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3.04.27 01:01 / 수정 2013.04.27 01:17

 

[현장 속으로] 권력과 인간의 진실 해부한 '권력의 경제학' … 리더십 역량·의지가 정치 불확실성 제거한다

 

마키아벨리의 흉상. 죽음의 얼굴상(추정)이다. 베키오 궁전 백합홀 집무실에 초상화와 함께 전시돼 있다. 얼굴(데스 마스크)에 치장용 벽토(stucco)를 발라 본뜬 것으로 추정한다. 거기에 검정·붉은색등 여러 색칠을 했다. 외모 기록대로 ‘마르고 작은 얼굴’이다. 상반신의 옷 형태와 색깔은 초상화와 같다. 작가 미상이다. 20세 초 미국인 르네상스 미술 수집가(Charles Loeser)가 흉상을 기증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 유배지. 500년 전 그대로인 시골집의 돌 벽에 붙은 탄생 400주년 기념 석판.

 

마키아벨리는 파격과 도전이다. 그는 사상의 질서를 깼다. 정치를 도덕과 종교에서 분리했다. 군주론(Il Principe, 영어 The Prince)의 주제는 대담하다. 언어는 강렬하다. 그 책은 권력의 본질과 인간 본성을 추적한다. 권력과 인간관계의 유형을 제시한다.

 군주론은 권모술수, 악의 교서라고 비난받았다. 그 500년은 애증(愛憎)의 서사시다. 군주론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를 상징한다.

집필 500년-. 자극의 단어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도시로 떠났다. 이탈리아의 중북부 피렌체(Firenze, 영어 Florence)다. 그가 태어났고 활약했던 곳이다. 4월 초 로마에서 고속철에 올랐다. 피렌체까지 북쪽으로 1시간30분.

 

피렌체시 외곽 시골집 2층에 있는 그의 소박한 책상과 액자(1532년 군주론의 첫 인쇄본).
 

 

피렌체는 르네상스 천재들의 도시다. 그 시대 그림·건축·조각·인문학으로 넘친다. 마키아벨리의 시골집이 시 외곽에 남아 있다. 피렌체에서 남쪽 11㎞.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시대로 그를 찾아간다.

 1512년 가을 그에게 비운이 찾아왔다. 피렌체 공화국은 무너졌다. 스페인 군대의 침공 때문이다. 행정 수반 소데리니(Pier Soderini) 정권은 몰락했다.

 그는 소데리니 정권과 운명을 같이했다. 1498년 정권 출범 때 그는 행정청의 제2서기장(Segretario della Seconda Cancelleria)을 맡았다(29세). 14년간 그는 피렌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소데리니의 퇴장과 함께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됐다.

 메디치 가문(Famiglia de’ Medici)이 18년 만에 권력에 복귀했다. 그는 반(反)메디치 음모에 연루됐다. 체포됐고 고문까지 받았다. 사면으로 풀렸다. 1513년 봄 시골집으로 쫓겨났다. 나이 44세. 유배의 가택연금 신세가 됐다.


 

베키오 궁전 집무실이었던 백합홀에 걸린 마키아 벨리 초상화(85x104cm)와 필자.

 

자동차는 시에나 쪽으로 20분쯤 달렸다. 산 카시아노(San Casciano) 지명 표지판에서 오른쪽 좁은 2차로 도로에 들어섰다. 완만한 포도밭 언덕, 올리브 나무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솟는다. 이탈리아 운전기사가 “토스카나(Toscana, 영어 Tuscany) 지방의 전형적인 전원 풍경”이라고 한다. 토스카나의 주도(州都)가 피렌체(인구 36만 명)다.

 5분쯤 뒤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Sant’Andrea in Percussina) 마을에 도착했다. 고풍의 수채화다. 여러 채의 돌집이 나를 맞는다. 잔잔하고 한적했다. 마을은 르네상스 시대 풍경 그대로라고 한다.

 알베르가치오(Albergaccio)-. 그의 소박한 3층 벽돌집이다. 그의 삶은 가난 속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법률가였다. 돌 벽 중간에 걸린 석판이 시선을 잡는다.

 che qui medito' e propugno' la liberazione d′Italia scrivendo le sue opere immortali sull′arte di reggere e difendere con armi proprie gli stati. “국가 통치와 자기 나라 군대로 방어하는 기술에 관한 불멸의 작품을 쓰면서 이탈리아의 해방을 모색하고 주창했던 마키아벨리.” 그의 탄생 400주년(1869년) 기념 석판이다.

 그 시대 이탈리아는 외세의 각축장이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공 신화는 퇴색했다. 두 강대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옆 얼굴 초상화가 붙은 ‘마키아벨리 와인’.
 

 

‘국가 통치술, 자주국방, 이탈리아의 통일’-. 군주론의 핵심 주제다. 마키아벨리의 고뇌와 열정을 압축한다. 나는 마지막 장을 떠올렸다. ‘야만인들의 지배에서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호소’(26장)다. 동판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열망을 반영한다. 마치니(Mazzini) 등 통일 운동가들은 그 대목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외국 지원군과 용병을 불신했다. “자신의 무력에 근거하지 않는 나라는 위기 때 자기 방어를 할 역량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운명에 의존한다”(13장)-. 자주국방은 국가 지도력의 핵심이다. 그 명제는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다. 북한 핵무기 위협의 방파제이기도 하다.

