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와 중세]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뮤지컬도 유럽에서부터 발생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뮤지컬의 역사와 오페라의 역사는 같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연원을 살펴볼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간혹 연극에 음악과 춤을 도입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에는 소포클레스와 이스킬러스(Aeschylus)가 자기들의 연극에 쓰기 위해 음악을 직접 작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3세기 로마시대에 플라우투스(Plautus)는 그의 연극에 고정적으로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노래와 춤의 반주를 맡도록 했다. 플라우투스(Titus Macchius Plautus: 254 BC-?)는 뮤지컬의 시조 할아버지이다. 연극에서의 춤은 무용수들이 추는 춤이 아니라 배우들이 직접 추는 춤이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이런 공연이 무슨 연유인지 인기가 시들해졌다. 다만 한가지 재미난 일이 있다면 춤추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스텝 소리를 관중들이 분명히 듣도록 하기 위해 신발에 쇠로 만든 클립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사빌라(Sabilla)라고 했다. 탭 댄스의 시초이다.

 

중세에 처음으로 등장한 세속 음악 연주단

 

중세에는 뮤지컬 배우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했다. 어떤 때에는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난 일도 있다. 전염병을 옮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보다도 풍기문란을 염려해서라는 설명도 있다. 중세판 남사당이다. 12-13세기에는 종교 드라마가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며 뮤지컬의 행세를 했다. 헤롯왕 이야기, 다니엘 이야기를 교회에서 성가를 바탕으로 공연했다. 이런 종교 뮤지컬은 예배의식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문맹의 일반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너무 딱딱해서는 효과를 볼수 없기 때문에 노래를 섞은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후 부터는 성경 이야기 부분과 노래와 춤 부분을 구분하여 공연하는 스타일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를 사이클 플레이(Cycle Play)라고 한다.

 

중세 교회에서의 음악연주

 

교회는 유랑순회극단들의 성경이야기 공연을 장려하였다. 성경에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이야기를 주제로 한 연극을 시골마다 돌아다니면서 공연하는 것을 선교라고 믿었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연극을 공연할 때에 노래와 춤을 곁들이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 그리하여 뮤지컬 팀은 마차에 온갖 무대도구들을 싣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순방했다. 아무튼 이들 종교극단을 '이동마차'(Pageant Wagons)라고 불렀다. 이런 종교극단은 여럿이 있어서 먼저 찾아온 극단이 보여준 스토리를 다음 극단이 이어받아 공연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말하자면 연속극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연극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시(詩)와는 형식이 달라야 했다. 멜로디에 맞는 가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에도 무언가 예술적으로 하는 노력을 했고 합창 같은 것은 단조롭기는 하지만 ‘종교우선원칙’에 따라 교회에서의 합창 형태로 불렀다. 일반 찬송가의 시작이다.


[르네상스로부터] 르네상스 시점까지는 이른바 '예술 코미디‘(comedia dell'arte)가 유행하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랑극단'이다. 주로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다. 약간은 덤벙대고 소란스런 광대가 등장하여 일반 사람들이 잘 아는 스토리를 만담식으로 노래를 곁들여 공연했다.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의 시작이다. 몰리에르(Moliere)는 17세기 말에 그의 코미디에 노래와 춤을 넣어 뮤지컬로 만들었다. 음악은 주로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가 작곡했다. 17세기는 뮤지컬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예술이 힘을 얻던 때였다.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

 

1700년대에 두가지 형태의 뮤지컬이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유행하였다. 발라드 오페라(Ballad Opera)와 코믹 오페라(Comic Opera)였다. 영국에서 유행한 발라드 오페라의 대표는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 1728)이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적당히 섞은 오페라이다. 발라드 오페라는 ‘야바위 오페라’(Spoofing opera)라는 별명도 들었다. 반면, 코믹 오페라에서는 노래를 대중가요에서 따온 것을 사용하지 않고 별도로 작곡한 것을 사용했으며 줄거리도 보통 로맨틱한 것을 택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은 윌리엄 발프(William Balfe)의 ‘집시 소녀’(The Bohemian Girl: 1845)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여러 잡다한 형태의 뮤지컬이 나타났다. 보드빌(Vaudeville), 영국의 뮤직 홀(Music Hall), 멜로드라마, 벌레스크(Burlesque)등이다. 영국에서는 특별히 멜로드라마가 유행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런던의 극장에서는 음악이 없는 연극은 공연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내용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했다. 그러므로 굳이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이고 저 작품은 벌레스크라고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 벌레스크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익살극이되 음악이 곁들인 좀 유치한 익살극이라고 보면 된다.

