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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근맥()”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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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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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유산, 한의학 역사에 대해

 

-개 요

 

홍산배달문명 한웅시대(神市時代)와 요하문명 단군시대(朝鮮時代)에 농업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임명받은 염제(炎帝) 신농(神農;BC3,218-3,078)씨가 있었고, 질병치료의 기술을 임명받은 황제(黃帝) 헌원(軒轅;BC2,692-2592)씨가 있었고, 길흉화복의 예견을 임명받은 태호(太昊) 복희(伏犧)씨가 있었다. 이들 3인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아닌 한단시대(桓檀時代)의 실존인물로서 한웅천황(桓熊天皇)과 단군임검(檀君壬儉)의 신하들이었다. 이들은 한웅천황과 단군임검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한 분야의 책임자로서 모두 배달겨레 한단족(東夷族)이였었지만, 쥐나역사는 이들을 삼황(三皇)으로 추앙하고 있다. 특히 황제 헌원은 한단시대에 청구풍산(靑邱風山)에서 스승인 자부진인(紫府眞人)에게서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황내문경에는 폄석술과 폄구처(경혈) 및 침구술의 경전들인 선도술(仙道術), 천부경(天府經), 사암경(舍巖經), 맥구경(脈灸經)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기전 3000~2000년경 배달쥬신족의 동이인 3황 중, 태호복희씨의 팔괘사상의 창안과, 신농의 염제가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처음으로 발견,조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들의 연구와 조사가 입으로 전해져 후에 그 뜻을 이어받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신농본초경'이야말로 약용식물의 발전의 기초가 되는 본초서의 시초이다. 이후 배달쥬신족의 중원대륙왕조에서는 신수본초,증류본초,가우본초를 시작으로 많은 본초서가 출판되었다. 그 후 이들을 보충개편하여 짱골라의 쥐나왕조 명나라에서 본초강목이 1596년 이시진에 의해 출산되었다. 1611년 이씨조선에서 더욱 발전된 허준의 동의보감이 태어나게 된다. 

참고로 1923년 8월9일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웅기면(雄基面) 송평동(松坪洞) 패총(貝塚)”에서 BC3000년대의 돌침(폄석)이 발굴되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보존되고 있는 폄석(貶石)은 고고학적으로 세계 최초의 돌침이다. 

<돌침(폄석) 유물번호 제9199번 & 뼈침(골침) 유물번호 제 8420번>

배달쥬신족의 고대국가 한단시대에 폄석술(침구술)과 탕약이 쥐나로 전파 전수되었다는 사실은 마왕퇴에서 출토된 유물들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마왕퇴에서 출토된 2100여년전 [백서, 음양11맥구경] 중에서 일찍이 팔,눈,뺨,인후와 상호관련된 "귀의 맥"을 계시하였다.
이 때 벌써 11경맥과 경혈이 확정되어 있었고, 침술과 뜸술 또한 현대 침구학 이론과 별반 다른 점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의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책을 황제내경(黃帝內經)으로 꼽는다. 이 책은 배달겨레 황제(공손헌원)가 기백이라는 인물에게 묻고 대답하는 식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짱골라들이 자신의 의학 서적으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책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은 B.C 2~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저자가 미상인, 더군다나 한 사람이 쓴 책도 아니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수정된 의학 서적이다. 또한 이 책은 "황제내경"의 "황제"란 명칭 때문에 진시황의 진나라(배달겨레 흉노계 왕조) 때 분서갱유의 액난도 면하였다는 일담도 있다.
현재 황제 내경은 소문(素問) 81편, 영추(靈樞) 81편으로 구성되었으나 원래는 소문 9권만으로 돠어 있었고 영추는 없었다.

영추는 배달겨레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대(唐代)에 침경 9권과 소문을 합본하면서 소문 9권을 81편, 침경 9권을 81편으로 각가 나누면서 침경을 영추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침경에는 신라 문무왕 12년(662)에 침 400대를 당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침술학이 당보다 앞선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는 곧 침술은 우리 나라에서 발생시킨 의술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송사(宋史)《宋朝實錄》 17권중 철종본기(哲宗本紀)에 "고려에서 전해진 침경을 이어 받아 천하에 행하도록 했다(紹領高麗所獻鍼經于天下)"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근 쥐나 짱골라학자 용백견(龍伯堅. 1900-1983)이 쓴 황제내경 개론에 "고려의 침경 전래"에 의하면 영추경은 송(宋)나라 철종 8년(1093)에 고려가 전해준 침경 9권본을 사숭(史 )이 개편하여 영추경이라 하였다.

요즘 쥐나 짱골라학자들도 영추경이 고대 한웅배달국, 단군조선국에서 유래된 의술이란 것을 발표한바 있으며, 침술의 경전으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내경에서까지 침술의 발생은 배달, 조선임을 서술하고 있다.
[황제내경 소문 권 제4 이법방의론 제12장]에서 "폄석은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산해경]에서도 "동방에서 돌로 만든 폄석이 먼저 생산된다"라는 기록이 있고, [통현지요부]에서 "요동 동쪽에 폄석을 이용한 치료술(침술)이 발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쥐나의 고 역사서의 기록들도 침술의 발상지가 힌결같이 요동 동쪽 한단민족에서 발생,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배달쥬신 선조들의 유산을 모두 남의 것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는 세뇌당한 현세태가 참 한심하다.
짱골라의 왕조 한, 송, 명 3왕조와 이들 짱골라왕조를 제외한, 그 이전부터 중원대륙과 만주를 지배해 온 대부분의 우리 배달겨레 왕조들을 혼동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중원 대부분의 역사를 지배한 배달쥬신왕조들의 위대한 발견,발명,업적들은 우리 형제,민족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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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다. 그 외의 수많은 왕조는 배달쥬신이 이룬 업적이다. 배달,조선,요,순,하,상(은),주,춘추 전국,위,수(선비),당(선비),요(거란),금(말갈,여진),원(몽골),청(여진,만주) 등 수많은 배달쥬신일족들이 이룬 역사이다. 따라서 짱골라들 시대에 만들어진 발견이나 발명은 인정되나 그 외의 시대는 배달쥬신의 발견이나 발명이다. 시대에 따라 영토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다.
얼마나 못 났으면 남의 조상도 지 조상이라고 우기는 짱골라가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이는가....짱골라들이 역사조작한 것은 이미 2000년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될 상황에 처해 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 멸망으로 나아갈 뿐이지. 우리의 어리석은 과거의 역사가 잘 증명 해주지 .

 

북한은 모든 민간요법 등을 총망라하여 임상실험한 결과 효능있는 것을 정리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한의학과 접목하여 고려의학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반해 남한은 양의학만 중요시한 나머지 한의학이나 기치료, 민간요법 등을 등한시하여 현재에까지 발전없는 정체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 유럽과 미국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접목시켜 대체의학의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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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침뜸의 기원과 발전

(참조 : 침뜸의학개론. 구당 김남수 저) 

 

1. 침뜸의 기원

 

『황제내경』중 『소문{素問』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에 의하면 “동쪽 지역은 천지가 시작되는 곳으로서 생선과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이며 바다를 끼고 있다. 그곳 사람들은 물고기를 주로 먹고 짠것을 좋아하는데,모두 그곳에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그곳에서 나는 음식물을 즐긴다. 물고기를 많이 먹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중초(中焦)에 열사(熱邪)가 쌓이도록 하고, 소금은 혈을 손상시킨다. 그러므로 그곳 사람들은 모두 피부가 검고 주리(腠理)가 성글며, 그들에게 발생하는 병은 대부분 옹양(癰瘍)인데, 그것을 치료할 때는 폄석(砭石)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폄석은 동방에서 전래되었다." 란 구절이 있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북방자는 …<중략> ... 장이 차가워져 창만병(眼滿病)이 잘 발생하는데,이를 치료하는 데는 쑥뜸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쑥뜸 요법은 북방에서 전래되었다” 란 구절이 있다. 돌침,즉 폄석으로 병을 치병하는 것은 중원대륙의 동부 연해 일대에서 어업을 위주로 하는 민족에게서 유래되었고,뜸법은 중원대륙의 북부에서 목축을 위주로 하는 민족에게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방이란 중원 본토의 동방이니 한반도와 만주 등지를 지칭하고,북방이란 만주의 서부지대로부터 몽골 일대까지를 지칭한 것이다. 이는 침뜸술이 중원대륙 본토보다는 동방과 북방지역에서 먼저 사용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중원대륙에 전해져  중원대륙 본토의학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침의 기원

 

원시 자침도구로서의 석기는 폄석,즉 돌침이라고 한다. 소문(素問)』보명전형론(寶命全形論)에서는 “폄석은 크고 작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고,5‐6세기 무렵의 전원기(全元起)의 주(註)에는 “폄석은 고대의 외과치료법인데,그 이름에는 세 가 지가 있다. 하나는 침석(鋼石)이고,다른 이름은 폄석이고,또 다른 이름은 참석(鍵石)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예전에는 주철(鐘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돌로 침을 만들었다”라고 했다.

폄석을 질병 치료에 응용한 것은 원시시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석기의 특정과 같다. 중원대륙의 원시시대는 태고적부터 1만년 전까지의 구석기시대와 1만년 전에서 4 천년 전까지의 신석기시대로 나눌 수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첨상석기(尖狀石器)와 괄삭석기(刮削石器) 등의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여 옹앙(癰瘍)을 찔러서 째고 농혈(膿血)을 빼냈다. 이같은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서 석기로 찔러서 치료하는 응용범위도 점차 확대되어갔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돌을 갈아서 정교한 석침 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여 마침내 전문적인 의료기구인 폄석을 생산해냈고,이후 폄석의 용도는 날로 늘어났다.

돌침에 대해서 중원대륙의 고서 『산해경(山海經)』에는 “고씨(高民)의 산에는 옥이 많고 그 아래에는 돌침이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씨는 졸본부여(고구려) 사람들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폄석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패총에서 뼈침과 함께 구석기시대 유물에서 발굴되었다. 또 산동성(山東省) 일조현(日照縣)에 있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무텀 속에서도 폄석 두 자루가 발견되었다. 산동성 일조현에서 발굴된 폄석은 길이가8.3cm인 것과 9.1cm인 것으로,뾰족한 끝은 삼릉추형(三稜錐形)과 원추형(圓錐形)으로 나뉘어진다. 이것들은 피를 빼고 경기(經氣)를 조화시키는 데 상용되던 것이었다.

내몽골(內象古) 다륜현(多倫縣)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는 한 끝은 사릉추형(四稜錐形)으로 피를 빼는 데 사용할 수 있고,다른 한 끝은 납작한 호형인(孤形刃)으로 농양(膿瘍)을 절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4.5cm 길이의 평석 한 자루가 발견된 적이 있다. 폄석 실물의 발견은 자침의 기원이 원시시대라는 것을 밝혀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2) 뜸의 기원

 

북부지역은 풍한(風寒)이 혹독하여 선사시대 사람들은 불을 가까이 하여 따뜻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벌판에서 살면서 유식생활(乳食生活)이 습관화 되어 있어 복부한통{腹部寒痛)과 창만(脹滿) 등의 병에 잘 걸리게 되므로 열 치료는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뜸 치료법과 열 치료법이 발명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불에 가열한 돌덩어리나 흙을 신체의 어떤 부위에다 붙여서 국부에 온기를 전하였고,점차 나무껍질이나 건초를 연료로 국부에 고정적인 온열자극을 줌으로써 많은 질병을 치료하면서 뜸법을 형성시켰다. 쑥을 뜸 치료의 원료로 사용한 것은 그후의 일이다. 쑥은 어느 땅에서나 잘 자라고,마른 쑥잎은 불이 잘 붙으며,가공하여 저장하기가 용이하다는 등의 장점이 있어 뜸 치료의 주요 원료로 쓰였다.

신석기시대부터 일찍이 성행했던 일종의 ‘골복’(骨卜)이란 쑥을 태워 동물의 뼈 위에 놓아서 형성되는 반점의 무늬가 어떤 조짐을 이루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골복’은 그 채용한 원료나 시행방법이 모두 뜸술과 아주 유사하다.

하남협현(河南陜縣) 영호국묘(零號國墓)에서 출토된 춘추시대의 호형동기(孤形銅器)는 불을 취하는 데 쓰인 양수(陽燧)였다. 같은 묘에서 출토된 원반형의 동관(銅罐) 은 애융(艾絨)으로 양수에 불을 붙이던 것이었다. 그것은 비교적 완전한 고대 뜸 치료에 전적으로 사용된 기구이며 또한 그것은 출토된 유물 중에서 뜸에 관한 최고의 실물인 것이다.