 관광객 다섯이 차에서 내린다. ‘피렌체시 군주론 500주년(V centenario)’ 홍보 로고가 차에 붙어 있다. 인솔자 조르조 키엘리니(46)는 토스카나의 르네상스 연구소 연구원이다. 그가 이 지역 신문(Il Gazzettino del Chianti)을 보여준다. ‘추방자 마키아벨리, 500주년 재현 행사’ 기사다.

 재현 행사는 피렌체 중심,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서 있었다. 관광객이 몰렸다. 16세기 옷차림의 관원이 말을 탄 채 마키아벨리 체포령을 발표한다. 그의 시골집 추방은 1513년 2월 19일 그렇게 시작됐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초상화, 궁정복 차림이다. 1575년(사후 48년) 산티 디 티토의 작품. 다문 얇은 입술에서 야릇한 미소가 풍긴다.

 

나는 집안에 들어갔다. 2층에 그의 책상이 남아 있다. 장식도 크기도 조촐하다. 거기서 군주론을 썼다. 등불과 깃촉 펜이 보인다. 벽에 그의 작은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군주론의 목차를 넣은 액자도 있다. 1532년 첫 인쇄본이다. 그의 죽음 5년 뒤다. 책상 뒤 창문 틈으로 꽃 향기가 스며든다. 그때도 피렌체는 꽃의 도시였다.

 그 방에 추방자의 삶이 배어 있다. 베토리(Francesco Vettori,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그의 편지(1513년 12월 10일)를 읽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편지를 “이탈리아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문체”(저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고 감탄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서재에 들어간다. 문턱에서 나는 진흙과 먼지 묻은 평상복을 벗고 품위 있는 궁정복으로 갈아입는다. 이런 옷차림으로 나는 고대인들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나를 반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궁금한 행적이 있으면 그 이유를 캐묻는다. 그들은 정중하게 답변한다. ··· 단테(Dante)는 읽은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는 성과를 기록해서 ‘군주에 관한 작은 책자(opuscolo De Principatibus)’를 썼다.”

 

피렌체 정치·행정의 중심 베키오 궁전(위). 궁전 2층의 화려한 백합홀에 마키아벨리의 집무실이 있다.
 

 

역사와의 대화다. 궁정복은 타임머신이다. 그는 고대 로마의 영웅, 철학자들과 토론한다. 1513년 여름부터 정력적으로 썼다. 편지를 보낼 무렵 군주론(헌정사+26장) 초고가 완성됐다. 그 표현대로 ‘국가통치술(arte dello stato)에 대한 연구’다. 그는 권력 복귀의 열정을 글에 쏟았다. 유배지에서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나는 동네를 살폈다. 집 건너편 작은 레스토랑의 외관은 500년 전 그대로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서 돈을 걸고 카드 게임(tric-trac)을 했다. 그의 사후, 집주인은 세리스토리(Serristori) 가문이었다. 최근 와인 회사(Gruppo Italiano Vini) 소유로 바뀌었다. 이곳은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와인 생산지다. 마키아벨리 상표 와인도 있다. 라벨에 옆 얼굴 초상화가 붙어 있다.

 집 지하에 와인 저장고가 있다.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냉혹한 권력의지에 심취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반도의 신예 강자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존해선 안 된다.” 체사레의 권력 평판은 잔인함의 외경(畏敬)이다.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곽준혁 소장은 “평판(reputazione)은 정치적 권위의 핵심 요소이며 영향력의 실질적 근거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고유 해석”이라고 설명한다.

 체사레의 아버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다. 일찍 죽는다. 후임 교황은 율리우스 2세다. 체사레는 그의 선출을 막지 않았다. 그것은 ‘체사레의 유일한 실수지만 파멸의 원인’이었다. “지난날 원한이 새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7장)이기 때문이다. 체사레 집안은 과거에 율리우스 2세와 섭섭한 관계였다. 은혜와 원한-. 인간성 양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통찰은 전율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연구원에게 물었다. “군주론의 어느 대목이 와닿느냐.”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군주는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 경멸받는 것은 변덕이 심하고, 소심,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다”(19장). 그는 “유럽 위기는 경제적 측면보다 결단과 용기의 정치 리더십 문제”라고 했다.

 

체사레 보르자(왼쪽)와 사보나롤나.
 

 

이명박(MB) 정권의 2008년 봄이 생각난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서 시위대의 ‘아침이슬’ 합창을 들었다. 민심을 향한 간절함의 표출이었다. 그 방식의 효험도 있었다. 부작용은 치명적이었다. 반(反)MB의 좌파 세력에 얕잡아 보였다. 지지층도 나약함에 실망했다. MB 정권은 권위와 존경을 잃었다.

 피렌체 시내로 돌아갔다. 떠나는 순간, 두오모(Duomo, Santa Maria del Fiore) 성당의 주황색 쿠폴라(cupola·둥근 지붕, 높이 106m)가 아련히 보인다. 피렌체 두오모는 건축 사상 가장 화려하다. 나는 아르노 강변 베키오 다리 부근에서 내렸다. 다리 옆 거리에도 마키아벨리의 집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대형 지뢰 폭발로 파괴됐다. 집터는 도자기 가게로 바뀌었다.

