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쥐스(Joseph Süss)

데틀레프 글라너트의 13장 오페라

유태인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에 대한 박해 이야기


데틀레프 글라너트


'요제프 쥐스'는 함부르크 출신의 데틀레프 글라너트(Detlev Glanert: 1960-)가 음악을 붙이고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베르너 프리츄(Werner Fritsch)와 우타 아커만(Uta Ackermann)이 공동으로 대본을 쓴 전 13장의 오페라이다. '요제프 쥐스'는 1999년 10월 13일 브레멘의 브레머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초연 이후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주제가 유태인에 대한 박해이기 때문이었다. '요제프 쥐스'는 18세기에 독일의 뷔르템버그에서 살았던 유태인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Joseph Suss Oppenheimer: 1698-1738)의 박해에 대한 내용이다. 유태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은 더러 있지만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주제로 삼은 오페라는 별로 없다. 오페라에서 유태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는 주로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로서 예를 들면 아담, 이브, 노아, 요셉, 모세, 삼손, 마카베우스, 에스더, 유딧, 다윗, 솔로몬 등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주제로 삼은 오페라는 별로 없다. 프랑스의 프로멘탈 알레비가 작곡한 '유태여인'(La Juive) 정도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치 시대에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주제로 삼은 오페라들은 더러 있다. 예를 들면 빅토르 울만의 '아틀란티스의 황제', 데이빗 칼슨의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이다. 그리고 '요제프 쥐스'가 있다.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


오페라 '요제프 쥐스'는 중세의 인물인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에 대한 사건을 공평하게 조명해 보자는 의도로서 제작되었다. 그렇다고 값싼 이상주의에 흐르자는 것은 아니었다. 요제프 쥐스라고 간단히 불리는 주인공은 18세기 독일의 한 공국인 뷔르템버그에서 칼 알렉산더 왕(공작)에게 봉사하는 재정 고문관이었다. 요제프 쥐스는 당시에 정의롭지 못하게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바이트 할란(Veit Harlan: 1899-1964)이 나치시대인 1940년에 감독한 영화 '유드 쥐스'(Jud Süss: 유태인 쥐스)이다.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요제프 쥐스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과거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그토록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요제프 쥐스는 독일의 유태인으로 은행가였고 슈투트가르트가 수도인 뷔르템버그 공국의 칼 알렉산더 공작의 궁신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유태인 세리였다. 쥐스는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다가 1720년경에 만하임과 다름슈타트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궁정에서 중책을 맡아 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있을 때에 나중에 뷔르템버그 공작으로서 왕좌에 오르는 칼 알렉산더를 만나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칼 알렉산더가 대관식을 가진 이듬 해인 1732년에 공작의 수석 경제 자문이 되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여러 면에서 권력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로 인하여 상당한 정적들을 가지게 되었다. 공작의 신임을 받아서 국가의 재정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종교적으로도 라이발이 많았다. 그가 모시는 군주는 개신교였지만 그는 유태교였다. 그런데 그는 유태인 사회에서는 유태교 전통과 신비주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다. 또한 그는 여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서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가 돈이 많기 때문에 여인들이 그에게 몰려 들었는지, 또는 그가 정말로 여인들을 좋아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대체적인 의견은 그가 여인을 멀리했다는 것이다. 다만 딸 나에미에 대하여서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지극했다고 한다. 쥐스는 한 동안 뷔르템버그 궁전의 보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보고 신용으로서 돈거래를 하였다. 그러나 군주인 알렉산더 공작은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쥐스는 그런 그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다보니 공작의 실정에 분노한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의 교수형 장면.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다.


오페라 '요제프 쥐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시기는 1738년이며 무대는 공작궁의 지하감옥이다.

-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Bar)

- 뷔르템버그의 군주인 공작(Buffo Bass)

- 나에미. 요제프 쥐스의 딸(Ms)

- 봐이젠제. 쥐스의 박해에 앞장선 인물(T)

- 마그달레네. 봐이젠제의 딸. 공작의 정부. 쥐스가 사랑한 여인(S)

- 그라치엘라(Graziela: Coloratura S). 공작의 또 다른 정부

- 교수형 집행자(스피킹 역할)


쥐스의 가장 큰 정적은 시의원인 봐이센제(Weissensee)이였다. 봐이센제는 쥐스가 알렉산더의 최측근인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음모를 진행시킨다. 그는 우선 쥐스가 자기의 딸 마그달레나에게 말할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며 비난한다. 실상 마그달레나는 공작의 정부이지만 쥐스는 그런 마그달레나를 사랑했다. 한편, 쥐스는 마치 리골레토에서처럼 공작이 자기의 딸 나에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을 짐작하고 딸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둔다. 그러나 봐이젠제의 수하들이 나에미의 거처를 알아낸다. 봐이젠제는 공작에게 나에미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준다. 공작의 부하들이 나에미의 거처를 에워싸자 나에미는 명예스럽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알렉산더 공작을 축출하려는 쿠테타가 있었으나 불발로 끝난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1737년에 심적인 충격을 받아서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권력을 장악한 봐이젠제 측은 쥐스를 앓던 이를 뽑는다는 식으로 그를 체포하여 지하감옥에 처 넣는다. 쥐스에 대한 혐의는 사기, 횡령, 모반, 여러 여인들과의 음란한 관계, 뇌물 수수 등이었다. 유태인중에 일부는 그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또 다른 유태인들은 오히려 불리한 증언을 하여 죄목을 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들만의 재판을 열어서 쥐스를 교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한다. 다만, 호색적인 활동은 무혐의가 되었다. 왜냐하면 쥐스와 관계했다는 귀부인들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아무튼 최종 선고를 할 때에 그의 죄목은 구체적으로 거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형선고는 쥐스를 공작의 속죄양으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쥐스는 1738년 2월 4일에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에게는 만일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사형집행을 중지할수도 있다는 마지막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그의 마지막 발언은 유태인의 기도문이었다. '들을지어다, 오 이스라엘이여, 여호와는 우리의 주시요 한분 뿐이니이다'였다. 이상이 오페라가 막을 올리기 전까지의 대략적인 스토리이다.     


