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의 신석기가 한국에서 발견

 

네이버 백과 사전에 보면 세계최초의 마제석기(갈아만든 석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http://100.naver.com/100.php?id=141613 )

 

" 가장 선진적인 것은 이란 서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아나톨리아 남부 ·팔레스티나 등으로, 그 곳에서는 BC 9000년경에 석기의 마제법이 고안되었다."

 

즉 세계최초의 마제석기(갈아만든 석기)가 약 1만 1천년전에 아랍에서 생겼다는 것인데

 

약 2만년전의 마제석기(갈아만든 석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세계최초의 신석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동아일보 2004-5-13]

 

전남 장흥군에서 약 2만년전 신석기 유물 출토

 

후기구석기 유적서 간돌 첫 출토


우리나라의 전형적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마제석기)이 여러 점 출토돼

마제석기(신석기)의 최초 사용 시기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李起吉)은 13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만8500년 전∼2만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이 출토 됐다고 발표했다.

발굴된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점,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 자귀 2점,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이 나온 가장 오래된 유적은 1만 2천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다.

 

따라서 이보다 최대 1만년 앞선 신북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다.

 

국내에선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가 출토 됐지만

마제석기의 제작도구까지 함께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대 박물관 이기길 관장은 “이번 발굴로 신석기시대 이전에도 마제석기가 사용됐음이 확실해졌다”고 밝혔다.

(펀주: 한국 신석기 시대가 지금까지의 예상보다 사실은 훨씬 더 일찍 시작했다는 말.)   

세계적으로 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함께 발굴된 경우는 일본 나가노현 간노키 유적과 히비야 유적 정도다.

(펀주: 원래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일본으로 계속적인 문명전파 가 있었읍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출처 -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405130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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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4년 5월 13일]
 

지난해 7월부터 전남 장흥군 신북 유적(4만여평)을 발굴 조사해온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은

최근 이 유적지에서 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좀돌날몸돌, 밀개, 새기개, 슴베찌르개 등의 타제석기 3만여점과 함께

간돌자귀, 숫돌, 둥근 홈석기 등 마제석기(간석기) 20여점을 발굴 했다고 13일 밝혔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약 2만2천년 전 인 후기 구석기시대로 밝혀졌다.

 

이는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사용됐다 는 학계의 통설과 달리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에 갈기(마제)로 석기를 만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주목된다.

 

 

 

 

이기길 박물관장은 “우리나라에서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마제석기가 다양하게 그리고 세트로 발굴되기는 처음”이라며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널리 쓰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현행 역사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중대한 발굴”이라고 말했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도 “구석기 유적에서 마제석기가 발굴된 것은

‘구석기=타제석기, 신석기=마제석기’의 등식을 깨뜨리는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신북 유적은 세계 구석기학사에서 일본에 이어 후기 구석기시대에 마제석기가 나온 곳이어서 일본 마제석기의 원류를 추적하는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주: 일본의 마제석기문명은 한국의 마제석기문명이 건너간 것이라는 말.) 

박물관측은 이와 함께 신북 유적지에서 구석기인들이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었던 화덕자리 6개를 발굴, 이 지역이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규모 살림터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출처 - http://www.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5131841341&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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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타임스 /2004년 07월 14일

 

http://www.jhtimes.net/

 


-‘타제석기(뗀 석기)는 구석기시대, 마제석기(간 석기)는 신석기시대 유물이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같은 역사 상식이 머지않아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남 장흥군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마제석기가 대량 출토돼 ‘마제석기=신석기 유물’이라는 등식을 여지없이 깨뜨렸기 때문이다.

 

관련 학계는 이를 세계고고학사의 기념비적 유적으로 보고 국제심포지엄을 준비하는 등 흥분하고 있다.-

 

이상은 중앙일간지(문화일보 2004.05.31)가 소개한 '장흥군 장동면 신북리에서 출토된 구석기 유물'에 대한 기사의 첫 대목이다.

 

바로 이 신북리 후기 구석기 유적 발굴을 기념하는 국제 학술대회가 지난 6월 22∼24일 장흥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새로운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유적 발굴 1년만에 그 성과를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 이같은 단기간의 학술대회는 세계에서 처음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근맥()”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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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 (출처 :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

 

태고의 만남을 가려낸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의 매혹
유라시아를 횡단하다
 

유물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고 시비를 가려내는 판관이다. 그 값어치는 시간이 올라갈수록 더 높다.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우연히 빗물에 씻겨나간 빗살무늬토기(일명 즐문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예순 곳 넘는 데서 이런 종류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연구 결과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토기로서, 이 시대를 ‘빗살무늬 시대’라고도 한다. 그만큼 이 토기는 우리의 문명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문화유물이다.