 나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10분쯤 걸어갔다. 그곳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은 지금도 시청 청사다. 광장 바닥에 동판이 있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비극을 기억하게 한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으로 메디치 권력은 무너진다(1494년). 수도사(修道士) 사보나롤라가 권좌에 올랐다. 그의 4년 통치는 급진개혁의 신정정치였다. 포퓰리즘적 광기로 대중 지지가 추락한다. 그는 화형을 당한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마키아벨리 묘비명, ‘어떤 찬사도 그 위대한 이름에 합당하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극적 몰락을 분석했다. “신질서(nuovi ordini)를 만드는 것은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질서의 이득을 본 사람들은 개혁자에게 적대적이다. 반면에 신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릴 사람들의 지지는 미온적이다. 인간 속성은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개혁을 신뢰하지 않는다.”(6장)

 대통령 퇴임 후 김영삼은 “개혁은 혁명보다 힘들다”고 실토했다. 500년 전 책은 개혁과 대중심리의 관계를 꿰뚫었다.

 사보나롤라는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비극이다. “무장한 예언자는 획득했고,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한다. 대중은 변덕스럽다. 대중은 설득하기 쉬우나 설득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6장) 노무현의 옛 386정권은 독특한 바람으로 집권했다. 집권 후 포퓰리즘 행태는 대중 다수의 반발을 샀다. 지지세력은 이탈했다. 나는 베키오 궁전에 들어갔다. 2층 백합홀(sala dei Gigli)로 갔다. 현란한 벽화에다 사자 조각상, 붉은색 백합이 그려져 있다. 피렌체의 상징물이다. 500년 전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함이 보존돼 있다.

 백합홀 왼쪽에 마키아벨리 집무실이 그대로 있다. 10평 정도다. 입구와 끝 양쪽에 그의 초상화와 흉상(胸像)이 있다.

 얼굴상( 작가 미상)은 초췌하다. 그의 죽은 얼굴을 흙으로 본떠 색칠한 것으로 추정한다. 흉상은 피곤한 말년의 삶을 드러내는 듯하다.

 초상화는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의 작품(1575년)이다. 화가는 ‘편지 속 궁정복’의 마키아벨리를 상상했다. 얼굴상과 그림은 그의 외모를 기록한 것과 비슷하다. “마르고 보통 키, 작은 얼굴, 매부리코, 검은 머리, 빛나는 검은 눈. 다물어진 얇은 입술, 냉소하는 듯하다.”

 그의 제2서기국은 외교와 대외 전략을 담당했다. 그는 외교사절(mandatario)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다. 대사(oratore)직은 맡지 못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이웃 통치자들을 만났다. 관찰하고 협상도 했다. 프랑스 루이 12세, 체사레 보르자, 막시밀리안 황제(신성로마제국), 교황 율리시스 2세-. 관찰의 초점은 통치자의 성향과 자질, 군사력, 권력 운용, 대중의 지지 여부였다. 그는 수많은 보고서를 보낸다. 직관과 통찰, 상상력과 분석력은 탁월했다.


안내문에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가 적혀 있다. 군주론의 핵심 용어다(25장). 마키아벨리는 중세시대의 소극적 운명론을 거부했다. 정치의 속성은 불확실과 변동이다. 하지만 정치의 안정은 포르투나의 운명적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창조적 의지력, 결단과 용기로 바뀐다. 그것이 비르투다.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 ’을 기억했다. 영화는 수정헌법(노예해방)의 하원 통과 과정을 다룬다. 19세기 미국은 내전(남북전쟁)과 노예제의 어두운 운명 속에 있었다. 링컨은 비르투의 정치력으로 운명을 역전시킨다. 비르투는 리더십의 매력을 발산한다. 정치는 가능성의 미학이다. 링컨은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의 롤 모델이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 리더십의 해법이다.

 그림 속 마키아벨리 미소는 야릇하다. 쾌감과 의연, 냉소와 반감이 교차한다. 군주론을 둘러싼 찬사와 적대의 반응인 듯하다.

 군주론 500년은 다양한 해석, 끊임없는 논란의 세월이다. 오해와 비판은 두텁다. 속임수와 기만의 정치 참고서라는 부정적 언어들이 넘친다. 1559년 로마 교황청은 마키아벨리의 책들을 금서(禁書)로 판정한다.

 군주론에 대한 옹호와 감탄은 더욱 두텁다. 18세기 장 자크 루소의 반격은 자주 인용된다. 루소는 “(마키아벨리는) 피상적인 독서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군주론은 권력의 야만성을 조명했다. 인간성의 어두운 본성을 파헤쳤다. 그 진실은 불편하고 역겹다. 그것은 윤리와 종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의 천재적 작업은 생각의 세상을 바꾸었다. 피렌체시 ‘군주론 500주년 기념 조직위원회’의 발도 스피니(Valdo Spini) 위원장은 진전된 관점을 내놓는다.

이탈리아 피렌체=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군주론 500년은 애증의 서사시
'살아 숨쉬는' 위기 극복 통치술



 

우피치 미술관(베키오 궁전 옆) 바깥 쪽 회랑에 서 있는 마키아벨리 동상. 흉상, 초상화와 달리 근엄하다.