 

2. 침뜸의 발전

 

1)침구(鍼具) 변화와 발전

 

사회의 생산력이 발전하고 의료의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폄석(砭石)의 종류도 점차 다양해지고, 골침(骨鍼)도 의료에 응용되게 되었고, 이밖에 죽침(竹鍼)과 도침(陶鍼)등도 의료에 응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속제의 도구를 사용하게 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러 금속침구〈金屬鍼具)를 이용하게 되었다. 중원대륙의 배달겨레 갈래왕조들 하夏) .상商) .주(周)시대에 이미 야금술(冶金術)이 발명되었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들어서 금속침구를 제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고 그후 야금술의 발달에 따라 철기(鐵器)가 보급되고 생산에 응용된 후 철침(鐵鍼)이 의료에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B.C. 400~200)에는 제철기술이 발전하여 침구의 제작과 응용은 상당한 단계에 도달하였다. 『내경(內經)』에 기술된 「구침(九鍼)」은 철기시대에 이르러 발전·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 금침(金鍼)·은침(銀鍼)·동침(銅鍼)·철침(鐵鍼)등이 출현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침구는 대부분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제(製)이다. 스테인리스 침은 강인하고 쉽게 녹슬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금속 제보다 우수하므로 오늘날 침뜸의 임상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2) 뜸 재료(材料)의 변화와 발전

 

뜸에 쓰인 재료는 최초에 일반적으로 니뭇잎 등을 이용했을 것이다. 쑥이 뜸의 주요 재료로 이용되게 된 것은 춘추·전국시대부터이다. 『맹자(孟子)』「이루{離樓」편에 칠년지병 구삼년지애(七年之病 求三年之艾)"라는 말이 있고 『영추(靈樞)』「경수(經水)」편에 기치이침애(其治以鍼艾)"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쑥이 뜸의 재료로서 그 당시부터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자(莊子) 「도척(盜跖)」에도 무병자구(無病自灸)로서 건신(建身)한다라는 말이 나와 있다.

 

3. 침뜸의학의 특징

 

1) 이론과 실천

 

침뜸의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침뜸이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몸에 익힌다는 것은 기술연마와 더불어 중요한 일이다. 이론과 기술은 수레 양쪽 바퀴와 같은 것으로서 서로 없어서는 안될 밀접한 관계에 있다. 지금까지 침뜸이 걸어온 역사를 더듬어보면 침뜸의 기술발전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고,새로 만들어진 이론이 다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침뜸이론을 경시하는 것은 수천년이나 된 귀중한 의료경험의 올바른 승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침뜸의학을 낳게 한 사상적 특징

 

정착농경을 주요 생활수단으로 해온 선인(先人)들에게는 사계절의 변화가 정상으로 운행되느냐 못 되느냐는 절실한 관심사였다. 비·바람 같은 천혜를 알맞게 향유 할 수 있을지 어떨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소문〈素問』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편에는 사계의 계절적 특정을 生(春)·長(夏)·收(秋)·藏(冬)으로 해석하여 이러한 사계 각각의 계절의 특징적인 활동을 ‘사기(四氣)’라고 하고,이에 따라 모든 생명활동이 영향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원대륙에서는 이러한 ‘기사상(氣思想)’이 춘추시대 말기(기원전 5세기)부터 노재(老子)와 장자(莊子)에 의하여 주장되어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과 더불어 삼라만생(森羅萬象)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시장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더욱이 음양론(陰陽論)과 오행설(五行說)에 의하여 철학성을 깊게 하여 침뜸의학의 시장적 배경으로 발전하였다.

장자(莊子)는 사람의 생(生)은 기(氣)의 모임[聚]이요, 죽음은 기(氣)의 흩어짐[散] 이다. 모이면 생이 되고,흩어지변 죽게 된다고 하여 (氣)의 사상에 근거한 생명관을 확립하였다. 침뜸의학의 이론체계의 대부분은 이 기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3) 사람과 자연에 대한 견해

 

사람은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음식물과 공기를 모두 자연계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천(天)과 지(地)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인간의 생명활동의 원천은 천과 지로 이루어진 대우주(大宇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영추(靈樞)』「사객(邪客)」편에는 “사람과 천지는 서로 응하고 있다·"라고 하였고, 또한 『소문(素問)』「육절장상론(六節藏象論)」편에는 “하늘은 사람을 양육함에 오기(五氣)로써 하고,땅은 사람을 양육함에 오미(五味)를 가지고 한다”라고 하였다. 어느 것이나 ‘기(氣)의 사상’과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 ‘천지인삼재사상(天地人三才思想)에 근거하고 있다.

 

4) 인체를 소우주(小宇富)로 본다

 

사람의 생명체를 대우주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는 견해에 기초하여 침뜸의학에서는 인체 내부의 구조도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로 생각한다. 인체의 각 장기(藏器),조직(組織 및 기관(器官)은 모두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전체로서의 유기적인 연결을 지닌 하나의 자연과 같은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인체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중심은 오장(五臟)으로 여기에 육부{六腑)가 배치되어 경락계통이 역할을 다함으로써 전체로서 통일성을 유지시키고 있다.

 

5) 『황제내경』의 성립과 이론적 발전

 

중원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산업의 진보와 더불어 경제,사회,정치,문화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학술사상도 이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 침뜸의학의 최고이며 체계적 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원형이 탄생되었다. 『황제내경』은 당시의 철학영역에서 침뜸[鍼灸]과 탕액(揚液),도인(導引),기공(氣功) 등에 공통되는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확립하고 침뜸의학 발전의 기초를 완성시켰다. 또한 의학이론뿐만 아니라 음양(陰陽), 오행(五行),기(氣),천인관계(天人關係:),형신관계(形神關係) 등에 대하여도 보다 앞선 탐구가 이루어졌다.

『황제내경』 중에는 당시의 세계적인 의학수준을 대폭 넘어선 내용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형태학분야에서는 인체의 골격,혈관의 길이,내장기관의 대소와 용량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현대의학의 수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현재의 해부학에 의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맥박 중에 기와 혈의 변화를 해독함으로써 기의 통로를 경락으로서 인식하고 침뜸의학의 기초를 쌓았다는 시실은 매우 중요 하다.

『황제내경』이 성립된 후 그 난해한 부분을 해설하는 입장에서 침에 의한 임상실천의 안내서로 작성된 것이 『난경(難經)』이다. 또한 후한(後漢) 말기의 저명한 의가(醫家)인 장중경(張仲景. 150~219)은 『내경』과 『난경』등의 이론을 더욱 많은 임상 체험과 결합하여 탕액분야로 발전시켜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후세의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圖要略)』을 펴냈다. 이 외에 역대의 의가는 이 『황제내경』과 『상한잡병론』을 기초로 여러 각도에서 침뜸과 탕액의 의학이론을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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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동북아시아 대륙, '몽골-만주-연해주-한반도'의 침뜸 역사

(참조 : 침뜸의학개론. 구당 김남수 저)

 

1.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우리 나라는 폄석(破石)을 중원대륙에 전할 정도로 침술이 발전하였고,또한 지리적 특성상 산야가 많아 다양한 약재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 약물에 대한 지식도 체계적으로 발전하여 다른 나라에서 의학을 배우러 오거나 외국에 의학사를 파견 하여 우리 의술을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평원왕 원년(564. 중원대륙 진무제 천가 5년)에 중원대륙 강남의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내외전(內外典)』,『약서(藥書)』,『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등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지총은 그후 일본으로 갔다고 문헌으로 전해진다.

백제에 『백제신집(百濟新集)』이 있었는데, 일본 의학서인 『의심방(醫心方)』권15 치폐옹방(治肺癰方) 제13에 『백제신집』의 내용을 인용한 기록이 유일한 단서일 뿐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는 침뜸과 서적을 중원대륙에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있고,신문왕 12년(692)에는 의학교를 설치하여 의시를 전문적으로 양성하였다고 한다. 일본 쪽의 문헌에 의하면 기기남마려(幾記男麻呂)가 신라에서 침술을 배운 후에 일본 황극왜왕(皇極天皇) 원년(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일본으로 돌아가서 침박사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신라의 침뜸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발해, 신라의 남북국시대에 이르러 정식 교육과정에 침뜸의학이 포함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삼국사기』「직관지(職官誌」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처음으로 의학을 두고 박사 2인에게 학생을 양성하게 하였다. 이때 교본으로 『본초경』,『갑을경』, 『소문』,『침경』,『맥경』,『병당경』,『난경』등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침뜸학을 비중 있게 가르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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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도 대장금이 있었을까? (출처 : 소년한국일보 / 작성자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
침술 발달·깨끗한 심신 단련으로 '장수 국가' 자랑

사람들은 누구나 늙지 않고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요?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공작새를 탄 신선이 약 단지를 들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강서대묘 벽화에도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삼신산으로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오래 사는 신선이 되기를 희망했으며, 오래 살 수 있는 약이나 비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사람의 몸은 약해지고, 병이 들어 죽게 된답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할 의사들이 필요하지요. 고구려에도 허준, 대장금과 같은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을까요?

 

 

◈ 침술이 발달한 나라

 

▲1) 오회분4호묘의 약 단지를 든 신선의 모습. 약 단지에는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선약(仙藥)이 들어 있다.

물론 있었습니다. 고구려 의사로 왜국에 건너가 왜왕의 어의가 된 모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백제 사람으로 왜국에서 활동한 소수니라는 여의사는 부인병 치료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고구려에도 대장금, 소수니와 같은 여자 의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특히 침술이 발달했는데, 안작득지라는 분은 침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고구려 의사는 한 치의 머리털을 갈라 10여 가닥으로 만들어 그곳에 보이는 빈틈까지 찌를 정도로 기술이 절묘했다고 중국 기록에 전해 옵니다. 고구려의 약재인 인삼, 오미자, 백부자, 말린 지네, 금 등은 품질이 아주 좋아서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답니다.

 

 

◈ 깨끗한 생활 습관

 

옛날에 사람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전염병인 역병이었습니다. 고구려에도 3 차례 역병이 돌았다고 하는데, 신라나 백제에 비하면 적은 편입니다. 고구려의 기후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자주 목욕을 했기 때문에 역병이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인들도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몸 씻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목욕을 1 년에 한번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냄새가 나고 더러워서 ‘때국 놈’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중국인들은 고구려의 이런 풍습을 놀라워했답니다.

과거에는 질병만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가뭄이나 홍수가 생기면 나라의 곡식을 풀어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특히 식량이 부족한 봄철에 나라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돌려받는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하기도 했답니다.

 

 

◈ 장수한 왕 많아

 

▲2) 강서대묘의 삼신산으로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 삼신산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옛날에는 60 세가 넘게 사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60이 넘으면 나라에서 장수를 축하하고 입을 것과 먹을 것, 때로는 관직도 주었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친형제 사이인 고구려 6대 태조대왕과 차대왕, 신대왕은 대단히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인 7 세에 왕위에 올라 146년까지 무려 94 년 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은 것은 이보다 더 늦은 165년으로 그 때 태조대왕의 나이는 무려 119 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대왕은 95 세에, 신대왕은 90 세에 죽었다는군요. 또 백성을 괴롭혔던 차대왕을 몰아 내고 신대왕을 왕위에 앉힌 명림답부는 98 세에 국상이 됐다가 113 세에 죽었습니다. 20대 장수왕은 78 년 간 왕으로 살다가 98 세에 죽었습니다.

과연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살 수가 있었을까요?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영조가 83 세, 태조 이성계가 74 세까지 살았으니까, 굳이 오래 산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요.

고구려 왕들의 평균 수명을 계산해 보면 대략 55 세가 됩니다. 지금 사람들보다는 일찍 죽은 셈이지요. 하지만 1960년의 한국인 평균 수명이 불과 52 세였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오래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 평소 몸과 마음을 단련

 

고구려가 장수 국가였던 것은 목욕을 자주해 위생에 철저했고, 의학이 발달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평소에 몸과 마음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씨름과 수박 등으로 몸을 단련했고, 빠르게 걸으며 씩씩하게 생활했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도 즐겼는데, 이 때 말을 탄 기마 자세나 활을 당기는 자세는 자연스럽게 단전 호흡을 하게 하여 건강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늘 노래와 춤을 추며 즐겁게 살았는데, 이 또한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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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의술과 연금술 (출처 : 고구려의 발견 / 작성자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

 

 
고대사회에서의 의술은 대부분 무(巫)에 의존했다. 유리명왕이 아픈걸 치료해 준 것은 무당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의술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나라의 <유양잡조(酉陽雜俎)>란 책은 고구려인 손님이 침(針)을 잘 사용하여 한 치의 머리털을 갈라 10가닥으로 만들고는 그곳에 보이는 빈틈까지 찌를 정도로 기술이 절묘했다고 기록하여 뛰어난 고구려 의술을 전한다.

