 2번 받았는데, 그당시의 법에 따르면 재세례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재세례파 자신들은 세례를 2번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받은 유아 세례를 신성모독적인 의식으로 보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 세례를 받는 것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의 견해를 따른 그들은 유아들이 선과 악에 대한 자각이 생기기 전까지는 죄로 인한 형벌을 받지 않으며 그런 자각이 생기고 난 후에야 자유의지로써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또 재세례파들의 신앙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국가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행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시민 선서를 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런 신앙 때문에 수천 명의 재세례파들이 죽음을 당했다. 재세례파들은 중세 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의 제도와 정신을 복원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재세례파 운동의 지도자들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와 사도로 기꺼이 인정했다. 모든 개종자들은 심판관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충분하게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받았던 고난과 동일시하고는 했다.

재세례파 운동은 취리히의 젊은 지식인 집단 가운데에서 처음 생겨났는데, 이들은 츠빙글리가 행정관들에게 아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데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는 데 반발했다.

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은 귀족 출신으로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인문주의자 콘라트 그레벨이었다. 최초의 성인세례는 1525년초에 취리히 외곽의 촐리콘에서 실행되었으며 곧이어 대중운동이 진행되었다. 스위스 운동의 좀더 독특한 신념들 가운데 일부는 미하엘 자틀러의 지도로 준비된 슐라이트하임 고백(1527)의 7개 조항에 제시되었다. 재세례파 지도자들의 격렬하고 비타협적 태도와 그들의 가르침에 함축된 혁명적인 내용 때문에 그들은 차례로 각 도시에서 추방되었으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선교운동을 촉진시켰을 뿐이다.

얼마 후 여러 도시의 시장들은 좀더 완고한 조치를 취했고, 초기의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대부분 옥사하거나 사형당했다.

토마스 뮌처는 재세례파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음을 강조한 사람들('신령한 자들'이라고도 함)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525년 반란에서 튀링겐 농민을 이끈 이후에 사형당했다. 그의 제자였던 한스 후트는 남부 독일의 중요한 급진 개혁주의자였는데, 152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옥사했다.

1528년 빈에서 사형당한 발타자르 후프마이어는 모라비아 니콜스부르크의 지도자였다.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들은 이주자들이 들어오기를 원했으며, 많은 재세례파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를 모델로 삼아 재산 공유를 강조하는 재세례파주의의 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야코프 후터가 지도자로 있을 때 이들 공산주의적 이주민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파로 불리게 되었다.

후터파는 지금은 주로 미국 서부와 캐나다에서 명맥을 이으며 살고 있다.

멜히오르 호프만은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사도로서 네덜란드에서 매우 많은 수의 추종자를 얻었다. 그는 이 세상이 곧 끝나며 새 시대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가르치다가 1533년에 스트라스부르에 투옥되어 1543년경에 죽었다.

호프만의 추종자 중 일부는 네덜란드 사람인 얀 마테이스(1534 죽음)와 레이덴의 얀(1535 죽음)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지도자들을 비롯한 여러 망명자들이 1534년에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그들은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공산주의적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세우고 일부다처제를 실시했다. 1535년 독일의 군주들이 일으킨 군대에 의해 뮌스터는 함락되었으며 재세례파들은 고문과 죽음을 당했다.

근대 역사가들은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 운동의 일탈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수년 동안 전통적인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은 호전적인 소수의 재세례파와 평화적인 다수의 재세례파를 가리지 않고 유럽 전역에 걸쳐 재세례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의 평화적인 재세례파들은 과거에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와 그의 부관 디르크 필립스의 영도 아래 집결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살아남아서 마침내 메노파라는 종파를 형성했다.→ 후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