영화 '요제프 쥐스'의 한 장면

           

쥐스는 감옥에서 악몽에 시달린다. 산자와 죽은자들이 함께 쥐스를 비난하고 괴롭히는 꿈이다. 이들은 쥐스를 극렬하게 비난하고 저주하는가 하면 그의 성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회상하는 얘기들도 한다. 어떤 음성은 그를 지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쥐스는 자기를 구하려는 모든 가능성을 거절한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나날에 그러한 쥐스의 거부는 기도로 변한다. 그리고 그 기도는 다시 죽음의 공포에 대한 비명소리로 변한다. 쥐스의 소리는 죽은 딸이 그를 부르는 소리보다 더 크다. 쥐스의 소리는 그를 교수대로 데리고 가는 북소리보다 더 크다.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 사건은 그후에도 유럽에서 잠재하고 있는 반유태주의의 전형으로 인용되는 것이었다. 나치는 쥐스의 스토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선전 영화에 이용하였다. 글라너트와 대본을 맡은 사람들은 그런 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이 시대에의 인묭이라는 두가지 사항 사이에서 마치 외줄을 타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위태롭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공헌하였다. 글라너트는 누가 보아도 헨체의 제자가 아니랄까봐 초연에서 하모니의 갑작스런 변화와 타악기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여서 관객들과의 소통을 활발하게 추구하였다.


쥐스 사건에 대한 기록은 당시에 절대 비밀문서로 관리되었다. 그러다가 쥐스 사건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거의 2백년 후인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고서였다. 물론 그 전에도 구전으로 쥐스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지만 비밀문서가 정식으로 밝혀지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쥐스에 대한 사형집행이 그의 범법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법을 가장한 살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쥐스에 대한 당시의 사형집행은 끔찍한 것이었다. 쥐스의 시신은 커다란 새장과 같은 곳에 넣어서 슈투트가르트 교외의 프라그자텔 구역에 6년 동안이나 매달아 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수 있게 했다. 새장에 넣은 쥐스의 시신이 겨우 철거된 것은 칼 알렉산더의 아들인 칼 오이겐이 뷔르템버그의 새로운 공작으로서 즉위하고 나서였다. 칼 오이겐이 즉위하고 나서 첫번째로 공포한 칙령이 쥐스의 시신을 교수대 아래에 묘지를 만들고 매장토록 한 것이었다.  


1940년에 나치가 선전용으로 만든 영화 '유태인 쥐스'(Jud Suss)에서 요제프 쥐스가 재판을 받는 장면. 유태인이 재물로서 권력을 쥐려고 했다는 것이 중심 메시지였다. 쥐스 역은 페르디난트 마리안.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에 대한 스토리는 지나간 20세기와 19세기에 여러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작품의 주제가 되어 왔다. 아마 처음 나온 문학작품은 빌헬름 하우프(Wilhelm Hauff)가 1827년에 발표한 소설 '유트 쥐스'(Jud Süss)일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리온 포이히봔거(Lion Feuchwanger)의 1925년도 소설로서 역시 제목은 '유트 쥐스'(유태인 쥐스)였다. 이 소설은 리온 포이히봔거가 1916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포이히봔거의 연극 '유트 쥐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연된 일이 없다. 포이히봔거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국의  애슐리 듀크스(Ashley Dukes)와 체코 출신의 유태인 작가인 폴 콘펠트(Paul Kornfeld)가 공동으로 극본을 쓴 것도 있다. 1934년에는 로타르 멘데스 감독으로 포이히봔거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있다. 쥐스의 역할은 콘라드 바이트(Conrad Veidt)가 맡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치는 선전목적으로 1940년에 바이트 할란(Veit Harlan) 감독으로 '유트 쥐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쥐스의 역할은 페르디난트 마리안이 맡았다. 2016년에는 Norman: The Moderate Rise and Tragic Fall of New York Fixer 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의 생애로부터 영감을 받은 영화이다. 주인공은 리쳐드 기어(Richard Gere)가 맡았다.


슈투트가르트 궁전.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바덴-뷔르템버그의 주도로서 산업과 역사가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포르셰의 탄생지이며 또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슈투트가르트는 독일에서 여섯번째의 대도시이며 호헨촐른 성 등 여러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가 수난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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