고구려 의술은 타국에 전파 되기도 했는데, 덕래(德來)는 본래 고구려인으로 백제에 귀화했다가 백제 개로왕 때에 왜국에 파견되어 백제 의술을 전한 사람이다.

이를 통해 보면 고구려 의술은 백제와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시대에는 침과 더불어 약재를 이용한 치료법이 발달했다.
고구려 의학을 전수받은 백제에서 약재와 분량과 약을 달이고 복용하는 방법등 의료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백제신집방>이란 의학서가 출간된 것을 보면 고구려도 이와 같은 의술서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의사 모치(毛治)는 왜국에 건너가 왜국왕의 주치의가 되었고, 안작득지(鞍作得志)는 호랑이에게 침술을 배워, 다스려서 낫지 않는 병이 없었다고 <일본서기>에 전할 만큼 대단한 의술을 가지고 있었다.

양나라의 유명한 도사 도홍경(陶弘景)이 중국의 연금술과 융합된 약물학적 지식을 담아 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11종의 고구려 의약재가 소개되어 있다.
이 중 인삼과 함께 고구려의 금(金)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금은 만들어 복용하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연금술과 관련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의 금은 잘 제련되어 능히 복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강서대묘에 그려진 선녀가 영약을 채취하고 약을 다리는 그릇을 가진 모습, 통구 4호분에 그려진 약단지를 들고 봉황을 탄 신선의 모습은 그러한 정제된 금이나 인삼을 복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연금술과 관련된 것이다.

고구려의 연금술은 특히 발달하여 중국의 도교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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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고구려전이 전하는 『고려비기(高麗秘記)』의 ‘900년 그리고『삼국유사』에 900년이라는 기록이 언급되어 있죠.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상서(尙書)』나 『일주서(逸周書)』의 기록입니다.
이미 주(周)가 상(商)을 평정하였을 당시인 기원전 12세기, 주나라와 교섭을 한 나라 가운데 고이(高夷)란 나라가 있었으며 그 주석에는 ‘옛 고구려(句麗)’라고 하였죠.
즉 고주몽 개국 훨씬 전부터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소면(蘇冕) ·최현(崔鉉) 등이 각각 40권의 《회요》를 저술한 것에 송(宋)나라의 왕부(王溥) 등이 당말(唐末)까지의 자료를 첨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당회요(唐會要)’라는 역사책에도 고구려가 900여년 존속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죠.

그렇다면 최소한 고구려는 기원전 3∼기원전 2세기에 건국된 셈입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대주류왕(또는 시조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적힌 반면, ‘삼국사기’에는 11세손으로 나옵니다. 양자를 액면 그대로 비교하면 ‘삼국사기’에는 초기 왕이 여러 명 생략됐다고 볼 수 있죠. 더욱이 ‘위서(魏書)’에는 주몽 다음에 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등 ‘삼국사기’에는 없는 왕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이에 북한학계는 고구려 초기에 5명의 왕이 더 존재했다고 보고, 각 왕의 재위기간을 40∼50년으로 상정해 기원전 277년에 건국되었다고 설정했죠.


그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사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높은가를 고려해 보기로 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언제 기록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삼국사기>는 1145년에 쓰여진 데 비해,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보다 731년이나 더 빠른 광개토대왕비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째, ‘누가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김부식은 광개토왕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으며 또 광개토왕을 본 적도 없다. 그에 비해,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몇 대 자손인가에 관한 한 김부식보다는 장수왕이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왜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김부식은 기본적으로 신라 중심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폄하하고 신라를 높이는 데에 있었다. 김부식은 고구려 성립이 신라 성립보다 20년 늦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 성립연대를 가급적 늦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부식의 말을 과연 100% 신뢰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김부식은 천년 전의 연대를 말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김부식이 주몽과 동시대의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천년 이상 뒤늦게 태어난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구려 성립 연대를 그토록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장수왕은 정치적 이유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세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비를 세우면서 자기 집안의 족보를 잘못 적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장수왕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주몽의 몇 세 손인지도 몰랐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고구려 성립연대를 신라보다 앞당겨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라는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기 때문이죠.

당시의 상황을 볼 때에 고구려 성립연대를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장수왕이 주몽과 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수를 조작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세수에 관한 김부식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의 말대로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닌 17세손이라면,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시간적 차이도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구려 성립이 BC 37년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김부식이 고구려 왕실의 세수를 잘못 적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성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남한의 식민사관학자들은 신라가 고구려,백제보다 먼저 건국되었다고 가르치니 정말 한심합니다.
최소 기원전 220년대에 건국된 국가 졸본부여(고구려)를 기원전30~40년대로 거의 200년이나 깎아먹는 짓거리나 하니....

졸본부여(고구려)를 최소한 기원전 227년대에 건국된 국가로 본다면 진시황의 진나라보다 5,6년 앞서 세워진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의 밥그릇이 진실과 민족의 부흥보다 중요하다지만 해도 너무합니다.
있는 사실도 스스로 축소시키는 미친 짓거리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남한밖에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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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시대

 

고려는 신라의 전통의학과 민간의학을 기본으로 하여 반도통일신라의 의학을 계승하고,발해의 대륙의학을 배합시켜 독특한 의학을 발전시켰다.

태조 왕건은 개국 12년(930)에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에서 서학박사(書學博士) 정악(廷鶚)에게 의사를 양성토록 하였으며 귀족계급을 위한 태의감(太醫鑑)과 서민 계층을 위한 혜민국(惠民局)을 두어 의료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태조 13년에는 서경에 행차하여 학교와 학원을 세우게 하였는데 후에 다시 학원에 의복(醫卜) 양과(兩科)를 특별히 설치하게 하였다.

제4대 광종 9년에 의업의 과거제도가 비로소 시행을 보게 되었으니 각 주현(州縣) 에서 호정(戶正) 이상의 자제에게 응시토록 하였다.

제6대 성종 2년(983)에는 행정개혁을 단행하면서 의사양성과 인재양성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중원대륙의 송(宋)나라와도 학술교류를 통하여 의생들의 지식함양을 모 색하였다. 성종은 주군현(州郡縣)의 자제를 경사(京師)에 모아 경(經) .의(醫)의 여러 업을 배우게 하다가 사정이 생겨 그 일부를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돌아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선생이 부족하여 12목{牧)에 경학(經學)박사와 의학박사 한 사람씩을 두어 가르치게 하였다. 그 중에서 경·의에 능통한 자가 있으면 이를 경사(京師) 에 추천하였다. 성종 8년에는 시어의(待御醫),상약(尙藥),직장(直長),태의(太醫),의정(醫正) 등의 직제를 두었다.

제7대 목종조에 이르러 대의감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대의감,감,소감,승,박사,의정을 두었고 어약을 맡은 상약국을 별도로 설치하여 봉어,시어의,직장,의좌 등의 관원을 두었다.

제11대 문종 13년·14년에는 각종 의서를 출간하였는데 그 중에 침뜸의학과 관련 된 의서는 『팔십일난경(八十→難經)』이 있었다. 문종 3년에 과거제도는 의과{醫科)와 같이 두루 익혀 쓰도록 하는 업에 대하여는 각 주현의 호정 이상의 자제에 한정하지 않고 널리 서민들에게도 응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또한 문종조에는 의료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중앙에는 대의김(大醫監),상약국(尙藥局),사선서(司膳署)를 설치하였다. 대의감에는 판사(判事),감(監),소감(小監),박사(博士),승(丞),의정(醫正),조교(助敎),주업박사(呪業博土),의침리(醫鍼吏) 등의 관직을 두었고, 상약국에도 전조(前朝)까지의 직제 외에 역시 의침리(醫鍼吏)를 두었으며 사선사에는 봉어(奉御),직장(直長),식의(食醫) 등을 두었다. 그 외에 동궁관(東宮官)으로 약장랑(樂藏郞),약장승(藥藏丞)이 있었다. 다시 문종 28년에는 제사, 도감,각색,동서대비원,제위보 등의 제도를 두어 각 관아에 의사를 배속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각종 의서가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하집(夏集)의 저서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에는 풍지혈로 치병을 한다는 구절이 있다.

제17대 인종 15년에는 의업에 관한 과거제도를 확충했다. 시험과목에 『소문(素問)』,『갑을경(甲乙經)』,『명당경(明堂經)』,『침경(鍼經)』,『난경(難經)』,『구경(灸經)』등이 들어 있어 침뜸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음을 보여준다. 이 과거제도는 의업식(醫業式)과 주업식(呪業式)의 2종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가 발명되면서 많은 의서들이 발간되었다. 대표적인 의서로는 『황령(黃領』,『구선활인심방(臞仙活人心方)』,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어의촬요(御醫撮要)』,『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진맥도결(診服圖訣)』등이 있다.

 

1)고려의 의학자

 

고려를 대표하는 의학자로는 이상로(李商老,1123~1197)와 설경성(薛景成,1237~1313) 등이 있다.

이상로는 고려 중서사인(中書舍人 ) 중부(仲孚)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중부가 반승(反僧) 묘청(妙淸)과 친하다 하여 청주에서 귀향을 살 때 같이 청주에 기거하며 의술에 뛰어난 승려를 만나 의술을 배우게 되었고, 그후 고려 의종의 다리 병을 침술로 고쳐 크게 명성을 떨친 침구사로 벼슬이 이부상서(更部尙書)까지 올랐다.

설경성은 신라 설총의 후손으로 원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원에는 『위생보감』을 저술한 나겸보(羅謙甫)라는 대의학자가 있었는데 그도 고치지 못한 세조 쿠빌라이의 병과 원나라 성종의 병을 설경성이 치료하여 찬성사(贊成事))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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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시대

 

고려시대부터 전문분과로 발전되어 오던 침뜸의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초기부터 침뜸전문의 제도가 생기는 등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발전의 길을 걷는다.

태조 원년에 문(文)·무(武) 양반제를 정하고 의료기관으로서 전의감,혜민국,동서대비원을 동반(東班)에 두었다. 태조 2년에는 각 도에 의학교수 한 사람씩을 보내어 계수관(界首官)마다 의원 하나를 설치하게 했다. 동 6년에는 중앙에 제생원을 신설 하였다. 또 교육기관인 육학(六學)에 의학을 두어 의학교육을 실시하여 의학자를 양성하였다. 태조 원년 8월에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을 제정하였고,여기에 문(文)·무(武)·역(譯)·리(吏)과와 함께 의과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2년 7월에는 예조에서 의업에 정통한 자를 시험으로 선발했으며 동7년 2월에는 조준,정도전 등이 고시관이 되어 명의(明醫) 8인을 선발하였다.

태종 5년에는 전의감,혜민국,동서대비원,제생원을 호조에 배속하게 하였으며 그 외에 의학과 종약색(種藥色)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각 도 학교에 의학을 두게 하였고,동6년에는 평양부의 관제를 개혁할 때 의학원(醫學院)으로 하여금 의학을 관장케 하였다.

이러한 관서에 배치되었던 관원 중 의무{醫務에) 관한 직원들은 약과 침을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많았고,지방의 의원들도 약과 침을 모두 다룰 줄 알았다. 이러한 사실은 태종 7년 3월에 의술에 능통하고 침술에 정묘한 교수관들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채약진상(採藥進上)과 생도교훈을 함께 주관하게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의학고시 제도는 잡과의 과로서 시행되어왔으나 고시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서 불편이 많았는데,세종 12년 3월에 고시 시기를 사맹윌(四孟月) 즉 정월,사윌,칠월,시월의 연 4회로 정하면서 정례화 되었다. 교과서로는 상정소(詳定所)에서 『직지맥』,『찬도맥』,『직지방』,『화제방』,『상한류요』,『화제지남』,『의방대성』,『어약원방』,『제생방』,『제생발췌방』,『쌍종처사활인서』,『연의본초』,『향약집성방』,『성제총록』,『부인대전』,『백일선방』,『천금익방』,그리고 『침구경』,『보주동인경』,『난경』,『소 문』 등 침뜸에 관한 서적을 지정하였다.

지방은 각 도에 심약(審藥)을 배치하였다. 경기·황해·강원에는 각 1인,충청·평안에 각 2인,경상·전라·함경에 각 3인을두었으며 함흥부에 의학승,경원부에 사의국승,영북진에 장의국승,평양부에 의학원부사 및 직장,경성부에 의학원록사(醫學院錄事)를 두고 각 군현에는 의생을 두게 했다.

 

1) 침뜸의 전문화와 의료제도의 정비

 

세종은 실학을 장려하고 다방면에 걸쳐서 두루 체계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는데 의학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세종조에 이르러는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문운이 강성함에 따라서 침뜸전문화를 포함한 의학과 의료제도에 큰 발전을 보았다.

