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의 불교

4-1 종교문제 – 도교의 흥기

불교는 중국에서 처음에는 도교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에는 본래 종교가 없었고 신앙도 없었다. 하나라와 하나라 이전 시대에는 아마 샤머니즘만이 있었을 것이다. 상나라 시대에 상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상숭배였지 종교적 신앙은 아니었다. 상나라의 상제는 신도 조물주도 아니고 죽은 제왕이었다. 이에 대응하는 것은 ‘하제下帝’, 즉 현재의 상나라 왕이었다.

하제와 상제는 모두 인간이었다.

달리 말하면 하제는 인간, 상제는 귀신 또는 죽은 인간이었다.그 후에 주나라인은 조상을 숭배하는 한편, 천명을 믿었다. 하늘의 주요 역할은 천자에게 천하를 관리하는 권한을 주고 자격 미달의 통치자에게 혁명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한 존재는 사실 인간이어서 그 후의 기나긴 세월 동안 구체적으로 하느님(老天爺)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종교도 신앙도 아니었다.

사실 중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종교가 생기는 것이 불가능했다(그 이유는 󰡔이중톈중국사 2권⋅국가󰡕, 󰡔이중톈중국사 3권⋅창시자󰡕, 󰡔이중톈중국사 9권⋅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참고).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자본주의가 생기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종교는 외부에서 전래된 타 민족의 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불교는 이미 중국에 존재하던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1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넓은 의미의 원시 도교였다.

사실 문화가 본래 ‘문명을 통한 교화’라는 뜻인 것처럼 종교도 중국어에서는 “어떤 교화를 종봉宗奉, 즉 우러러 받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릇 “도로 교화하는” 이론과 실천은 모두 넓은 의미의 도교였다. 선진先秦 시대의 제자백가와 훗날의 불교와 도교는 모두 이렇게 이해되었다.2

그것은 당연히 엄격한 의미의 종교religion가 아니었다.

원시 도교도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반은 사상, 즉 황로도黃老道였고 절반은 법술法術, 즉 방선도方仙道였다. 도교는 황로와 방선의 혼합이었다.

먼저 황로도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황로도는 황로지술黃老之術이라고도 불렸는데 간단히 말해 황제黃帝와 노자의 기치를 든 사상과 방법이었다. 황제와 노자를 연계시킨 때는 전국시대였고 그것이 크게 유행한 때는 양한 시대였다. 당시 황로도는 내용이 복잡하고 방대하여 대동大同의 사회사상과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정치이념에 주역철학, 신선사상, 음양오행의 관념이 다 합쳐진 잡탕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사조였다.

사조로서 황로지술이 한나라 초에 숭상을 받은 것은 당시의 통치자들이 청정무위와 여민휴식與民休息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어도 그들의 황로에 대한 태도는 역시 신봉이었을 뿐, 신앙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신봉조차 유가만 받들어지게 된 후로 점차 엷어졌다. 황로지술 속의 주역철학과 음양오행은 유가에 의해 흡수되어서 남은 것은 신선사상뿐이었다.

신선사상은 중국 고유의 것으로 다른 민족에는 신神만 있지 선仙은 없었다. 신과 선의 구별은, 신은 신이고 선은 인간이라는 데 있거나 신은 죽은 사람이고 선은 산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전에 나라와 민족에 큰 공을 세우면 죽은 뒤에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신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수련이나 약 복용을 통해 불로장생의 육체를 얻어 비상하면 그 사람은 신선이었다. 당나라의 한상자韓湘子와 여동빈呂洞賓이 그랬다.확실히 신을 봉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일이어서 개인은 신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선이 되는 것은 도교의 핵심이었다.

신선이 되는 꿈을 이루는 방식이 바로 방술이었고 방술을 아는 사람은 곧 방사方士였다. 방사는 전국시대 제나라와 연나라 일대의 연해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그들은 일반인이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진시황 때의 서복徐福은 선약仙藥을 구할 수 있었고 한 무제 때의 난대欒大는 귀신과 통했으며 조조 때의 좌자左慈는 신출귀몰했다. 요컨대 그들은 기이한 비방이나 비술을 갖고 있어서 천하를 주유하며 군주나 제후와 사귈 수 있었다.

그들 중에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기인이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방술이 단순하게 샤머니즘과 같지는 않다는 것은 긍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의라 불린 화타華佗도 방사였다. 실제로 고대 중국에서 샤머니즘과 의술은 흔히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이른바 방술은 신비화되고 샤머니즘화된 과학기술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방중술房中術을 예로 들어보겠다.

