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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2) - 일본서목록.동이총기(東夷總記).단군조선(檀君朝鮮)|역사 사료

솔롱고 | 조회 13 |추천 0 |2016.10.04. 00:35 http://cafe.daum.net/ko.art./otNC/469 

인용 서목 일본서(日本書) 목록(目錄)


효경범례(孝經凡例) : 등익근(藤益根)이 지은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記) : 일본 나라조[奈良朝]의 황족(皇族) 궁신(宮臣)인 사인친왕(舍人親王)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일본의 첫 관찬 사서(史書)이다. 총 30권이며, 이른바 ‘신대(神代)’ 때부터 지통천황(持統天皇)까지의 역사를 중국의

정사체(正史體)를 모방하여 한문(漢文)으로 기술하였다.

대의 일본 문화나 한일(韓日) 관계를 밝히고,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정치와 불교(佛敎)의 전래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기(日本紀) : 안마려(安麻呂)가 찬한 것이다.


속일본기(續日本記) : 관야조신진도(管野朝臣眞道) 등이 편한 것으로, 40권이다. 문무천황(文武天皇) 즉위년부터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10년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하였다.


일본일사(日本逸史) : 압우지(鴨祐之)가 찬한 것으로, 40권이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

으로,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11년 정월부터 순화천황(淳和天皇) 천장(天長) 10년 12월까지 기술하였다.

강호(江戶) 시대의 역사서이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 대장선행(大藏善行)이 찬한 것이다.


일본문덕실록(日本文德實錄) : 도량향(都良香)이 찬한 것이다.


제왕편년집성(帝王編年集成)


유취일본국사(類聚日本國史) : 관원도진(管原道眞)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200권이며, 별도로 목록 2권,

제왕계도(帝王系圖) 3권이 있는데, 지금은 산실되고 61권만 남아 있다. 《육국사(六國史)》에 실려 있는 기사를

신기(神祇), 제왕(帝王), 후궁(後宮), 인(人), 세(歲) 등의 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양안상순(良安尙順)이 찬한 것으로, 105권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모방하여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사물을 모은 다음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였다.

천부(天部), 천문(天文), 천상(天象), 시후(時候) 등 105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찬한 것이다.


무림전(武林傳)


정벌기(征伐記)


모리씨가기(毛利氏家記) : 모리대장(毛利大藏)이 찬한 것이다.


유마회연기(維摩會緣起)


시학침열(時學鍼焫) : 고지(高志)가 찬한 것이다.


백석여고(白石餘稿) : 실직청(室直淸)이 찬한 것이다.


조래집(徂徠集) : 물무경(物茂卿)이 찬한 것이다.


남포문집(南浦文集)


봉도유주(蓬島遺珠) : 조문연(晁文淵)이 찬한 것이다.


일본명가시선(日本名家詩選) : 등원병(藤元昺)이 찬한 것이다.


객관필담(客館筆談) : 목실문(木實聞)이 찬한 것이다.

[주C-001]일본서(日本書) 목록(目錄) : 이 해동역사(海東繹史) 인용 서목(引用書目)은 원문의 인용 서목에 역자가

해설을 덧붙인 것이므로 영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





제1권 세기(世紀) 동이총기(東夷總記)


○ 군자국(君子國)이 북쪽에 있으니, 관(冠)을 쓰고 검(劍)을 차며, 짐승을 먹는다. 두 마리의 문호(文虎)를 곁에 두고

있다. 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가 있어서 아침에 피어났다가 저녁에 죽는다.

 산해경(山海經)》


○ 군자국은 땅이 사방 1천 리이고 목근화(木槿花)가 많다. 《고금주(古今注)》

곽박(郭璞)이 찬하기를,
동방의 기운은 어질어서 / 東方氣仁
나라에 군자가 많다 / 國有君子
훈화초를 먹으며 / 薰華是食
문호(文虎)를 부린다 / 雕虎是使
본디 예양을 좋아하고 / 雅好禮讓
예는 사리에 따른다 / 禮委論理
하였다. 《산해경찬(山海經讃)》


○ 공자(孔子)가 구이(九夷) 지방에 살려고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누추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니, 공자가 말하

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누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논어(論語)》

○ 《설문(說文)》에는,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띄워 바다로 나가 구이(九夷)가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였다.” 하였다.