세종 20년(1438) 3월에 침뜸전문생을 매년 3인씩 채용하여 전의감(典醫監).혜민국(惠民局).제생원(濟生院)의 삼의사(三醫司)에 각 1인씩 배정하였다. 이 삼의사에 분속된 전문생들은 의례히 직을 받아야 하나 직을 받지 못한 자는 6월 도목{都目)에 대신 배치하였다. 이것이 침구전문의로서 독립 분과된 처음이다. 이는 약과 침뜸의 특이성을 인정하여 의술의 전문화를 도모한 것으로 전통의학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세종 24년(1442)에는 매년 의사취재시험에 삼의사,의관들에게도 모두 침구경(鍼灸經)을 필수로 하여 시험을 보게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의료지식과 함께 침뜸술의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이다.

제6대 단종 원년 5월에 임원준(任元濬)이 『의학편의(醫學便宜)』를 조진(條陳)하는 중에 침뜸전문의 법을 세워 침과 약을 병용케 하였으므로 일반 의원들에게 침뜸술의 지식을 갖도록 함과 동시에 침구의들에게도 일반의학에 관한 방서(方書)들을 권장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제9대 성종 3년 3월 의학권장(醫學勸獎) 10조를 정하는 중에 침뜸전문의를 따로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16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의과취재에도 다른 의원들과 분리하여 침뜸의 전문강서만으로서 침구의가 될 수 있는 제도를 반포하게 되어서 침구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의방서(醫方書)의 지식을 갖지 않아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 강서의 방법에 『찬도맥』,『화제지남』,『동인경』을 암송케 하고 『직지맥』,『침경지남』,『자오유주』,『옥룡가』,『자생경』,『외과정요』,『십사 경발휘』,『침경적요』 등을 임문{臨文)케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2) 의녀(醫女)제도의 활성화

 

태종 4년(1404)에는 한성 천도를 단행하면서 체계적인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하여 학문의 발전에 힘썼고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과 유교사상의 왕권임에도 태종 6년 (1406)에는 여자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해서 제생원에 처음으로 배속시켰다. 의녀 제도는 의료사업을 위하여 창설된 것으로서 당시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던 사회제도와 전통적인 풍습으로 부녀자의 진료는 의녀로 하여금 취급케 하려는 의도로 창설된 것이다. 이렇게 양성된 여의사로 하여금 각 지방의 부녀자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의녀는 직업적으로 남성과 접촉할 기회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양반계급은 물론이고 중서계급의 자녀들도 의녀가 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불가불 하류천배이었던 노비들 속에서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창설 당시에 창고궁사의 동녀(童女) 수십인을 선택하여 『맥경』과 침뜸법을 가르쳤다. 그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서 태종 18년 6월에는 각 사(司) 노비 자녀 중 13세 이하의 동녀 10인을 늘려 선발하였고,세종 16년 12월에는 30세 이하 12세 이상의 각 사 노비 출생과 여기(女妓) 출생, 중앙 및 지방의 노비 자녀 중에서 선택하게 하였다.

세종 때에는 의녀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도관을 두었고,지방 관비 중 동녀를 중앙에 보내면 침뜸술·약빙법(藥聘法) 등을 가르쳐 다시 그 지방으로 송환하기도 하였다. 세종 12년 12월부터는 『산서(産書)』를 함께 강의하도록 하였고 세조 5년에는 제생원을 혜민국으로 합속시킴과 동시에 의녀의 교육도 혜민국으로 소속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 9년 2월에는 의녀의 교과를 『직지맥』,『동인경』,『가감십삼방』,『화제부인문』,『산서』로 확장하였다.

연산군조에 이르러서는 이 제도의 본질이 변질되어 의녀를 기녀(妓女)와 같이 취급하여 의기(醫妓)라 불리며 의료와 기락(妓樂)을 겸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의녀들이 의료에서 담당한 역할은 특기할 만하다.

 

3) 의학의 발전

 

고구려시대에 침뜸술에 관한 서적이 유입된 이후에 천여년 동안 의가(醫家)는 전부 중원대륙쪽 저술로 종전(宗典)을 삼았다. 중원대륙에서는 허다한 저서가 계출(繼出)하 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이렇다 할 만한 저작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점차 우리 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침뜸에 관한 저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세종대에 전순의는 『침뜸택일편집』을 저술하였고, 임언국의 『치종비방』 및 『치종지남』,유성룡의 『침구요결』,사암도인의 『사암침구요결』 등이 저술되었다. 세종 13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은 어명에 의하여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전의감정 노중례,동부지 박구덕 등이 편찬한 것으로서 각 편에 침뜸치법이 편입되어 있고 첫째 권(卷)에 『자생경』에서 인용한 침혈의 경혈명이 열기(列記)되어 있다. 동 27년에 편찬된 『의방유취』는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 저작랑 유성원,사직 민보화,집현전 직제학 김문·신석조,부교리 이예,승문원 교리 김수온,의관 전순의·최윤·김유지 등이 찬술 한 것으로서 각 편마다 역시 침뜸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저술하는데 인용한 침뜸에 관한 서적은 『황제내경』,『소문』,『영추』,『명당구경』,『침경』,『침구경』,『난경본의』,『자생경』, 『자오유주』,『침경지남』,『옥룡가』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

제9대 성종대에는 『의방유취』,『향약집성방』을 비롯하여 허다한 의적(醫籍)이 간행되었는데 그 중에 침뜸 관계로는 명유근의 저서 『신응경』과 『자생경』,『십사경발휘』 등이 들어 있었다.

제11대 중종대에는 의서 출판이 성행하였는데 침뜸 관계로는 정부에서 『영추』와 『난경』이 간행되었고 지방에서는 전라도에서 『소문』.『화제방』의 합본이 출간되었으며 진주에서는 『신응경』,충주에서는『소문』,청주에서는 『찬도맥』과 『구급방』의 합본이 간행되었다.

 

4) 조선시대의 의학자

 

노중례(盧重禮) : 세종 때의 의학자로 세종 13년에 유효통{兪孝通),박윤덕(朴允德)과 같이 최초로 한글로 정리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저술하였으며 명나라에 왕래하면서 명나라 약재와 조선 약재의 차이점을 연구하여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1433년에 편찬하였으며,벼슬은 검지중추원사(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임언국(任彦國) : 중종 때의 침의(鍼醫)로 모친의 종창(腫瘡)을 치료하고 묘리를 터득하여 명종 14 년(1559)에 외과전문서인 『치종비방(治腫秘方)』을 간행하였으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하여지지 않고 일본에 약탈되어 일본 도서요(圖書療)에 소장되어 있다.

 

허준(許浚) : 선조 때의 명의로 의학에 밝고 인술을 펼친 조선의 의성(醫聖)이다. 선조 29년(1596) 왕의 명을 받아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술에 착수하여 집필한 지 16년 만인 광해군 2년에 완성하였다. 이 외에도 『구급방(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擔集要)』,『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등의 의학서를 한글로 발간하였다. 벼슬은 선조 34년에 어의(御]醫)로서 정현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선조 37년에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어 양평군 정1품에 피봉되었으며 광해군 원년에 수석어의(首席御醫)가 되었고 광해군 7년(1615)에 사망하였다.

 

사암(舍岩) : 사암은 호(號)이며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그가 승려였다는 설(說)과 사명당(四溟堂)의 제자라는 설이 유력하게 구전되어 왔을 뿐이다. 사암침법이 1644~1742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 사암은 17세기 초엽 즉 조선 중기의 사람으로 보인다. 『사암침구요결(舍岩鍼灸要訣)』은 사암도인이 개발한 침구보사법을 수록한 침구서이다. 450년 전에 음양오행침법을 개발하여 체질과 증후에 맞게 보사치료하는 이론과 염괄침법을 창안하였다.

 

허임(許任) : 허임은 하양인(河陽人)으로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명성을 떨친 조선 제1의 침의(鍼醫)이다. 선조 31년부터 동 39년까지 침의로서 입시(入侍)하여 왕의 병환을 치료하였다. 후세에 폭주로 알려진 광해군도 침뜸의 지지자로서 자신의 치료를 침뜸에 의존하였고 허임과 같은 당대 명침을 측근에 두고 애호하였다. 광해군 4년 8 월에 광해군이 해주에 주류할 때부터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시종 배행하여 삼등공신에 서(叙)하였고 동 8년 정월에는 특지(特旨)로 영평현령,동 9년에는 양주목사로 다시 부평부시를 역임하고 광해군이 미령(未寧)하자 입시 시침하였다. 동 14년에 입시 시침의 공으로 남양부사에 특제(特除)되었다.

허임은 인조 때에도 입시 시침하였으며 인조 22년에 평소에 경험한 침뜸술을 종합하여 『침구경험방』 1권을 저술하였다. 또한 허임은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의 1인으로서 다른 명의 3인 이석간·채득기·박렴과 함께 그의 경험방이 합질·출판되었다. 그리고 『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도 있다.

『침구경험방』은 상술한 바와 같이 허임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이루어진 저서로서 특기할 점은 보사법에 있다고 할 것이다. 보사법이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허임은 그 방법에 있어서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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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李濟馬) : 고종 때의 명의로 경서백가(經書百家),의약(醫藥),복술(卜術)에 능통하였으며 고종 31년(1894)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상·하 2권으로 저술하였고 다음 해인 고종 32년에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보원국(保元局) 을 열어 의술을 펼쳤다. 사람은 각기 다른 체질을 가지고 있어 치료처방이 다르다는 사상의설을 창안하였으나 완성을 못하고 광무 4년(1900)에 세상을 떠났다.

 

4. 일제 강점기

 

고대 일본의 침뜸의학 또는 침뜸술은 우리 나라를 통하여 전수되기도 하고,배달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 시대부터 우리나라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원대륙과 문물의 교류가 시작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침뜸술은 시술의 간편성,치효의 정확성,치료비의 저렴성 등의 이점으로 말미암아 널리 보급되었다. 물론 어느 면에서는 중원대륙보다 본원지인 우리나라의 학과 술이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지배하게 되자 조선에도 침뜸의학과 침뜸의술이 크게 보급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또 일본에서 건너온 침뜸 의가(醫家)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를 제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안마술·침술·구술의 면허제도인 것이다. 1914년 10월 조선총독부 경령 (警令) 제10호로 안마술·침술·구술 영업자의 자격,업무양성,규제감독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법적으로 제도화하였으나,그 권위는 일개 기능사로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가 1922년 10월에 개정되면서 접골술업자도 이에 준용 하기로 한다는 요지의 조항이 삽입되면서 접골술도 침술과 법규에서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다.

이러한 면허제도가 생김에 따라 1921년에는 경성침구안마술업자조합이 발족되었고,일본인 근본개장(根本介藏)을 초대 조합장에 선정했다. 1941년 3월에는 서울에서 전조선침구·안마술업자대회를 개최하여 조선침구·안마사연합회가 결성되었 다. 이때 침구술업자란 명칭을 폐기하고 침사·구사·안마사로 개칭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정당국에 건의키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이들의 명칭은 1944년에는 안마술· 침술·구술 영업자에서 침사{鍼士).구사{灸士).안마사{按摩士) 등으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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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방 이후

 

농업사회였던 우리나라는 8·15 해방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의원이라 부르는 지역의사가 있었다. 의원은 소불알처럼 큰 주머니를 허리띠 앞쪽에 매달아 그 주머니 속에 여러 가지 침들을 넣어 두고,왕진을 요청하면 밤낮없이 산과 강,논두렁,밭두렁을 가리지 않고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진료했다. 이러한 의원에게 동네사람들은 보리 추수 때는 보리, 벼 추수 때는 벼를 형편이 닿는 대로 모아서 사례했다. 그런 형편도 안되는 가난한 사람은 그 집안 일을 도외주어 품으로 보답했다. 이는 일종의 의료보험제도 같은 것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운용되어 왔다.

의원은 침과 뜸으로 치료하고 또 약이 펼요한 사람에게는 처방을 해주었다. 환자는 이 처방에 따라 약을 구하게 되는데,약방에서는 그 의원의 화제[處方]에 의하여 약을 지어주었다. 민간에서는 니름대로의 의약분업이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착되어가던 농경사회 의료제도는 현대의술의 범람과 산업화,그리고 의료제도의 변동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1951년 9월 국민의료법을 제정하면서 “종래에 규정된 접골술,침술,구술,안마술업자 등 의료유사업자제도는 주무부령으로 정한다”라고 규정하여 침구사제도를 존속시켰다. 하지만 행정부는 침구계의 진정과 건의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무부령의 제정을 지연시켰다. 이 무렵 대한침구의회와 대한안마사회,대한접골사협회 등이 궐기하여 부령의 제정을 촉구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실력투쟁의 단계에까지 돌입하게 되었다.