 

영국 발라드 오페라의 대표작인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이런 18-19세기의 뮤지컬들은 얼마나 인기를 끌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거지 오페라’는 1728년 초연 이래 62회 연속공연을 기록했다. 두 달 이상을 계속 공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뮤지컬이든 오페라이든 한두회 공연이면 족하던 실정에 비하여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 기록은 그로부터 거의 백년후에 갱신되었다. ‘런던 생활’(Life in London: 1821)이란 소설에 기본을 둔 ‘톰과 제리’(Tom and Jerry)가 초연이래 150회 연속공연을 기록했던 것이다.


오늘날 뮤지컬의 왕국인 미국에서는 어떠했는가? 미국은 1752년까지 뮤지컬을 공연할 변변한 극장이 하나도 없었다. 영국의 윌리엄 할람(William Hallam)이란 사람이 12명으로 구성된 뮤지컬 공연단을 구성하여 당시 영국 식민지인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했으나 극장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윌리엄 할람은 아예 미국에서 살 생각을 하고 버지니아의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 극장을 세웠다. 그리고 The Merchant of Venice(베니스의 상인)과 The Anatomist(해부학자)를 무대에 올렸다. 이듬해인 1753년 할람의 극단은 뉴욕으로 와서 The Beggar's Opera(거지 오페라)와 Damon and Phillida(다몬과 필리다)와 같은 발라드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1840년대에 P.T. 바넘(Barnum)이란 사람이 맨해튼 아랫마을에 일종의 엔터테인멘트 콤플렉스(Entertainment Complex)를 건설하였다. 종합공연시설이다. 당시에는 맨해튼 아랫마을이 땅값이 비교적 저렴했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들어와서 중심가인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로 진출할수 있었다. 아무튼 맨해튼에 세운 바넘의 종합공연시설이 브로드웨이의 시초였다. 뮤지컬 극장이 맨해튼에 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롱런(장기흥행)을 기록한 작품은 The Elves(요정들)라는 것이었다. 1857년의 일이었다. 당시 뉴욕은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런던보다 뒤쳐진 상태였다. 런던 사람들이 뮤지컬(발라드 오페라 등)에 열광하고 있을 때 뉴욕은 겨우 시작단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0년 로라 킨느(Laura Keene)의 뮤지컬 벌레스크인 Seven Sisters(일곱 자매)가 맨해튼에 등장하자 뉴욕 사람들의 뮤지컬에 대한 관심을 런던을 앞질렀다. ‘일곱 자매’는 뉴욕에서 253회 연속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뉴욕 벌레스크 공연의 스타인 로라 킨느(Laura Keene)


[뮤지컬 코미디 전성시대] 현대 뮤지컬의 연혁에 있어서 처음으로 뮤지컬다운 작품이 뉴욕에 등장한 것은 1866년 9월로서 뉴욕에서 초연된 The Black Crook(못된 악당)이었다. 스토리를 얘기하기 위해 별도로 음악을 작곡했으며 춤도 새로 개발한 것이었다. 이 작품의 공연은 무려 5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초연이래 474회의 연속공연을 기록하는 대기염을 토하였다. 같은 해에 The Black Domino(검은 도미노)와 Between You, Me and the Post(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가 처음 공연되었다. 사람들은 이들 작품을 뮤지컬 코미디(Musical comedy)라고 불렀다.


코미디언인 에드워드 해리건(Edward Harrigan)과 토니 하트(Tony Hart)가 1878년 The Mulligan Guard Picnic(멀리간 가드 피크닉)이란 뮤지컬을 직접 제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주역은 물론 해리건과 하트 두 사람이었다. 대본은 해리건이 썼고 음악은 해리건의 장인어른인 데이비드 브래엄(David Braham)이란 분이 만들었다. 이 뮤지컬은 뉴욕에 사는 서민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특색이 있다. 문학적인 면에서 보데빌이나 벌레스크보다 한걸음 발전한 것이었다. 이 뮤지컬에는 당시 최고 인기를 끈 가수들이 등장했다. 에드나 메이(Edna May), 릴리안 러셀(Lillian Russell), 비비안 세갈(Vivienne Segal)등이었다. 종전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일반 가수들이 보데빌이나 벌레스크에 등장하기가 일쑤였다. 인기가수들의 뮤지컬 출연은 뮤지컬의 격조를 크게 높여준 것이었다.