동이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군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이란 주나라 조선(朝鮮) 땅이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져서는 도를 미루어서 풍속을 교화시켰으며,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농사짓는 법과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지금까지도 그 백성들이 먹고 마심에 변두(籩豆)를 귀중
하게 여기고,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중국과 같다. 이는 기자가 교화를 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군자가 산다는 한 구절은 아마도 기자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공자가 자신을 가리켜서 군자라고 한 것은
아닌 듯하다.”하였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살펴보건대,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에 이르기를,
“동방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남자들은 모두 흰 띠에 검은 관을 쓰고 여자들은 모두 채색 옷을 입는다.
항상 공손하게 앉아 서로를 범하지 않으며, 서로 칭찬하고 헐뜯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보면 목숨
을 내던지면서까지 구해 준다. 얼핏보면 바보스러운 것 같은데, 그를 이름하여 ‘선인(善人)’이라고 한다.”
하였다. 선인과 군자국은 모두 우리나라를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당(唐) 현종(玄宗)이 신라(新羅)를 두고 ‘군자의 나라’
라고 하였고, 또 고려(高麗) 때에는 표사(表詞)에서 우리나라를 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라는 호칭이 있었는바, 공자께서 가서 살고자 하는 뜻을 가졌던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 동방(東方)의 오랑캐를 이(夷)라고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몸에 문신을 새겼으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자

가 있다. 《예기(禮記)》


○ 《이아(爾雅)》에는, “구이(九夷)ㆍ팔적(八狄)ㆍ칠융(七戎)ㆍ육만(六蠻)을 일러 사해(四海)라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설문(說文)》에, “이(夷)는 대(大) 자에 궁(弓) 자를 붙여 쓴 글자로, 동쪽 지방의 사람을 가리킨다.”
하였다.


○ 동이(東夷)에는 9종이 있으니,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

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가 그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중국 동북쪽 변경에 있는 자를 구이라고 하는데, 상고 시대 때 견이(畎夷)ㆍ우이(嵎夷) 바로 우이(于夷)이다.ㆍ방이
(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남이(藍夷) 바로 풍이(風夷)이다.
ㆍ양이(暘夷)라는 바로 양이(陽夷)이다. 칭호가 있었다. 《동래집(東萊集)》
구이를 또 현토(玄兎)ㆍ낙랑(樂浪)ㆍ고려(高驪)ㆍ만칙(滿飭)ㆍ부유(鳧臾)ㆍ색가(索家)ㆍ동도(東屠)ㆍ왜인(倭人)ㆍ
천비(天鄙)라고도 한다. 《풍속통(風俗通)》 ○ 삼가 살펴보건대, 부유는 바로 부여(夫餘)이다.
부여기(夫餘紀)에 상세히 보인다.
구이는 동쪽에 있다. 《이아주(爾雅註)》
동방의 오랑캐에는 9종이 있다. 《논어집해(論語集解)》
살펴보건대, 구이는 바로 동북 오랑캐 종족의 총칭으로, 우리나라 강역 안에 있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선유(先儒)들의 여러 가지 설이 있으므로 지금 모두 아울러서 기록하여 참고에 대비한다.


○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도록 하니, 바로 양곡(暘谷)이란 곳이다. 떠오르는 해를

공손하게 인도하여 봄농사를 일과로 삼게 하니 날은 춘분이오 별은 주조(朱鳥)라. 이로써 중춘(仲春)에 맞게 한다.

《상서(尙書)》


○ 살펴보건대, 《사기(史記)》에는 우이(嵎夷)가 욱이(郁夷)로 되어 있다.

우공(禹貢)에서 청주(靑州)에 대해 말하기를, “우이가 이미 경략하였다.” 하였으니, 우이는 청주에 살고 있었다.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동방 청주 우이의 지역을 다스리라고 명한 것이다. 해가 나오는 곳을 이름하여 ‘양명지곡
(陽明之谷)’이라 한다. 《사기정의(史記正義)》
살펴보건대, 자허부(子虛賦)에서는 제(齊)의 오른쪽은 양곡(暘谷)으로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고, 호위생(胡渭生)은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한서(漢書)》를 인용하여 우이를 조선 땅이라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는 말하기를, “만약 이 설과 같다면 우이는 바로 경상도 영해(寧海)나 혹은 강원도 강릉(江陵) 등의
지역으로, 요 임금이 도읍한 곳에서 불과 6, 7천 리밖에 안 되니, 어찌 멀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우(禹)가 9주를 평정한 다음 각각 그 직책으로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황복(荒服)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산융(山戎)ㆍ

발(發)ㆍ식신(息愼)을 무마하고, 동쪽으로는 장이(長夷)ㆍ조이(鳥夷)를 살펴보건대, 《사기정의》에는 조이(鳥夷)가

혹 도이(島夷)로 되어 있는데, 백제(百濟) 서남쪽의 바다에 있는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을 도이라고 한다.