방중술은 사실 성과학이자 성 기술이었다. 도교에서는 성생활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법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섹스의 의의는 생육이나 쾌락이 아니라 양생養生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섹스는 합기合氣, 즉 남자의 양기와 여자의 음기를 조화시켜 양기로 음기를 보완하고 음기로 양기를 보완하는 이중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살을 맞대고 체액을 교환하는 방식으로만 실현되므로 성생활은 필수불가결했다. 다만 시의에 안 맞거나 절제를 모르거나 요령이 없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금기가 있어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했다. 삽입의 깊이, 피스톤운동의 속도, 오르가즘의 시점 등이 다 고려 대상이 되었다. 결국 방중술을 잘 알면 수명을 연장하고 젊어져서 심지어 신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술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실천했을 것이다. 비록 신선이 될 수 없어도 신선이 되고 싶고, 신선이 되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신선이 되는 것과 방술의 관계는 대체로 이랬다.

이것이 바로 방선도였다.

방선도의 내용에는 당연히 방중술만 있지 않았다. 적어도 복식服食과 행기行氣가 더 있었다. 행기는 우선 한의학에서 창시한 일종의 호흡 방법으로 그 목적은 탁한 기를 뱉어내고 맑은 기를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즉, 오래된 것을 내보내고(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納) 것이어서 간단히 토납吐納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토납을 할 때 곁들이는 체조는 도인導引이라 했으며 여기에 안마까지 곁들여서 통틀어 행기라고 불렀다.

복식도 복약服藥과 복단服丹, 두 가지를 포함했다. 약은 영지버섯 같은 초목이었고 단은 단사丹砂 위주의 광석이었다. 약은 몸을 튼튼하게 해주지만 단은 신선이 되게 해주므로 따로 선단仙丹이라 불렸다. 가장 좋은 금단은 먹은 뒤 사흘이면 신선이 됐는데 그 이름은 구전금단九轉金丹이었다.

‘구전’은 반복적으로 가열하고 정련하는 것을 뜻하며 단은 세발솥인 노정爐鼎에서 만들었다. 단사 등의 원료를 정련해 만든 것은 이름이 외단外丹으로, 주요 화학성분이 납과 수은이어서 복용하면 신선이 되기는커녕 중독이 되곤 했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또 인체를 노정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정精, 기氣, 신神을 재료와 화롯불로 삼아 정련해낸 결과를 내단內丹이라고 했다. 훗날 남송 전진교全眞敎의 남북 두 종파가 모두 외단을 배척하고 내단을 주장했다.

복식, 행기, 방중술은 진한秦漢 시대 방술의 3대 추세였다. 그밖에도 방술은 천문(점성술 포함), 역술, 점복, 관상, 풍수, 연금술 등을 다 포괄했다. 도교는 그 잡동사니들을 죄다 받아들였고 적잖은 것들을 황제의 발명이나 노자, 장자의 주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방선도와 황로도는 이렇게 하나로 합쳐졌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종교가 아니었다. 실제로 방선이든 황로든 가장 중시한 것은 신선이 되는 것과 양생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단지 개인과 관련이 있는데 종교는 사회에서 조직적 행위가 있다. 만약 황로도와 방선도가 사회 대중 및 국가 사무와 전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면 영원히 방술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래서 재초齋醮와 부록符籙이 발명되었다.

재초는 일종의 제사로서 제단을 차리고, 공양을 하고, 향을 사르고, 부적을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등의 절차가 있었으며 목적은 복을 빌고 화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재초는 위로는 천자, 가운데는 각급 관원들, 아래로는 백성을 수혜자로 삼아 그들을 완전히 동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대중적 토대를 가진 도교에서 재초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부록은 붉은 먹으로 종이에 적은, 글자와 유사한 도형이었다. 불에 태우면 신과 통하고, 귀신을 쫓고, 비를 부르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이것은 신선이 되는 것보다 더 사회의 수요를 만족시켰다. 실제로 최초의 도교 조직이었던 천사도天師道와 태평도太平道(󰡔이중톈중국사 9권⋅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참고)는 이 부록의 신비한 작용에 힘입어 많은 신도를 끌어들여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부록은 훗날 일종의 제도가 되었다. 천사도는 규정하길, 어떤 사람이 일정한 의식에서 정식으로 부록을 받아 몸에 지니면 그 조직에 가입해 교단의 일원이 된 것을 뜻한다고 했다. 우리는 종교의 지표 중 하나가 교단 조직이며 역할 중 하나는 아이덴티티의 승인(󰡔이중톈중국사 2권⋅국가󰡕를 참고)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록 제도를 가짐으로써 방선도는 종교와 겨우 한 발짝 거리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한 발짝은 역시 어마어마하게 멀었을 것이다. 어쨌든 종교는 중국에서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이 불가능했고 황로도와 방선도도 필연적으로 종교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외부 세력의 자극과 타자의 시범이 없었다면 천사도든 태평도든 생겨나기는 했어도 그저 샤머니즘에 의지해 유지되는 민간조직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잘못했으면 사교邪敎가 되었을 것이다.다행히도, 불교가 전래되었다.