주무부령인 의료유사업자령과 접골사·침사·구사·안마사 자격시험규정의 제정은 1960년에 들어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51년도 국민의료법의 제정을 보고 설립되기 시작한 11개의 관인 침구학원에서 침뜸을 공부한 5천여명은 시험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5·16군사정부의 최고회의에 의하여 종래의 국민의료법이 철폐되고 새로이 의료법이 반포되었는데,그 법에는 침구사 등에 대한 법적 근거인 국민의료법 제59조의 해당조항은 삭제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유사의료업자의 자격규정과 시험 제도를 규정한 보사부령 제56호는 그 근거법이 없어 자동적으로 폐지되고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방(약제)의료에 종사하는 자를 위하여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 국가시험령」(l951.1.15. 대통령령 제588호)과 「의사·치과의사·한의사 국가시험 응시자격시험규정」(l952.1.30. 보건부령 제12호)을 일찍부터 마련하고,단기양성기관 출신자나 무학력의 한의업 종사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검정시험을 1952년부터 매년 실시하여 그들에게 한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그 검정시험제도는 1962년 3월 20일의 의료법 개정 후에도 존치되어(부칙 제2항) 1963년 10월 8일 공고에 의한 시험까지 그들의 구제를 위한 검정시험이 실시되었다. 즉 국민의료법 제13조는 문교부장관이 인가한 한의학전공의 대학졸업자 외에 주무부장관이 시행 하는 검정시험에 의하여 위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에게 한의사국가시험에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 검정시험규정은 6개월 내지 1년 과정의 단기 양성기관(각종 관인학원) 출신자는 물론 무학력으로 한의업(한약전업의 약방 등)에서 10년 이상 종사한 사람(양자를 합쳐 약 3,000명으로 추산됨)에 대하여도 5년간은 한의사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어,검정시험과 한의사국가시험을 거쳐 한의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1952년부터 1963년 10월 8일 공고에 의한 시험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시행된 위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그후 한의사국가시험까지 합격하여 한의사가 된 사람의 수는 당시 전국 한의사수의 2/3 가량인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와 같이 한의사 양성기관 출신자와 무학력의 한의업종사자에 대하여는 충분한 구제의 기회를 부여하면서도 유독 침구사 양성기관 출신자 등에 대하여는 단 한 차례도,단 한 사람에게도 구제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새로 침구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영영 막아버린 것이다. 더구나 의료법 제정 당시의 한의사는 한약에 관한 자격시험을 거쳤을 뿐,침뜸 시술의 능력 구비여부에 대한 검정은 전혀 거치지 않았고 실제로도 침뜸 시술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침뜸 등 모든 민간의술을 할 수 있도록 독점적으로 허용했다. 한의사국가시험에서 침뜸의학이 시험과목으로 추가된 것은 1962년 1월 19일 공고에 의한 시험 때부터였다. 이에 반해 침뜸에 관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수년 동안 시험실시를 기다리며 준비해온 수많은 침뜸 전문가들에 대하여 그 의술을 활용할 기회를 막아버린 것은 실로 민족 전통의술 수천년의 역사를 단절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후 의료법 제25조에 규정된 ‘한방의료’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란이 무성하였다.

이는 종래에 침·뜸·접골·안마 등에 대하여는 별도의 자격제도가 있었고 한의사 시험과목에는 이들 과목이 들어 있지 않아 한의사가 이러한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제정된 의료법에 규정된 한방의료의 개념에 과연 침·뜸 등이 포함되는 것인지,만약 포함되지 않는다면 침·뜸의 시술권은 누구에게든지 개방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후의 판례(判例)는,국민의료법에 있던 침구사 등의 제도가 의료법에서는 없어지면서 부칙에서 기존 자격취득자만 보호하는 규정을 둔 것으로 보아 한의사에게 침뜸 시술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한 취지로 볼 수 있다는 이유로,한방의료의 개념에 침술 등이 포함되므로 한의사가 아니면 시술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그 의료법은 1973년 2월 16일 다시 전면 개정되어 제24조(무면허 의료행위등 금지) 제1 항에서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제66조에서 이에 위반하는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었는데, 제24조는 다시 1975년 12월 31일 의료법 개정시에 제25조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합법적인 침구사 양성의 길이 단절되어 있었다. 침뜸의학에 있어서 세계를 선도해야 할 종주국의 일원인 우리 나라가 침체를 벗어 나지 못한 채 당시 자격을 갖고 있던 고령(高齡)의 침구사들과 민간단체가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소중한 정통 침뜸의 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침술이 국제사회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한 이후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인류 전체 질병의 75%는 침요법을 활용한 1차 보건진료만으로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회원국에게 현대의료에 침뜸을 병용하도록 권장하고,오랜 기간의 과학적 검증을 거쳐 1998년 1월 27일에는 300여종의 질병을 침뜸술로 치료할 수 있다고 확인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쥐나·일본은 물론 서양의학의 첨단을 걷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캐나다 등 선진국에서조차 침뜸의학이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체의학이라는 것을 인정하여 침뜸의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으며,침구사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와 대학을 설립하고 침구사 자격을 수여하여 자국민의 건강증진에 기여토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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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9일 (금) 13:31   문화일보

서울대 소광섭교수팀 “氣실체 주장한 ‘봉한학설’ 입증”

한의학계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여겨졌던 ‘기(氣) 흐름’의 실체가 입증됐다. 이에 따라 당뇨병이나 암 치료에 한발짝 다가서는 계기 마련과 함께 동서양 의학을 관통하는 새로운 ‘제3의 의학’ 탄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소광섭(62) 교수는 9일 “1960년대 북한의 김봉한 평양의대 교수가 인체에는 심혈계, 림프계와 다른 제3의 순환계가 있다고 주장해 국제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봉한학설’을 과학적으로 확인했다”며 “새로운 순환계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향후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등 의학계에 혁명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고 밝혔다.

소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한의학물리연구실은 오는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 의대 임상의학연구소에서 이같은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소 교수에 따르면 특수 형광염색법을 개발해 토끼와 쥐의 큰 혈관 속에서 거미줄처럼 가늘고 투명한 줄인 봉한관을 찾아냈고, 장기 표면에서 채취한 봉한관 속을 흐르는 액체의 속력을 측정했다. 봉한관은 온 몸에 퍼져 있는 새로운 순환계의 통로며 그 안에 흐르는 액체에 있는 ‘산알’(생명의 알이라는 뜻으로 디옥시리보핵산(DNA) 알갱이)은 세포 재생을 담당한다.

소 교수팀은 이어 봉한관에 아드레날린 호르몬을 생성하는 세포가 있음을 확인했으며, 이를 통해 봉한관이 호르몬 수송로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소 교수팀은 특히 봉한관에서 산알을 추출, 산알 속에 DNA가 있음을 확인했으며, 원자 힘 현미경을 사용해 산알 형태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는 봉한관을 흐르는 산알의 DNA의 생명정보와 빛 에너지”라며 “신경은 전기로 신호전달을 하는 반면 경락은 빛을 통해 신호를 전달하는 체계로 봉한경락은 몸 안의 ‘광통신 네트워크’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피부의 특정 경혈과 문제가 있는 장기를 이어주는 봉한관을 확인할 경우 이 경혈에 약물을 주입해 당뇨병이나 암 등 현대의학이 풀지 못하는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건상(중앙대 의대 교수) 대한의학회장은 “봉한학설이 객관적으로 입증이 된다면 매우 획기적이고 굉장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승재·이용권기자 leesj@munhwa.com

◆봉한학설 = 혈관 속에 봉한관이라는 가는 줄에 액체가 흐르며, 그 액체 안에 있는 ‘산알’이 세포 재생 역할을 한다는 이론. 한의학의 경혈·경락을 포함하는, 전신에 그물처럼 분포된 순환체계를 봉한체계라 부른다. 이 학설을 제기한 김봉한 교수는 경성제대(옛 서울대) 의과대학 출신으로 평양의대 생리학 교수 겸 북한 국립연구소 ‘경락 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1960년대 자신의 학설을 담은 5개의 논문을 연달아 발표하며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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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락의 실체 ‘봉한계’ 그 비밀을 벗긴다

서울대 소광섭 교수의 봉학학설 강연

2008년 02월 01일(금)

금요일의 과학터치 과학계에선 항상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과학과 공학이 만나서 먼 우주공간에 우주선을 쏘아올리는가 하면 나노와 바이오가 만나서 암 치료에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만약에 물리학과 한의학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제48회 금과터 서울역 강연에선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소광섭 교수(62)가 '한의학의 과학화와 세포치료'란 주제로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봉한학설을 첨단 물리학 이론으로 규명,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 서울대 한의학물리연구실 소광섭 교수가 봉한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양의학과 달리 경험의학인 한의학은 중국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임상정보를 기반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온 몸에 그물처럼 뻗어있는 경락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 아직도 과학적 규명이 안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이미 경락의 실체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소 교수의 강연은 봉한학설의 소개에서 시작됐다.

“해방전 1941년 서울의대를 졸업한 김봉한 교수는 ‘53년 북한의 평양의대 교수가 됐다. 그리고 ’64년 경락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침놓는 자리(경혈)에 ‘봉한소체’라는 작은 알갱이 같은 조직이 있고 이를 잇는 선(경락)은 ‘봉한관’이란 조직으로 그 안에 액체가 흐른다고 주장했다.”

즉, 몸의 전체에 그 물망처럼 퍼져 있는 봉한관은 서양의학에서 밝힌 혈관계나 림프계와는 전혀 다른 제3의 순환계를 형성하고 이 봉한관을 통해 흐르는 액체에는 ‘산알’(살아있는 생명의 알)이 흘러 다니며 손상된 조직의 재생을 돕는다는 학설이다.

봉한관이 경혈/경락의 실체

수천년 동안 동양의학에서 베일을 간직하고 있던 경락/경혈을 처음 본 사람은 평양의대 김봉한 교수다.

“봉한학설이 맞다면 한의학을 과학화하고, 서양의학과 통합시키는 획기적 업적이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른 연구팀이 이 결과를 재현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봉한관을 관찰하는 방법과 기술이 공개되지 않고 비밀로 묻혔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로 김봉한 연구팀도 해체되어, 봉한학설은 그 맥이 끊어졌었다.”

▲ 토끼의 림프관 안에 있는 봉한관 (경락). 림프관은 투명하며, 그 안에 아주 가는 봉한관이 떠 있으므로 림프관 밖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적 통신사 AFP는 ‘62년 2월 13일 보도를 통해 “김봉한 박사의 연구가 17세기 인체의 혈액순환을 처음 발견한 '윌리엄 하비(W. Harvey)'의 연구와 대등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김봉한 교수의 연구가 동양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근대의학은 핼액의 순환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영국의 의사 윌리엄 하비(1578-1657)에 의해서 출발했다. 그 이전엔 동양의학이나 서양의학의 수준이 비슷했다. 그러나 하비의 발견에 의해서 서양의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만큼 우리 몸의 혈액순환계는 중요하다. 이후 제2순환계인 림프계가 발견됐다. 서양의학은 제2순환계인 림프계까지만 밝혀놓고 있다.”

그러나 ‘60년대 초에 김 교수가 제3순환계인 봉한경락계의 존재를 주장했고 4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지난해 11월 9일 서울대 소 교수는 봉한경락계의 실체를 밝히는데 성공했다.

“우리 인체에는 가늘고 투명한 줄인 봉한관이 전신에 그물처럼 퍼져있다. 침놓는 자리인 봉한소체(경혈)를 이은 선이 봉한관이고 이것이 경락이다. 봉한관에는 디옥시리보핵산(DNA) 알갱이라 불리는 ‘산알’이 흐르는데 이는 세포를 재생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봉한계다.”

소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한의학 물리연구실의 이병천 박사(약리학)는 최초로 토끼의 배에 있는 림프관 속에 들어있는 매우 가느다란 관을 특수 현미경으로 찍는데 성공, 그동안 설로만 분분하던 봉한관의 존재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봉한학설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금과터 강연에 참석한 이병천 박사는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봉한학설 난치병에 도전한다

‘60년대 초에 이미 세상에 알려졌다 그대로 묻힌 봉한학설이 21세기 첨단 과학의 힘을 빌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양의대 김봉한 교수 연구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소 교수다.

“우리 연구팀은 지난 2003년부터 NRL 사업으로 지정 받아 한의학 진단 및 치료를 위한 경혈/경락의 생물물리학적 기전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다. 그동안 경혈경락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를 수행, 혈관 속에서 봉한관을 관찰하는 형광기법, 장기표면의 봉한관의 채취와 전자현미경을 사용한 분석, 림프관 안에 떠 있는 봉한관의 광학적 관찰, 산알의 채취와 운동 분석 등의 성과를 냈다.”