다음에 상세하게 나온다. 무마하여 모두 순 임금의 공을 떠받들게 하였다. 《사기》

장이(長夷)니 조이(鳥夷)니 하는 것은, 지금 《대대례(大戴禮)》를 살펴보건대, 역시 장이(長夷)라고 하였는바,
장(長)은 바로 오랑캐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
조이(鳥夷)는 동북쪽의 백성으로 새와 짐승 고기를 나누어 먹는 자들이다. 《사기주(史記註)》


○ 기주(冀州)의 도이(島夷)는 가죽 옷을 공물로 가지고 오는데, 오른쪽으로 갈석(碣石)을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상서(尙書)》 ○ 삼가 살펴보건대, 도이가 《사기》에는 조이(鳥夷)로 되어 있다.

도이는 바다 섬에 사는 오랑캐이다. 기주의 동북쪽에 있는 나라인데, 요동이나 조선의 땅과 같이 청주(靑州)에 부용
(附庸)하지 않고 기주에 속한 자이다. 공물은 가죽 옷으로 바쳤는데, 《이아(爾雅)》에 이른 바 ‘동북방의 문피(文皮)’
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통감전편(通鑑前編)》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진(弁辰) 삼한(三韓)은 바로 기주를 설명하는 데에서 말한 도이로 가죽 옷을 입는 자들이
다. 《우공추지(禹貢錐指)》
살펴보건대, 기주의 동북쪽은 옛날에 동이의 지역이었으므로 우(禹)의 발자취가 갈석(碣石)을 오른쪽에 둔 곳까지
미쳤는데, ‘도이는 가죽 옷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도이는 바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형상이 섬과 같으므로 《한서》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는
월(越)의 형상이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요 임금과 순 임금 때 덕스러운 교화가 점차 퍼져 귀화하는
동이가 점차 많아지자 기주 동북쪽에 있는 의무려(醫無閭) 지방을 나누어 유주(幽州)로 삼았는데, 지금의 요하(遼河)
이서의 지역이고, 청주(靑州) 동북쪽 바다 너머의 지역을 영주(營州)로 삼았는데, 지금의 요하 이동의 지역이다.
이는 대개 후세의 기미주(羈縻州)와 같이 이맥(夷貊)을 붙잡아 매어 두기 위한 것이었다.
또 살펴보건대, 《관자(管子)》 경중편(輕重篇)에서, 발(發)ㆍ조선(朝鮮)의 문채나는 가죽 옷으로 내어 폐백을 삼는
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상서》 우공(禹貢)에서 ‘도이는 가죽 옷을 입는 자이다.’라고 한 것이다.


○ 바다와 대산(岱山) 사이에는 청주(靑州)가 있다. 우이(嵎夷)가 이미 평정하였다. 《상서》

청주(靑州)를 말하면서 먼저 우이를 썼는데, 다른 여러 주를 말하면서는 이런 예가 없다. 단지 청주에는 실로 바다를
건너서 동이(東夷)가 있으며, 또 아울러서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에 살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맞이
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앞에다가 써서 표출한 것이다. 《통감전편》


○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는 양주(揚州)가 있다. 도이(島夷)는 초복(草服)을 입는다. 《상서》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백제국(百濟國)의 서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큰 섬 15개가 있다. 모두 부락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데, 백제에 속하는
곳이다. 또 왜국(倭國)은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는데, 백제의 남쪽에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에 살고 있는데, 모두 1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다.”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양주(揚州)의 동쪽
에 있는 도이들이다. 살펴보건대, 동남쪽 오랑캐들의 초복(草服)은 갈월(葛越)이나 초죽(蕉竹) 등으로 만들어 입는데,
월(越)은 바로 모시이다. 《사기정의》


○ 하(夏)의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구이(九夷)를 가르쳤다. 《묵자(墨子)》
○ 후상(后相)이 원년 무술에 즉위하여 상구(商邱)에 살면서 견이(畎夷)를 정벌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2년에 풍이(風夷)와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 《상동》
○ 7년에 우이(于夷)가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견이가 와서 조공하였다. 《통감전편(通鑑前編)》

옛날에 하후씨(夏后氏) 태강(太康)이 나라를 잃자 사이(四夷)가 모두 배반하였다. 후상이 즉위함에 미쳐서 견이를
정벌하였는데, 7년이 지난 뒤 와서 조공하였다. 《후한서》