 

그는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권력을 방어하는 인식의 도구를 시민들에게 제공했다”고 말한다. 피렌체시는 12월까지 군주론의 학술회의, 재현 행사, 기념 사업을 한다.

 그 책의 언어는 직설과 대비다. “군주는 대중에게 사랑(amore)보다 두려움(timore)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17장) 하지만 미움(odio)은 피해야 한다. 두려움은 적절한 통치 수단이다. 미움은 군주에게 치명적이다. 그런 대비법은 강렬하게 꽂힌다.

 군주론은 ‘현실주의 정치(realpolitik)’ 교본이다. 초점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통치의 딜레마를 푸는 데 있다. 군주론은 ‘살아 숨 쉬는’ 지도력 연구서다. ‘권력의 경제학’이다. 권력은 낭비되지 말아야 한다. 군주론은 기만과 비열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정치행위의 판단 기준은 좋은 결과와 효용, 공익이다. 고려대 최장집 명예교수는 그것을 “좋은 가치보다 좋은 결과의 기능주의”로 해석한다.

 프린스턴대 비롤리(Maurizio Viroli)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삶은 역설과 불확실성, 비극적 드라마로 차 있다(저서 『Niccolo’s Smile』)”고 했다.

 비롤리의 포착은 실감 난다. 마키아벨리는 역설이다. 군주론의 부정적 이미지는 능숙한 처세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그렇지 못했다. 1515년 가을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군주론을 바쳤다. 책은 ‘헌정사(獻呈辭·Dedica)’로 시작한다. "전하께 드리는 선물은 장신구가 아닌 지식입니다.” 그것을 통해 책사(策士)의 역량과 충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그만의 권력 복귀 방식이었다. 그러나 젊은 메디치 군주는 그 책을 외면했다. 그의 정치 재기 꿈도 사라졌다.

 

 

불우함은 반전(反轉)을 낳는다. 그는 저술로 삶을 집중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강론(Discorsi),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피렌체사도 썼다. 희곡 만드라골라(Mandragola)는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반전은 그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스피니 조직위원장은 그 반전과 역설을 ‘역사의 복수(la vendetta della storia)’라고 했다. 시인 단테의 신곡 은 망명의 산물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다산 정약용의 저서도 비슷하다. 군주론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정치와 리더십 담론은 군주론을 통과해야 한다. 정치인, 학자는 군주론을 우회할 수 없다. 격찬과 비판과는 상관없다.

 베키오 궁전에서 나왔다. 그 옆은 우피치(Uffizi) 미술관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受胎告知)’,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거장의 걸작들이 쏟아지는 곳이다. 미술관 밖 회랑에서 마키아벨리를 조각상으로 만났다. 과장된 근엄함은 로마공화정의 원로원 귀족 같다.

 그는 좌절과 낭패 속에서 병으로 숨졌다. 1527년 6월, 58세. 묘소는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에 있다. 시신이 없는 묘비(cenotafio)다. 베키오 궁전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성당 안에는 단테와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묘비도 있다. 피렌체 출신 위대한 고유명사들이다.

 마키아벨리의 라틴어 묘비명(1787년 작품)은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찬사도 이처럼 위대한 이름에 적합하지 않는다.” 탄토 노미니 눌룸 파르 엘로지움(Tanto nomini nvllvm par elogium)-.


최장집 교수가 본 마키아벨리즘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 중요 … 마키아벨리에 익숙해져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요즘도 ‘왜 마키아벨리를 공부하나’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 최 교수는 3년 전 “우리 정치에서 카를 마르크스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그 주장은 유효한가.

 “그렇다. 한국정치는 도덕적·이상주의적이다. 한국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전통이 약하다. 마르크스 이론에는 정치의 역할이 없다. 규범과 이상만 강요한다. 그것이 이 시점에서 ‘왜 마키아벨리인가’다.”

 - 민주주의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는.

 

 

“민주주의도 통치체제의 하나다. 통치행위는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민주주의는 추상화, 물신(物神)화, 도덕적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이런 문제의 해독(解毒)제로서 마키아벨리의 유용성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항의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다.”

 -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솔직하고 대담무쌍한 정치철학자다. 도덕·종교적 담론은 인간의 권력의지를 베일에 덮어씌운다. 마키아벨리는 그 위선적 가면을 벗겨 보인 위에서 정치현상을 설명했다. ”

 - 우리 사회에 반(反)정치의 분위기가 퍼져 있다.

 “ 정치 배제의 반정치는 무책임의 정치를 낳는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찾는 게 정치다.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와 통치술에 익숙해야 한다.”

 - ‘좋은 정치’란.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좋은 정당으로 뒷받침받는 좋은 리더십이 해결 과제를 사려 깊게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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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사입력 2013-04-27 03:00:00 기사수정 2013-04-27 08:02:36

 

청와대 사람들 476명 정밀분석

동아일보DB

 

3월 14일 아직 어스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오전 7시 40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실 옆 회의실. 이남기 홍보수석과 최형두 홍보기획비서관, 백기승 국정홍보비서관, 윤창중 김행 청와대 대변인, 최상화 춘추관장, 여기에 이정현 정무수석과 김선동 정무비서관, 유민봉 국정기획수석과 홍남기 기획비서관 등 모두 10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날 조간신문을 살펴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조간신문에는 전날 민생현장 행보의 일환으로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 하나로클럽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사진 속 박 대통령은 쇼핑카트를 직접 끌면서 시민들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협상이 국회에서 난항을 겪고 있었던 데다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계속되던 시기라 언론에 나오는 박 대통령의 표정은 주로 심각하거나 어두웠다. 참모들로선 모처럼 얼굴에 웃음꽃이 핀 박 대통령의 사진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박 대통령 옆의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이었다. 외부행사였던 만큼 이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박 대통령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대통령과 심각한 주변 사람들은 부조화 그 자체였다.