일찍이 1920년대 북유럽의 핀란드와 스웨덴, 북부 독일, 폴란드 등지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토기가 발굴되어 핀란드의 고고학자 아일리오는 그것에 독일어 ‘캄케라믹’(kammkeramik: 빗살무늬토기)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뒤 북방 유럽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동서쪽 광활한 지역에서도 그러한 토기가 속속 발굴됨으로써 ‘캄케라믹’은 빗살무늬토기 일반에 대한 학명으로 굳어졌다. 이 토기는 주로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위 55° 이북 지역에 하나의 문화대를 이루고 있어 일명 ‘환북극(環北極) 문화’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빗살무늬토기는 거석문화권과 채도문화권, 세석기문화권과 함께 신석시 시대 4대 문화권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

 

시베리아 고아시아인이 전한 신석기시대 세계문화의 꽃
“한반도 토기가 연대 더 빨라 시베리아로 역류했을 가능성도”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항아리들

빗살무늬토기란 토기의 겉면에 빗살 같은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토기를 말한다. 이러한 무늬는 여러 가닥이 난 빗살 모양의 무늬새기개로 그릇 겉면에 짤막한 줄을 누르거나 그어서 만든다. 그런데 북유럽의 토기에서 보다시피 왕왕 빗살무늬와 함께 가는 참대관이나 새뼈 같은 것으로 둥근 구멍을 찍은 무늬, 즉 타래무늬(일명 와문)가 새겨져 있어 ‘타래무늬토기’라고도 한다. 그릇 형태는 대체로 초기에는 뾰족바닥의 반달걀 모양이나 점차 깊은 바리바닥 모양으로 바뀐다. 이러한 토기는 지역에 따라 무늬나 모양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 제작 편년이 들쭉날쭉하지만, 신석기 시대의 주요 용기로서 신석기 시대가 지난 뒤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빗살무늬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4천년부터 1천년 사이에 주로 산림이 우거진 강하천 주변에서 수렵과 어업을 주된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여졌다. 아직까지 이 질그릇의 발원지가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포지에 관해서는 거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어 그 교류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 분포지를 살펴보면, 북유럽의 핀란드로부터 출발하여 서북 러시아의 오카-볼가강 상류 지방을 거쳐 우랄 산맥을 넘은 다음 중부 시베리아 오브강 하류의 지류인 라핀강 유역으로 뻗어나간다. 이 분포양상은 계속 동진하여 예니세이강 중류를 지나 바이칼호에 이른다. 거기서 동남쪽으로 꺾어 몽골초원이나 헤이룽(흑룡)강을 지나 한반도로 남하하였는데, 그 여파는 일본 규슈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분포지에 관한 고찰이지 결코 유동방향은 아니다. 만약 이것을 유동방향으로 착각하면 이 토기가 서방에서 발원해 점차 동방으로 전파된 이른바 ‘서방기원설’로 오도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사와 관련해서는 더욱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초보적 연구결과들을 보면 우리의 것이 시베리아의 것보다 천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아직은 섣불리 그러한 ‘서방기원설’을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발원지나 유동경로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석기 시대에 북방의 드넓은 지역에 동서로 빗살무늬토기대가 형성되어 문명교류사의 서장을 장식했다는 사실이다.


△ 핀란드 소로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로 우리 토기와 무늬의 배열양상이 다르다.

우리는 이 문화대의 동쪽끝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북방 초원지대와 교류하고 문명을 공유했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태초부터 인류와 더불어 문명사를 엮어왔다는 극명한 증좌다.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북방 유라시아의 빗살무늬토기 사이에 구체적으로 몇 가지 공통요소가 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우선, 무늬의 공통성과 유사성을 들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빗살무늬인데, 우리의 것은 신석기 시대 전반에 걸쳐 보편화되었으나, 유럽은 신석기 시대 토기의 제1기에만 지배적인 무늬로 나타난다. 타래무늬의 경우, 대·소타래무늬의 2종이 있는데, 유럽에서는 주로 토기 제2기에 나타나나, 한반도에서는 시기에 관계없이 골고루 나타난다. 그밖에 빗살무늬와 타래무늬를 엇바꾸는 교대배열 형식에서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무늬가 한국 토기에서는 입 가장자리에 집중되고 있으나 유럽의 것은 배면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릇 모양에서도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에 곧은 입술의 반달걀 모양으로서, 이것은 빗살무늬토기의 원초적 형태에 해당한다. 북유럽이나 시베리아의 초기 빗살무늬토기도 거개가 이러한 형태이기는 하나, 후기에 와서 점차 바닥이 깊은 바리 모양을 띤다. 끝으로 입 가장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은 공통된 수수께끼다. 남북한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의 입 가장자리에는 구멍이 한두 개, 또는 그 이상이 비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뚫려 있다. 이러한 구멍은 북방 유라시아의 빗살무늬토기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 구멍의 쓰임새에 관해서는 뚜껑을 비끄러매거나 어디에 달아매기 위해서라느니, 장식용이라느니, 깨진 곳을 수선한 자국이라느니 등 여러 설왕설래가 있어 아직 정설은 없다.