○ 소강(小康)이 즉위하고 2년이 지난 뒤 방이(方夷)가 와서 조공하였다. 《죽서기년》

○ 살펴보건대, 《회기(會紀)》에는 원년의 일로 되어 있다.
○ 제저(帝杼) 8년에 살펴보건대, 《통감전편》 및 《회기》에는 5년으로 되어 있다. 동해(東海) 및 삼수(三壽)를 정벌

하여 여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꼬리가 9개였다. 《상동》
○ 제분(帝芬) 3년에 동쪽의 구이(九夷)가 와서 복속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사기》 본기(本紀)에는 제분이 제괴(帝槐)로 되어 있다.
○ 후망(后芒)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뒤 구이가 와서 조공하였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후설(后泄) 21년에 살펴보건대, 후설은 16년간 재위하였는데 이곳에서는 21년이라 하였으니, 상세하지가 않다.

《통감전편》과 《회기》에는 모두 원년 을사로 되어 있다.

견이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를 명하였다. 《죽서기년》

육이(六夷)가 와서 복속하였다. 이에 비로소 작명(爵命)을 가하였다. 《노사(路史)》
상(相)이 즉위하여 견이를 정벌하였다. 설(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작명을 가하니, 이로부터 복종하였다. 《후한서》


○ 후발(后發)이 즉위하였다. 원년에 제이(諸夷)가 왕문(王門)에 조공하면서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죽서기년》
○ 제계(帝癸) 3년 갑오에 삼가 살펴보건대, 《회기》에는 갑오가 을사로 되어 있다.

견이가 기(岐) 땅에 들어와서 반란하였다. 《상동》
○ 탕(湯)이 걸(桀)을 정벌하려고 하자, 이윤(伊尹)이, 공물을 저지하고 줄여서 그가 하는 짓을 보기를 청하였다.

걸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안 됩니다.

걸은 아직도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죄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탕이 걸에게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다음해에 또 공물을 바치지 않자 걸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이윤이, 이제 된다고 말하였다.

탕이 이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다음 걸을 남소(南巢)에다가 옮겨 살게 하였다. 《설원(說苑)》

성탕(成湯)이 즉위하여 견이를 정벌하였다. 이에 앞서 후걸(后桀)이 난정(亂政)을 하자 견이가 빈(邠)과 기(岐) 땅
사이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성탕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고 그 지역을 도로 빼앗은 것이다. 《후한서》

○ 태무(太戊) 61년에 동쪽의 구이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 《죽서기년》
○ 중정(仲丁)이 즉위하였다. 6년에 남이(藍夷)를 정벌하였다. 《상동》
○ 하전갑(河亶甲) 4년에 남이를 정벌하였다. 《상동》


○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드디어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에 길을 통하였다. 《상서》

해동의 여러 오랑캐들이 무왕(武王)이 상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성왕(成王)이 정사를 하자 반란을 일으켰
는데, 정벌하니 복종하였다. 《상서전(尙書傳)》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양이(良夷)로, 재자(在子)이다. 《급총주서(汲冡周書)》

양이는 바로 낙랑(樂浪)의 오랑캐로 기이한 짐승을 공물로 바쳤다. 《급총주서주(汲冡周書註)》

○ 주공(周公)이 은(殷)을 이기고 나서 상합(商蓋)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공 갑(辛公甲)이 말하기를, “큰 나라는 공격하기가 어렵고 작은 나라는 복종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여러 작은 나라를 복종시켜서 큰 나라를 위협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구이(九夷)를 공격하니, 상합이 복종하였다. 《한비자(韓非子)》


○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성왕(成王)이 서자 상(象)이 동이(東夷)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이에 주공(周公)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축출하였다. 강남(江南)에 이르러 삼상(三象)을 만들어서 그 덕을 기렸다.” 하였다.


○ 성왕이 제후들과 기양(岐陽)에서 맹세하면서 초(楚)를 형만(荊蠻)으로 삼은 다음 띠풀을 엮어서 자리를 만들고

망표(望表)를 세워서 표시를 하고는 선모(鮮牟)와 더불어 횃불을 지키게 하였다. 《국어(國語)》

선모(鮮牟)는 동이의 나라이다. 《국어해(國語解)》


○ 제(齊) 환공(桓公) 23년에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영지(令支)를 제압하고 고죽(孤竹)을 참수하자 동이