홍보수석실에 모인 10인은 외부행사라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멀리서 근접경호를 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경호원들을 대통령 주변에 배치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통령경호실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했다. 이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외부행사 사진을 살펴봤다. 사진 속에서 경호원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름의 근거를 만든 셈이다. 이들의 의견은 경호실로 전달됐고 경호실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다음 날 학교 안전 점검을 위해 서울 종로구 창신동 명신초등학교를 찾았다. 그 다음 날 조간신문에 실린 박 대통령의 사진은 어땠을까. 경호원도, 수행원도 보이지 않았다. 박 대통령과 아이들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PI(President Identity·대통령 이미지 통합관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대통령 경호 라인을 바꾼 10인이 주중에 매일 오전 7시 40분, 오후 5시 등 두 차례 모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후 오균 국정과제비서관이 합류한 이른바 ‘11인 회의’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회의의 공식 명칭은 없다. 어느 참석자는 홍보대책회의라고 하고 다른 참석자는 현안대책회의라고 부른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대통령수석실이 관계된 주요 현안이 있을 때는 해당 수석이 옵서버로 참석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 현안 대책 등이 모두 여기서 가닥이 잡힌다.

새로운 청와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4월 중순 현재까지 청와대 직원 476명 중 최종 발령이 나지 않아 예비자 신분으로 일하는 직원도 74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각종 회의체와 대통령과의 면담이나 통화 횟수 등으로 청와대 내 권력지도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청와대 내 최고 실력자 역할을 하는 허태열 비서실장,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이정현 정무수석,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7인의 궤적을 쫓아가 봤다. 또 청와대 직원 476명을 다각도로 취재해 분석한 결과도 소개한다.

동아일보DB

▼ 내정 현안마다 11인 회의서 방향 정리… 키맨은 이정현 ▼

‘11인 회의’의 키맨 이정현


‘11인 회의’는 사실상 이정현 정무수석이 주재한다.

이 회의는 논의를 다음 회의로 잘 넘기지 않는다. 보통 1시간 이상 진행되는 이 회의에서 수석 간에 논란이 되는 사안이 있거나, 궁금증이 있거나, 대통령의 뜻을 물어 논란을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모두 해결한다. 이때 장관이나 비서실장,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이 이 수석이다. 이 수석은 지금도 수석들 중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 횟수가 가장 잦다. 이 회의를 정리하는 마무리 발언도 대체로 이 수석이 한다.

이 회의에서는 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선제적 대응’을 위해 사회적 갈등이 큰 사안도 다룬다. 최근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폐업 방침을 밝혀 논란이 된 진주의료원 사태가 대표적이다. 11인 회의는 ‘공공의료 확대냐, 지방재정 건전성 확보냐’를 놓고 논쟁의 소지가 큰 만큼 일단 모든 수치와 사실 관계를 국민에게 알려 여론의 향방을 지켜봐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박 대통령은 15일 청와대로 초청한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진주의료원 사태에 대해 “경남도민이 판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 판단을 정부는 따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이 ‘11인 회의’의 논의 결과에 따른다기보다 자신의 생각이 이 회의 구성원들에게 전달되고 정부 전체로 퍼져 나간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에서 발언할 주제도 ‘11인 회의’에서 논의된다. 이 회의에서 발언 주제를 6, 7개 취합해 올리면 박 대통령은 이 중에서 선별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추가한다. 최근 박 대통령이 과도한 경제민주화에 우려를 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 종합 정리한 것도 이 회의의 논의 결과가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일정도 상당 부분 ‘11인 회의’에서 논의된다. 이 회의에서는 대통령의 행보 자체가 대국민 메시지인 만큼 어느 시점에, 어떤 장소를 방문해, 무엇을 할 것인지 수시로 의논한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건의를 대체로 수용한다고 한다. 다만 장소 등은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16일 박 대통령이 찾은 경기 파주시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인 ‘에덴하우스’가 그런 경우다. 고용복지수석실에서 올린 방문지 후보군에 이 장애인시설은 없었지만 박 대통령이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이곳을 최종 선택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당 대표나 대선후보 시절 방문한 곳의 애로사항을 꼼꼼히 메모하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곳은 꼭 다시 방문하려고 노력한다. ‘박 대통령의 수첩’이 대통령 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 ‘11인 회의’에서는 140개 국정과제 중 최종 정리된 것부터 순차적으로 언론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이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은 없는 정책이나 다름없다”는 박 대통령의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정책, 정무, 홍보라는 국정의 삼두마차가 모이는 ‘11인 회의’에서 국정의 시작과 끝이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회의(약칭 실수비)를 매일 주재했으나 3월 22일 개정안이 통과된 뒤 이 회의는 매주 두 차례 화, 금요일 오전 8시 반에 열리는 것으로 조정됐다. 매일 열리는 ‘11인 회의’가 사실상 ‘미니 실수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보 책임자’ 김장수와 ‘막후 책임자’ 허태열


