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벽랑국(碧浪國) 찾기

                 탐라국(제주도)의 고대사는 왜곡되었다.

                                                                                                                                                

                                                                                  글:구산  장  동  균(九山 張 東 均)

                                                               


     차    례

♣별지 영주산(瀛洲山)의 설화소개                                                     

[1]본문 개요

[2]무너지는 한반도의 서기 전의 건국설

[3]고지도에서 낙랑조선과 낙랑군(海) 찾기

[4]준왕의 망명과 낙랑국

[5]낙랑조선과 삼한은 해양국가

[6]낙랑고분 출토품들은 은나라와 낙랑조선의 합작품

[7]폐망한 낙랑국의 난민들은 어디로 갔는가.

[8]제주도 선주민은 선비족 아닌 낙랑조선족

[9]사료로 보는 삼신산과 삼한의 위치

[10] 맺음말



♣영주산(瀛洲山)의 설화


▼아래 한라산은 '동영주'란 이름으로 기록이 전해온다.어떤사람들이 언제쯤 이름을 옮겨온 것일까.그 베일을 벗겨본다.

영주산(瀛洲山) (한라산 전경)


영주산이란 기록은 중국의 ≪사기 史記≫<봉선서>에서 유래한다. 바다 가운데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 등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진시황(秦始皇)은 서기 전 218년경 역사(力士) 서불(徐市)에게 그 약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으나  2차의 출동끝에 결국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의 설화는 영주산이 중국의 설화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은 삼신산은 발해해협에 있던 고조선의 영지였고,이상향의 요람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고적편 ‘고기(古記)에는  한라산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고 하였고, 한라산을 가리켜 영주산이라 명기한 최초의 기록이다. 라고 하였다.<탐라지> ‘김치의 유 한라산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영주산이 곧 한라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 영주산 이야기는 잇달아 등장한다




[1] 개요(槪要)

  세간에는 수천년 동안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니 그건 당신도 나도 알고 있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다. 갈홍의 《신선전》에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뜻인데, 이 말은 바로 발해(渤海)가 수몰되었다는 말이다. 부상(扶桑)이 있는 곳은, 발해(渤海)의 해중(海中)이었고 그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며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을 일컫는다고《사기》<봉선서>는 기록  하고 있다.

 

 그 옛날 발해(渤海)는, 넓은 평원에 있었던 대동이(大東夷)의 거주지였다가 약 5천 년 전부터 서서히 뻘로 변해갔으며, 그래도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등은 높은 지대였으므로 육지(태백산)가 섬으로 변할 때까지 별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후 지진으로 육지에서 16개의 섬으로 변했으며(《중국고금지명 대사전》1931년판 장려화...) 오랜 세월 동안 신비한 신선들의 세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논어》<자한편>에서 동이는 예로부터 군자국 예의지국이라 하여 그 문화가 중원문화를 능가하게 되므로 공자께서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 나라를 떠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려고 하니 나를 따라올 자는 아마도 자로(子路)일 것이다 라며 동이를 이상국가로 그리고 있다. 노나라 (산동반도)에서 땟목을 타고 건널 수 있는 동쪽바다가 어디이겠는가.하지만 행여 이곳을 한반도로 속단하는것은 금물이다.


  뗏목은 급류에 필요하므로 산동반도 동쪽바다에서 급류가 흐르는 수도를 건너면 그곳에 이상향 군자국이 있다는 말이다. 그 험한 물(험독)이 어디일까?

《사기》<봉선서>에서 사마천은 삼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길이 멀지 않다고 하였으며, 선인(仙人)들이 바람을 일으켜 배를 멀리 보냈다고 하였다.


이것은 십주기(十州記)에서 기록한 " 물살이 크고 거칠며 무서운 파도가 친다. "한 것과 일치한다. 위만이 이곳에서 조선을 약탈하여 준왕의 뒤를 승계한것이다. 이곳을 《사기》는 낙랑군 험독이라 하였고 성 이름을 왕험성(王險城)이라 하였다.


  발해는 원래 '뻘밭'을 뜻하는 싯담어이다. 《동국정운》에 기록한 발(渤)자의 정확한 발음은 '뻘'이다. 즉, 갯뻘을 말한다. 또한 싯담어 사전에는 대평원의 뜻도 있다.《관자》 <규도편>에서는 이를 발조선(發朝鮮)이라 하고, 제나라에서 거리가 八千 리라 하여 혼란을 야기시켰으나 실재의 거리는 바다를 경계로 팔십 리다. '十'字를 '千'字로 왜곡한 징후가 짙다. 또한 평양(平壤)이란 지명중 '壤'字는 뻘을 뜻한 무괴유토(無塊柔土)라는 뜻이다. 평양은 뻘밭이 평원을 이루는 섬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곳이 결정적으로 물에 잠기게 된 첫 번째 기록은 단군조선이 개국한지 37년(甲辰 年)이 되던 해에 일어났던 대홍수 였고, 그 후로 수차의 지진을 거쳤지만 당나라가 평양성을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이후에 일어났다고 하는 지진은 낮은지대를 수몰시키는 참상을 불러왔던것이다.《대청일통지》 이렇듯 고조선이 바다에 있었다는 중국 측의 기록은《산해경》과《고려도경》<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곳을 곽박은 주석에서 낙랑군이라고 하였고,청나라 오임신은 《산해경 광주》에서 '낙랑조선은 단군조선이다.라고 하였다. 신시를 건국한 초대 커발한 환웅은 삼신상제님의 명을 받고 무리 3천을 이끌고 동방 태백으로 이주하여 신시배달국을 세운곳이 이곳이다.인류최초의 나라를 세우고, 인류의 태초 문화를 열어갔던 이들은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즉 신(神)과 대화하고 그 명을 받들어서 세상을 교화(敎化)하고 치화(治化)하였던것이다.


그 최초의 장소를 삼신산이라 부르고 후에 사문도(沙門島)라 불렀다. 인류의 태고시대를 수놓았던 이 샤먼의 문화가 전세계로 흘러갔다. 동북아에서 9천년전에 비롯된 이 샤먼은, 한자로는 살만(薩蔓)·찰만(札蠻)·철만(撤蠻)·산만(珊蠻) 등으로 음역되어 사용되어 졌다. 샤먼은 우상이나 사(祠)를 의미하는 세멘(Schemen)의 페르시아어, 팔리어의 사마나(Samana), 대승불교의 사문(沙門) 등으로 전해졌다.

▲ 일출을 경배하는 원주민들  (장도(사문도) 역사박물관 소장)

모닥불을 피어놓고 일출을 경배하는 장면은 그 복장이 인디언들과 흡사하다.

샤먼의 원형을 보는듯 하다.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에 보이는 "삼마는 우리말로 승려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고 하는 구절의 '삼마'는 '샤먼'과 어원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불교의 사문만이 아니라 사미도 또한 우리말 “삼마"“샤먼”에서 흘러간 것이다.따라서 사문도(沙門島)는 샤먼이즘의 최초 발상지가 되는것이다.





 ▼낙랑조선 (한무제 이후 낙랑군)은 동해에 있었다고 전하는산해경 해내경》

《산해경》에서도 조선의 위치를 동해(황해)의 내해와 북해(발해)의 주변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의 사료에 기록되는 '동해'는 한반도의 서해를 말하고 북해는 발해를 말한다.