들이 비로소 복종하였다. 《책부원귀》

제나라가 바다를 건너서 동쪽으로 구이(九夷)와 통하였다. 《박물지(博物志)》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쪽의 오랑캐를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저(柢)이니,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
하여 만물이 땅에 뿌리박고 자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해서 올바른 도리로 거느리기가 쉽다.
이에 심지어는 군자(君子)가 죽지 않는 나라까지 있다. 이(夷)에는 아홉 종족이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자 한 것이다.
옛날에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의 지역에 살게 했는데, 양곡(暘谷)은 대개 해가 돋는 곳이다.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동이들이 반란하기 시작했다. 소강(小康)이 즉위한 이후로는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어 드디어 왕의 궁문에 나와서 복종하면서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桀)이 폭정을 하자 여러 오랑캐들이 내침하였는데, 은(殷)의 탕(湯) 임금이 혁명을 일으켜 정벌해서 안정시켰다.
중정(仲丁)에 이르러서 남이(藍夷)가 침략해 왔다. 이로부터 3백여 년간 혹 복종하기도 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무을(武乙)이 쇠약하고 피폐해지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졌다. 이에 드디어 회(淮)ㆍ대(岱) 지방으로 옮겨오더니, 점차
중원 지방에 살게 되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멸망시키자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石砮)와 고시(楛矢)를 바쳤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는 이적(夷狄)들을 불러들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를 정벌
하여 드디어 동이가 평정되었다. 강왕(康王) 때에 숙신이 다시 왔다. 그 뒤에 서이(徐夷)가 왕호(王號)를 참칭하고는
구이를 이끌고 주나라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黃河) 가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들의 기세가 한창 치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쪽 지방의 제후들을 나눈 다음 서언왕(徐偃王)에게 이들
을 다스리게 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하자 회이(淮夷)가 쳐들어왔다. 이에 왕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명하였는데,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유왕(幽王)에 이르러서 유왕이 몹시 음란하자
사방의 오랑캐가 번갈아 쳐들어왔다.
제(齊) 환공(桓公)에 이르러서 패업(霸業)을 이루어 이들을 퇴각시켰다. 초(楚)나라 영왕(靈王)에 이르러서 신(申) 땅
에서 회맹(會盟)할 때 역시 와서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월(越)나라가 낭야(瑯琊)로 옮겼을 때 이들이 월나라와
함께 전쟁을 일으켜, 드디어 중국을 업신여기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였다.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들이 모두 흩어져서 민호(民戶)가 되었다.
진섭(陳涉)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사람 위만(衞滿)이 난을 피하여 조선(朝鮮)으로 가서 그곳의 왕이
되었는데, 1백여 년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멸망시켰다. 이에 동이가 비로소 상경(上京)과 통하게 되었다. 《후한서》

넓은 골짜기와 큰 냇물 간에는 제도가 서로 다르고 사람들이 그 사이에 살면서는 풍속이 서로 달라, 좋아하는 것이
같지 않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법이다.
성인이 이를 인하여 가르침을 베풀었는바, 이는 그들의 뜻을 서로 통하게 하고 풍속을 서로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구이(九夷)들이 사는 곳은 중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천성이 유순하여 포악한 기풍이 없다.
이에 아득히 먼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올바른 도리로 이끌기가 쉽다.
하(夏)나라 때에는 가끔씩 와서 조회하기도 하였다. 기자(箕子)가 조선 땅으로 피하여 감에 미쳐서 비로소 팔조(八條)
의 금법(禁法)을 만들었는데, 소략하나 빠뜨린 것이 없었고 간략하나 오래 시행할 수가 있었는바, 그 교화에 감화된
바가 천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지금 요동의 여러 나라들이 혹 의복의 제도에 있어서 관면(冠冕)을 사용하기도 하고, 음식을 먹을 때 조두(俎豆)와 같
은 그릇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경술(經術)을 숭상하고 문사(文史)를 좋아하여 중국의 서울로 유학 오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혹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자들도 있다.
참으로 선철(先哲)의 유풍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처럼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말이 믿음직하고 행실이 독실하면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그들의 풍속 가운데서 채납할 만한 것이 어찌 고시(楛矢)를 바친 그 일뿐이겠는가.
《북사(北史)》


부록(附錄)

○ 청구국(靑邱國)이 그 북쪽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오곡을 먹으며 사백(絲帛)을 입는다.

혹은 조양(朝陽)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 청구(靑邱)의 나라에는 여우가 있는데, 꼬리가 아홉 개다. 태평 시절에는 나와서 상서를 알린다. 온순하고 소박한

백성들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영토(嬴土)의 나라이다. 영(嬴)은 비옥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 《이상 모두 산해경》
○ 찬하기를,

청구에 사는 기이한 짐승 / 靑邱奇獸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라네 / 九尾之狐
도가 있는 세상이면 나타나는데 / 有道翔見
나타날 땐 글을 물고 나타난다네 / 出則銜書
상서로움을 전문(篆文)에 나타내어 / 作瑞周文
신령스러움을 표시한다네 / 以標靈符

하였다. 《산해경찬》


○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청구에서 죽이고 강고곡(棡鼓曲) 10장을 만들었다. 《귀장(歸藏)》

○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에 도착해서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이로써 만신(萬神)을 불렀다.” 하였다.