‘11인 회의’가 내치(內治)용 회의라면, 국방 외교 등 외치(外治)용 회의는 매일 오전 8시 김장수 실장이 주재한다. 청와대에서는 이 회의를 ‘상황평가회의’라고 부른다. 이 회의에는 주철기 외교안보수석과 소속 비서관들이 참석한다. 통일부가 25일 북한에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실무회담을 제의하고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 ‘중대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남북문제와 관련한 청와대와 외교안보 부처 간 역할 분담 및 대응수위는 모두 이 회의에서 조율된다. 북한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는 이 회의를 거쳐 거의 다 마련돼 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전언이다.

북한의 동향이 시시각각 변함에 따라 상황평가회의는 정기회의 외에 긴급회의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주 수석이 이례적으로 일요일인 14일 오후 9시 35분 북한의 대화 제의 거부에 유감을 표명하는 긴급 성명을 낸 것도 직전에 열린 긴급회의의 논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거의 퇴근한 탓에 이정현 수석과 윤창중,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긴급 성명의 취지를 각 언론에 전하느라 밤늦게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허태열 비서실장은 내치용 ‘11인 회의’에도, 외치용 ‘상황평가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예전 청와대처럼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이 출근한 이후 문안인사 겸 일일보고를 하는 관행도 거의 없어졌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허 실장에게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게 청와대의 내부 평가다.

박 대통령은 수시로 각 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리고 결과보고에 대한 피드백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과 수석들 사이에 오간 내용을 모두 허 실장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허 실장이 모든 현안을 알고 있어야 대통령수석실 간 칸막이를 없애고 협업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자연히 웬만한 수석들보다 박 대통령과 허 실장의 통화 횟수가 3, 4배 많다고 한다. 자정 넘어서 대통령 전화를 받을 때도 왕왕 있다고 여권 인사는 전했다.

더욱이 인사위원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인사위원장인 허 실장에게 무게 추가 더 쏠리고 있다. 장차관 등 고위직 인사는 대부분 박 대통령이 오랫동안 염두에 둔 인사가 낙점돼 인사위의 역할이 미미했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지는 공공기관장이나 감사 등의 인선에는 인사위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위로 추천권이 넘어간 지 꽤 됐다. 허 실장이 상당히 추천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허 실장 이외에 인사위의 고정 멤버는 유민봉 국정기획, 이정현 정무, 곽상도 민정, 이남기 홍보수석 등이다. 산하기관 및 공공기관 인선은 각 부처와 해당 수석실이 협의해 1차 후보군을 올리면 민정수석실 공직기강팀의 검증을 거쳐 허 실장 직속의 인사지원팀에서 각 후보의 장단점을 종합 정리한 자료를 인사위에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공공기관장 인선을 앞두고 대선 공신들 사이에 파워 게임이 시작됐다는 말도 들린다. 특히 지금까지 인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호남과 강원, 대구·경북(TK) 지역 인사들 사이에 줄 대기가 본격화됐다는 것이다. 각 수석과 장관, 새누리당 핵심 인사 등을 통해 쏟아지는 인사 민원을 얼마나 잡음 없이 조율하느냐가 허 실장의 ‘롱런 포인트’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비회의’ 주재하는 유민봉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의 힘은 국정조정과 일정, 메시지 등 3개에서 나온다. 유 수석은 매주 목요일 ‘선비회의’를 주재한다. 선비회의는 각 수석실 선임비서관들이 모이는 회의의 약칭이다. 이때 각 수석실의 모든 현안이 논의된다. 실수비와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약칭 대수비)의 회의 자료도 여기서 최종 취합한다.

유 수석은 매주 수요일, 역시 선임비서관들이 참석하는 대통령 일정회의도 주재한다. 수석실별로 건의를 받아 향후 일주일에서 석 달 정도까지 단기와 중장기 일정을 구분해 정리한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탄생했으니 창조경제와 관련한 박람회나 워크숍에 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대통령에게 제시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결정된 일정은 부속실로 올라간다. 부속실에서 수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의전비서관실에서는 일단 이 회의에서 통과된 일정에 맞춰 준비를 시작한다.

유 수석은 2주에 한 번 전 부처의 기획조정실장 회의를 주재한다. 이 자리에서는 각종 국정과제를 점검하고 부처 간 갈등 사안을 조정한다. 각 부처가 창조경제의 개념을 잡지 못하자 3월 중순 전 부처 기조실장과 창조경제 전문가들을 불러 워크숍을 주재하기도 했다.

정책과 관련된 박 대통령의 메시지도 연설기록비서관실로 올라가는 초안을 국정기획수석실에서 담당하고 있다.