이러한 공통성과 유사성이 바로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지닌 세계성이며, 이로 인해 우리 겨레는 아득한 그 옛날부터 남들과 만나고 어울려왔으며, 드디어 신석기 시대 세계적 문화권의 하나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의 의젓한 일원이 되었다. 따라서 유구한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들과의 소통을 주선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이 빗살무늬토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극히 소박하고 원시적인 이 질그릇에 의한 세계와의 첫 만남이 우리 겨레의 역사, 특히 교류사에 남긴 의미는 그만큼 오롯하다고 하겠다.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주역은 시베리아 초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고아시아인들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들에 의해 주도된 이 문화가 그들의 이동에 따라 북방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퍼졌으며, 급기야는 우리의 한반도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요컨대, 빗살무늬토기의 전파는 고아시아인들의 한반도 유입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자생 토착문화에는 북방 초원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요소가 가미되어 고대 우리 문화를 더욱 살찌게 했던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의 제작 연대가 상대적으로 시베리아의 그것보다 더 오랠 수도 있다는 추정은 일찍부터 찬란하게 꽃피웠던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로 역류되어 빗살무늬토기 문화 전반을 더욱 빛나게 했을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에는 종종 이러한 상승적인 역교류(逆交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석기 시대에 고아시아인들과 함께 일구어놓은 빗살무늬토기 문화는 적어도 청동기 시대 이전까지 우리의 고대문화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우리의 사대주의 유습에 일침을 놓는 질그릇의 엄정한 증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역사적 만남의 시비를 가려낸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거석문화사에 우뚝 선 고인돌


△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에있는 고인돌인 사적 137호 강화지석묘. 한겨레 자료사진

다음세상 꿈꾼 한반도 불멸의 넋
 

흔히들 돌을 무지나 아둔함, 그리고 무언에 빗댄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가 스며들었을 때, 돌은 ‘불멸의 상징’이나 ‘수호신’ 으로 둔갑되기도 하고, 말도 한다. 그래서 버려졌던 큰 돌들이 인간의 주목을 받고, 인간은 이러한 돌들과 긴 시간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그 역사는 백년도 채 안된다.

거석이란 선사 시대에 무엇을 기리거나 상징하기 위하여 큰 돌로 만든 구조물, 즉 거석기념물을 말하며, 이러한 거석기념물을 수반하는 여러 문화를 통칭 거석문화라고 한다. 원래 거석기념물은 유럽의 대서양 연안지대에서 발견된 거석분묘나 원시 신앙과 관련된 각종 거석유물을 가리켰으나, 지금에 와서는 유럽뿐만 아니라, 그밖의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거석유물들을 통틀어 일컫고 있다. 거석문화는 대체로 신석기 시대에 출현하여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 시대 초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생존해온 끈덕진 문화다.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의 일부 도서 지방에서는 여전히 거석기념물을 축조하는 이른바 ‘살아있는 거석문화’가 남아있어 생생한 연구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거석기념물은 지역에 따라 제작 편년이나 형태 및 기능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체적으로 유형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긴 기둥 모양의 돌 하나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독석)와 돌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한 개 가로얹은 트릴리톤, 그리고 돌을 여러 개 세운 위에 평평한 뚜껑돌을 얹은 돌멘이 있다. 일명 지석(支石)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 돌멘은 좁은 의미에서 거석기념물을 뜻하리만큼 거석기념물 중에서 가장 많고, 또 분포지도 제일 넓다. 그래서 거석문화 연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돌멘 앞에 큰 돌로 출입하는 통로를 만들고 봉토를 쌓은 코리도툼과 기둥 모양의 돌을 여러 줄 배열한 알리뉴망(열석), 여러 개의 돌을 일정한 간격에 따라 원형으로 둘러서게 한 크롬렉(환상열석)도 있다. 그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도 거석기념물에 속한다.


△ 자료: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2001)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흔하고 무덤덤한 무생물인 돌이지만, 인간의 요리에 의해 문명의 한 화신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몇 가지 의미있는 문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선, 거석은 고대인의 묘장법(墓葬法)을 증언한다. 돌멘과 같이 그 자체가 분묘인 것도 있고, 묘의 통로로서의 코리도툼도 묘장법의 일부다. 멘히르는 묘의 표지이기도 하지만,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남근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 배치된 거석은 종교적 행사용이고, 원형의 크롬렉은 태양 숭배를 의미하며, 어마어마한 거석은 악마로부터 시체나 영혼을 수호하기 위한 성역(聖域)으로 풀이된다. 이와 더불어 육중한 거석은 위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기능과 의미 때문에 거석기념물은 하나의 보편성을 띤 복합적 문화를 형성하고 장기간 존속되어 올 수 있었다.