○ 《회남자(淮南子)》에는, “요 임금이 예(羿)를 시켜서 청구의 못에서 대풍(大風)을 돌리게 하였다.” 하였다.

○ 《여씨춘추》에는,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큰 나무가 있는 곳, 구진(九津)에서 해가 떠오르는 청강(靑羌)의 들판,

나무가 모여 있는 곳, 하늘까지 닿은 큰 산, 조곡(鳥谷) 청구(靑邱)의 향(鄕), 흑치(黑齒)의 나라에 이르렀다.” 하였다.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청구는 고려의 경계 안에 있다. 자허부(子虛賦)에, ‘가을에 청구에서 사냥한다’

하였으니, 대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복건(服虔)이 말하기를, ‘청구국은 해동 3백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고,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청구 칠성(靑邱七星)은 진수(軫宿)의 동남쪽에 있는데, 청구는 만이(蠻夷)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토벌하고는 청구도 행군총관(靑邱道行軍摠管)을 두었다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우(禹)가 수해(竪亥)에게 청구의 북쪽을 명하였다.” 하였고, 《회남자》에 말하
기를, “청구는 제(齊)의 바다 바깥에 있다.” 하였으니, 청구라는 것은 대개 동방에 있는 나라이다.
《천문유초(天文類抄)》에 “청구 칠성은 동방 삼한(三韓)의 나라를 주관한다.” 하였으니, 이것 역시 지역으로 이름한
것이다.

한안(韓雁)은 바다 가운데 도주(都州)의 남쪽에 있다. 《산해경》
○ 한안과 시구(始鳩)는 바닷가에 있다. 《산해경찬》
《산해경》에서 이른 바 한안은 바로 지금의 요동인 듯하다. 《산해경석의》

 

[주C-001]동이(東夷) : 동이라고 하는 명칭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동방 민족, 즉 산동반도(山東半島)와 회하(淮河)

유역 및 발해(渤海) 연안과 그 이동(印)의 민족을 지칭하고 있다. 대개 한(漢)나라를 전후로 하여 동이의 지리적인

위치가 약간 다른데, 은주(殷周) 시기의 동이는 산동반도 및 회하 유역의 민족을 지칭하였고, 그 후 전국 시대와 한(漢)

나라 이후의 동이는 발해 연안 내지 그 이동의 여러 민족을 지칭하였다.
[주D-001]문호(文虎) : 얼룩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말한다. 최남선(崔南善)은 군자국의 이러한 정경을 우리 민속 가

운데 산신(山神)이나 혹은 독성(獨聖)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02]훈화초(薰華草) : 무궁화 꽃을 말한다.
[주D-003]자허부(子虛賦)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부이다.
[주D-004]발(發)ㆍ식신(息愼) : 이 부분이 《관자》 권23 규도편 경중갑에는 ‘발조선(發朝鮮)’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발(發)의 조선(朝鮮)’으로 해석하는 설과 ‘발과 조선’으로 해석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 경인문화사에서 영인한 《표점 교감 사기》에는 ‘발’과 ‘식신’을 두 종족으로 구별하여 해석하였다.

김정학(金廷鶴)은 “숙신과 조선은 고대의 음이 약간은 차이가 있으나, 《관자》에서는 ‘발ㆍ조선’이라고 한 것을 《사기》

에서는 ‘발ㆍ식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같은 부족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숙신과 조선을 동일한 부족

으로 보았으며, 발과 식신을 두 개의 부족으로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다.《한국 상고사의 제문제, 정신문화연구원, 1987》

천관우(千寬宇)는 “《일주서(逸周書)》의 ‘발인(發人)ㆍ녹인(鹿人)’의 예로 보아 ‘발조선’도 역시 ‘발과 조선’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여 두 종족으로 보았다.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77쪽 주》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옛날 책들에 고조선족을 ‘발조선’

이라 한 것은 고조선족을 박달족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박달에서의 ‘박’은 백악산(白岳山)이나 태백산(太白山)에서의 백(白)과 같은 뜻으로서 그 어원은 ‘밝다’이며, ‘밝’은 ‘박’

이나 ‘발’로 발음된다.