문고리 3인방

박 대통령과 통화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허 실장이라면 박 대통령을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과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다. 정 비서관은 곳곳에서 올라오는 모든 보고서를 취합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대통령에게로 가는 일종의 ‘관문’인 셈이다. 수석들도 주로 정, 안 비서관을 통해 박 대통령의 의중을 살핀다. 24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의 오찬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을 모두 공개할지를 두고 홍보수석실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나 “공개해도 좋다”는 박 대통령의 의사가 정 비서관을 통해 전달되면서 일단락됐다. 일정회의에서 올라온 일정과 연설기록비서관실에서 올라온 메시지도 정 비서관이 박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한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으로 출근할 때 항상 동행하는 이는 안 비서관이다. 안 비서관은 아예 대통령 관저로 출근했다가 박 대통령과 함께 집무실로 이동한다. 청와대 내에서 박 대통령의 사적(私的) 생활을 아는 이도 안 비서관이 거의 유일하다. 박 대통령은 안 비서관에게 핸드백을 맡길 정도로 안 비서관을 편하게 대한다.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 수석보좌관이었던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청와대 안살림을 도맡고 있다. 청와대 비서관실 중에서 총무비서관실의 인원은 72명으로 가장 많다. 총무비서관실은 인사팀 재정팀 행정팀 구매팀 시설팀 위민팀 등 6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청와대에는 박 대통령의 의원실 보좌진 출신 9명이 모두 들어와 있다. 국정홍보비서관실 김휘종 씨, 총무비서관실 소속 황혜성 서영모 씨와 제2부속비서관실 김형일 씨 등이 그들이다.

정호성 안봉근 이재만 등 ‘비서관 3인방’은 명실상부한 ‘문고리 권력’이다. 하지만 이들은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맡겨진 임무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게 청와대 내부 평가다.



▼ 문고리 3인방 팀, 24명중 21명 靑입성 ▼

청와대 티켓 경쟁, 별정직 118명 해부


2012년 7월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맞은편의 대하빌딩 2층에 박근혜 대선 경선 캠프가 꾸려졌다. 경선 캠프에는 현역 의원 11명을 포함해 본부장과 정책위원 등 직함을 가진 멤버가 31명이었다. 이들은 대선 본선 때까지 선거의 중심 역할을 했지만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나 내각에 합류한 사람은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윤성규 환경부장관, 백기승 대통령국정홍보비서관 등 6명뿐이다.

이 멤버들 외에 경선 캠프에 실무진 36명이 합류했다. 실무진은 대부분 캠프가 꾸려지기 전부터 박 대통령 의원실 보좌진이었던 이재만(총무비서관) 정호성(제1부속비서관) 이춘상(작고) 안봉근(제2부속비서관) 등이 2007년 경선 캠프 실무진에 추가로 영입해 놓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경선이 끝난 이후에도 당사가 아니라 대하빌딩 2층에 남아 사실상 박 대통령의 직속 별동부대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경선 때 실무진 수를 늘려 달라는 건의를 받았으나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당선된 이후 자리 부담이 있었기 때문일까. 당시 캠프 실무진 36명 중 30명이 청와대에 입성했다. 대하빌딩 2층이 결국 ‘청와대 출입문’이었던 셈이다.

동아일보가 다각도로 취재한 결과 4월 중순 현재 대통령비서실 근무자는 모두 476명이다. 이 중에는 이름은 올라 있지만 전임 청와대 출신으로 최근 퇴직한 이들도 일부 포함됐다고 한다. 동아일보 분석 결과 476명 중 관료 파견이거나 전직 관료 출신, 청와대 직원을 제외한 정치권에서 온 별정직은 118명이었다. 이 별정직들은 대부분 대선 캠프에 있었던 이들로 박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청와대 내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전체 수석과 비서관 45명 중 절반이 넘는 27명이 정치권 출신의 별정직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2급 이하 행정관과 행정요원 정치권 별정직은 91명으로 전체 2급 이하 437명의 20.8%에 불과하다.

1급 비서관 이상의 고위급도 27명 중 11명은 대선 때 뛰지 않고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처럼 대통령직인수위에서 합류했거나 윤창중 대변인, 이중희 민정비서관처럼 교수나 언론인, 법조인 같은 비관료 출신이다.

2급 이하 중 정치권 별정직은 청와대 내 비(非)정책 라인에 집중 배치됐다. 청와대 정책 관련 수석실인 국정기획, 민정, 외교안보, 경제, 미래전략, 교육문화, 고용복지수석실 직원 239명 중 정치권 별정직 출신은 34명(14.2%)뿐이다. 비서실장 직속, 정무, 홍보수석실 직원 237명 중에는 정치권 별정직이 84명(35.4%)이었다.

제1, 2부속비서관실은 직원 17명 전원이 별정직이다. 정무비서관실도 10명 중 8명이 정치권에서 온 별정직 출신이다. 그러나 같은 정무수석실이라도 행정자치비서관실에는 정치권 별정직이 한 명도 없다.

수석실 인원이 가장 많은 민정수석실(71명)도 별정직은 수석과 비서관 한 명씩을 포함해 4명뿐이다. 민정비서관실 직원은 37명으로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감찰하는 특별감찰관 10명이 포함돼 있지만 특별감찰관실에도 정치권 별정직은 한 명도 없다.

정치권 별정직 출신이 정책 라인에 거의 합류하지 못해 박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청와대와 내각에 전파되는 게 더디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가 챙기는 주요 정책은 대통령의 지지기반과 직결되는 만큼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책 라인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 국정기획수석실의 경우 전체 직원 27명 중 캠프 출신의 별정직이 3명뿐이다.