 

미국 뮤지컬의 선구자인 에드워드 해리건(Edward Harrigan: 1844-1911)


이와 함께 상당히 짧았던 공연 시간도 요즘의 뮤지컬 공연시간처럼 정상화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거리마다 가로등이 밝혀졌으며 너도 나도 자동차로 다니기 시작하자 극장에 대한 관심도 따라서 커졌다. 늦은 밤에 극장에 다니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공연시간이 좀 길어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극장들이 생겼다. 특히 신세계에 와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우쭐하고 싶어서 극장을 후원하는 파트론(Patron)들이 되었다. 극장 출입을 자주 하는 것이 상류사회에 사는 체통이라고 생각했다. 뮤지컬은 돈 벌이가 되었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연극에 대한 관심도 무척 높아졌다. 1875년 런던에서 공연된 Our Boys(우리 아이들)이란 연극은 초연 이래 무려 1,362회 연속공연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어떤 뮤지컬도 이 기록에 필적하지 못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가 (암스테르담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공연중)

 

그러다가 1878년 영국에서 길버트-설리반이 가족분위기의 코믹 오페라를 선보였다. 처음 작품인 HMS Pinafore(여왕폐하 피나포어호)는 단번에 500회 연속공연을 기록하는 대성공이었다. 이 기록은 약 10년후인 1886년 알프레드 셀리어(Alfred Cellier)와 B.C. 스테픈슨(Stephenson)의 연극 겸 뮤지컬인 Dorothy(도로시)가 연속공연 931회로서 겨우 깨트렸을 뿐이었다. 도로시는 코믹 오페라와 뮤지컬 코미디의 중간 과정에 있는 작품이었다. 그나저나 도로시의 기록은 이어서 1890년대에 나온 길버트-설리반의 코믹 오페라의 인기에 밀려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얼마후 길버트-설리반의 코믹 오페라는 뉴욕에 상륙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으며 나아가 유럽과 대양주와 아시아까지 인기의 여세를 몰아갔다. 길버트-설리반의 뮤지컬은 대중의 존경을 받고 있는 가수들이 출연하여 종전의 벌레스크 또는 멜로드라마, 보디 뮤직 홀 쇼(Bawdy Music Hall Show), 그리고 형편없이 번역된 프랑스 오페레타보다 훨씬 높은 격조를 보였다.

 

길버트-설리번 뮤지컬 '펜잔스의 해적'. 영국식 뮤지컬의 전환을 이룬 작품이다.

 

길버트-설리반이 상륙하기 전까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는 챨스 호이트(Charles Hoyt)의 A Trip to Chinatown(차이나타운으로의 여행)이 1891년 초연 이후 657회의 연속공연을 기록할 정도로 롱 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편, 런던에서 길버트-설리반의 뮤지컬(코믹 오페라)에 대한 인기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자 뉴욕에서도 이와 흡사한 작품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모았다. 예를 들면 레지날드 드코벤(Reginald DeKoven)의 Robin Hood(로빈 후드: 1891), 존 필립 수자(John Philip Sousa)의 El Capital(엘 카피탄: 1896)이다. 1898년에 나온 A Trip to Coontown(쿤타운으로의 여행)은 브로드웨이 최초로 흑인이 제작하여 무대에 올린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민스트렐 쇼(Minstrel show: 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여 공연하는 쇼)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어 역시 흑인 제작의 Clorindy the Origin of the Cakewalk(남녀 한쌍의 걸음걸이 경기의 기원: 1898), 대히트를 이룬 In Dahomey(다호미에서: 1902)가 나와 바야흐로 오페라에 진출하지 못한 흑인들의 뮤지컬 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후 수백편의 뮤지컬 코미디가 1890년대와 1900년대 초반에 브로드웨이에 올려졌다. 대부분 뉴욕의 틴 팬 앨리(Tin Pan Alley: 주로 뉴욕의 대중가요계)에서 나온 음악을 주류로 한 것이다. 틴 팬 앨리의 작곡가로서는 유명한 거스 에드워즈(Gus Edwards), 존 맥날리(John McNally), 존 월터 브래튼(John Walter Bratton), 조지 코앤(George Cohan)등을 들수 있다. 조지 코앤은 Little Johnny Jones(리틀 자니 존스: 1904), 45 Minutes from Broadway(브로드웨이에서 45분거리: 1906), George Washington Jr(조지 워싱턴 주니어: 1906)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뉴욕의 뮤지컬은 런던에 비해 단기간 공연이었을 뿐이었다.