국제 관광도시로 각광을 받고있는 제주특별자치도는 그 역사적 배경에 탐라국과 벽랑국이라는 왕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그중 벽랑국은 내륙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2012년 제주대학에서 열렸던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서는 특히 벽랑국의 위치를 찾는데 관심을 보였는데 그 위치를 완도군 관내의 소랑도(벽랑도)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이 결론에 선듯 동의하기엔 부족되는 바가 많다.그 이유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공주가 있는 이상 그 배경에는 왕국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고대사에서 서기 전후 1세기에 존재하던 왕국중 벽랑국이라는 나라는 없었고,오직 국명이 유사한 낙랑국이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름이 유사한 낙랑국의 생성과 소멸을 추적하여 벽랑국과의 관계를 밝혀보는것이 순리일것으로 생각한다.그동안 제주에서 진행되었던 벽랑국 찾기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의 주장대로 완도군 관활의 소랑도(벽랑도)와 관계가 있었을것으로 공감하지만 제반 여건들을 감안할때 소랑도는 당시 탐라로 향하던 벽랑국의 일행들이 잠정적으로 머물렀던 경유지로 인정하는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따라서 벽랑국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던 방위 개념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밝혀진 요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을 적용할것이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2]무너지는 한반도의 서기 전의 건국설


▶ 무너진 익산 금마군 전기 마한설. 대왕능에도 준왕은 없었다.


지난 2018/4월 전북 익산 쌍릉(사적 87호)의 대묘(대왕릉)에서 확인된 인골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그동안 쌍릉 중 규모가 큰 대왕릉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능묘로 밝혀지므로서 마한과 백제의 4세기 전 한반도설은 무너진것이다.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남성인골더미. 1917년 이 무덤을 발굴한 일본인 야쓰이가 인골을 상

자에 담아 무덤방에 넣은 것을 101년만인 지난 4월 재발굴 과정에서 찾아냈다.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제공)


지금까지는 익산 쌍능이 고조선의 준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유지되어 왔지만 이번에 인골분석으로 ‘쌍릉은 백제 왕능설’에 더욱 무게를 둘 수 있게 되었다.따라서 익산 마한설과 4세기 전 백제 왕국설이 무너지게 됨으로서 마한 역사에 근거를 둔 제주의 역사도 재로운 검토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주호설(州胡說)과 일본설(日本說)로 설왕설래하던 근거가 어떻게 연계된것인지 그 진실을 밝혀본다.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의 쌍능 유골 분석결과 발표

무왕의 서거년(641년)과 비슷한(620~659년) 인골연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대왕묘의 석실에서 확인한 나무상자에 담긴 인골 조각102개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의 키는 161㎝에서 최대 170.1㎝,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 연대는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됐다”고 밝혔다. 연구소측은 고고학·법인류학·유전학·생리학은 물론 암석학과 임산공학 전문가들을 총동원했다고 밝혔다. --하략--



익산 쌍릉 발굴 인골, '백제 무왕' 가능성 높아져

익산 쌍릉 발굴 인골, '백제 무왕' 가능성 높아져(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18일 오전 서울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인골 분석 결과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이상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브리핑하고 있다. 2018.7.18




● 이 외에도 최근 한국의 고대사학계는 실증사학을 앞세워 100여년동안 주장해오던 위만조선의 평양설을 요동지역으로 바꾸는 주장을 고고학대회를 통하여 발표하는가 하면(정인성교수) 신라 천년의 경주시대 역사를 출토품이 없다는 이유로 4세기 후반으로 발표하여(이한상교수) 《삼국사기》의 삼국건국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있다.따라서 이같은 고고학계의 주장들은 결론적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한 일본측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등의 주장을 긍정하는 셈이 된것이다.


이상과 같이 4세기 이전의 삼국 건국론이 한반도에서 부정된다면 동북공정으로 주장하는 중국측의 위만조선 평양설도 부정될것이고《일본서기(AD720)》나 『임나흥망사(1949)』를 저술해 임나의 강역을 전라도까지 확장시킨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등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의 주장들도 부정되는것이다.



2018/12월 일본 매일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유적지에 대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도래 시기가 4세기 말~5세기 초 라고 하고 있다.그렇다면 4세기 이전의 일본 도래 사실도 부정되는것이다.따라서 도래인들에 의한 4세기 이전의 일본 건국의 역사도 부정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BC.1세기~AD.1세기 기간중 일어났던 벽랑국의 존재를 한반도 주변 또는 일본에서 찾는다는것은 무모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따라서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위만조선 한반도설이나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등은 출토유물의 증언에 따른다면 부정되는셈이 된다.그렇다면 그동안의 사료들은 모두가 허구였을까.아니다 그것은 사료의 곡해와 자연재난에 의한 변형 또는 강대국들의 고의적인 은폐에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서기전 1122년 경 기자가 백공기예인 5천명을 대리고 동으로 건넜다는 조선이나 서기전 195년부터 등장하는 최숭의 낙랑국과 서기전 108년부터 등장하는 한사군중 낙랑군등의 낙랑이란 지명이 붙는 장소는 모두가 해상에 기반을 두고있던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낙랑군을 한반도의 평양에서 찾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것이다.


이는 3조선중 내륙에 있다가 연나라에게 빼앗긴 예맥조선(상곡.어양.우북평군)과 진번조선(요서.요동군)을 제외하고 최후까지 발해 해협에 남아있던 낙랑조선(낙랑.진번.암둔.현도군)을 말하는것이다.이중 진번과 임둔군은 낙랑군과 현도군으로 통패합 되고 그 후 현도군은 쉴새없는 부흥군들을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내륙으로 옮겨 무순 요양등지에 위치했고, 낙랑군믄 발해와 동해 해상에 머물렀었음을 뜻한다.


낙랑이란 이름은 해상낙원을 상징하는 산수(仙水)(삼신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또한 『사기史記』 조선전을 주석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3세기경 위나라 사람인 장안의 설을 인용하여 ‘조선’이란 명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 3개의 강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 열수가 되었으며 낙랑
조선이란 명칭이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 같다.라고 하였다.

 (集解張晏曰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為洌水 疑樂浪 朝鮮取名於此也 『史記』 권115 朝鮮列傳55)


▼ 아래 지도는 습수.열수.산수등으로 이루어지는 패수의 경로를 그린것이다.

<대명구변만국노정전도>大明九邊萬國路程全圖) 열수부분도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 3개의 강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 열수가 되었으며 낙랑
조선이란 명칭이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 같다.



그리고 평양(平壤)이란 지명은 뻘밭으로 이루어진 평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일명 발조선으로 불렀다.서기전 221년 연나라를 점령했던 진시황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삼신산으로 서불을 보내놓고 기다렸으나 실패하고 물건너에 있던 삼신산만 바라보다 객사하고 말았다.공자 역시 땟목으로라도 건너기를 원했던 일명 군자국은 그 만큼 건너기가 어려운 물 건너에 있었으니 이 물을 일명 험독이라 불렀다.이곳 낙랑조선이 서기전 108년 한나라 무제에게 점령당한 이후 어느때인가 봉래산은 한반도의 금강산으로 방장산은 지리산으로 영주산은 동영주란 이름으로 한라산으로 옮겨진것이다.


[3]고지도에서 낙랑조선과 낙랑군(海) 찾기

 

서한(西漢)때 낙랑조선의 위치와 서진(西晉)때 낙랑군의 위치를 다음 지도에서 볼 수 있다.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는 왕사탁의 수경주도(水經注圖)에서 발췌하였고,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는 송나라의 역대지리지장도에서 발췌하였다.이러한 지도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발해해협의 묘도열도와 사문도의 낙랑조선설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억지는 스스로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고정시키려는 고의적인 왜곡으로밖에 볼 수 없다.중국 역시 이러한 사료들을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동북공정이란 과정을 통하여 엉뚱한 주장을 날조하고 있는 행위는 강대국답지 못한 비열한 역사침략행위다.

 



낙랑국 최숭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수경주도》의 <서한군국도>에 그려진 낙랑조선은 사문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 낙랑조선의 위치를 한반도로 보는것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이다.그 이유는 아래

《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指掌圖)》《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指掌圖)》에서 공영달의 《상서정의(尙書正義)》(이하 《정의(正義)》라고 함)에서 밝히고 있다.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  발해해협에 걸쳐있는 낙랑군 

《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指掌圖)》《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





▼ 은나라의 기자가 동으로 건너간 조선은 해중에 있던 낙랑조선이다.

