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지를 세상에 알린 박금 선생_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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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를 세상에 알린 박금 선생_1편]

* 박제상의 55세 후손 박재익 '징심록' 연구 '요정징심록연의' 완성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43891
 
- 글쓴이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

* 마고신화의 뿌리를 찾아서 4

앞서 근대 이전의 시기 영해박씨가『징심록』을 전수해 갔던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근대 이후 박재익에 의해『징심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문천의 박씨 일족은 양산군수를 지낸 문홍 이후 지방의 유림세력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문홍의 직계로 박제상의 52세 박인록朴寅祿, 53세 박래봉朴來鳳, 54세 박진영朴璡榮이 있다.

박진영(1871~1961)은 고종대 교원敎員을 지냈으며
금호대서당錦湖大書堂(문천 박씨의 사숙私塾)의 마지막 선생으로
윤해尹海 외 백여명의 문인으로 거느렸다고 하니
문천 일대의 명망 있는 유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일 정씨와의 사이에 재익載益, 재풍載豊 2남과 2녀를 두었다.

박진영의 맏아들인 박재익(1895~1969)은
박제상의 55세로 자는 광보光甫, 호는 금당琴堂(또는 금당錦塘),
후에 금錦으로 개명하여 주로 박금朴錦으로 알려졌다.

문천에서 태어났으며 가학을 익혔고 정규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다.
20대에 청년운동, 문예운동을 하다가
1924년(30세) 무렵 원산의 동아일보 지국에 입사하여,
1928년(34세) 원산지국장을 거쳐 동아일보 본사로 옮겨 사회부 기자를 지냈다.
1929년(35세) 원산대노동쟁의元山大勞動爭議와 1931년(37세)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만보산 사건 취재 시에는
사태수습에 공을 많이 세워 당시 중국 국민정부의 주석이던 장개석으로부터
그가 입고 출정한 중산복中山服과 친서 1통을 받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만보산 사건은
장춘長春 근교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규로
일제는 이를 허위과장 보도함으로써 조‧중 갈등을 일으켜 대륙침략의 구실로 삼으려 하였다.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동아‧조선 양 신문사의 노력으로 사태는 원만히 수습되었는데,
특히 동아일보 기자 박금의 공이 많아 장개석은 화상華商 궁학정宮鶴汀을 통해 노고를 치하하였다.

1934년(40세) 동아일보 퇴사 후에는 연구와 교육사업에 몰두하였으며
1941년(47세) 2차 대전이 일어나자 향리인 문천 금호錦湖에 칩거하여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금호이학원) 및 선사학회연구원先史學會硏究院을 설립, 가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5년(51세)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이 주도한 문맹퇴치운동인 성인교육협회총본부成人敎育協會總本部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47년(53세)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1949년(55세)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에 이름을 올리면서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56세) 한국전쟁으로 울산에 피난한 이후에는 사회활동을 접고 가학 연구에 전념하여
1953년(59세)『연의』를 완성하였으며
1958년(64세)에는『영해박씨천현록寧海朴氏闡顯錄』을 편찬하고
영해박씨 세보(『영해박씨대보』) 편찬을 주도하였다.

1967년(73세)까지도『신라초대오왕계박씨선원세보新羅初代五王系朴氏璿源世譜』를 편찬하는 등 연구를 계속하다
1969년(75세) 사망하였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