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군다나 당나라 때 백거이가 이곳 용문의 풍광을 무척 즐겼다고 하며 이곳 향산사에 18년간이나 눌러 빈대생활도 했다 하니
보기와는 다른 곳이네요.
백거이가 자신을 향산거사라 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의 은거 생활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香山居士!
佳人居士 다녀가네~

여기 큰 돌에 무수히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제목이 취음선생부(醉吟先生傳)라는 작품을 돌에다 새겨놓았습니다.
저 글을 서서 다 읽고 갈 수 있을까요? 헐!!!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라는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한가야말로 백거이를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시라 하네요.

그런데 그 사랑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이었나요?
원래 양귀비의 오리지날 서방이 누구였나 모르겠습니다.
양귀비는 워낙 출중한 미모를 지녔기에 오히려 불행한 여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불륜의 사랑은 아름답다고 미화한 백거이도 빠떼루 받아야 합니다.
북방 민족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풍습은 있으나 살아있는 자식의 여자를 인터셉트하는 법은 없잖아요.
황제가 한 일에 묻거나 따지면 안 되는 일입니다.
장한가(長恨歌)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blog.daum.net/nhk2375/7164425
시간이 허락하시면 오늘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시 한 편 읊어봄이 어떨까요?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 사람입니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 부근의 신정(新鄭)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네요.
과인이 총명하야 5살 때부터 이미 시 짓는 법을 배웠고 27세 때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백거이는 뛰어난 재능에 비해 그리 순탄한 관직 생활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겨우 항주와 소주의 자사를 역임하게 되었다고 하니 관운은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었나 봅니다.

묘 앞의 석비에는 당소부백공지묘(唐少傳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당나라 태자의 스승이었기에 당소부(唐少傳)라는 비문을 새겨놓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많은 문인이 태어나고 스러졌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있잖아요.

이백과 두보라는 두 걸출한 시인이 아마도 우리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문인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시인은 그가 처한 삶이 달랐기에 그의 시 또한 한 사람은 삶의 즐거움이었고
다른 사람은 슬픔을 이야기했나 봅니다.
자라며 처한 환경이 사람의 인성에 무척 큰 영향을 준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인이 가고 난 뒤 중국 문학계에는 또 하나의 기라성을 방불하는 문인을 맞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백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사람들이 아름다운 시를 노래했기에 성당시대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백씨 종친회에서도 다녀가며 기념비를 남겼나 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에서도 이곳에 비석을 남겼습니다.

백거이는 일본에서도 대단히 유명한 시인인가 봅니다.
일본에서도 이곳에 와 글을 남겼습니다.
백낙천이여~ 영원하라!
실제로 일본에는 안녹산의 난 때 양귀비가 피난 중 죽지 않고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에서 살다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합니다.
정말 그 속을 누가 알까요?
그래서 일본에서도 양귀비는 대단히 널리 알려진 미인인가 봅니다.

그의 시는 무척 서정적이며 평이했기에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시를 쓰고 난 후 이웃집 여인에게 읽게 하고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 정식으로 시를 발표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가 의미하기는 쉽고 대중적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