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선집

유명 음악인들의 촌철과 같은 에피소드 정리

 

○ 륄리의 마지막 고해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는 1686년에 루이 14세가 심한 병세에서 회복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테 데움(Te Deum: 기쁨의 감사 찬송)을 작곡하고 직접 지휘했다. 당시에는 지휘자가 마치 지팡이와 같은 지휘봉을 가지고 바닥을 침으로서 박자를 맞추어 주었다. 륄리의 지휘봉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끝이 뾰죽한 것이었다. 륄리는 지휘하는 중에 잘못해서 자기의 발가락을 지휘봉으로 내려쳤다. 엄지발가락을 크게 다쳤다. 그로 인하여 륄리는 집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어떤 귀족이 륄리를 돕기 위해 그 분야의 유명한 의사를 특별히 보내어 치료토록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작곡가인 륄리가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그동안의 파란만장한 질곡과 영광을 모두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를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륄리가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가 작곡한 오페라에는 방탕과 음란한 내용을 도입하여서 교회와 점잖은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더구나 아무리 비극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오페라에 발레를 도입하여 다른 나라 작곡가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며 그밖에도 타락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하였기 때문에 고해성사의 내용도 그런 것들에 집중할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사람들은 륄리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로서 아직 공연되지 않은 '아킬레와 폴리세느'(Achille et Polyxene)에 타락적인 내용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륄리가 고해성사에서 그 오페라를 어떻게 처리하겠다고 말할지 궁금해 했다. 륄리는 고해를 받는 신부에게 '아킬레와 폴리세느'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불태워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그 소리를 들은 륄리의 친구 하나가 륄리에게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면서 그를 비난하고 꾸짖었다. 그 친구는 '위대한 장 바티스트 륄리의 마지막 오페라...작곡자 자신이 그 작품을 거부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일텐데 말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륄리는 그 친구에게 '여보게 제발 목소리 좀 줄이게나. 누가 듣겠네. 그런데 실은 말이야 내가 고해 신부님을 속였다네. 내가 불태우겠다고 말하고 하인에게 건네 준 스코어는 복사한 것이라네'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마친 륄리는 그가 작곡한 테 데움에 나오는 소절인 Il faut mourir, pecheur, il faut mourir (죄인이여, 너 또한 죽을수 밖에 없도다)라는 구절의 노래를 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장 바티스트 륄리

 

○ 라모의 전례

루이 15세는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천재성을 높이 치하하여 그에게 귀족의 작위를 내리겠다는 찬하의 친서(Letter of nobility)를 보내고 그 내용을 보다 빛나게 하기 위해 성미하엘훈장을 수여키로 했다. 그 친서는 즉시 개봉해도 좋다는(Letters-patent) 단서가 붙어 있었다. 대개의 경우, 그런 서한을 받은 사람은 개봉하기 전에 등기소에 가서 법적으로 공증을 받아 놓는 것이 일반이다. 그래야 나중에 서한의 내용을 법적으로 보장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모는 루이 15세의 왕서를 등기하지 않고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루이 15세는 아마 이 늙은 까다롭고 초라한 작곡가가 등기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등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이 15세는 등기ㅣ 경비를 친히 부담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라모는 '그렇다면 그 돈을 직접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돈을 다른 목적으로 더 유용하게 쓸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실은 그가 오래전에 작곡한 캬스토(Castor)와 다르다누스(Dardanus)의 경우에도 루이 15세로부터 그와 같은  찬하의 서한을 받은 일이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 그레트리의 연애장면

앙드레 그레트리(Andre Gretry: 1741-1813) 시대에는 오페라에서 극렬한 변조가 하나의 유행이었다. 바로크 오페라를 존중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못마땅해서 불평들이었지만 일반 관중들은 오히려 스토리의 변화에 따른 오케스트라의 뒷받침을 엔조이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음악이 상황을 잘 묘사해 준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도둑이 도망을 가고 사람들이 잡으러 쫓아가는 장면이 나오면 이에 맞게 오케스트라가 급박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다. 순수주의자들은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음악이란 정해진 격식에 따라 아름답고 부드럽게 만들어져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평안한 마음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레트리는 그런 유행에 전혀 동요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친구가 그레트리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언젠가는 나도 청중들에게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주겠지. 하지만 유행이라고해서 그걸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 그런 음악을 만들려면 무슨 이유가 있어야겠지"

- 아니, 무슨 이유란 말인가?