거석기념물은 북유럽과 서유럽으로부터 지중해 연안과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를 거쳐 멀리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동서 광활한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범세계적 문화권을 이루고 있다. 그 편년을 보면 유럽과 지중해 일원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그 이동 지역은 청동기 이후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자칫 거석문화의 ‘서방기원설’이나 ‘동전설’을 유발시킬 수 있는데, 아직은 그 확실한 전거가 잡히지 않고 있다. 문명의 전파는 단순한 편년의 차이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 거석유물은 주로 큰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으면서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남방의 양석(陽石)해양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소속이야 어떻든간에 거석문화는 오래된 하나의 큰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권은 자생한 것인지, 아니면 교류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생치고는 문화의 보편성이 너무나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넓은 지역에서 실현된 것이 못내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교류에 의한 것이라면, 엄청난 거석이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시점에서 추단할 수 있는 것은 자생설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거석의 이동이 아닌 그 문화 창조자들의 이동이나 만남에 의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석문화권의 중추에 우리 한반도가 우뚝 서있다. 중국 동북 요녕 지방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서부의 규슈 지방을 망라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른바 ‘고여있는 돌’이란 뜻의 고인돌(돌멘)이 수많이 발견되는 까닭에 이 지역을 ‘동북아시아 돌멘권’이란 하나의 거석문화 분포권으로 묶을 수 있다. 이 분포권에서 우리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도 가장 많다.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부장품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만 5천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 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 기밖에 안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 4만 기(북한에 1만 4~5천 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 중 전남 지방에서만 발견된 것이 2만여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997호로 등록하였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 된다.


△ 영국남부 웨섹스 지방의 환상열석(스톤헨지) 복원도. 태양숭배와 관련된 거석기념물로서 원내구조물은 하지의 일출을 관측하기 위한것으로 보고있음.
<선사의 세계>(일본 간담사1994)에서)

한반도에서 출토된 고인돌의 형식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두 개의 세움돌(지석) 위에 한 개의 가름돌(횡석)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북방식)과 지상에 놓인 바둑판 같은 가름돌을 몇 개의 작은 돌로 괸 기반식(基盤式, 남방식)으로 대별하며, 그 중간형식으로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도 있다. 고인돌과 함께 각종 무문토기와 석기류, 옥, 맷돌, 짐승과 사람의 뼈,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와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의 고인돌은 신석시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주로 분묘나 제단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며, 숭배 대상이나 수호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해발 80미터의 고지 위에 홀로 서있는, 가름돌 무게만도 50톤(운반에 4백명 인력이 필요)이 넘는 황해남도 관산리 고인돌 같은 거석은 어떤 권력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돌멘의 기원에 관해서는 남방의 벼농사 문화와 함께 전해졌다는 남방기원설과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상자식 돌관에서 원류를 찾는 북방기원설, 그리고 자생설의 세 가지가 있다. 아직은 어느 것 하나도 논거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고인돌이 거석기념물 본연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지역 거석문화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  (위로부터) ○고창 도산리 야산 꼭대기 인가 옆의 북방식 고인돌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있는 약 550개의 인면석상.
한겨레 자료사진

이와 같이 고인돌은 그 옛날 우리 겨레의 삶을 지켜주고 빛낸 값진 문화유산이기에 후손들은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해 왔다. 전라북도 고창군 지동마을 능선에는 훤출한 위용의 탁자식 고인돌(이른바 ‘도산리지석묘’) 하나가 서있는데, 사람들은 망북단(望北壇)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이 마을에서 태어난 송기상(宋基想)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진군하던 중 굴욕적인 화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되돌아와 호국충절을 다지며 평생토록 이 고인돌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망북통배’(望北痛拜, 북방을 바라보면서 통한의 예를 올림)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땅의 고인돌 하나하나에는 이처럼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얼과 넋은 겨레의 갈라짐을 넘어딛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2년 전 남북한 고인돌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던 만남의 물꼬를 트는 순간이었다. 반 세기란 한맺힌 세월이 고인돌의 이름으로부터 그 기원과 편년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얕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본의 아니게 하나의 역사를 놓고 서로 다르게 둘로 써왔다. 어찌 고인돌뿐이랴. 우리 겨레 앞에 나선 숙명적 과제는 하나를 둘 아닌 하나로만 되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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