《한서》<지리지>

樂浪朝鮮民 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이곳이 낙랑군이 되자 처음에는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 검은색 부분 :東西二千里南北四千里 《명일통지》의 조선국

 

《명일통지》권89  외이

조선국 동서남 빈해, 북으로 인접하여 여단(여진). 서북으로 압록강에 이르고,동서 2천리 남북 4천리다. 자 국성지 경사 3천5백리 지 남경 4천리 연혁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곳이고,진(秦)나라때 요동외요에 속했으며 한나라 초에 연인 위만이 점거했던 땅이다. 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등 4군을 두었다. 소제시(bc75)낙랑과 현도2군으로 합병하였다.한말에 공손도가 점거하였다가 연(淵)에 이르러 위(魏)에 망하였다.


진(晉)영가 말(312)고구려에 함몰되었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그왕 고련(장수왕 )이 살던 평양성 즉 낙랑군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뽑아버리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수 동남 천여리(현 평양)다.5대당시(五代唐時) 왕건이 고구려의 궐지(빈터)와 고신라와 백제의 영역을 합쳐서 넓히고 송악으로 천도하고 평양은 서경으로 삼았다....

 

***《명일통지》의 중요한 포인트는

1) 조선의 강역이 동서 2천리,남북 4천리로서 현재의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북경에서 조선까지 3500리라고 하였으니 《후한서》<군국지>에서 말하는 낙양에서 의무려산까지 3600리의 거리를 넘지 못하는것이다.

 

2)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란 대목에서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이는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고구려가 한사군의 현토군 구려현에서 발생되었다는 설을 부정한다.

 

3)고구려 장수왕이 살던 평양성 즉 한나라의 낙랑군 땅은 당나라가 정벌하여 뽑아버리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평양은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수의 동남쪽 천여리라고 하고 있다.압록수는 요양의 서쪽으로 흐르는 구려하 또는 개주하(청하)를 말한다.따라서 옮겨간 평양은 현재 한반도의 평양을 말하는것이다.그렇다면 한반도의 평양은 당나라가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평양이 아니다.한나라가 사군을 두고 설치한 낙랑군이 아니라는 말이다.

 

4)후당 5대시 왕건이 건국한 고려를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에서는 고구려와는 아무런 연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 강역에 고구려의 궐지를 수복하였다고 한 대목은 고구려와의 연계성을 확인하는것이다.뿐만 아니라 《고려도경》이나 《원사》<지리지>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등에는 고려가 평양성(사문도)에서 건국한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산동의 북동부 일대와 묘도열도가 낙랑군이었고, 옛 평양성이었다는 지도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 제작 왕군보(王群甫)     제공:향고도       편집:필자

청 강희2년(1663)청에서 제작돤것을 다시 일본에서 번각하여 쓰쿠바대와 고베학 도서관에 소장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와 대명식(大明式) 천하도를 절충하여 성한 세계지도의 전형적인 지도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양을 서경이라고 주장하던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고 발해바다에 평양을 그려놓은 지도다. 안락(사문도)에 위치했던 평양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세개의 섬으로 그리고 내용을 설명한것이다.이 지도는 한반도가 제외되었다.따라서 한반도는 고조선 이후 연계되는 위만조선.한사군.등의 강역에서 제외된다. 


등주 봉래각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이곳을 옛날에 고구려 평양성이라 불렀고 후에 서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당나라에 점령되어 안동도호부가 되었고,그후 원나라때는 총관부와 동령이라고 표시하여 한반도 평양 동령로설을 부정하였다.도는 영국의 대영도서관과 일본의 쓰쿠바대학.고배대학에도 소장되어있어 공신력을 추가한다.

 

●지도의 표주(漂註)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국은 땅이 요동의 동해중에있다.삼면이 바다이고 한쪽은 여직과 접한다.원래 기자가 봉해진 나다.주한(周.漢)이후 성교가 시작되어 고구려가 건국되었다.한초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위만이 그땅에 살기 시작하였다.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을 설치하였다.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오대시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빈땅을 넓혔다.팔도를 두고, 부주현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동서가 2천리,남북이 4천리다.□□董善瀆(讀)書.명조 홍무2년 그나라는 장촉(욱)이 직위하였다.그후 부터 즉 이성계가 대신 왕위를 이어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전조선은 조공을 패하지 않았다.


 朝鮮國, 地在遼東東海, 三面濱海, 此隣女直。原箕子所封之國。周漢以後, 始自爲聲敎, 建號高麗。漢初無人, 衛滿據具(其)地。漢武帝定朝鮮爲四郡。唐征高麗, 置安東都護府。五代時, 王建闢地益廣, 倂新羅、百洛(濟)爲其地。有八道, 分統府州縣。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董善瀆(讀)書。明朝洪成(武)二年, 其國長蜀(顓)卽位, 賜金卽(印)誥命高麗國王。其後苻?卽李成住(桂)代位, 請段(更)國號爲朝鮮。前朝朝貢不蚤。


 

(장수왕)이 살기 시작한곳이 이 성이다.후에 서경이었고 원나라가 동령로로 삼았다.

서경이 바다의 섬에 있었다는 기록은 아래 보이는 《신원사》<지리지>에서도 확인이 된다.홍복원이 반란을 이르키자.고려는 해도(海島)에 있던 서경의 백성들을 옮겼다는 애기다.여기서 정원부(定遠府)는 서경에 속해있던 최항이 받친 60여성중의 하나다.《신원사권47 지리지4》

 

동령로 자비령 발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인자수지(人子須知)연산도(燕山圖)의 조선부분:조선은 황해가 입해하는 동북쪽 즉 등주의 동북쪽바다다.즉 사문도다.이 지도역시 조선의 위치를 요동의 바다에 표시하고 있다.





[4]준왕의 망명과 낙랑국 


▶『위략(魏略)』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일찍이 참람되게 왕을 칭하였는데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에게 공격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서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하략--

장수들과 좌우궁인들을 대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불렀다.


▶先時 崔崇 自樂浪山 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都王儉城 是檀君 丙午冬也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산(삼신산=사문도)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싣고 바다(발해)를 건너 마한에 도착하여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해모수 병오(BCE 195) 겨울이라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임신 원년은 BCE 169년인데, 정월달에 낙랑왕이였던 최숭이라는 사람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다가 바쳤다. 이때는 북부여가 위만 정권하고 대립하고 있을 때인데, 그 전방에 해당하는 해성에 군량미를 보급을 한 거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해모수 단군 병오년, 즉 BCE 195년에 최숭이 낙랑산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싣고서, 바다를 건너왔다. 여기 나오는 낙랑은 지금의 삼신산이 있던 낙랑조선 즉 장도(사문도)다.



서기전 194년 최숭으로부터 시작된 낙랑국은 중간쯤에 최리가 등장하였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무렵에는 시길이 낙랑국의 왕으로서 요동반도의 남쪽 해중의 대장산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무리들이었기에 주몽도 만만히 보지를 못하고 포용을 할려고 노력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처음에는 시길의 딸인 작을 부인으로 받아드렸고, 후에도 계속하여 혼인길은 열려있었지만 대무신제때 이르러 일격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중 북쪽으로 달아나 남옥저로 패주한것이 서기47년이었다.이들이 남옥저로 망명한 후에도 위험이 계속되자 다시 그곳을 탈출하여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경유 제주에 도착한것으로 보인다.또 하나의 탈출경로는 요동반도의 남쪽해상에 있던 신라와 왜를 경유하여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처 제주로 통하는 항로가 있다.