박 대통령은 허태열 비서실장에게 청와대에 합류할 캠프 출신 실무진 명단을 주며 “급수를 높게 주지 마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대통령비서실의 2급 선임행정관 24명 중에 정치권 출신 별정직은 6명뿐이다.

이 정치권 별정직 118명을 대선 캠프 출신별로 살펴보면 공보단과 홍보팀의 약진이 눈에 띈다. 동아일보가 파악한 바로는 홍보팀 출신이 청와대에 19명, 공보단 출신이 17명 합류했다. 이들의 청와대 입성 실적이 좋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공보단을 이끌었던 이정현 정무수석과 백기승 국정홍보비서관이 청와대에 들어오면서 함께 손발을 맞춘 이들이 청와대에 입성했다. 특히 백 비서관이 오랫동안 홍보와 공보 두 업무를 함께하다 보니 같이 일했던 이들이 대거 들어갔다. 청와대 초기에는 홍보팀 출신의 합류가 저조했으나 지난해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춘상 전 보좌관 및 김우동 팀장과 함께 일했던 이들이 뒤늦게 합류했다. 또 다른 이유는 청와대는 급수마다 정원이 있다. 급수가 높아질수록 자리를 주기가 쉽지 않다. 공보단과 홍보팀 출신으로 실무를 했던 나이 어린 이들은 6급 이하 행정요원들로 대거 합류했다.

일각에는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이 청와대 실무진 인선을 다 짰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일한 이들이 청와대에 대부분 합류한 것은 맞지만 적어도 경선 때부터 같이 일해 온 이들로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경선 캠프부터 이재만 비서관과 함께 일한 정책팀은 이현진(총무비서관실) 권정욱 행정관(제1부속비서관실) 등 3명 정도다. 정호성 비서관과 함께 일한 메시지팀도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을 비롯해 6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12명으로 구성된 경선 정책메시지팀은 대선을 거치면서 한 명 정도 추가된 것 이외에는 낙오된 사람 없이 전원 당선인 비서실을 거쳐 청와대에 합류했다.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을 비롯해 경선 캠프에서 최경환 의원과 함께 일했던 총괄본부팀은 대선 때 종합상황실, 공보단 등으로 흩어졌으나 12명 중 9명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뒤늦게 대선 본선에 합류한 실무진은 상대적으로 청와대의 문턱이 높았다. 팀별로 허 비서실장과 이 정무수석을 통한 민원들이 쏟아졌지만 남은 자리는 많지 않았다. 종합상황실의 경우 실장과 단장이 청와대에 들어오지 못해 실무진은 40여 명 중 9명 정도만 청와대에 합류했다. 안종범 의원이 여의도연구소 직원과 함께 별도로 이끌던 정책팀에서 3명이 청와대에 들어왔다. 조직과 직능은 7명 정도 합류했는데 일한 인원수에 비해 청와대 입성률이 낮아 상대적으로 불만이 큰 편이다.

대선 캠프 출신 별정직의 경우 당 선거대책위원회와 실무 라인에서 명단이 올라갔고 박 대통령은 이를 정리해 허 비서실장에게 넘겨준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조직 구성 완료에 시간이 걸려 각 수석비서관이 허 실장으로부터 명단을 전달받은 행정관들에게 연락을 늦게 취해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 캠프 인사는 해당 비서관실에서 청와대 합류 통보를 늦게 받는 바람에 이미 다른 자리를 찾아 청와대에 못 들어갔다.

새누리당에서 파견을 나온 사람은 모두 16명이다. 당 파견은 새누리당에서 2배수의 후보군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그중에서 청와대가 골랐다고 한다.

당 파견자들은 박 대통령이 2005년 당대표 시절, 지난해 비상대책위원장과 대선후보 시절 비서실에서 손발을 맞춰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대거 합류했다. 써 본 사람을 쓴다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권순일 인사위원회 인사지원실 선임행정관은 후보 비서실 보좌역이었다. 의전비서관실의 윤선형 행정관은 대표, 비대위원장, 후보 시절 등 3차례 모두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당에서 파견된 16명 중 절반(8명)이 비서실 출신이다. 이재성 정무수석실 선임행정관을 비롯해 총선과 대선을 총괄기획한 당 기획조정국의 핵심 멤버들도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명박 대통령 초기 때는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이 캠프 출신 별정직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는 캠프 출신들의 인사를 챙기고 이들이 각 수석실에서 힘을 갖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청와대에서 정치권 별정직은 모두 숨죽이고 있는 상황이다. 별정직들을 모을 만한 구심점도 없다. 한 행정관은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캠프 출신끼리 같이 밥 한번 먹기는커녕 메신저나 카카오톡으로 서로 그룹을 지어 이야기 한번 해본 적 없다”며 “그냥 수석과 비서관들이 시키는 일에 묻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나마 부속실, 정무, 홍보 라인 등 별정직들이 모여 있는 비서관실은 약간 숨통이 트이지만 정책라인에 가 있는 이들의 경우 관료 출신들의 층층시하에 가려 정무적 판단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이른바 늘공(늘 공무원)과 어공(어쩌다 공무원)들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정민·이재명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