따라서 ‘발조선’의 ‘발’은 고조선족이 자기족을 표시하여 부르던 박달에서 온 이름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여 ‘발조선’을

하나로 보았다.《조선전사 권2 고조선사》 이 ‘발식신’ 부분은 《관자》의 ‘발조선’ 부분과 함께 신채호(申采浩) 등 ‘막ㆍ

진ㆍ번 삼조선(莫眞番三朝鮮)’ 논자들의 중요한 논거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북한의 이지린은 “어떤 자는 ‘발ㆍ조선’

을 ‘발조선’으로 해석하여 조선을 국호가 아니라, 그것이 마치 종족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12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발과 식신으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주D-005]갈석(碣石) : 갈석은 조선 후기 실학파(實學派) 이래로 ‘조선’과의 관련 가능성이 지적되어 왔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큰 혼란이 있어 왔다. 《통전》에는 고구려 구계(舊界)인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

(灤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을 열거하고 있으며, 국내

에는 갈석산이 한반도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예로부터 있어 왔고, 또 그와는 반대로 낙랑군

이 본래부터 평양이 아니라 난하 하류였다고 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천관우,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20

쪽 주》 북한의 이지린은 산해관(山海關) 부근이라 하였다.《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210쪽》
[주D-006]의무려(醫無閭) : 산의 이름으로, 광녕우위(廣寧右衞)의 서쪽 5리에 있는 산이며, 사산(蛇山), 반산(盤山),

첨산(添山), 백운산(白雲山), 안산(鞍山) 등 12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讀史方輿紀要 卷37 山東條》
[주D-007]성주(成周)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전국 시대 때에는 낙양(洛陽)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주D-008]기양(岐陽)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부풍현(扶風縣) 서쪽에 있던 옛 지명이다.
[주D-009]산융(山戎) : 춘추 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방 천안현(遷安縣)의 산간 지대에 살던 오랑캐의 족속

으로, 바로 후대의 흉노족(凶奴族)을 가리킨다.
[주D-010]영지(令支) : 춘추 시대 때 산융(山戎)의 속국(屬國)으로 있던 종족이다.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 일대에서

살았다.
[주D-011]고죽(孤竹) : 상(商)나라 때의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에서부터 열하성(熱河省)

조양현(朝陽縣) 일대에 있었다.
[주D-012]숙신(肅愼) : 만주 동쪽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고조선 때 만주 동쪽에서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때 종족의 일부가 병합되었고, 광개토왕 때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숙신의 후예로 추정되는

말갈(靺鞨), 읍루(揖婁)의 종족이 일어났다. 식신(息愼), 직신(稷愼)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13]석노(石砮)와 고시(楛矢) : 석노는 돌화살촉이며, 고시는 고나무로 만든 화살이다. 고나무는 백두산에서

나는데, 견고하고 곧아서 그것으로 화살대를 만들면 습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석노와 고시는 모두 고대에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공물로 바쳤다.
[주D-014]회이(淮夷) : 주나라 때 회수(淮水)의 남쪽과 북쪽에 있던 동이(東夷)로, 서이(徐夷)와 함께 산동(山東) 해안

지역에 할거하면서 노(魯)와 주(周)를 침공하는 일이 잦았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소공(召公)이 보(保)가 되고

주공(周公)이 사(師)가 되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정벌하였다.” 하였고,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관숙(管叔),

채숙(蔡叔), 무경(武庚) 등이 과연 회이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성왕(成王)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정벌하였다.” 하였다.
[주D-015]위만(衞滿) : 《사기》에는 만(滿)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만(魏滿)으로 되어 있다.

위(衞)가 만(滿)의 씨성(氏姓)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이를 씨성으로 간주하여 그의 나라를 위씨조선

(衞氏朝鮮)이라 명명하고 있다.
[주D-016]팔조(八條)의 금법(禁法) : 이른바 기자(箕子)가 지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법률을 말한다. 고조선에는 일찍

부터 8개의 금법이 있어 각종 범죄를 처벌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재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相殺償以命],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 보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相盜者沒爲其家奴婢]

는 3개 조항만이 전하고 나머지는 전하지 않는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 권2 제국부(諸國部)

본국조(本國條)에서 “오륜(五倫)을 합해 8조목인 듯하다.” 하였고,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기자조

(箕子條)에서 “팔조는 아마도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였다. 이병도(李丙燾)는 “오늘날 기자의

동래(東來), 동봉설(東封說)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볼 때 소위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의 범금팔조(犯禁八條)란 것은

기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의 본유본래(本有本來)의 법금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

史硏究, 박영사, 1976, 58쪽》 북한(北韓)의 이지린은 “범금팔조는 고조선 국가가 실시했던 역사적 사실이며, 기자가

팔조의 금법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은 고조선의 범금팔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반고(班固)의 주관인 것이다.”