그동안 쥐와 토끼를 대상으로 장기표면, 혈관, 림프관 등의 세 군데에서 봉한관을 발견한 소 교수 연구팀은 피부의 경혈로부터 몸 속의 장기로 액체가 흐르는 순환경로를 추적중이다. 따라서 봉한계 전체를 인체에서 찾아야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 하비의 발견이 서양의학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듯이 소 교수 연구팀의 발견으로 동양의학은 제2의 도약기를 맞을 채비를 하게 됐다.

“한의학은 몇 천 년이 넘게 우리 민족의 건강을 지켜온 의학이었다. 이런 전통의학의 효험에도 불구, 한동안 서양의학의 위세에 눌리어 미신이나 사술처럼 업신여김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에서 한약과 침구에 대한 연구가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한국에서도 한의학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을 정도다. 봉한관의 발견으로 동양의학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말미에 소 교수는 봉한학설이 가져 올 미래의학의 발전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강연을 마쳤다.

“이 연구가 성공하면 한의학의 과학화는 물론 동서통합의학의 신기원이 수립된다. 이른바 봉한계라는 제 3순환계의 확립으로 생물의학, 약학, 화학, 물리학, 의공학 등 여러 학문이 협력해 연구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암과 성인병 등 서양의학이 못 고치는 난치병에 대해 봉한경락계를 이용한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것이다.”

소광섭 교수는 ‘68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74년 미국의 브라운(Brown Univ.)대서 소립자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물리천문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조행만 기자 | chohang2@empal.com

저작권자 2008.02.01 ⓒ ScienceTimes

 

 

#배달겨레의 사상과 철학

 

“한-중 도교 고향은 보하이 만 연안”
동아일보 ㅣ 입력2006.11.07 03:00
 
한국도교의 기원에 대해선 크게 2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중국 전래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자생설’이다. 전래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류왕 편에서 당() 고조가 보낸 도사를 통해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내용과 보장왕 편에서 연개소문의 주청으로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근거다. 전래 시점은 7세기경이라는 것.

 

 
자생설은 유불선을 통합하는 풍류()라는 고유한 가르침이 나라에 본래 있었다는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과 도교의 가르침이 환웅과 환검(단군)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는 ‘규원사화’ 등의 설화에 의거한다.

정재서(사진) 이화여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에서 전래설과 자생설의 문제점을 각각 비판하며 도교가 동이족의 거점이었던 보하이() 만 연안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공유설을 주장했다.

그는 자생설에 대해 실증성이 떨어지고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그 근거가 출처가 불분명한 규원사화 등의 설화에 치우쳐 있고, 중국 삼황오제 중 한 명인 황제가 동서남북 각처에서 도를 구했다는 ‘포박자’의 내용 중에 유독 동쪽에서 도를 얻었다는 내용만 선별해 자료해석의 편향성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또 전래설에 대해선 중국 문화가 고대 다양한 문화를 흡수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단일문화였던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에서도 고대 도교의 발생지에 대해 보하이 만 연안과 쓰촨() 지역의 2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그중 보하이 만은 중국 한족과 한국의 뿌리라 할 동이족이 오랫동안 경합하던 공간이다.

서양의 도교연구가 막심 칼텐마크는 1953년 동이계의 신조()숭배가 후대 신선의 비승() 관념으로 전화해 도교가 됐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정 교수는 이런 칼텐마크의 비교신화적 관점에다 한국의 민간도교와 중국 초기 도교의 유사성 연구를 더해 보하이 만 일대 동이족 문화에서 비롯한 원시도교문화가 중국과 한국에 동시 전파됐고 중국에서 이론화한 도교가 다시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공명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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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태극기의 원리와 변천과정을 담은 책 <태극기>        
 
2005년 8월 15일 서울시청은 대형 태극기와 3600장의 소형 태극기로 온통 뒤덮였다. 광복 60돌을 맞아 기쁨을 표현한 일이었다. 그 태극기가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이는 태극기가 중국 것이고 뜻이 어려우니 도안을 바꾸자고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이에 태극기는 우리 것이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국기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허정윤·반재원씨가 도서출판 한배달을 통해 내놓은 <태극기>가 그것이다.

ⓒ 도서출판 한배달
그는 말한다. "단군 조선 이전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13자의 진리인 신선도에 그 맥이 닿아있는 우리의 태극기와 우주 천문의 운행원리를 근원으로 하고 있는 한글이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서로 둘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시원사상이라는 하나의 나뭇가지에 열린 한 열매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태극도형이 중국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다. 주렴계는 송나라 신종 때 즉 우리나라 고려 문종 24년, 1070년경의 사람이다. 하지만 신라 때 세운 감은사(感恩寺) 석탑 장대석에 새겨진 태극도형은 682년으로 보아 주렴계의 태극도설보다 388년이 앞섰다는 것이다.

또 중국 주렴계의 음은 검정, 양은 흰색이며, 음양의 군역이 좌우 대칭으로 되어있고, 음양의 머리 부분에는 점이 있으며, 둘레에는 8괘가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태극무늬는 음은 청색, 양은 홍색으로 되어 있으며, 음양의 권역은 좌우 또는 위아래 대칭으로 되어 있고, 네 귀퉁이에 4괘를 배치한 것이 다르다.

그렇다면 태극기의 원리는 무엇일까? 글쓴이는 아주 간단한 원리라고 강조한다. 태극기는 음양의 생성원리와 이에 따르는 계절의 순환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감은사 석탑 장대석에 있는 태극무늬(왼쪽), 1328년 고려 충숙왕 15년에 창건한 회암사 석계 고형석의 ‘회돌이 태극’(오른쪽)
ⓒ 반재원
태극기의 음이 가장 극성하여 양이 처음 생겨나는 때가 동지이고, 양의 기운이 점점 자라나 음과 양이 같아지는 때가 춘분이며, 역시 양이 가장 극성하여 음이 생겨나는 때가 하지이고, 음의 기운이 자라나 음양이 대등하게 되면 추분이라는 것이다. 태극기는 음과 양에 더하여 이에 맞게 괘를 그려 넣었다.

태극은 허공의 충만한 두 기운인 음기와 양기의 조건에 의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또 조건에 따라 다시 태극으로 돌아가는 자연현상의 순환원리를 표현한 도식이라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태극무늬를 오랫동안 써온 우리 겨레는 천손민족임이 분명하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또 이 태극도의 원리와 한글의 원리는 같은 맥락임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원리에 맞게 그려진 태극기(바탕은 옥색이며, 음의 색은 검정, 괘도 양은 붉은 색 음은 검정색으로 했다.)
ⓒ 도서출판 한배달
▲ 태극 괘와 한글 가운뎃소리와의 관계
ⓒ 도서출판 한배달
이런 태극기를 '25시'의 작가이며, 루마니아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인 게오르규는 태극기송(頌)으로 찬양한다.

"한국의 국기는 유일하다.
어느 나라의 국기와도 닮지 않았다.
세계 모든 철학의 요약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는 우주의 대질서, 인간의 조건과 살과 죽음의 모든 운명이
선, 점, 원, 붉은 색, 흰색, 그리고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현재의 태극기에는 원래의 것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특히 태극의 빛깔이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되어 있는데 파란색은 원래 음색인 검정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도안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실제론 고종황제라고 말한다. 특히 1882년 10월 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제179호에 실린 다음의 기사는 태극기 제작 배경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본다.

▲ 고종황제가 태극기의 직접적인 도안자임을 드러내주는 도쿄의 시사신문 기사. 내용 중엔 고종의 태극기가 나온다.
ⓒ 도서출판 한배달
"지금까지 조선에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를 청국의 국기를 모방하여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서 쓰도록 한 데 대하여 고종황제가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거절하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여서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

이 책에는 태극기의 원리를 확인하고, 변천과 수정론 등을 살피는 것은 물론 한글의 원리에도 대입하고 있으며, 태극기와 제작 방법과 국기 게양법을 상세하게 다룬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국화인 무궁화와 애국가에 대한 얘기도 들려준다.

이 책은 글쓴이의 많은 노력 속에서 출간된 것이 분명하다. 특히 태극기의 원리에 대해 많은 참고 자료를 탐독하고, 깊은 숙고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도 약간의 옥에 티는 있다. 좀 더 쉽게 풀어주고, 컬러사진 자료들을 많이 덧붙였더라면 아주 훌륭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음이 위에 있고, 검정색이다), 고종황제가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태극무늬가 회오리 모양), 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 '대한독립'이라고 쓴 안중근 태극기 (왼쪽부터 시계방향)
ⓒ 김영조
우리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의 원리를 잘 모르고 있다. 원리를 모르니 중국의 것이라는 오해로 국기를 바꾸자는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또 태극기의 도안자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탐독함으로써 한국인인임을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일이다.
 

 
"태극기는 고종황제의 자주정신이 빚었다"
[대담] <태극기>의 저자 반재원
 
▲ <태극기> 책을 보며 설명하는 반재원
ⓒ김영조
- 어떻게 태극기를 연구하고 책을 쓰게 되었나?
"나는 오랫동안 훈민정음 창제 기원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원리에는 음양오행이 있었고, 훈민정음 원본에는 태극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따라서 훈민정음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태극의 원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공부 과정에서 태극기에 대한 오해가 많음을 알았고, 이를 책으로 써서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원래의 태극무늬는 회오리 모양인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닌지? 또 태극무늬만 있고 괘가 없었는데 언제부터 붙었고, 없애면 어떤가?
"물론 원래의 태극무늬가 회오리인 것은 사실이고, 그 모양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또 4괘도 고종황제 때부터 붙은 것이다. 괘는 부연설명일 뿐이므로 없어도 상관없다. 또 원래 고종의 태극기는 옥색 바탕이었기 때문에 바탕 색깔도 바꾸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의 국기로 써온 태극기의 도안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 원초적 철학이 담긴 태극무늬를 중국이 국기에 쓰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중국에서 맨 처음 태극에 대한 논리를 얘기한 주렴계의 태극도설 이전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태극무늬를 써왔다. 조선에서 너무 오랫동안 써왔기에 태극도는 조선의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천손의 표시인 태극무늬를 중국에 뺏기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태극기를 고종이 디자인했다면 고종의 자주적인 생각 때문이라고 보는가?
"물론이다. <시사신보>의 기사를 보면 청국의 깃발을 모방하여 만들라는 청국 사신의 권유에 화를 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황룡포를 입고,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고종황제가 자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태극무늬를 국기에 썼다는 생각이다."

- 국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흔히 태극무늬가 중국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또 원리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어렵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국기를 바꾸자고 주장하지만 내용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바꾸자는 주장을 할 리가 없다. 태극기를 바꾸자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이 책을 통해 잘못된 오해를 풀고 태극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한다."

- 태극기를 옷에 디자인하여 입기도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바람직한 일이다. 태극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천손민족임을 표시하며,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그동안 지나치게 엄격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래서 태극기가 더 어렵게 느낀 것이 사실이다. 옷에 디자인하여 입는 것은 태극기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질 것이기에 좋은 일이다."
 
ⓒ김영조 기자

 

 

 

 

 

#우실하, "최초의 태극 관념은 음양태극이 아니라 삼태극/삼원태극이었다"[동양사회사상]
            (서울:동양사회사상학회, 2003) 제8집, 5-37쪽.

2003년 11월 30일자로 간행된 위 학술지에 실린 필자의 글이다.
사진 자료 때문에 사이즈가 너무 커서 그동안 파일을 올리지 못했는데,
사진 자료의 사이즈를 줄여서 파일로 올려 놓았다.
-----------------차례-----------------------------
<최초의 태극 관념은 음양태극이 아니라 삼태극/삼원태극이었다.>
                                         우실하(사회학박사, 전 요녕대교수, 연세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1. 글을 시작하며: 음양태극과 삼태극
2. 상商, 주周, 춘추春秋, 전국戰國 시대의 삼태극 문양
3. 일본에서 사용되는 삼태극 문양
4. "태극원기 함삼위일太極元氣 函三爲一": 삼태극/삼원태극의 철학
   1).『한서』「율력지」의 삼태극 논리: 최초의 태극 개념은 삼태극/삼원태극이었다.
   2). 당唐 나라 시대까지도 태극은 삼태극/삼원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사기史記』「율서律書」의 주에 보이는 삼태극 관념
5. 태극 관념의 변화
6. 삼태극 관념의 기원에 대하여
7. 글을 맺으며
--------------------------------------------------
<국문요약>

   '태극太極'에 대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음과 양이 어우러진 태극 곧 '음양태극陰陽太極'을 떠올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음양태극 대신에 흔히 '삼태극三太極' 혹은 '삼원태극三元太極'이라고 불리는 문양이 많이 사용된다.