18/01/02 한국NGO신문  상반된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의 열국 위치주장


▶최근까지도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는 고조선의 폐망후 생겨난 열국들의 위치를 두고 위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지도의 중앙을 비워둔체 극 동쪽으로 또는 극 서쪽으로 그 위치를 주장하고 있어 <서진군국도>등의 사료를 무시한체 각자 틀린 주장만 앞세우고 있는것이다.


만약 통설대로 남옥저나 동옥저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면 동해안의 한류와 난류의 충돌때문에 경주나 제주까지의 통행은 불가능하다.이는 이미 2차에 걸친 땟목탐험으로 증명된바 있다.반대로 서해안 항로는 가능한것이었다.따라서 부여 황실과 경주신라간파소의 이동은 불가능한것이었다.또한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소서노의 남천 경로도 잘못된것이다.

상생방송 《환단고기》경주 북콘서트에서

(1). 부여황실의 딸 파소의 이동로 추정지 경주  (2).남옥저 위치  (3).최리의 낙랑국 추정지와

이외에 서기전 57년 박혁거세의 경주신라 건국설과 서기전 19년 온조의 하남 마한땅으로 이주와 백제 건국설등은 당시 삼한의 위치가 요동에 있었으므로 불가한 일이었다.


[5]낙랑조선과 삼한은 해양국가.



<이아구주도 제2>(우공추지)   부여의 황녀 파소(婆蘇)는 천제를 주관하는 신녀다.그는 사문도의 천후궁에서 천신녀의 교육을 마치고 장산군도의 신라로 들어간 경로를 밟고있다.

이 지도의 특징은 대요수와 마자수가 흐르는 경로와 그 사이에 끼어있는 요동(빗금친 부분)을 볼 수 있다.이곳이 현재는 바다(요동만)로 변한 고구려 지역이다.마자수의 오른쪽이 현재의 요동반도인데 이곳이 당시의 조선(우이)이었다.고대 사료상에 한반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사》<지리지>에는 고주(高州)에 삼한현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부여를 진한으로,변한을 신라로,마한을 고려로 하였다.개태중(1012~) 성종이 고려를 멸하고 요동계중에 잡혀있던 삼국의 유민들을 삼한현으로 옮겼다.지금요동의 삼한이 아니다.옛 한국(삼한)은 조선(요동)의 동남 대해중에 있었다.사면이 물로 둘러쌓인 섬에 살았다.옛날에는 '도이'라고 불렀다.(우공추지 권2-82)


《遼史》《地理誌》有高州三韓縣。辰韓為扶餘,弁韓為新羅,馬韓為高麗。開泰中,聖宗伐高麗,俘三國之遺人於遼東界中,僑置三韓縣。今以遼東為三韓,非也。古韓國在朝鮮東南大海中,依山島而居,水環其四麵,故曰島夷。


청의 금서《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

조선국은 요양의 동쪽에서 압록강을 경계로 있었다.즉 기자를 봉한 나라다.한초에 연나라사람 위만이 그 땅을 점거하였다.한말에는 공손탁이 점거하였으나 진(晉)말 영가말(312)에 고구려에게 빼앗겼다.오대 당시 왕건이 고구려를 벌하고 빈땅을 넓혔다.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요 홍무2년 그 주인 왕전이 표를 올려 직위하였다.고려국왕에 봉하였다.


●고려 건국때도 조선은 요양으로 부터 동쪽으로 압록강까지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이아구주도 제2도>


"朝鮮國, 在遼陽之東, 以鴨綠江爲界, 卽周箕子封國。漢初燕人衛滿據其地, 漢末爲公孫度所據, 晉末永嘉末陷入高麗。五代唐時, 王建伐高麗, 闕之益廣, 世遣使朝貢于宋、遼。洪武二年, 其主王顓表賀卽位, 以金印、誥命, 封高麗國王。




[6] 낙랑고분 출토품들은 은나라와 낙랑조선의 합작품이다.


평양 낙랑고분 석암리 9호분(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황금 허리띠 장식.


한편 평양지역으로 상륙한 무리들이 무덤을 남기고 있는데 이를 분석하면 전실묘는 벽돌로 지은 무덤인데 낙랑고분의 30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무덤에는 벽돌에 무덤의 주인공을 표시한것으로 보이는 ‘한씨(韓氏)’·‘왕(王)’·‘왕평(王平)’·‘전(田)’·‘전전(田田)’·‘조주(趙主)’·‘장씨(張氏)’·‘장무이(張撫夷)’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그렇다면 준왕의 직계인 한씨와 그를 보좌하던 측근들은 석암리에 묻혔고,낙랑국의 왕이던 최씨계는 다른지역으로 흩어진것으로 보인다.

           평양 낙랑고분 석암리 9호분(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황금 허리띠 장식.


위의 황금 허리띠장식은 국보로 지정된 평양 낙랑고분 출토품이다. 신라의 황금유물 등과 유사한 모양세가 아닌가.낙랑고분의 황금 허리띠장식은 누금세공법으로 만들어진 제품인데 신라의 황금유물에도 흔히 쓰이는 기법이라면 평양의 낙랑고분과 경주의 낙랑형 목곽묘, 누금세공법으로 만들어진 낙랑 황금허리띠 장식과 누금세공법으로 만들어진 신라 황금유물.등은 모두 낙랑조선의 낙랑산(삼신산)으로 부터 최숭이 반출한 보물들이 아니었을까.




[7]폐망한 낙랑국의 난민들은 어디로 갔는가.

서기후 1세기에 낙랑국이 멸망한 뒤 유민 5000여명이 신라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은나라의 백공기예인들이 낙랑조선으로 유입되었던것 처럼 그들의 백공기예집단은 고스란히 신라의 지배층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313년에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반인 일부가 요서지역으로 옮겨가고 남어지 낙랑유민들은 남쪽에 있던 신라로 유입된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의 빼어난 공예기술은 은나라로 부터 낙랑조선을 거쳐 전수된 맥을 잇고있다.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서기38)조에 ‘고구려왕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투항하니 6부에 나뉘어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살수계선(벽류하=필자 주)) 이남 지역에서 낙랑국 재건을 선포하고 그 명맥을 유지했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 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 投于羅


후기 낙랑국

살수 이남계선에서 다시 일어선 낙랑국의 통치자는 역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아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낙랑국이 다시 일어서기까지 몇 년 동안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봐, 최씨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기원 37년에 낙랑국이 멸망한 이후 7년이 지난 기원 44년에 이르러서야 후한이 사신을 보내 낙랑국의 재건을 축하했다. 이렇게 늦게 사신을 보낸 까닭은 그동안 낙랑국 재건을 둘러싸고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원 44년 후한이 사신을 보낸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나온다. 그러나 양측의 기록 내용은 약간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27년 9월조에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벽류하) 이남이 한나라에 속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반면에〈삼국유사〉낙랑국조에는 이 때 한나라가 ‘사신’을 보낸 것으로 돼 있다. 어느 쪽의 기사가 옳은가를 둘러싸고 역사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하다.




낙랑유민 망명 추정도




《고구려사략》<三代> 추모대제기

       ▶十五年 戊戌 五月 東巡至樂浪 浮海納 柴吉女鵲氏 爲夫人

        15년 무술(B.C.23) 5월 (왕이) 동쪽으로 순행중 낙랑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자

        시길(柴吉)이 딸 작씨(鵲氏)를 바치니,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二十七年(서기44)秋九月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 

       대무신왕27년(서기44)가을 9월 한 광무제는 군사로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군으로 삼았다.《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대무신왕


     大祖大王 四年(서기56) 秋士{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대조대왕4년(서기56) 추 7월에 동옥저를 쳐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에 이른다.

   

***살수는 동옥저의 남쪽에 있다.(동옥저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다.

    단단대령은 요동반도의 서쪽에 있다.따라서 살수는 청천강이 아

    니라 요동반도의 남족으로 흐르는 벽류하(碧流河(畢利河))다.