하였다.《이지린,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353쪽》
[주D-017]치우(蚩尤) : 황제(黃帝) 때의 제후(諸侯) 이름으로, 《상서(尙書)》 공안국전(孔安國傳)에서는 옛 구려국

(九黎國)의 임금이라고 하였고, 《예기》 정현(鄭玄)의 주(注)에서는 삼묘(三苗)를 치우라고 하였으며, 응소(應邵)는

옛날의 천자(天子)라고 하여 그 설이 서로 다르다. 《사기(史記)》 오제기(五帝紀)에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제후들에게서 군사를 징발하여 치우와 더불어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하였다.
[주D-018]강고곡(棡鼓曲) :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구당서(舊唐書)》 음악지(音樂志)에는 “진뢰경(震雷驚),

맹호해(猛虎駭) 등 10개의 곡이 있는데, 그 내용을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주D-019]풍산(風山) : 청구국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이곳에는 항상 뇌성벽력이 치며, 자부궁(紫府宮)이 있어 천진

선녀(天眞仙女)가 그곳에서 노닌다고 한다.
[주D-020]수해(竪亥) : 하(夏)나라 사람으로 걷기를 잘했던 사람의 이름이다. 우 임금이 그를 시켜서 거리를 재게

하였다 한다.
[주D-021]한안(韓雁) : 명나라 왕숭경(王崇慶)은 지금의 요동 부근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보았으며, 최남선(崔南善)

은 한안이 한(韓)ㆍ한(寒) 등의 글자와 마찬가지 글자로, 동이(東夷)의 국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주D-022]시구(始鳩) : 옛 나라의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새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제2권 세기(世紀) 단군조선(檀君朝鮮) 



살펴보건대,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조(朝)의 음은 조(潮)이고 선(鮮)의 음은 산(汕)이다.

조선에는 산수(汕水)가 있으므로 그렇게 명한 것이다.” 하였고,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이르기를,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달아나자 무왕(武王)이 이를 듣고는 그곳에다 봉(封)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기자 이전에도 조선이라는 칭호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단군 시대 때의 조선을 칭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분명하지가 않다. 《여사(麗史)》에서 단군 시대를 전조선(前朝鮮)이라고 하고 기자 시대를 후조선이라 하였

기 때문에 지금 그대로 따른다.


○ 당요씨(唐堯氏)가 천하의 임금으로 있은 지 29년째인 무진(戊辰)에 단군씨(檀君氏)가 서서 처음으로 도읍을 다스

렸는데, 평양(平壤)에다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환웅(桓雄)은

천신(天神) 환인(桓因)의 아들이다. 태백산(太白山)의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熊女)와 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박달나무 아래에서 낳았으므로 인하여 단군이라고 하였다. 단군의 이름은 검(儉)으로, 나면서부터

신명하여 구이(九夷)가 임금으로 삼았다. 은씨(殷氏) 무정(武丁) 8년 을미에 단군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1천 48세였다. 《조선세기(朝鮮世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사책에서 말하는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가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군이 맨 먼저
났으니 반드시 그 사람에게는 신성한 덕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에 신성한 사람이 태어남에는 참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특이한 일이 있기는 하나, 어찌 이처럼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겠는가.
고기(古記)에 나오는 ‘환인(桓因)’이니 ‘제석(帝釋)’이니 하는 등의 말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말인바, 신라
(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비장(祕藏)되어 있었던 국사(國史)가 모두 불타 남아난 것이 없게 되고,
승려들이 기록한 것만이 암혈 속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이에 역사를 쓰는 자들이 기록할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나머지 간혹 이를 정사(正史) 속에 편찬해 넣었다. 그런데 세대가 오래될수록 그 말이 사실로 굳어져서 중국
에까지 흘러들어가 드디어는 인현(仁賢)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말이 괴이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또 살펴보건대, 《회기(會紀)》에 상(商)나라 무정 8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자년으로 당요 무진년부터 무정 갑자년
까지는 1천 17년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의 나이가 1천 48년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 설이
이치에 맞지 않아 상고할 수가 없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시에,
몇 대를 이어왔는지 모르겠으나 / 傳世不知幾
지난 햇수는 천년이 넘더라 / 歷年曾過千
하였는데, 이는 대개 1천 17년으로 세대를 전한 햇수를 삼은 것으로, 이 설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