"생각해 보게나. 어떤 연애를 좋아하는 기세있는 청년이 어떤 예쁜 아가씨를 만나서 연애를 시작한다면 어떤 음악이 나오겠나? 사랑의 듀엣이지!"

- 그렇겠지

"그런데 아가씨의 완고한 아버지가 자기 딸이 웬 바람둥이 녀석하고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 그러면 음악은 불길한 예감을 들려주겠지"

- 물론이지(Naturellement)

"아버지는 두 사람의 뒤에서 몰래 다가간다네. 그땐 크레센도이겠지. 그리고는 그 못된 젊은이의 엉덩이를 발길로 한 대 크게 차 주겠지. 갑자기 공격을 받은 젊은이는 나 살려라 하고 뺑소니치겠지. 그때의 음악은 격렬한 변조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결국 그레트리도 전통적으로 격식에만 얽힌 음악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었다.

 

○ 치마로사에 대한 아첨

어떤 화가가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1749-1801)에게 무언가 아첨하고 싶어서 생각 끝에 '선생님. 선생님 앞에서는 모차르트도 저리가라일 정도로 선생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든지 찬사를 듣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지나쳤다. 치마로사는 "음악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은 라파엘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하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대답했다.

 

○ 메울 감싸기

어떤 사람이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에게 스코어 하나를 보여주면서 그것을 에티엔느 메울(Etienne Mehul: 1763-1817)의 것으로 믿고 메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케루비니로 말하자면 파리음악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최고 작곡가 겸 음악학자로서 자처하고 있던 터였다. 케루비니는 그 사람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릴 요량으로  "그래요? 그런데 이 음악은 메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모자라네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건 실은 내가 쓴 음악이요"라고 덧 붙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짐짓 놀라면서 '그럴리가 없는데요"라면서 왜 그러냐는 케루비니의 질문에 대하여 "이 음악이 선생님 것이라면 너무 훌륭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케루비니가 로시니를 평가하다

어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허드레 작곡가가 케루비니에게 로시니의 오페라 '이집트의 모세'의 스코어를 높이 들어보이면서 "선생님, 자유주의 사상가 로시니 선생님이 쓴 이 반음계적 파사지를 보세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기분이 약간 상한 케루비니는 그 사람에게 '여보게, 나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네'라고 대답해 주었다.

 

○ 이번에는 베를리오즈가 케루비니를 평가하다

베를리오즈는 케루비니의 오페라 '알리 바바'가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오페라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역겨워하였다. 1막이 끝나자 베를리오즈는 옆 사람들에게 '저 오페라를 위해 아이디어 하나를 내면 20프랑을 드리겠소'라고 소리쳤다. 2막이 끝나자 다시 '아이디어 하나에 40프랑을 드리겠소'라고 소리쳤다. 그랬는데도 아무런 반응들이 없자 '80프랑이요'라고 소리쳤다. 오페라가 끝나자 베를리오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포기요 포기. 나는 그 정도로 돈이 많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 구노에 대한 기념품

어떤 백작부인이라는 사람이 구노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바닷가에 있는 구노의 별장인 생 클루(St Cloud)를 찾아왔다. 구노는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백작부인은 구노의 식구들이 점심 식사를 막 마친 때에 도착했다. 백작부인은 거실로 안내를 받아 가던중 식당을 거쳐가게 되었다. 백작부인은 식탁위의 접시에 체리 씨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건 틀림없이 구노가 먹고 나서 뱉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작부인은 구노의 입에 들어갔었던 체리의 씨를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꺼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래 그 체리 씨를 기념품으로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얼마후 백작부인은 구노에게 마치 자랑이라고 하듯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잡수셨던 체리의 씨를 제가 하나 가지고 있답니다. 저는 이것으로 펜단트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닐꺼예요'라고 말했다. 사태를 파악한 구노는 점잖게 웃으면서 '마담. 나는 체리를 먹지 않는답니다. 그건 아마 저의 집 마부가 먹고 뱉어 놓았던 것일 겁니다. 그 친구는 노상 체리를 먹고나서 씨를 접시에 뱉어 놓는답니다'라고 말했다. 백작부인에게는 하나도 재미없는 말이었다.