 

민스트렐 쇼의 포스터

  

한편 런던에서는 어떠했는가? 런던에서는 게이 나인티스(Gay Nineties: 풍요롭고 즐거운 90년대)라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으쓱대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절에 나온 뮤지컬은 이들의 기호에 맞추어야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지 에드워즈(George Edwardes)였다. 그는 ‘사람들의 취향이 사보이 스타일의 코믹 오페라에서 떠났다. 사보이 스타일과 같은 정치사회적 풍자는 더 이상 관심꺼리가 될수 없다’고 밝히고 사보이극장을 떠났다. 그는 사람들이 봄바람과 같은 향긋하고 싱그러운 음악, 로맨틱한 코미디, 그리고 멋진 스펙터클을 원한다고 보았다. 그는 게이어티극장(Gaiety Theater)과 댈리의 극장(Dally's Theater)등을 통해 그런 취향에 맞는 뮤지컬을 내놓았다. 특히 공연에 유명한 게이어티 걸스(Gaiety Girls: 요즘으로치면 본드 걸스)를 등장시켜 사람들의 눈요기도 만족시켜 주었다. 그의 작품은 종전의 해리간과 하트의 음악 스타일을 답습한 것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뮤지컬로서 대표적인 것은 1892년의 In Town(마을에서)과 1893년의 Gaiety Girl(즐거운 아가씨)이다.

 

 게이어티 걸 포스터


게이어티 시기의 히트 작품들은 대부분 가볍고 로맨틱한 것으로 가장 흔한 내용은 평범한 아가씨가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져 난관을 겪다가 결국은 해피엔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게이어티 뮤지컬에는 Girl이라는 단어를 넣은 타이틀이 많았다. The Shop Girl(점원 아가씨), A Runaway Girl(가출 아가씨), A Country Girl(시골 아가씨) 등이다. 발프(Balfe)의 The Bohemian Girl(집시 아가씨)도 이에 속한다. 이에 힘입은 조지 에드워즈는 좀 더 복잡한 뮤지컬을 내 놓았다. The Geisha(게이샤: 1896)이었다. 시드니 존스(Sidney Jones)의 San Toy(산 토이: 1899)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가볍고 로맨틱한 스타일에서 약간은 철학적인 사상을 담아 생각하는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이 두 뮤지컬은 무려 2년 동안이나 연속공연되었다. 레슬리 스투어트(Leslie Stuart)와 폴 루벤스(Paul Rubens)가 공동으로 만든 Florodora(플로로도라: 1899)와 영국의 대본가인 조지 댄스(George Dance)의 스토리에 미국 작곡가 하워드 탈보트(Howard Talbot)가 음악을 붙인 A Chines Honeymoon(중국 신혼여행: 1901)은 영국의 뮤지컬 코미디이지만 미국에서도 대히트를 하였다. 런던에서는 기록적인 1,074회 연속공연을 가졌으며 뉴욕에서는 376회나 연속공연되었다. 그러다가 유럽의 오페레타가 영국과 미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프란츠 레하르의 The Merry Widow(유쾌한 미망인: 메리 위도우)이었다. 메리 위도우는 1907년 런던에 상륙하여 대히트를 기록했다.