4-2 불교의 전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역대로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서한 애제哀帝의 원수元壽 원년(BC 2년)이다. 그해에 어느 박사博士의 제자가 대월씨大月氏에서 온 사신이 󰡔부도경浮屠經󰡕을 구술하는 것을 들었다. 부도는 사실 붓다Buddha이며 대월씨의 사신이 구술한 것은 석가모니의 삶에 관한 이야기로서 훗날 알려진 전설과 차이가 없었다.3

이것이 비교적 믿을 만한 가장 이른 전래 시기이다.

그러면 가장 늦은 시기는 언제일까?

동한 명제明帝 시기이다. 명제가 불법을 구하러 인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전설에 불과해도 그의 동생,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붓다를 숭상하고 왕궁에서 재계하며 예불을 올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당시 불교의 영향력이 이미 작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교 최초의 경전인 󰡔태평경太平經󰡕이 탄생한 것은 적어도 반세기 뒤였다.4

천사도와 태평도가 종교조직이 된 것은 더 나중이었다.

따라서 도교의 창시자가 불교에서 힌트와 영감을 얻고 심지어 그것을 본받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도교의 창립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반대로 불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을까? 미안하지만 역시 없다.5

사실 불교의 영향을 빼놓고는 천사도와 태평도가 어떻게 약속이나 한 듯 뜬금없이 생겨났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종교가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며 자신들이 종교를 만들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남이 어떤 것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도 가져야 하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래서 도교는 발전 과정에서 계속 불교를 본받았다. 불교에 사원이 있어 도교에 도관道觀이 생겼고 불교에 승려가 있어 도교에 도사가 생겼으며 불교에 가사가 있어 도교에 도포가 생겼다. 그리고 불교에 석가모니가 있어 도교는 부득이 노자를 떠받들었다. 사실 노자는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했느냐는 것조차 확실치 않으며 종교와는 더더욱 무관했다. 하지만 그래야만 도교는 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었다.6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그닥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 문화는 본래 학습할 필요가 있고 심지어 베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일은 도교가 불교를 그대로 따라했는데도 불구하고 동한 시대에는 후자가 전자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었다. 물론 처음 시작된 도교, 즉 도교 전의 도교인 원시 도교로 간주되었다.

그런 불교는 부도도浮屠道라 불렸다.

부도도는 바로 외국의 황로도였으며 그것은 동한 시대 상류사회의 보편적인 견해였다. 그래서 초왕 유영과 훗날의 한 환제桓帝는 다 황로와 부도를 함께 떠받들었다. 그들의 궁 안에는 황로의 사당과 부도의 사당이 다 있었다.7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아직 종교를 접한 적이 없는 중국인은 기존의 지식에 따라 그 수입품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승려를 도인道人(도교의 성직자는 도사로 불렸음) 등으로 불렀다. 더구나 불교가 주장하는 사대개공四大皆空(세상의 모든 현상이 공허하다는 뜻)과 상락아정常樂我淨, 청정무위와 매우 흡사했다.8

하지만 차이도 매우 컸다.

도교의 목적은 신선이 되는 것이었는데 불교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이었다. 신선과 부처는 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래서 이 둘을 뜻하는 한자(仙, 佛)는 다 사람 인(人) 변을 갖고 있다. 이것은 도교와 불교의 공통점이면서 그것들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핵심이다. 다시 말해 불교와 도교는 다 인본주의적이며 이것은 중국문명의 정신에 부합하였다(󰡔이중톈중국사 3권⋅창시자󰡕를 참고).

그러나 신선과 부처는 크게 다르기도 하다.

신선의 특징은 죽지 않는 것이며 부처의 특징은 깨달음이다. 어떤 사람이 최고의 지혜를 깨닫기만 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자각(자신의 깨달음), 각타覺他(타인을 깨닫게 하는 것), 각행覺行(깨달음의 과정과 행위가 원만한 것)을 다 이뤄야 부처이다. 자각과 각타만 이뤘으면 보살(Bodhisattva)이고 오직 자신만 깨달았으면 나한羅漢(Arhat)이다.