 

○ 이번에는 스트라빈스키가 헨델을 평가하다

스트라빈스키는 헨델의 '테오도라'(Theodora)를 음반을 듣고 나서 "아름답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끝났는 줄 알았는데 그 후에도 너무 길고 많은 음표들이 붙어 있으니 말이라네'라고 덧 붙였다.

 

○ 브리튼에 대하여

누군가가 벤자민 브리튼에 대하여 "그 사람은 작곡가 아니야. 그 사람은 도벽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브리튼은 다른 사람들이 작곡해 놓은 멜로디를 가져와서 자기 작품에 사용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 사뮈엘 바버가 톰슨을 치하하다

사뮈엘 바버는 버질 톰슨(Virgil Thompson: 1896-1989)의 '우리 모두의 어머니'(The Mother of Us All)의 초연에서 톰슨에게 "참으로 훌륭한 음악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의 코드에서 몇 소절을 훔쳐가고 싶군요"라며 찬사를 보냈다. 톰슨의 코드는 기초적인 하모니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훔쳐가고 싶다느니 무어니 했으니 오히려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오페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수잰 안소니(Susan Anthony)의 생애에 대한 오페라이다.

 

○ 폰 뷜로브가 테너들에게

지휘자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ulow: 1830-1894)가 어떤 테너를 칭찬하자 헨리 크레비엘이라는 테너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 테너는 남자다움이 부족한데 어찌하여 칭찬을 하느냐는 의견이었다. 폰 뷜로브는 "여보게, 테너는 남자가 아니라네. 테너는 질병이고 악폐라네"라고 대꾸해 주었다.

 

한스 폰 뷜로브.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인 코지마의 전 남편이었다.

 

○ 월급에 대한 얘기

지휘자인 클레오폰테 캄파니니(Cleofonte Campanini: 1860-1919)가 어떤 테너를 오디션했다. 특출하지는 않지만 쓸만한 테너였다. 캄파니니는 그 테너에게 전에 얼마나 월급을 받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한번 공연에 2천 달러를 받았다는 것이다. 캄파니니는 (어이가 없어서) '우린 2백 달러 주겠네'라고 말했다. 그 테너는 당장에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요지경 세상이다.

 

○ 클렘페러 대 레만

봐이마르의 베를린은 세개의 오페라 극장으로 사랑을 받았다. 국립오페라극장인 운터 덴 린덴, 시립극장이나 마찬가지인 샬로텐부르크 오페라, 그리고 의욕에 넘치는 신생 크롤 오페라이다. 크롤 오페라는 정확하기로 소문난 오토 클렘페러가 지휘를 맡고 있었다. 크롤 오페라가 재정난 때문에 문을 닫게 되자 오토 클렘페러는 운터 덴 린덴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여기에서도 깐깐하고 정확한 지휘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대의 소프라노인 로테 레만(Lotte Lehmann: 1888-1976)이 운터 덴 린덴에서 '장미의 기사'에 출연하게 되었다. 클렘페러는 깐깐하고 정확하기가 이를데 없지만 레만은 리허설은 대충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레만이 마침내 불만을 토로하였다. '선생님, 계속 무어라무어라 하시면 정말 피곤합니다. 저는요 여기 운터 덴 린덴에서 그저 몇번만 출연하고 끝납니다. 그후엔 코벤트 가든과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에서 마샬린('장미의 기사'에서 공작부인)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바쁘답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나로 말하면 이런 세계적인 프리마 돈나인데 잔소리좀 그만 하라는 경고였다. 그러자 클렘페러는 '어떤 버전입니까? 슈트라우스 버전입니까, 아니면 레만 버전입니까?'라고 물었다. 말하자면 자기 멋대로 하는 공연이냐, 그렇지 않으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스코어에 충실한 공연이냐를 물으며 핀잔한 것이었고 결론적으로 자기 멋대로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에게 경고를 주는 말이었다.

