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프란츠 요셉 1세는 이모의 아들

 

다시 씨씨의 가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려울 것 없다. 남편 프란츠 요셉은 이모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남편 프란츠 요셉은 씨씨와 이종 사촌간이다. 남편의 어머니(시어머니)는 씨씨 엄마의 언니이다. 프란츠 찰스에게 시집온 바바리아 국왕의 셋째 딸 조피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 이름은 루도비카(Ludovica)였다. 이 루도비카가 바바리아 공작 막시밀리안이란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슬하에 공식적으로 1남 2녀를 두었고 비공식적으로는 8명의 자녀를 두었다. 큰 딸 이름은 헬레네(Helene)이고 둘째 딸 이름은 엘리자베스(Elisabeth)였다. 이제 역사의 수레바퀴는 엘리자베스 쪽으로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한다.

 

(씨씨의 공식 타이틀은 프란츠 요셉 황제와 결혼하기 이전에는 바바리아의 공주 또는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 대공녀였으며 결혼후에는 오스트리아 황비,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비였다. 호칭은 HI u. RM이라고 했으나 Her Impperial and Royal Majesty의 약자이다. 어릴때의 풀 네임은 엘리자베트 아말이 오이게니(Elisabeth Amalie Eugenie)였다.

 

나중에 씨씨와 결혼한 프란츠 요셉의 어린시절. 어머니 조피.

                       

엄마와 이모의 계획

프란츠 요셉은 불과 18세의 나이에 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젊은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Sophie)는 프란츠 요셉의 결혼을 서둘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무궁한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에게 부인이 없다면 이것 또한 체면이 안 되는 일이기에 서두르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도 후사를 보아야 했다. 하지만 젊은 황제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라면서 결혼을 미루기만 했다. 그러기를 4년이 지났다. 왕대비 마마인 조피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 신부 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몇 사람 후보가 있었지만 마땅치 않았다. 처음에는 프러시아 왕의 조카딸인 마리아 안나를 후보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프란츠 요셉이 마땅치 않아 했다. 다음으로는 작소니의 마리아 시도니 공주를 생각했다. 마리아 시도니는 프란츠 요셉의 사촌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는 등 정국이 소란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또한 프란츠 요셉도 별로 내키지 않아 했다.

 

프란츠 요셉의 어머니인 조피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여동생 생각이 났다. ‘맞다! 동생네에 딸 둘이 있지! 그 중에서 큰 딸은 얼핏 혼기가 찼을 걸...’ 이렇게 생각한 조피는 바바리아 (지금의 뮌헨 부근)에 살고 있는 동생 루도비카에게 연락했다. ‘사촌간이면 어떠냐? 왕실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라고 생각했다. 동생 루도비카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자기 큰 딸 헬레네가 막강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젊은 황제와 결혼 할수 있다니! 더 할 나위 없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더구나 젊은 황제는 용모도 준수하지 않던가? (일설에는 루도비카가 둘째 딸 엘리자베트를 후보자로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언니부터 시집보내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서 나중에는 헬레네를 적극 추진했다고 한다.)

 

씨씨의 어머니 마리아 루도비카

                       

1853년 8월 어느 날, 프란츠 요셉의 어머니인 조피는 동생 루도비카와 연락하여 잘츠부르크 인근, 이슐에 있는 황실 여름 별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들 프란츠 요셉과는 여름  휴가라는 명목아래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조피는 아들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이번 여름 별장에 가서 아무개를 만나게 될 터이니 그저 잔 말 말고 청혼해서 이 에미 속 좀 편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평소 효자로 알려진 프란츠 요셉은 더 이상 혼인을 미룰 수가 없어서 마음에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찌하랴? 황실을 위한 일이니! 그래서 '망극하옵나이다!'라고 답변하고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으로 갔다. 루도비카와 헬렌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바드 이슐에 미리 와 있었다. 루도비카는 자기 딸이 황제로부터 청혼을 받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소문이 나면 곤란하니까 그런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고 그저 자기네 식구끼리 별도로 여름 휴가차 바드 이슐에 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작은 딸 엘리자베스도 같이 데리고 왔다. 그 때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열여섯 이었다. 바드 이슐이 어딘고 하니 요한 슈트라우쓰의 오페레타 ‘박쥐’(Die Fledermaus)의 무대가 된 곳이며 프란츠 레하르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밝고 명랑한 엘리자베스

15세의 밝고 명랑한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바드 이슐에 오자 혼자서 숲속을 거닐거나 산에 오르기도 하고 아버지의 낚시대로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등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엄마(루도비카)와 이모(조피)가 언니인 헬렌과 프란츠 요셉과의 결혼을 꾸미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엘리자베스는 강에서 낚시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도 강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하여 우연찮게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이 젊은 귀공자가 대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인줄 몰랐다. 프란츠 요셉도 이 천방지축 같은 예쁘고 명랑한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 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저 웃고 떠들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프란츠 요셉은 오랜만에 왕궁에서 빠져 나와 신선한 자연 속에서 명랑하고 발랄하며 천진난만한 아가씨를 만나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얘기 끝에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모님 딸로서 자기와는 사촌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프란츠 요셉은 첫 눈에 엘리자베스에게 끌렸다. 다음날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등산을 함께 가서 또 다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엘리자베스는 왕족으로서 자수를 놓는다든지 피아노를 공부한다든지 또는 궁중 예법을 공부하기는커녕 혼자서 자유스런 시간을 가지기를 더 즐겨했다.