     (편집자 주))


    二十年王襲樂浪滅之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대무신왕



二十七年秋九月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대무신왕 四年 秋士{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


■ 다음은 낙랑국이 해상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경초중(A.D 237-239)에 명제는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바다 건너로 보내어 2군을 다스리게 하였다. 여러 한국의 신지들에게 읍군 인수를 주고 그 아래는 읍장 인수를 주었다....하략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於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하략


   《고구려사략》<三代> 추모대제기

十五年 戊戌 五月 東巡至 樂浪浮海納柴吉女鵲氏 爲夫人 15년 무술(B.C.23) 5월 (왕이) 동쪽을 순행하였고, 낙랑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시길(柴吉)의 딸 작씨(鵲氏)를 바치니,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낙랑국은 최숭으로 부터 계산하면 기원전194년~기원후 54년까지 약 248여년을 유지한 셈이다.

이곳은 주몽이 동순하여 낙랑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가 시길의 딸 작부인을 아내로 맞어 대려왔으며, 대무신왕 역시 (서기37년)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들어가 최리의 내외를 사로 잡았다고 하였다. 이후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44년)군사를 보내어 이곳을 칠때도 역시 배를 타고 건넜으며 위(魏)나라경초때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어 낙랑,대방 이군을 평정할때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낙랑국은 시작하는 당시부터 최숭이 배로서 준왕의 보물들을 사전에 배에 싣고 옮겨왔고, 해성에 300석의 쌀을 바치는가 하면 이후로 마한도 왕검성(馬韓都  王儉城)으로 옮겨와 한왕이 된  준왕을 보좌하였다.

 

 

志)' 위서(魏書)


3세기 저작인 중국 사서(史書) '삼국지(三國志)'는 위서(魏書) 동이전에서 부여를 시작으로 고구려·옥저·동예·읍루·한·왜 순으로 기록한다. 부여는 여러 나라 중 맨 앞에 나온다. 동이전은 부여에 대해 '아주 부유하고 (3세기 중반까지) 한 번도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다'고 적었다. 부여는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였다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부여의 왕자 출신이었고, 백제를 세운 온조 집단도 부여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한때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8]  제주도 선주민은 선비족 아닌 낙랑조선족 

▼ 제주시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주시에 대한 역사의 기록

사마천(BC 45~86)의 사기 : 제주도를 도이(島夷)로 지칭하고 “백제 서남 해중에 큰 섬이 15소(所)나 있는데 모두 마을이 설치되어 사람이 살고 있으며 백제에 속해 있다”라고 하고 있다.그리고 진수(AD 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이 있는데 주호(州胡)라고 부른다. 체구가 비교적 적고 언어는 한(韓)나라와 틀리며 소와 돼지를 잘 치고 배를 타고 왕래하는데 한(韓)나라와 장사 거래를 한다”라고 하여 제주인의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正義括地志云:“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又倭國,武皇后改曰日本國,在百濟南,隔海依島而居,(이상 제주시 소개)

정의괄지지:"백제국서남쪽 발해중에 큰 섬 15개가 있는데,모두 사람이 살고 이들은 백제국에 속해있다. 

또 "왜국, 이 있는데 무황 후 일본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백제의 남쪽에 있으며 바다 사이에 떨어저 산을 의지하여 산다고 하였다.


《한국해양사》또한『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주호설(州胡說)을 따르고 있다

▶제주시 산지항(제주항)도 원삼국시대에 국제교역항으로 개발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주도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전에 주호州胡라는 명칭으로 나타나며, 주호사람들은 선박을 타고 한韓에 왕래하며 무역을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가 3세기에 본토와 해상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한국해양사》


☆그러나 장초금이 지은 <한원> 이라는 책에는. 마한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있다.,
 <馬韓在西 散在 山海間>마한재서 산재 산해간.마한은 삼한중 서쪽에 있는데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다.고 하였다.따라서 삼한은 섬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통전》<동이 상>에는 [其 三 韓之 地 在 海 島 之 上,] 그 삼한의 땅은 섬에 있다고 하고 있다.

★또《조선지》에는... 서쪽은 황해인데 그 서쪽으로 대해 끝까지 옛 조선과 마한의 옛 땅이라는 대목이 있다.따라서 고조선과 마한 땅이 황해바다 영역안에 있었다는 말이다.

전략 百濟...西曰 黃海 其西抵 大海 古 朝鮮 馬韓舊地 後爲 高句麗所有....하략

《사고전서존목총서총목록(四庫全書存目叢書總目錄)·사부(史部)》자료에 《조선지(朝鮮志)》 2권이 들어 있다.





▶馬韓之西, 海島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髡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 貨市韓中
.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섬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사람들은 몸집이 작고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고 한(韓)과 교역한다.《후한서》 동이 열전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市買韓中。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주호(州胡)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소 몸집이 작고 언어가 한(韓)과 다르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 옷을 입는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으니 대략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이상과 같이 제주역사에 《삼국지<위서> 동이전을 적용한 사실은 크나큰 착각속에서 범한 왜곡이었다.그들은 몸집이 작은것도 아니었고,언어가 다른것도 아니었다.더구나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은것도 아니었고,아랫도리를 벗고 사는 만족도 아니었다.그 이유는 제주도는 마한의 서쪽 바다가운데 있던 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기 삼한(마한과 백제)의 위치를 후기 삼한인 한반도로 잘못 추정한데 있다. 

▶《독사방여기요》권38에는 탐라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耽罗今朝鲜之庆尚南境,亦曰儋罗国。《唐史》云:居新罗武州南岛上,初附百济,后附新罗。麟德二年,遣使入朝,后为新罗所并。《图经》:今济州,即古耽罗国也
탐라는 지금 조선의 경상남도경계에 있다.역시 탐라국이라 한다.《당사》에 이르기를 신라의 무주 남쪽 섬에있다.처음에는 백제였고 후에 신라에 속했다.인덕2년에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후에 신라로 병탄되었다. 《도경》에는 지금의 제주는 즉 옛 탐라국이다.


제주도의 역사를 밝 밝히기 위한 국제 학술대회는 열렸지만....

 


 

▲ 신용하 교수가 14일 열린 2012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서 탐라국의 건국 과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2012년 9월14일자 제주의 소리 보도에 의하면 탐라국'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누가 그 탐라국을 세웠는지, 어떤 형성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 진상을 밝혀보기 위한 국제학술대회 개최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대중들에게 생소한 탐라국의 건국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14일 오전 11시 제주대학교 국제교류회관에서 국제학술대회 ‘바다로 열린 세계, 제주의 해양문화’가 막을 올렸다. 이 날 발표는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조발제로 시작됐다. ‘탐라왕국의 건국과 해양문화 형성’이라는 주제로 탐라국의 기원과 당시의 해양문화를 고찰했다.

 

신 교수는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탐라국 건국에 대해서 신화적 부분까지 신봉하는 고정관념이 이미 설정돼 있는 경우가 많다”며 “기성 고정관념의 입장에서는 기이하고 불경스러운 견해로 들릴수도 있지만 탐라왕국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히겠다”는 전제로 말문을 열었다.


탐라국 건국에 대해 신 교수는 ‘북방계의 민족들이 남하해 건설한 국가’라는 내용을 제시했다. 이는 신 교수가 지난해 5월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역사박물관대학 시민강좌 ‘탐라국 형성의 원류’ 강좌에서도 제기했던 학설.


제주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긴 했지만 탐라국을 건국한 세력은 외부 이주 세력이라는 것.

그는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과 고구려, 백제, 신라 신흥고대국가들의 격렬한 정치변동으로 동남방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시기에 고구려족, 양맥족, 부여족을 비롯해 고조선 계열의 민족들이 제주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역사적 문헌에 남아있다며 사실상 제주지방에 외주인들이 대거 이주했던 점을 강조했다.