   한, 중, 일의 경우 사용되는 태극의 모양이 다르다. 예를 들어 전통 북(鼓)의 표면에는 ꡐ태극ꡑ이 장식되어 있는데, 중국의 전통 북에는 음양태극이 그려져 있고, 한국과 일본의 북에는 삼태극/삼원태극이 그려져 있다.

   상ㆍ주ㆍ춘추ㆍ전국 시대에 이르는 고고 유물이나 악기에는 삼태극 도형이 대단히 많이 보이는데 반해서 음양태극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 주, 춘추, 전국 시대의 각종 고고 유물에서도 삼태극이 그려져 있다면, 도대체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삼태극이 음양태극으로 바뀐 것일까?

   이 글에서는 고대의 동양에서 태극이란 삼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한서』「율력지」에는 "태극원기는 셋을 함유하면서 하나가 된다(太極元氣, 函三爲一)"는 삼태극 관념이 보이고, 이것은 한나라와 삼국 시대 그리고 당나라 시대의 학자들에게까지도 보편적인 태극 이해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태극을 삼태극으로 이해하던 관념은, 송대宋代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이래로 음양 2기만을 포함하는 음양태극 관념으로 변화된다. 이와 더불어 이 글에서는 이런 삼태극 관념이 동북방 샤마니즘의 '3수 분화의 세계관'의 산물이라는 점도 밝혀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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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http://www.gaonnuri.co.kr/z/data/paper/2003,_최초의_태극관념은_삼태극,_동양사회사상_8호_(2003).pdf

 

 

 

 

 

#우실하, "삼태극(三太極)/삼원태극(三元太極)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 [정신문화연구]
           제29권 제2호, 통권 103호(2006년 여름호), 205-237쪽. (학진 등재지)

---------<차 례>-----------
1. 글을 시작하며
2. 당나라 시대까지도 태극(太極)이란 삼태극/삼원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빛날 경(冏)’자와 ‘밝을 명(明)’자의 옛 글자 ‘囧’자
4. 명(明)자의 변화
5. 맹(盟)자의 변화
6. 태양을 상징하는 ‘日’과 ‘囧’의 차이
   1) ‘밝다. 빛나다, 환하다’의 의미를 지닌 한자들
   2) ‘빛, 불빛, 햇빛’의 의미를 지닌 한자들
   3) ‘囧’자 모양은 ‘태양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다
7. 글을 맺으며:  ‘囧’자 형태의 태양상징은 파문(巴紋)ᐧ와문(渦紋)ᐧ삼태극(三太極) 문양의 기원이다
-------------------------

On the origin of the Shape of ‘Sam Taegǔk(三太極)󰡑�����������������������or󰡐�����������������������Sam-won Taegǔk(三元太極 )󰡑�����������������������

                                   Woo   Sil-Ha  (Ph. D., Hankook Aviation Univ. General Studies)

  Chinese hieroglyphic character ‘囧’ is an old style letter of ‘冏(shine, be bright)’ and ‘明(light, bright)’. Hieroglyphic character ‘囧’ is seen in  ‘Gapgol-mun(甲骨文: inscriptions on bones and tortoise carapaces)’ and ‘Gum-mun(金文: inscriptions on bronze ware)’. But, there are three different  theories about  what is the meaning of hieroglyphic letter  ‘囧’.  
  The first one says that ‘囧’ represents 'an open window' exposed to the shinning moon. The second one says that ‘囧’ represents 'the ear of cattle' that had been used in the sacrificial rites for the 'god of brightness(明神)' every 12 years in ancient China. The third one says that ‘囧’ represents 'a flame in the fire'.
  In this paper, the author critically reviews the old style letters of  '冏ᐧ明ᐧ盟ᐧ日' that is closely connected with hieroglyphic character ‘囧’.  Through these critical review the author suggests that Chinese hieroglyphic character ‘囧’ represents 'a flame' that give rise to 'a light'. Especially, ‘囧’ represents 'a flame flared up inside the sun'.
   Moreover the author suggests that the shape of ‘Sam Taegǔk(三太極)󰡑�����������������������or󰡐�����������������������Sam-won Taegǔk(三元太極 )󰡑�����������������������that is frequently seen in Korean traditional culture is also related to hieroglyphic character ‘囧’.  That is to say, the shape of ‘Sam Taegǔk󰡑�����������������������or󰡐�����������������������Sam-won Taegǔk’ has its origin in 'a flame flared up inside the sun'.
   So, the author concludes as fallows; At the beginning the shape of ‘Sam Taegǔk󰡑�����������������������or󰡐�����������������������Sam-won Taegǔk’ represents the figure of 'a flame flared up inside the sun'. Therefore, original design of ‘Sam Taegǔk󰡑�����������������������or󰡐�����������������������Sam-won Taegǔk’ represents the shape of sun in which sun-flame is whirling strong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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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태극(三太極)/삼원태극(三元太極)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

                                   우실하 (사회학박사, 한국항공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囧’자는  ‘빛날 경(冏)’자와 ‘밝을 명(明)’자의 옛 글자이다. 그러나 이 ‘囧’자가 무엇을 상형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공존하고 있다. 첫째, 달빛이 비치는 ‘열린 창문’을 상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둘째, 12년 마다 제후들을 모아 ‘밝음의 신(明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맹(盟)이라는 행사에서 제단에 올려졌던 ‘소의 귀’를 상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셋째, 빛을 발산하는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글에서는 ‘囧’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冏)ᐧ명(明)ᐧ맹(盟)ᐧ일(日) 등의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이들 글자들의 변화를  통해서 위의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서  밝을 경(冏)자와 밝을 명(明)자의 공통 기원인 ‘囧’자가  태양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였다.  특히 ‘밝다⋅ 빛나다⋅ 환하다’는 의미의 ‘囧’자는 ‘빛’을 발생시키는 ‘불(火)’ 곧 ‘태양 속에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보면, (1) ‘囧’자의 갑골문과 금문에서 보이는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원 안에 3-4개의 선이나 C자형 곡선이 둘러져 있는 囧자 형상’에서 각종 파문(巴紋)이 발생하였고, (2) 이런 파문들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원 안에 3개의 선이나 3개의 C자형 곡선이 둘러져 있는 囧자 형상’에서 우리나라에서 특히 많이 사용되는 삼태극(三太極) 혹은 삼원태극(三元太極)의 초기 형상이 기원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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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어 >  태극(Taegǔk : 太極), 음양태극(Yin-yang Taegǔk : 陰陽太極), 삼태극(Sam Taegǔk : 三太極), 삼원태극(Sam-won Taegǔk : 三元太極), 샤머니즘(sham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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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타 자 료 -

 

우실하, <중국의 역사관련 공정의 최종판 요하문명론> (2006.9.13일 국회발표자료)

9월 13일에 국회에서 발표를 했었고 국회방송에서 생방송으로 나갔으며,
9월 17일 국회방송에서 녹화방송을 내보냈던 자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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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동북공정의 최종판 ‘요하문명론’ ([단군학연구] 제15호,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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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 http://www.gaonnuri.co.kr/z/data/paper/200612(동북공정의_최종판_요하문명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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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

[인터뷰] 금·청사 한국사 편입 주장 서길수 교수                                                                                김태경 (gauzari)       

 

 

▲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이사장
ⓒ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열린 '동북공정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는 금·청나라 역사를 한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논리가 강단사학계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오마이뉴스>는 20일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를 만났다.

서 교수는 "중국은 한국사 해체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대응하자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전통사관"이라며 "25사에 들어있는 원나라는 몽골사지 중국사가 아니다, 요·금·원·청을 다 중국사로 인정한다면 이제 고구려의 중국사 편입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지적에 대해 서 교수는 "그들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일리가 있는 면도 있다"며 "강단사학계는 재야사학자 등의 주장을 학술적으로 검증해야지 아예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토론회에서 나온 주장은 사실 유득공부터 시작해 신채호·장도빈 선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했던 말이다.

서 교수는 "일본 밑에서 반도사관을 주재했던 사람이 해방 뒤 주도권을 잡으면서 반도사관이 굳어졌다"며 "우리 학계는 재야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열린 사학계가 아니다, 이러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으며 닫힌 반도사관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원자바오 총리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동북공정 문제를 잘 다루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는 "중국의 외교적인 언사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절대 속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고구려 역사재단 해체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고구려 역사재단의 공과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동북아역사재단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지난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 토론회에서 금·청나라 역사의 한국사 편입을 주장했는데….
"그동안 중국의 역사침탈 대응 논리를 개발하는데 국내 학계가 한계가 있었다. 고구려는 지방정권이며, 고구려 멸망 뒤 백성들이 다 중국 땅에 들어갔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논리적 대응을 했다. 그러나 고구려 이후 금·원·명·청 시기에 대한 연구가 안돼 있다.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민중사적으로 봤을 때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뒤 민중들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깊이있는 연구를 해야하고, 그 후손들이 누구와 친연성이 많은 지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 문제 등을 정확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 중국이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적이 있었나?
"사실 없었다. 일단 금나라는 중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역사다. 여러 사서에 금나라의 시조인 김함보가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나라는 몽골이 자국사로 본다.

명나라의 경우 만주를 완전히 지배했는지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지난해 말 강원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남의현 교수는 명나라는 요동반도만 차지한 것으로 보고있다.

명나라는 요동반도의 오른쪽은 새외(塞外)로 봤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요동변장을 세워 관리를 했는데 나중에는 거의 안됐고 결국 여진족이 중국 전체를 차지했다. 중국에서조차 원나라와 청나라는 정복 민족이라고 했지 자기 민족 역사로 보지 않았다."

- 금나라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해서 금나라 사람들이 한민족이 될 수는 없다는 견해가 있다.
"민중사적인 정체성을 보면 된다. 왕조가 망했다고 만주에 살던 고구려·발해 사람들이 어디 가겠나? 백제사람이 신라인 되고 이들이 고려인되고 조선인되고 한국인이 됐다."

- 사실 1911년 신해혁명 때 구호가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 정권을 세우자)이었다.
"중국은 1980년대 들어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해 만주족 역사를 자기 역사로 편입했다. 이전에는 자신을 정복한 나쁜 민족에 불과했다. 중국의 역사지리학자인 탄치양에 의해서 청나라 영토에 속한 모든 민족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로 보는 개념이 생겼다."

- 중국 25사에 금나라·원나라의 역사가 들어있지 않나?
"동양사 전공하는 분들이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중국적 사고방식이다. 원나라가 어떻게 중국 역사인가? 세계사적으로 새롭게 조명하지 않은 것이고 사대주의적 전통사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것이다. 요·금·원·청을 다 중국사로 인정한다면 이제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 14일 토론회 뒤 기존 학계에서는 반응은 어떤가?
"문제는 기존 학계의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고구려연구회 홈페이지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일부 글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관련 전공자가 올린 것 같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도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이게 우리 학계의 현실이다."('histholi'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금·청사의 한국사 편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우리말로 지금의 만주족과 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대해 '금사연구'라는 아이디이 네티즌은 "그러면 한족(漢族)과 만주족은 대화할 수 있는가? 한족은 만주어 배우기가 매우 어렵지만 조선어는 만주어의 문법과 구조가 같아 우리 나라사람들은 만주어를 단기간에 바로 배울 수 있다"고 답글을 달았다. - 편집자 주)

- 이런 주장은 재야사학자들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반박이 나올 것 같다.
"나는 강단 사학계 쪽이 더 반성을 해야한다고 본다. 우리 학계는 재야사학자들의 논리라는 이유로 얘기를 못 꺼내고 있다. 재야사학자들의 논리가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일리가 있는 면도 있다.

재야와 강단은 적이 아니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재야사학자는 자기들의 주장을 당당히 얘기하고 강단은 이른바 학술적으로 증명된 부문만 얘기하면 된다. 사실 발해사가 우리 역사가 되는 것에 강단 사학자들은 절대로 반대했다. 발해사가 우리 역사가 된 것은 북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의 공이 컸다. 북한 학자들이 과감하게 주장했고 결국 교과서에 들어갔다."

- 발해사, 금·청사 등과 관련한 주장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이런 문제는 유득공의 '발해고'부터 시작해 단재 신채호 선생, 장도빈 선생 등이 다 얘기했던 것이다. 이런 분들이 서울대에서 강의를 했다면 당연히 국사책에 들어갔을 것이고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반도사관, 반도를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다뤘던 것이다.