 

16세의 씨씨.

              

프란츠 요셉 황제의 청혼

다음날,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젊은 황제가 초청하는 무도회였다. 엘리자베스의 엄마 루도비카는 큰 딸 헬렌만을 무도회에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작은 딸 엘리자베스를 집에 혼자 두면 또 혼자서 어딜 쏘아 다닐지 모르기 때문에 함께 데려가기로 했다. 무도회장은 가벼운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자리에서 젊은 황제가 앞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새로운 황비를 선택하여 청혼할 것이라는 뉴스가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엄마 루도비카와 황제의 어머니 조피는 짜고 치는 고스톱 처럼 어서 젊은 황제가 헬렌에게 청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도회장 밖에는 바드 이슐의 시민들이 모여 들어 젊은 황제의 약혼 발표가 나면 만세를 부르고 불꽃을 쏘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혼을 위해 미라마레에  도착한 씨씨가 시어머니(겸 이모) 조피, 신랑이 될 프란츠 요셉의 영접을 받고 있다.

             

무도회가 한창인때에 황실의 시종장이 커다란 장미꽃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이제 젊은 황제는 이 장미꽃 바구니를 자기의 미래 신부에게 전달하고 청혼하기만 하면 되었다. 한쪽에 서있는 헬렌의 얼굴이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프란츠 요셉은 장미 꽃 다발을 한 쪽 구석에 서 있던 엘리자베스에게 전해 주며 정식으로 청혼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좌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제일 놀란 것은 황제의 어머니 조피와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루도비카였다. 헬렌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억지로 참고 창백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서서 말하였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따님 엘리자베스여,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뜻밖의 황제의 청혼에 엘리자베스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제 겨우 15세가 아니던가! 하지만 황실에서의 결혼은 나이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청혼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제의 결정에 대하여 더 이상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무도회에 참가하였던 만조백관들은 '황제 만세, 엘리자베스 공주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중들도 덩달아서 만세를 부르고 불꽃을 쏘아 올렸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15세, 신랑이 될 프란츠 요셉은 22세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가 씨씨에게 청혼했던 에스플라나데(Esplanade) 10번지의 이 건물은 현재 바드 이슐 시립 박물관(Museum der Stadt Bad Ischl)이 되어 있다. 1858년 8월 19일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가 약혼식을 거행하였다. 결혼후인 이듬해 씨씨의 시어머니인 조피(Sophie) 대공부인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으로 바드 이슐에 있는 황실 별장을 선물로 주었다. 명칭도 카이저빌라고 바꾸었다. 프란츠 요셉과 씨씨의 가족은 여름이면 카이저빌라에서 지냈다. 프란츠 요셉은 카이저빌라는 '지상천국'이라고 불렀다. 그 지상천국에서 1914년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르비아와의 선전포고문에 서명함으로서 1차대전의 신호가 올려졌다. 오늘날 카이저빌라는 프란츠 요셉과 씨씨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건물의 일부는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의 약혼식이 열렸던 건물. 현 바드 이슐 시립박물관. 입구의 양쪽에 당시 프란츠 요셉와 씨씨의 모습이 그림으로 걸려 있다. 위층은 호텔 아우스트리아.

  

시어머니 조피의 허탈감

황제의 결혼 상대자는 황제가 직접 선정한 일이어서 어느 누구도 무어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황제의 어머니라고 해도 황제가 만좌에서 엘리자베스를 장래의 신부로 공표하였으므로 이를 번복할 재주가 없었다. 조피는 엘리자베스가 당황하여 앉아 있는 옆방으로 가서 엘리자베스에게 ‘네가 싫다면 어쩔수 없다. 하지만....황제가 그렇게 정하였으니....’라면서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자기의 원래 계획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허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저졌다. 조피가 할수 있는 일은 어린 며느리 후보자(실은 조카딸)를 처음부터 군기를 확 잡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를 깊이 느끼도록 하며 아울러 시어머니인 자기 말에 절대 순종토록 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게 ‘궁중 예법을 어서 속히 배워야 한다, 프랑스 말도 할줄 알아야 한다, 라틴어도 공부해야한다’ 등등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식은 다음 해, 엘리자베스가 17살이 되면 하겠다고 선언했다.

 

1854년 프란츠 요셉과 씨씨의 결혼 기념으로 조피 대공부인이 선물한 카이저 빌라. 프란츠 요셉 황제는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을 알리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을 이곳에서 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