 

○ 조심많은 테너

되는대로 성의 없이 노래하는 테너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리허설에서 마크를 하는 테너들이다. 마크라는 것은 아리아를 부를 때 소리를 죽여서 반쯤의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아예 가성 비슷하게 흉내만 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하기야 테너로서는 연습 때에도 풀 보이스를 낸다면 목이 상할수가 있어서 조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확하기로 이름난 오토 클렘페러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클렘페러는 테너에게 '소리를 내란 말이요, 소리를'이라며 소리쳤다. 그러자 테너는 무대 가장자리로 걸어와서 클렘페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말하는 것도 마크를 한 것이다. '선생님, 저는요 앞으로 하이 C 를 두번이나 더 내야 합니다. 그 하이 C 를 오늘 밤에 들으시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들으시겠어요'라고 말했다. 클렘페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오토 클렘페러

 

○ 너무 쉬운 대답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바톤 테크닉은 너무 애매해서 바톤을 보고 박자를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지휘자의 박자를 맞추어야 하나? 푸르트뱅글러는 '어느 지휘자도 마치 사각형을 그리듯이 직선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때 단원들이 그런 지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자 푸르트뱅글러는 '좋습니다. 한번 해 보지요'라고 말하고는 아주 철저하게 정확한 박자로서 명료한 연주를 이끌었다. 그래더니 지휘를 끝내고 나서 바톤을 내려 놓고는 '하지만 참 지루하고 재미없네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 좋은 질문

베를린 필의 어떤 단원이 콘서트마스터인 헨리 홀스트(Henry Holst)에게 '선배님은 푸르트뱅글러 지휘자의 박자를 어떻게 따라가세요?'라고 물었다. 홀스트는 그 단원에게 '우리가 따라갔던가?'라며 오히려 물어보았다.

 

○ 시골아가씨

지휘자인 한스 크나퍼츠부슈(Hans Knappertsbusch)는 소프라노 리자 델라 카사(Lisa della Casa: 1919-2012)에 대하여 힘들어 했다. 리자 델라 카사가 센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크나퍼츠부슈가 에스프레시보(espressivo)를 요구하면 리자 델라 카사는 디레토(diretto)로 불렀고 그가 악첸토(accento)를 원하면 리자 델라 카사는 센차첸토(senz'accento)로 불렀다. 그가 콘 슬라치오(con slancio)를 요구하면 리자 델라 카사는 모르비데짜(morbidezza)로 불렀다. 마침내 크나퍼츠부슈는 손발 다 들고 리자 델라 카사에게 마지막으로 '혹시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리자 델라 카사는 '베른이예요.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크나퍼츠부슈는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중얼거렸다. (베른은 취리히나 제네바에 비해서 아주 시골로 생각하며 또한 베른 사람들은 말 안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소프라노 리자 델라 카사

 

○ 베를리오즈가 다비드에게

펠리시앙 다비드(Felicien David: 1810-1876)는 프랑스 오페라의 동양풍의 선도자였다. 그는 동양풍의 여러 오페라를 제작했다. 비제의 '진주잡이', 들리브의 '라크메', 마스네의 '라호르의 왕', 라보의 '마루프'(Marouf), 그리고 루셀의 '파드마바티'(Padmavati) 등이다. 다비드는 이런 오페라의 제작을 통해 동양풍의 새로운 멋과 유행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그런 것들을 다만 귀족적인 저속함이라며 경멸했다. 동양풍을 모방한다고 해서 그저 심발이나 종들을 울려대면 다냐면서 무시했다. 어느날 다비드의 새로운 제작인 '사막'(Le Desert)이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베를리오즈의 어떤 친구가 베를리오즈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베를리오즈는 적당한 한마디를 생각해 내느라고 잠시 지체하더니 Il est descendu, de son chameau 라고 말했다. '그의 낙타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말이다. 사막에 있는 낙타에서 나온 작품이니 한심하다는 얘기였다.