 

'중국 신혼여행'(A Chinese Honeymoon) 포스터

 
[오페레타와 1차대전]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걸쳐서 길버트-설리반의 코믹 오페라가 런던과 뉴욕을 휩쓸었지만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에 들어와서는 유럽의 오페레타가 이들 런던표 코믹 오페라와 경쟁하게 되었다. 런던과 뉴욕은 유럽이라는 고고한 문화의 원천에 대하여 항상 동경과 선망의 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19세기 후반을 수놓은  가장 뛰어난 오페레타 작곡가는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와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는 런던과 뉴욕에서 너무 형편없이 번역되어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예를 들면 Die Fleddermaus(The Bat: 박쥐)였다. 그러므로 한때는 런던표 뮤지컬이 우세를 지니기도 했다. 특히 1차대전의 어둠속에서 런던의 대중들은 번역본의 오스트리아/독일 오페레타보다도 국산 뮤지컬을 찾았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은 Maid of the Mountains(산악의 아가씨), Irene(이렌느), Chu Chin Chow(추 친 초우), The Bing Boys Are Here(빙 보이스)등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Die Fledermaus)의 한 장면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의 오페레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고 더구나 유럽 오페레타에 대한 번역에 대단한 신경을 쓴 결과, 프란츠 레하르와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가 연일 주가상승이었다. 스토리야 그렇다고 쳐도 면면히 흐르는 음악은 과연 비엔나의 오페레타구나라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태가 이러하자 영국과 미국의 작곡가들도 유럽풍의 오페레타에 신경을 쓰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1910년대에 활동했던 P.G. 워드하우스(Wodehouse), 기 볼튼(Guy Bolton), 해리 스미스(Harry Smith)등은 앞으로 등장할 제롬 컨(Jerome Kern)의 작품을 위해 길을 닦아 놓은 사람들이다. 제롬 컨의 뮤지컬은 가볍고 감동적인 터치와 음악과 스토리간의 연속성을 복합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뮤지컬이라고 해서 싱거운 잡담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음악과 스토리가 일체가 되어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롬 컨에 이어 나타난 또 하나의 거성은 빅토 허버트(Victor Herbert)이다. 고전적인 뮤지컬 세팅에 현대적인 감각을 도입한 인물이다. 그의 오페레타인 The Fortune Teller(점장이: 1898), Babes in Toyland(장남감 나라의 아기들: 1903), Mille. Modiste(모디스트양: 1905), The Red Mill(빨간 물방아: 1906), Naughty Marietta(거만한 마리에타: 1910)은 당대를 주름잡았던 빅터 허버트의 대표적인 오페레타 작품들이다. 제롬 컨이든 빅터 허버트이든지 모두 길버트-설리반과 그 이후의 뮤지컬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제롬 컨(Jerome Kern)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오페레타의 전성기였다. 루돌프 프리미(Rudolf Frimi), 어빙 베를린(Irving Berlin), 지그문드 롬버르크(Siegmund Romberg),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노엘 카워드(Noel Coward)등은 모두 이 시대를 풍미했던 오페레타 작곡가들이다. 이들은 훗날의 로저스와 햄머슈타인, 스테픈 손드하임(Stephen Sondheim)등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기염의 20세기] 영화가 등장하였다. 기존의 뮤지컬/오페레타 무대는 도전을 받았다. 처음에는 영화가 그다지 큰 도전이 되지 못했다. 무성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The Jazz Singer(재즈 가수)가 음악과 영상을 신크로하여 나오자 사태는 달라졌다. 평론가들은 영화가 무대를 대신할수도 있다고 보았다. 극장들은 영화에 관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리수를 두었다. 스토리는 저리가라였고 주역 가수와 여배우에게만 포커스를 두었으며 춤장면도 눈요기를 위해 대규모로 변신하였다. 이와 함께 노래는 사람들의 귀에 익은 대중가요를 강조하였다. 간단히 말하여 그저 왕왕거리는 노래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보니 제작비가 점점 많이 들게 되었다.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 시기에 나온 전형적인 뮤지컬은 Sally(샐리), Lady Be Good(상냥하세요), Sunny(서니), No, No, Nanette(안돼요 나네트), Oh, Kay(오케이), Funny Face(웃기는 얼굴)등이다. 이 시기의 스타로서는 춤의 거장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 마릴린 밀러(Marilyn Miller)등이다. 사람들은 이런 뮤지컬을 보면서 발로 장단을 맞추며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유럽의 오페레타들도 계속 인기를 유지했다. 영화가 무대 공연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뮤지컬 '노, 노, 나네트'의 나네트