나한, 보살, 부처는 다 죽는 존재이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부처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열반(nirvāna) 또는 원적圓寂(Parinirvāna)이라 불렸다.

이것은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사실 죽음은 죽음이고, 원적은 원적이고, 열반은 열반이다. 원적의 본래 뜻은 ‘원만한 적멸寂滅’이다.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로서 산스크리트어에서의 본래 뜻은 바람에 흩어지고 불이 꺼지는 것이어서 결코 죽음이 아니다. 정반대로 생사, 시공, 희로애락과 일체의 경험을 초월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부득이 열반이라고 부른다.

열반에는 4가지 덕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상락아정이다. 간단히 말하면 죽지도 살지도 않는 것이 상常이고, 영원히 고통이 없는 것이 락樂이고, 본성이 변치 않는 것이 아我이고, 한 점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 정淨이다. 확실히 불교의 목적은 사람을 신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상태가 바뀌면 적어도 나한이 된다.

나한과 신선은 전혀 다르다.

불교와 도교는 역시 전혀 달랐다.

목적만 다른 게 아니라 방법과 경로도 달랐다. 예를 들어 도교는 수일守一을, 불교는 선정禪定을 중시했는데 이 두 가지는 다 정신의 집중과 한결같음을 요구하여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수일은 정, 기, 신이 새고 확산되는 것을 방지해 불로장생을 보장한다. 하지만 선정은 정력을 집중해 특정 대상(연꽃이나 여러 부처들)을 관조함으로써 최고의 지혜를 얻는다.

확실히 수일은 양생이며 선정은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정혜定慧(선정과 지혜)를 함께 운용하는 것을 중시했고 도교는 성명性命을 함께 닦는 것을 중시했다. 성性과 명命은 신神과 형形, 즉 정신과 신체이다. 따라서 도교는 심신의 건강을 함께 추구했다.

이것은 당연히 훌륭한 사상이다.

선정은 선과 정을 합친 명칭이다. 선禪(Dhyāna)은 본말이 선나禅那이고 고요한 생각을 뜻한다. 정定은 기다림이며 다시 말해 집중이다. 그리고 혜慧(Mati)는 밝은 관찰이자 결단이다. 이 세 단어를 이어놓으면 고요히 생각하고(선) 정신을 집중해 탐구하고 나서(정) 미혹을 끊고 밝게 살핌으로써(혜) 불교에서 추구하는 반야般若를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반야(Prajñā)는 지혜, 혹은 지혜를 통해 열반의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생사는 미망의 세계로서 차안이며 열반은 해탈이고 피안이라고 생각한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는 것은 바라밀다(Pāramitā)라고 한다. 그리고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려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智는 세상일을 인식할 수 있고 혜慧는 속세의 법칙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반야이다.물론 반야는 속세의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반야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부처가 되는 데 필요한 특수한 인식이다. 최고의 지혜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은 이는 심지어 붓다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부처가 못 돼도 나한이 될 수는 있다. 관건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리고 끝없는 고해에서 해탈했는지에 있다.9

이 문제는 더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이중톈중국사 14권󰡕을 참고) 불교와 도교의 차이는 매우 확연하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고 도교는 생명의 종교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도교는 사람이 살면서 신선 같은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지만 불교는 영혼의 안정과 추구에 더 주목했다. 그래서 불교는 복식과 행기 같은 것은 중시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혜와 방술은 서로 무관하다.

종교에 필요한 것은 귀신 놀음이나 연금술이 아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본인도 샤머니즘에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제자들이 주술을 행하면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그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지는 않았다. 소승불교에서도 대승불교에서도 모두 부차적인 방식으로 주술을 남겨두었다. 브라만교와 결합한 밀교 같은 경우는 샤머니즘을 고도로 조직화하기도 했다.10

하지만 종교는 본질적으로 샤머니즘이 아니다. 그것이 계속 샤머니즘과 결탁해 분간하기 어렵다면 종교로 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종교는 순수할수록 샤머니즘과 거리가 멀다. 중국의 선종이 바로 그랬다. 설령 선종이 진정으로 순수한 종교가 아니고 철학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선종은 불교가 외래문화로서 중국화가 필요했기에 탄생했다. 유학화된 선종은 그 중국화의 세 번째 행보였고 현학화된 반야학은 두 번째 행보였으며 샤머니즘화된 부도도는 첫 번째 행보였다. 첫 번째 행보는 황당해 보이기는 해도 그것이 없었으면 불교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물론 중국사의 이야기가 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첫 번째 행보를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