 

펠리시앙 다비드

 

○ 아무데나

택시 운전기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를 태우게 되었다. 운전기사가 '어디로 모실깝쇼?'라고 물었다. 지휘자는 '아무데나!'라고 말하고는 '난 말야 어느 곳에서든지 오라고 한단 말이네'라고 덧붙였다.

 

○ 최고의 좌석

어떤 사람이 바이로이트의 티켓을 사고 싶어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팔고 싶어했다. 하지만 값이 너무 비쌌다. 살 사람은 팔 사람에게 '그렇게 비싸니 제일 좋은 좌석이겠지요?'라고 물었다. 팔 사람은 '그럼요'라고 대답하고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 공연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들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중간에 슬쩍 나오기가 쉬운 좌석이라는 것이었다.

 

○ 공식 의상

1940년대와 50년대에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주요 후원자인 존 온도프(John Orndorff)여사는 매년 시즌의 오프닝 나이트에 그 날 공연될 오페라의 여주인공의 의상을 상징적으로 입고 등장하여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예를 들어 '카르멘'을 공연할 때에는 검은색 레이스 만티야(커다란 스카프와 같은 것)와 금빗으로 머리 장식을 했다. '아이다'가 공연될 때에는 종려나무 잎으로 디자인한 옷과 금속 조각들을 이어 만든 이집트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오텔로'일 때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의 초록색 비로도 옷을 입었다. 그런데 어떤 해에는 실수가 있었다. 릴리 폰스가 갑자기 감기 몸살로 '라크메'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페라단은 어쩔수 없이 밀라노프의 '아이다'를 준비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존 온도프 여사는 배를 들어내 보이는 힌두의 사리와 같은 옷을 입고 등장했다. 시카고 리릭 오페라는 1956년에 '황금서부의 아가씨'를 공연하게 되었다. 호화 출연진이었다. 소프라노 엘레오노르 스테버(Eleanor Steber: 1914-1990),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 바리톤 티토 고비 등이 출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존 온도프 여사는 오프닝 나이트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술집 여종업원'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황금서부의 아까씨'의 여주인공인 미니는 거칠기가 이를데 없는 서부의 어떤 산간 마을에 있는 작은 술집의 주인이었다.

 

○ 라이발의 세계

오페라에서 라이발이라고 하면 주로 성악가들과 관련이 된다. 1970년대에는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의 라이발이 대단한 화제가 됐었다. 칼라스는 소프라노 아솔르타(soprano assoluta)의 타이틀을 갖기 위해 온힘으로 노력하였으며 테발디는 그 뒤를 쫓았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는 로테 레만과 마리아 예리차의 라이발 관계가 비엔나를 둘로 갈라 놓을 정도로 치열했었다. 헨델은 두 명의 소프라노, 즉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와 프란체스카 쿠쪼니(Francesca Cuzzoni)와 원수처럼 지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두 소프라노가 무대에서는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난리인 라이발로 지냈다. 존 게이(John Gay)는 그렇게 두 소프라노가 무대에서 앙숙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그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에 폴리와 루시가 다투는 장면의 음악을 만들었다. I'm bubbles, I'am bubbled (부글부글 끓어 오를 정도로 속상하다)이다. 작곡자간에 라이발이 생기는 일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일반 대중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다. 작곡가들의 라이발은 음악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사연이 더 많다.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라이발 관계가 그렇다. 유명한 악보 출판사인 리코르디가 베르디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심을 하고 있을 때에 작곡가들이 서로 경쟁의식을 가졌던 것도 간과할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에서 글룩과 피치니의 라이발 관계는 음악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케이스였다. 마치 1720년대에 영국에서 토리당과 위그당이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서로 아우성치던 것과 같다.

 

 

로테 레만(좌)과 마리아 예리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