 

그건 그렇고 빅터 허버트와 센티멘탈한 오페레타 이후 뮤지컬은 한 단계 새로운 모습으로 선을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1927년 초연된 Show Boat(쇼보트)였다. 뉴욕 지그펠드 극장(Ziegfeld Theater)의 무대에 올려졌다. 대본과ㅗ 음악이 종합을 이룬 작품이었다.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드라마틱한 주제, 대사, 세팅, 연기 모두 일체가 되는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에드나 퍼브(Edna Ferber)의 소설을 오스카 햄머슈타인이 각색을 하고 제롬 컨이 음악을 담당한 뮤지컬이었다.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리지널 무대는 572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그 때에 런던에서는 어떠했는가? The Beggar's Opera(거지 오페라)가 영국의 햄머스미스극장에서 1,463회의 공연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제는 런던이 뉴욕에 비하여 뒤처지게 되었다.

 

쇼 보트 포스터(소프라노 캐스린 그레이슨, 바리톤 하워드 킬, 배우 에바 가드너 주연)

 
[대공황 시대의 뮤지컬] 대공황으로 뉴욕은 물론 런던의 극장에 서리가 내렸다. 더구나 토키(Talkie)영화가 값싸게 나와 엔터테인멘트 극장을 위협했다. 런던과 뉴욕의 극장가에서는 겨우 몇편의 뮤지컬이 명맥을 유지하며 공연되었다. 그러나 뮤지컬에 관련하는 사람들과 아직도 부유한 파트론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제작팀은 생존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결과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내놓게 되었다. 조지 거슈인이 음악을 맡고 아이라 거슈인(Ira Gershwin)이 대본을 맡은 정치 풍자극 Of Thee I Sing(그대를 위한 노래: 1931)은 퓰리처 상을 받은 첫 뮤지컬이다. The Band Wagon(유랑극단: 1931)은 댄스 파트너인 프레드 아스테아와 그의 여동생 아델레가 출연하여 갈채를 받은 작품이다. 포터의 Anything Goes Well(잘해 보게!)에서 주역을 맡은 에텔 머맨(Ethel Merman)은 뮤지컬의 훠스트 레이디로서 그 명성을 수년동안 유지하였다. 모두들 에텔 머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없는 살림에 극장으로 몰려 왔다. 뮤지컬의 성공여부가 배우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다는 좋은 예이다.

 

 뮤지컬 '밴드 왜건'(The Band Wagon)의 포스터


거슈인의 Porgy and Bess(포기와 베쓰: 1935)는 쇼보트 등등의 뮤지컬 보다는 차원을 달리하는 작품으로 오페라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실제로 ‘포기와 베쓰’는 그 다음에 나오는 ‘West Side Story(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Sweeney Todd(스위니 토드)의 앞길을 밝힌 것이다. 마르크 블리츠슈타인(Marc Blitzstein)이 대본과 음악을 작곡한 The Cradle Will Rock(흔들리는 요람: 1937)은 오슨 웰스(Orson Welles) 감독으로 무대에 올려진 이래 상당한 관심을 끌고 180회나 연속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정치적 풍자가 지나치게 깃들여 있어서 논란이 되었었다. 쿠르트 봐일(Kurt Weill)의 Knickerbocker Holiday(니커보커 홀리데이: 네델란드 이민 자손들의 휴일)은 프랭클린 루즈벨트대통령을 선의로 풍자한 작품이다.

 

거슈인의 '포기와 베쓰' 무대. 사실 이 작품도 뮤지컬이다.

 
경제공황에다가 영화의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은 생존하였다. 정치적 풍자를 담은 뮤지컬로의 진일보, 무대 연출의 새로운 스타일, 꾸미지 않은 자연적인 대화 스타일 등은 게이 나인티스(1890년대의 촐랑거리는 뮤지컬)에서 보여주는 쇼걸들의 유치찬란한 무대와 센티멘탈한 로맨틱 오페라로부터 탈피하였을뿐만 아니라 으르렁거리는 생존경쟁의 20세기에서도 살아남았다. 더구나 1950년대에 이르러 경제가 부흥되자 뮤지컬은 다시한번 전성기를 마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