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2

성읍(城邑)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개주(開州)라고도 하고, 송악군(松嶽郡)이라고도 하고,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다. 큰 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세웠으며 성벽을 쌓았는데,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한다. 백성들이 사는 집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었고, 크기가 단지 두어 칸에 지나지 않으며, 기와로 지붕을 이은 집은 겨우 10분의 2쯤 된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국성(國城)은 삼면이 산을 등지고 있는데, 북쪽이 가장 높고 가파르다. 시내가 있어서 굽이굽이 성안을 관통하여 흐르는데, 서남쪽이 하류이므로 조금 넓고 평평하다. 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서 쌓았으나 형세는 튼튼하고 장엄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당()나라 이전에는 평양에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고려는 여러 대에 걸쳐 겪은 병란에 징계되어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지금의 왕성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바,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둘레가 60리인데,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 지형에 따라 쌓았다. 성 밖에는 참호(塹壕)가 없고, 여장(女牆)을 만들지 않았다. 줄지어 잇닿은 집들은 행랑채와 같은 모습으로,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성에는 비록 병기(兵器)를 설치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는 하였으나, 산의 형세에 따라서 성을 쌓은 탓에 전체가 견고하지는 않다. 이에 낮은 곳의 경우는 적을 막아 낼 수 없는바,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능히 지켜 내지 못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받았음으로 도읍을 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형세를 살펴보아 장구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을 택한 다음에 자리 잡는다. ()나라 말기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도읍을 옮겼고, 후위(後魏)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에 도읍하였다. 당나라 이적(李勣)이 평양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점차 동쪽으로 도망쳐 옮겨 가 살았는데, 어디에 도읍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당나라 말기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바로 지금 도읍한 곳이다. 이곳은 대개 전에 개주(開州)였던 곳으로, 지금도 개성부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은 북쪽으로 숭산(嵩山)에 의지하였는데, 숭산은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산등성이에 이르러서 점차 나뉘어져 두 줄기가 되어 서로를 감고 돌았는바, 음양가들은 그것을 일러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줄기라고 한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으면 흥성하는데, ()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이다. 뻗어 내린 등성이가 서북쪽[亥方]으로 나갔으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쪽으로 돌아 나와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았다. 그 형상이 마치 물동이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산이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바깥에 또 하나의 안산이 있는데, 높이가 배는 높으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에 있다. 물은 숭산 뒤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방[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艮方]에 이르러 꾸불꾸불 흘러서 성안으로 들어온다. 광화문(廣化門)을 지나면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서 빠져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이 되는데, 금의 가장 좋은 방위는 동남쪽[]이므로,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마치 청룡(靑龍)이 시냇물을 마시는 형상과 같다. 그러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오래도록 역년(歷年)을 누리면서 항시 성조(聖朝)의 속국(屬國)이 됨 직하다.

원사(元史)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임금이 되어 숭악(崧岳)으로 천도한 자는 성이 왕씨(王氏)이고 이름이 건()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조선의 국성(國城)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려에서 주()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이 있어서 험고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숭악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천우(天祐) 초에 애꾸눈의 승려인 궁예(躬乂) -삼가 살펴보건대, 궁예(弓裔)의 잘못된 표기이다.- 가 이곳에 웅거하였다. 주량(朱梁) 정명(貞明) 5(919)에 회남(淮南)의 양융연(楊隆演)에게 들어와 조공하였다. 후당(後唐) 청태(淸泰) 말기에 왕건(王建)이 궁예를 시해하고 대신 임금이 되어 그대로 이곳에 도읍하고는 동경(東京)이라고 일렀는데, 개경(開京)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개성부라고 한다.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遼史)지리지에, “본디 예(), ()의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를 두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가 되었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이 되었으며, 요나라 말기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혹은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도경을 보면 군()은 개주의 동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성부는 신라 때에는 송악군(松嶽郡)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2(919)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가 되었다. 광종 때 개성부로 고쳤고 지금은 그대로 따랐다. 송사에서 이른 바 촉막군은 바로 송악군의 음이 변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개주가 바로 개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두 개의 주로 나누고서 또다시 요나라의 개주를 억지로 끌어다 붙였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요나라의 개주는 지금의 봉황성(鳳凰城) 등지로, 촉막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승천부(昇天府)

 

원사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5(1268) 7월에 조서를 내려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의 국왕이 승천부(昇天府)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대개 군사를 사열하고 배 만드는 일에 대해 효유하기 위해 간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승천부는 지금의 풍덕부(豐德府)이다.

 

 

이상은 경기(京畿)에 예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