이후 3개의 민족이 연맹해 현재의 제주시 지역에 고을국가를 건국한 국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의 고대국가 ‘탐라국’이라고 설명하며 “고문헌 자료와 고고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시기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경 사이”라고 말했다.


또 “이주민들은 당시 선박의 규모상 수백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그들이 국가를 건국했다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많은 수천명의 선주민을 포용해야 했다”며 작은 고을국가였던 탐라국이 제주도 해안의 마을공동체들을 포용한 고대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 14일 2012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발표자들과 내빈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탐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벽랑국’에 대한 연구도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3을나 설화’에는 탐라국에 세 명의 공주와 곡물씨앗, 목축이 도입돼 온 곳이 ‘벽랑국’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탐구한 것.

 

신 교수는 “벽랑국은 탐라국 건국기에 한반도 남해안의 지금의 강진, 완도, 해남을 포괄한 소왕국의 명칭인 동시에,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완도에 설치한 군영,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완도 옆에도 ‘벽랑국’이라고 표기된 내용이 있다”고 말해 신화 속 벽랑국이 일본의 섬이나 가상의 공간이 아닌 한국 내륙지방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중 한 명인 신 교수의 발표는 제주 역사를 민속학이나 역사학이 아닌 실증적 사회과학으로 색다르게 접근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시간이었다.

이 날 신 교수의 발표에 이어 열린 첫 번째 섹션에서는 ‘제주문화의 형성 과정과 특징’에 대해 주강현 제주대 교수, 이영권 제주대 교수, 조성윤 제주대 교수가 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외국에서 온 학자들이 ‘아시아 태평양의 바다와 제주’를 주제로 바다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태평양의 해양사를 다뤘다. 한흥용 중국 상해 해양대 교수, 토드 아메스 미국 괌대 교수, 모리타 마사야 일본 관서학원대 교수가 차례로 자신의 국가와 제주의 해양문화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오는 15일까지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제주문화의 특징과 제주 해양문화의 보편성을 논구하면서, 제주문화 전승의 올바른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날 개회식에는 윤용택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소장, 김형선 제주도 행정부지사, 허향진 제주대학교 총장이 참석했다. <제주의소리>문준영 인턴기자>


■이상의 보도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했던 사실은 탐라국을 건국한 주인공들의 출전과 벽랑국의 정체였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과 고구려, 백제, 신라 신흥 고대국가들의 격렬한 정치변동으로 동남방으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시기에 고구려족, 양맥족, 부여족을 비롯해 고조선 계열의 민족들이 제주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역사적 문헌에 남아있다며 사실상 제주지방에 외주인들이 대거 이주했던 점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벽랑국의 정체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추정하고 있던  “벽랑국은 탐라국 건국기에 한반도 남해안의 지금의 강진, 완도, 해남을 포괄한 소왕국의 명칭인 동시에,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완도에 설치한 군영,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완도 옆에도 ‘벽랑국’이라고 표기된 내용이 있다”고 말해 신화 속 벽랑국이 일본의 섬이나 가상의 공간이 아닌 한국 내륙지방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상의 결론들은 기왕에 알려져왔던 통설들을 국제학술대회란 행사를 통해서 확인한 이외에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는 구체적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이러한 정도의 사실 외에도 이미 다음과 같은 새로운 연구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신단실기》(김교헌저)의 족통원류(族統源流)에 의하면 탐라족은 후조선족으로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고있다. 이들이 마한족을 통하여 한족(韓族)과 합하고 다시 세가지로 나뉘어 하나는 백제와 합하고, 하나는 고구려와 합하여 정안족(定安族)에게 전하고, 다음이 탐라족(耽羅族)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조선 말기에 위만에게 밀려난 준왕의 족통이라는 말이다.이들이 바다로 달아나 처음 도착한곳은 요동반도의 남쪽 해상에 있던 대왕가도(大王家島)다.이 바다를 《한서》<지리지>에서는 낙랑해라고 부르고 있다.이 때 준왕의 망명세력을 모셨던 최리의 낙랑국이 벽류하(살수)의 해안인 낙랑해에 있었다.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낙랑해(樂浪海)중에 왜인이 있는데 100여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다"라고 하였고,

《한서》권28下 지리지 제 8 燕地,尾、箕分野也。樂浪海中有倭人

       

▶《후한서(漢書) ·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왜는 한(韓)의 동남쪽 대해 중에 있는데 산도(山島)에 의지해서 살고 있으며 모두 100여 개의 나라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漢書》《武帝紀》에는 낙랑 남쪽으로 삼한이 바다에 분산되어있다고 하고있다.


▶또《삼국지》<오한 선비전>중 왜인전에는 왜인은 대방군의 동남 대해중에 100여국이 산도에 흩어져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통전》에는 삼한이 섬 위에 있다고 전하고 있는것이다.



▶반면 벽랑국의 위치에 대하여 한반도를 위주로 연구한 이형석 박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는 다음과 같은 지명을 논문을 통해서 발표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1451)에 부인도(富仁島), 은파도(恩波島), 벽랑도(碧浪島), 선선도(仙仙島), 완도(莞島) 등이 탐진현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 성종 때(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강진현 산천’조에 완도(莞島, 둘레 290리-이하 같음)를 비롯, 고이도(古尒島, 105리), 조약도(助藥島, 95리), 신지도(新智島, 90리), 가배도(加背島, 30리), 소흘도(所訖島, 20리), 다야도(多也島, 4리), 동량도(銅梁島, 4리), 부인도(富仁島, 5리), 은파도(恩波島, 6리), 벽랑도(碧浪島, 4리), 죽도(竹島, 6리), 재마도(載馬島, 15리) 등 여러 섬이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당시의 양무군의 관할이었던 지금의 완도읍 죽청리와 장좌리 일대에 청해진(淸海鎭)(828)을 설치, 장보고(張保皐)를 중심으로 대활약을 펼침으로써 이 지역이 당시 한·중·일 무역의 거점으로 부상했음은 물론 나중에 강진 대구면 일대 고려청자문화 발달의 배경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이는 중국과의 항로가 해류를 따라 연계되고 있음을 증언하는것이다.

▼ 둘째 (사)한국해양탐험문화진흥회 채바다 이사장의 실제 체험을 통한 벽랑국찾기 결과 완도군 금일도의 작은 섬 소랑도가 벽랑도로 밝혀졌다고 완도신문 2018년10월26일자는 보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벽랑국은 완도군 금일읍의 소랑도인가?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보도내용들을 추적해본다.이상의 결과들은 그 가능성이 다른 학자들의 주장과 상통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또한 벽랑국찾기 계획은 이미 1996년부터 시작하여 진행되어왔음을 제주신보를 통해서 6부연작으로 발표한바 제주에 주재하고 있던 기타 중앙지들도 이 사실을 소개하여 전국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었던것도 사실이다.














           사진:채바다 이사장과 벽랑국 탐사선  <제주신보제공>


완도군 금일도-소랑도-(벽랑도)


완도 금일읍 소랑도는 전국 다시마의 80%를 생산하는 금일읍에서도 다시마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다시마 건조철이면 온 섬이 다시마 건조장으로 변하다시피 한다. 그런데 이 작은 섬이 탐라국(제주의 옛지명) 건국신화와 연결돼 있는 걸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중략---

그렇다면 이 탐라국 건국신화에서 세 공주가 왔다는 벽랑국은 과연 어디일까?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벽랑국이 어디에 있던 나라인지는 문헌사료나 유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히 알길이 없었고,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족국가시대의 완도지방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했다. 게다가 학자들 간의 견해가 서로 달라 벽랑국이 상상의 나라이거나 일본이라는 설 등이 난무했다.

