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학자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


중국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후비 유씨(柳氏)의 책봉조서다. 그 가운데 “그대(*왕건)는 장회(長淮)의 무족(茂族:번성한 명문의 족속)이며 창해(漲海)의 웅번(雄蕃)이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영토를 보유하고 충효의 절개로 중국의 교화와 풍속을 받았다.” (又詔曰 卿 長淮茂族 漲海雄蕃 以文武之才 控玆土宇 以忠孝之節 來化風)란 구절이 있다.

 

중국 학자에 따르면, 장회(長淮)의 ‘장’은 길다는 뜻의 수식어이며, ‘회’는 중국의 회하(淮河), 혹은 회하 유역이다. ‘창해의 웅번’은 바다 건너 커다란 번국의 제후라는 뜻이다.

 

송나라가 고려 성종을 책봉한 985년(성종4) 조서에도 “항상 백제(*삼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장회 출신인 너의 족속을 영원히 번창케 하라”(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고려사』권3·성종 4년(985) 5월조)란 구절이 다시 언급돼 있다.

 

중국 학자는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왕건(고려왕실)의 선조는 중국 회하 유역의 명문거족이고, 왕건은 회하 유역 한족(漢族)의 후예로 단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작한 왕건의 초상.

야성적이면서도 예민한 기운이 감도는 인물로 표현돼 있다.

 

중국 회하 명문거족의 후예인 왕건이 중국의 바다 건너편에 제후국 고려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또한 왕건 책봉조서에 나온 “(그대 왕건은) 주몽이 개국한 상서로움을 이어받아 그 나라의 군장이 되었고, 기자가 번국(蕃國)을 이룩한 자취를 밟았도다”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란 구절도 문제가 됐다.

 

왕건은 조선반도 역사상 주몽과 기자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온 통치자로서, 고려왕조의 군장이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한인(漢人)의 후예인 왕건이 세운 왕조이며, 기자조선 고구려에 이어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史長樂, ‘당(*후당)나라 명종이 밝힌 고려 태조 왕건의 족적(族籍)’ 『동북사지(東北史地)』2007년 3호(5-6월호)]. 최근 문제의 고구려비가 발견된 지린성에는 동북공정을 처음 발의한 지린성 사회과학원이 있다. 이곳에서 발간된 격월간 역사잡지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이다.

고려가 중국인의 후예가 세운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이런 황당한 주장을 새삼 거론한 건 ‘지안고구려비’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보고서가 고구려인의 기원을 중국 고대종족의 하나인 고이(高夷)족이라 주장한 사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은 비문의 건립 시기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필자는 다른 생각이다. ‘지안고구려비’를 계기로 중국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주장에서 한발 더 나가, 그 건국 주체까지 중국인의 후예로 보려는 방향으로 동북공정식 역사연구 방법론이 확장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문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문 내용과 관련 없는 고구려인의 뿌리를 건드린 중국 학자들의 보고서에서 동북공정의 또 다른 저의를 읽을 수 있다.

『고려도경』이 동북공정 오류 보여줘


고려가 기자조선과 고구려를 이어 건국됐다는 구절은 오히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려준다. 그런 사실을 기록한 후당의 조서야말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

 

동북공정의 논리에 경도된 중국 학자들에게나 세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읽힐 뿐이다. 그런 잘못된 시각만 걷어내면 위의 기록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도 고려는 우리나라 땅을 침식해 들어와서, 거란이 침략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고려의 서희(徐熙)는 “아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땅의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은 모두 우리 영토 안에 있다”고 반박했다.(『고려사』권94 서희 열전)

동북공정식의 논리라면, 서희의 얘기처럼 고구려 땅에 건국한 고려야말로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알려주는 더없이 좋은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영토와 의식의 차원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서희의 얘기를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서희뿐만 아니다.

 

고려·거란 전쟁 뒤 100년이 지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구려의 대족(大族)이다. 고씨(高氏)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후당 장흥(長興) 3년(932)에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후당) 명종에게 봉작을 청하자, (명종은 왕건을) 고려의 왕으로 봉했다.” (『고려도경』 권2 왕씨조(王氏祖))라고 했다.

 

당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릴 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왕건의 조상을 ‘고구려 대족의 후예’라 했다. 또한 고구려 국왕의 성씨인 고씨(高氏)를 이어 왕건이 국왕으로 추대됐다는 표현 속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반영돼있다. 이런 기록들을 무시하고, 왕건을 중국인(漢人)의 후예로 본 것은 사료 해석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다.

“고려왕실은 동이족 중 명문거족” 반론


그런 점에서 왕건의 출신을 ‘장회무족’이라 한 구절은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얻게 된다.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회수(淮水)라는 이름은 회이(淮夷)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이는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저명한 족속이다. ‘장회무족’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이라는 뜻이다.” (김상기, 『역주 고려사』, 동아대).

중국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동이족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나라와 항쟁하면서 점차 하류 지역으로 내려온다.

 

동남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동이족은 한(韓)·예(濊)·맥(貊)족으로 갈린다. 산둥 반도 쪽으로 이동한 동이족은 우이(嵎夷:청주(靑州)지역, 동부연안), 내이(萊夷:등주 지방), 회이(淮夷:강소성 양주(楊州) 일대, 회수 유역에서 산동성의 동남부 지역), 서융(西戎: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한 노(魯)의 동남지역)이 된다.

 

특히 회이와 서융은 서주와 춘추시대 한족(漢族)과 대립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돼 전국시대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서융은 기원전 515년에 오(吳)나라에 망한다.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동이족은 한족(漢族) 사이에 분산 배치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김상기,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하여』1954).

후당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후당(後唐:923~936년)은 13년짜리 단명 왕조다. 고려왕실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질 형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후당은 당시까지 중국에 전해오던 동이족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책봉조서에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가 책봉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려는 막바지에 이른 후삼국 통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후당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들과의 친근함을 강조하기 위해 왕건의 본관을 동이족이 번성했던 회수지역과 연결시켜 그렇게 작성했을 수 있다.

 

대체로 그런 유의 책봉조서는 상대국을 존중하여 그들이 보낸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오히려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중국에서 번성했던 모습을 확인한 셈이다.

 

현재 우리의 역사연구와 서술에서 이런 사실들이 강조되지 않았던 현실이 동북공정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준 건 아닐까 반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