이것이 2006년 세 공주가 왔다는 벽랑국을 찾아 뱃길 탐험을 떠났던 (사)한국해양탐험문화진흥회 채바다 이사장이 그 해 12월 완도군과 공동으로 탐라국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벽랑국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개최한 ‘탐진항로와 해상왕국 벽랑국’이라는 학술심포지움에서 “탐라국 신화 속 벽랑국은 완도 금일읍 소랑도”라고 주장하면서 “벽랑국=소랑도”가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채 이사장은 벽랑국이 완도지방의 고대 소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완도 인근의 지명과 전설, 지리적인 근접성 등을 들어 완도 금일 소랑도가 벽랑국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벽랑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문헌을 보면 고려사지리지(벽랑도:탐진현1454년), 동국여지승람(벽랑도:강진현1486년), 신증동국여지승람(벽랑도:강진현1530년), 동여도(벽랑도:강진현1861년), 대동여지도(벽랑도:강진현1864년)에 벽랑도의 기록이 보인다. 또한 기록에서 벽랑도의 섬 규모는 4리라고 돼 있다.

여러 고서에서 채 이사장이 탐라국 건국신화 속에 등장하는 벽랑국으로 확신하게 됐고, 전남의 지명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자료들을 분석하여 여러 권의 연구보고서와 도서들을 펴낸 바 있는 진도문화원 김정호 원장을 만나 “벽랑도가 바로 완도 금일 소랑도가 맞다”라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

"문헌과 유적, 말과 생활상, 문화의 동질․유사성, 지리적 접근성, 해류와 조류, 계절풍 등을 이용하는 항로 등에서 제주와 완도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 탐라국 건국신화 속에서 벽랑국 세공주를 통해 완도와 제주간에는 고대부터 인적, 물적 교류와 지리적 접근성이 인근의 시·군보다 매우 빈번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채 이사장은 말하고 있다.

이는 제주도의 수렵채집인들이 농업문명과 국가조직체계를 받아들여 탐라국을 세우는 과정을 ‘영주지’의 탐라국 신화는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선진문명의 전파루트로 볼때 한반도의 벽랑국에서 제주도로 건너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그러나 한반도에 남겨있는 진나라의 방사 서불의 행적처럼 완도의 소랑도는 그 규모로 볼때 벽랑국인들의 경과지로 추정하는것이 옳을듯 하다.


    거제도 해금강 주변의 서불 유숙지 비

전설로 남아있는 서불의 행차 흔적



▶ 다음은 이형석박사가 주장하는 벽랑도의 규모다.벽랑도(사랑도)는 그 둘레가 완도나 강진군의 섬들중 가장 작은 4리에 불과하여 완도의 290리에 비하면 이를 국가로 인정하기엔 불가한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완도군 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인간의 거주흔적은 밝혀졌지만 벽랑국의 역사는 볼 수 없다.

●삼국시대:백제의 영지인 새금현에 속했다

●통일신라시대:흥덕왕 3년(828)년에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문성왕 13년(851년)에 청해진을 폐지하고, 주민을 벽골군에 강제 이주시켰다.

●고려시대:현종때 각 섬을 3분하여 동부는 강진군에, 금일면은 장흥군에, 서남부는 영암군에 귀속하였다. 삼별초 난 때 (1270년~1273년) 송징이 완도에 입도하였다. 공민왕 원년(1351년)에 다시 주민의 거주를 허용하였다.

●조선시대:중종17년(1522년)에 대해적들의 횡포로 인하여 군내리에 가리포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고종 33년(1896년) 군내리에 군청을 설치하고 영암, 강진, 해남, 장흥등에 속한 유인도 75개, 무인도 135개를 통합하여 14면에 설치하였다.

         
한편 당시의 양무군의 관할이었던 지금의 완도읍 죽청리와 장좌리 일대에 청해진(淸海鎭)(828)을 설치, 장보고(張保皐)를 중심으로 대활약을 펼침으로써 이 지역이 당시 한·중·일 무역의 거점으로 부상했음은 물론 나중에 강진 대구면 일대 고려청자문화 발달의 배경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이 말은 강진 완도등 남해안 일대가 중국과 통하는 항로라는 말이다.그렇다면 국가의 규모로서는 불가한 벽랑도는 벽랑국의 경유지가 아니었을까.하는 의심을 갖지않을 수 없다.

▶ 더하여 국가가 기록한 공식 사료에 벽랑국을 일본이라고 기록하여 일본이라는 국명이 최초로 시작된 시기를 《삼국사기》나 《구당서》는 서기67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모를리 없는 고려나 조선의 학자들이 무려 2200여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왜 일본국으로 기록을 남겼을까.

▶ 한라산의 옛 이름을 영주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 왜 동영주(東瀛洲)라고 하였을까.그렇다면 제주도의 서쪽에도 영주산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사기》<봉선서>에서 전하는 삼신산의 실재 위치를 찾는다면 동해에 있었다는 벽랑국의 위치도 밝혀질 수 있을것이다.

▶ 최초의 제주 원주민은 한반도의 농경민족과는 다른 북방유목 기마민족이라고 하였다.그리고 한반도의 농경민족은 선사시대부터 머리에 상투를 틀고 배옷을 입었으며 언어도 한어를 사용하는 문화복합체의 집단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주도는 《삼국지》를 인용하여 키가 비교적 작고 머리는 선비족과 같이 박박 깎고, 옷은 가죽옷을 입었었다는것이다..언어 또한 북방군에 속하는 부여계 언어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그러나 이같은 전언은 애시당초부터 잘못 인용된《삼국지》의 해석이 원인이었다.이에 대한 강상원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제주의 언어는 싼스크리스터어를 저변에 깔고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당시 탐라인들은 정통 고조선인들이었기에 조선인들의 풍속을 따랐음이 분명하다.

▶ 그뿐 아니라 말의 고장인 제주도를 대표하는 토종말은 공식적으로는 ‘제주마(濟州馬)’로 이름 붙여졌지만 흔히 조랑말이라고 부른다. 조랑말은 그 어감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다른 말들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어서 암컷은 117㎝, 수컷은 115㎝ 정도에 불과하다. 몸집이 작은 조랑말은 과일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과하마(果下馬)’라고 불리기도 하고 ‘토마(土馬)’라고도 불린다. 그 원조가 벽랑국에서 보낸 망아지가 아닌가.과하마의 산지는 동예나 낙랑국 옥저다.역시 요동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벽랑국에서 가져간 오곡의 종자와 망아지인 과하마와 연계한다면 ㅡ그 출전을 낙랑국 옥저에서 찾는게 상식이다.키가 3척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고서도 능히 과실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고구려와 동예의 특산물이었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시조 주몽(朱蒙)이 탔다는 전승이 전하며, 동예에서는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중국과의 주요 교역품의 하나이기도 하였다.그러나 통설로 알려진 강능(동예)이나 함흥(남옥저)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반대로 함경도의 특산품인 명태는 옥저에서는 나지 않는다.따라서 한반도의 옥저나 동예설은 후대에 옮겨진것이다.


■ 이상의 조건으로 벽랑국을 완도군 금일읍 소랑도로 인정하는건 무리가 따른다.따라서 벽랑국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신용하 교수의 주장처럼 대략 BC.1세기~ AD.1세기 경 이라면 당시의 역사를 추적하여 벽랑국의 실체를 찾는것이 순리다.그렇다면 중국의 사서들은 조선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9]사료로 보는 삼신산과 삼한의 위치 




<대청일통지  표주  도삭산(度朔山)과 삼신산(三神山)과 봉래현>  동해의 내해에 있던 조선을 사문도로 표시하고 이곳을 삼신산으로 주석하고 있다.





남당유고》<백제왕기>남옥저의 주석부분에서 남옥저는 북부마한 땅이었고 현재는 압록강의 서쪽에 있는  대고산 땅이라는 설명이 있다.





서진군국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지도에서 낙랑으로 표시된 장해현이 장산군도의 행정 중심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피구항까지 18해리다.이곳에 최리의 낙랑국과 후한의 낙랑군이 있었다.동북쪽으로 준왕이 동천한 왕가도가 있었고 서남쪽으로 광록도에 대방군이 있었다.그 남쪽으로 대마도와 요동 삼한이 있었고,동남쪽으로 해양도에 왜가 있었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벽랑국을 왜(일본)로 기록한 내력은 위 지도를 통해서 보듯이 왜를 경유지로 본다면 이해할만도 한것이다.


《성경통지》주(周)나라 이후 금주(대련지방)는 조선의 경계요 진한땅이라고 하였다.한나라때 원토군.진(晉)나라때는 고구려.수나라때는 고려.당나라가 고려를 평정하고 처음으로 금주를 설치한 후 발해의 삼노군이 되었다.요나라가 복주 화성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금주로 바꾸었다.금나라때 소주 안복군으로 고치고 내소.회화 두현을 두었다.원초에 개주로로 바꾼 후 요양로로 병합하였다.명 홍무4년 다시 금주위로 바꾸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접하였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였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에 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후한서》에서,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라고 하였다.

변천

묘도군도의 황성도에 있던 남옥저의 중심집단은 서기전 2세기경 위만조선에 복속되었고, 서기전 108년, 다시 한의 현도군에 소속되었다. 서기전 75년 현도군이 제2 현도군으로 이동한 이후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

 

서기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봉해졌으나 56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244년 관구검이 이끄는 위(魏)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어 사실상 옥저는 소멸되고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이루어졌다.

 

 

동옥저(東沃沮)

 

동옥저(東沃沮)는 개마산 동쪽에 있었던 한국의 옛 나라이다. 서기 57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여기서 개마산은 요동반도에 있는 일명 단단대령이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주: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성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검성이다.]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가 있고 남으로 예맥에 접하고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되며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하략--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따르면 고구려는 "4년(서기 57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벽류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옥저의 위치는 한반도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다.따라서 영동7현과 동예의 위치도 모두 한반도의 서쪽인 요동땅으로 바뀐다.

 

특산물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다.

명주(비단)와 삼베 : 방직 기술이 발달


▶그러나 실제 강원도 강능의 특산물은 자연산 돌각·돌미역·젓갈류·오징어·황태·한과셋트·과줄·찹쌀흰강정 등이 유명하다. 왜 이렇게 동예와 특산물이 전연히 다를까.이곳은 초기 동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응신천황14년(404)백제의 아직기로 부터 순한말 두필을 선물받음으로서 말이 없던 왜국에 말이 처음 들어왔다고 하였다.따라서 서기 전후 1세기경에 망아지를 보냈던 벽랑국은 일본국이 될 수 없다.


《삼국지》「동이전」에 2만 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고, 《한서》「동이열전」에서는 진번군의 남려 예군이 위만과 충돌하여  28만명이 한의 요동군에 투항한 기록이 나온다.

낙랑조선과 벽랑국의 위치  (낙랑과 벽랑은 바닷물의 청탁(淸濁)에 의해서 구분됨) 남려 예군의 28만명 종착지는 한예(동예)즉 석성도다.

                                                                                                삼국지》에는 이 옛날의 진국이라고 하고 후한서》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삼한은 모두 옛날의 진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조선의 재상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왕(右渠王)에게 한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백성 2,000여호와 함께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고 하고 《한서》에서는 우거왕이 진국과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방해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역계경이 2000여호를 대동하고 떠난 방향이 동쪽이라는 사실<東之辰國>이다.만약 이들이 떠난 위만조선이 통설처럼 한반도의 평양지역이라면 진국이나 삼한은 모두 함경도 지역에 있어야 한다.뿐만 아니라 서기전 194년에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바다로 달아났다고 하였는데 그의 도착지가 진국이었으니 당연히 함경도여야 하는데 바다라고 하였다.그러나 평양의 동쪽에는 백두대간과 함경도가 있을 뿐 바다가 없다.


따라서 진국과 삼한의 위치는 위의 지도에 예시한 요동반도의 장산군도다.이러한 사실은 한국고대의 진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10] 맺음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것은 탐라국을 건국한 주인공들의 유입경로와 부수적인 조건 즉 인종들의 특징,동해 벽랑국의 정체.사료에 기록된 일본국의 정체.동영주라는 지명의 유래.최초로 유입되었다는 오곡의 종자와 송아지.망아지가 시사하는 문제.등이었다.그리고 탐라역사를 왜곡하는 원인이 되었던 다음 《한서》<지리지>나《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기록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제주시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주시에 대한 역사의 기록

사마천(BC 45~86)의 사기 : 제주도를 도이(島夷)로 지칭하여 “백제 서남 해중에 큰 섬이 있고 15소(所)나 되며 모두 마을이 설치되어 사람이 살고 있으며 백제에 속해 있다”라고 하고 있으며, 진수(AD 233~297)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이 있는데 주호(州胡)라는 나라가 있다. 체구가 비교적 적고 언어는 한(韓)나라와 틀리며 소와 돼지를 잘 치고 배를 타서 왕래하는데 한(韓)나라와 장사 거래를 한다”라고 하여 제주인의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正義括地志云:“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又倭國,武皇后改曰日本國,在百濟南,隔海依島而居,凡百餘小國。此皆揚州之東島夷也。按:東南之夷草服葛越,焦竹之屬,越即苧祁也。




“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마한의 서쪽이나 백제국 서남쪽 발해중에 있는 큰섬 15개는 제주도가 아니라 묘도군도(낙랑조선)다.




▶“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 馬韓之西, 海島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髡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 貨市韓中.


▶만약 동예나 남옥저가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이라라면 특산품인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소곰등이 생산되어야 하지만 강원도나 함경도에 이러한 특산물이 나지 않는다.반면 함경도의 특산품인 명태가 옥저에선 나지 않는다.


산융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묘도군도를 산융(山戎)으로 표시한 지도> 이곳은 준왕의 낙랑조선이 떠나간 이후 한때 주호(州胡)들의 점령지가 되기도 하였었다.


또한 최근에 만화로 소개된  정용연작 '목호의 난'(딸기책방)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74년 최영 장군의 제주도 토벌 사건을 그리고 있는데  그 내용은 주인공인 목호(牧胡)들의 저항운동을 소개하고 있다.목호는 삼별초 이후 몽골의 직접 지배로 넘어간 탐라에서 살았던 몽골인 말치기 목동을 말한다. 이들은 한반도 육지와는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애월읍경은 항몽(삼별초) 멸호(목호)의 땅. 애월은 항몽의 역사 현장이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망한 이후 제주에 남은 목호들은 원이 쇠퇴한 후에도 고려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말 2천마리를 바치라는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이를 집행하려는 고려정부의 지시를 거부하며 비극적 결사 항전이 벌어졌고, 제주도 주민 절반 가까이가 죽는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 애월 바닷가 두 개의 석상과 비석만이 그 사실을 아직도 알려주고 있다.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최영을 도통사로 삼아 병선 314척, 정예 군사 2만5605명을 보내 제주를 토벌했다는 내용이다. 목호측은 홀고탁,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조장홀고손 등이 고려와 맞서 싸웠다. 이 전쟁에서 억울한 생명들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로부터 600여년이 흐른 뒤 제주에는 또 다른 아픈 역사가 있었다. 제주 4·3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은 동족상쟁에서도‘우리’가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에서 ‘목호의 난’과 유사하다. 그렇게 닮은 역사는 애시당초부터 왜곡된 역사의 그늘이 이토록 무서울줄을 그누가 알았겠는가.


발굴유물중에도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있다. 또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본향에서 흔히 확인되는 지(之)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지(之)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고조선의 발원지인 발해해안 출토품과 같다.따라서 제주의 인류문화와 역사의 뿌리는 고조선이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성주가 '마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 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