해방 뒤 일본 밑에서 반도사관을 주재했던 사람이 결국은 주도권을 잡으면서 우리는 반도사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이나 우리 주장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열린사학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닫힌 반도사관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 중국이 만주족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만주족이 같은 민족이면 나중에 한국과도 합치자"고 한다면?
"일단 만주족이 중화민족에 속하느냐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중국이 언제 만주족을 자기 민족으로 봤나? 그런 논리는 중국의 주장은 언제나 옳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 서 이사장의 주장은 중국사 해체 작업인데….
"중국이 한국사를 해체하고 있는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다시 보자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25사의 열전에 들어있는 것도 모두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나는 25사의 체계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원사가 25사에 들어있다고 곧 중국사인가? 원사는 몽골사가 분명하다."

- 김한규 교수는 요동사를 주장했는데….(요동은 중국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아닌 제3의 역사공동체로 존재해왔다는 설-편집자 주)
"요동이 중국과 상관없다고 본 것은 성과이지만, 만주와 연관있는 모든 세력을 다 무시하는 것은 문제다. 예를들어 만주국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그들이 요동사의 주체가 됐을 것이고 만약 우리가 그들과 통일을 한다면? 지금 청나라는 없어지고 원래 관계도 없던 중국과 러시아가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있다."

- 일부에서 한-몽골 연합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연합이라는 말을 몽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전혀 고려가 없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지금 양국의 국력에 큰 차이가 있는데 과연 몽골이 국가 연합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런 얘기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이라고 본다.

현재 몽골은 요나라를 자기 역사라고 하는데 한국이 도움을 줘야 할 것이다. 몽골 학자들 가운데 한자로 된 원전을 읽는 사람이 드물다. 한국인들은 몽골에 가서 '어글리 코리언' 행동만 하지말고 장기적으로 상호 호혜의 입장에서 교류하고 입장을 가져야한다."

- 지난 16일 베이징대 역사학과 쑹청유 교수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외국의 역사라는 것이 베이징대 역사학과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나?
"지금까지 중국 내부에서 동북공정에 대한 반론이 없었는데 최초의 이견을 내놓았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고려해 볼 점이 있다. 우선 그의 말은 학술적인 논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따라서 (10월로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온 립서비스인지, 정말 활자화된 논문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

또 '중국 내부에도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변강사지 연구중심의 연구성과가 모두 순수 학술적 차원이고 학술적 의견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를 반증해주는 효과를 노린 것일 수 있다. 베이징대 교수가 직접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동북3성 학자들처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다. 그러면서 실제 돈은 변강사지연구중심에 들어간다.

중국의 '고구려 지방정권론'은 조공-책봉 논리가 유일한 근거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 일본 등과 분쟁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때를 대비해 어느 정도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을 수도 있다. 조공-책봉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조사를 해보니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장수왕 때 조공을 제일 많이했다."

- 원자바오 총리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동북공정 문제를 잘 다루도록 지시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은 중국의 외교적인 언사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절대 속아서는 안된다. 중국은 문제가 생기면 지방정부 차원이라고 주장하고, 지방정부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라면서 서로 핑퐁 게임을 한다. "

- 국내 학계에서 국사해체론이 나오는데….
"중국과 일본이 국사해체를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그 쪽은 더 강화하는데 우리만 해체하자는 것은 국제정치의 역학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 홍산문화 등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텐데….(홍산문화는 기원전 3500년 께 요하(遼河) 및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석기 문화-편집자 주)
"홍산문화·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 문화는 모두 고조선 관련 문명이다. 황하 상류인 내몽골 지역에 많은 석성이 있다. 그런데 이 석성이 중원으로 퍼지지 않고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후 고구려에 등장하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문화의 흐름이다."

 

2006-09-22 09:1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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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금·원·청은 중국사 아니다. 여진·만주족 한민족사로 봐야"

 고구려연구회 토론회서 "중국사 해체" 공개 거론                                                                       김태경 (gauzari)  

 

 

 
▲ 14일 학자들이 국회 헌정회관에서 열린 '동북공정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 토론을 하고있다.
ⓒ 오마이뉴스 김태경

"이제 동북아시아 역사 해석을 위한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고구려·발해 이후 만주와 북방을 지배했던 요·금·원·청나라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과연 중국인에 가까운가 아니면 한국인에 가까운가? 한국인에 가깝다. 동북아 역사의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유효한 새로운 사관을 개발해야 한다."

14일 국회 헌정회관에서 열린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이같이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는 고구려연구회 주최, KTF 후원으로 열렸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역사 침탈을 하고 있다'는 기존의 울분성 탄식과는 달리 북방 민족사를 한민족사의 범주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이는 곧 중국사를 해체하자는 말로 그동안의 방어적 자세에서 적극적 공세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그동안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로부터 많이 나왔다. 그러나 '강단 사학계'에 속한 학자들이 공개 토론회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드문 일다.

서 교수는 "몽골의 울란바타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그들은 흉노→선비→유연→돌궐→위구르→원→몽골공화국으로 자국사를 파악하고 있다"며 "이렇다면 북방의 주요 정복 왕조 가운데 여진족의 금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남는데 이들이 과연 중국 역사인지 재검토해야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정사인 금사(金史)에는 금의 시조의 이름은 함보이고 처음 고려에서 왔다고 되어있다. 즉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인이다.

연변대 사학과 고영일 교수의 <중국 조선민족사 연구>라는 책에 따르면 만주족은 조선족과 한족(漢族) 사이의 중간적 특징을 가지면서도 조선족에 더 가깝다. 분류학적으로 보면 만주족이 조선족과 가까운 것은 10개이지만 한족과 가까운 징표는 4개에 불과하다는 것.

중국 정사에 '금나라 시조는 고려인' 기록

즉 만주족은 중국인이 아니며 오히려 한민족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또 요즘 갑자기 부각된 발해사의 귀속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

요·금사 전문가인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는 기술이 중국 역사책 여러 곳에 보인다"며 "흔히 발해와 신라를 남북조로 파악하는데 나는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 역시 남북조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더 나가면 청나라 시대까지 남북조로 파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즉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 역시 남북조로 본다는 말이다.

김 명예교수는 중국의 이른바 25사의 정사 체계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중국은 후대의 왕조가 전대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김 교수는 "중국의 역사서라는 게 피정복자가 정복자의 역사를 자기 역사에 편입한 것"이라며 "그러나 과연 대한민국이 일제를 우리 역사로 편입하는 것이 올바른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김 교수는 "요·금·원·청나라 때 보면 북방 왕조가 훨씬 더 강했는데 여전히 역사를 중원의 한족 왕조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이는 잘못된 역사해석으로 당연히 북방의 강자 중심으로 봐야한다, 고대 천하질서의 중심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도 "여진족과 만주족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기존 관념을 벗어나 유연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동북공정은 현재 중국 영토 안의 모든 역사와 문화를 중국화하려는 시도"라며 "이미 중국인으로 포함된 여진족과 만주족이 오래전부터 거주했던 동북지역은 당연히 중국 영토라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규철 경성대 교수는 평소의 지론인 "말갈족으로 불렸던 다수는 사실상 고구려인으로 볼 수 있는 예맥·부여계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고조선 이전 문화도 적극 연구해야"

한 교수는 "말갈이란 자칭이 아닌 타칭으로 당나라에서 동북방 이민족을 통틀어 부르는 통칭이자, 고구려 변방 주민을 낮춰 부르던 비칭(卑稱)이었다"며 "발해인들은 스스로를 발해로 불렀으며, 당나라가 처음에는 비하해 말갈로 표기하다가 나중에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된 뒤 발해로 불렀다"고 속했다.

그는 "말갈을 잘못 이해해 발해가 말갈의 왕조였다는 주장이 한국 학계에서마저 일반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교과서적 견해를 다수의 고구려인설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발해사를 말갈사로 보면 결국 고구려사까지 말갈사로 보게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동북공정의 고조선 연구 결과를 분석한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중국은 단군조선은 근거없는 허구로, 기자 조선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중원의 지방정권으로 강변하고 있다"며 "이는 한국사 자체를 말살하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우리 학계는 고조선의 지표문화로 인정되는 랴오닝 비파형 동검문화는 연구해왔으나 그 바탕이 되는 홍산문화~하가점하층 문화 등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없다"며 "환웅으로 대표되는 유이민 집단이 고조선지역으로 오기 전 거주 지역과 관련해 동북아시아 고대 문화에 대한 보다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토론회가 끝난 뒤 서길수 교수는 이날 학자들의 발언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서 교수는 "동북공정에 대해 우리가 '아니다'라는 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며 "이제 중국사를 해체해야 한다, 오늘 토론회에서 이 같은 발언이 나온 것은 강단사학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강단 사학계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과 같은 문제 제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며 "만주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대해서는 혈통이나 인구학적으로 이미 많은 연구가 되어있다"고 덧붙였다.

고구려연구회는 내년 말 이와 관련한 연구성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2006-09-15 11:0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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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카페 다빈치 - 뜸, 온화하고 강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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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골라학자 낙빈기 금석문에도 저것에 대해 어느 정도 발혀져 있고, 하나라와 은나라가 모두 동이족 국가이며 은나라의 갑골문은 유명하죠. 그리고 은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 역시 동이족 국가죠.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나라가 배달 9夷의 후손이란 것도..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 하가점문화나 장강문화 등 모두 배달민족들이 이룬 것이 라는 고고학적 사실이나 논문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고 KBS역사스페셜,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도 다룬 내용이죠.

독일, 핀란드 등을 비롯한 유럽, 미국, 러시아 기타 등등 셰계 여러 학자들이 짱골라의 방해로 유적조사 방문이 막혀 진행이 지체되고 있는 것도 사실...
민족에 관한 내용은 요사, 금사, 원사, 청사 등에 보면 그들이 모두 고구려나 흉노 등 배달계통 동이의 후예 또는 갈래민족이란 것을 다 밝히고 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 청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예라고까지 자처했으며, 특히 신라가 망한 후 그 신라 왕족 일부가 이들 나라들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것도 얘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수많은 북방민족왕조들하에서 짱골라 한족은 똥개와 동급인 최하층계급이었죠.

원나라 치하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 몽골인이었고 다음이 고려인, 승려들인 라마를 비롯한 티벳인, 이슬람인이었죠.

짱골라는 아예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노예계급이었죠.

또 청나라 조정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 #34201;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들의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 #34201;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 #37992;)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실제 짱골라들이 자랑하는 한족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왕조들은 홍산문명 한웅배달국이나 요하문명 단군조선국의 제후 또는 갈래왕조들입니다.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이 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 등 여러 고고학 유적지가 밝히짐에 따라 실재성이 드러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짱골라들이 지들 조상이라 억지 부리는 복희, 신농,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마저도 모두 배달민족들이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계통 흉노족국가죠. 그러니 짱골라들이 역사공정하려고 발악할 수 밖에...그리고 박창규님의 글도 인용해보겠습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에 불교를 전할 뜻을 세우고 히말라야를 넘어 동쪽으로 갔다. 이처럼 뜻을 세운 사람 하나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있는데 거대한 종족의 무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역사를 찾는 후세의 노력부족에서 원인을 찾아야하는 문제겠지만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사례 하나를 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비약시켜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것이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의 투쟁으로 곰족이 승리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은 역사가들도 지지하는 설이다. 곰족이 우리가 말하는 단군조선의 정통구성원이었다면, 호랑이족은 누구였으며 정통성 다툼에 패배한 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단군신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 역사와 연결시켜보자.
단군왕검의 출현은 환웅 신시배달국의 분열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환웅이 아들을 보고 아들이 왕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왕조와 왕조의 교체를 너무나 함축적으로 설명한 신화다.
창세기 1장1절과 2절 사이의 간격만큼 먼, 그런 거리를 단 한 사건으로 연결한다. 신화의 용도는 그런 것이다. 천년의 비약이 환웅과 웅녀의 가족사에 숨어있는 셈이다. 이 연결고리에 곰과 호랑이의 설화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원래 함께 살았던 곰과 호랑이가 단군을 기점으로 헤어진다는 의미다. 그것도 마늘과 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곰은 환웅의 적통을 이어받을 옥동자 단군을 낳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의 흔적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호랑이족이 정통성에 패배해 권력을 잃고 피지배층이 되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멀리멀리 다른 땅을 찾아 떠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면 호랑이 토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 있고 산동성에서 청나라 때 발견되어 다시 세워진 고대 사당에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판박이한 듯한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는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적통을 잇는다.

호랑이라는 점만 빼면 단군신화와 이야기 줄거리가 같은 벽화가 걸린 이 사당의 이름을 '무씨사당'이라고 한다. 나는 호랑이족의 출현을 중국왕조의 출현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때만 해도 중국적 특징보다는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더 많은 고대중국의 국가다. 실제로 초대 단군시대는 중국의 요임금과 맞물려있고, 한단고기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요임금은 한웅시대에 배달국에 도전했던 황제(黃帝)헌원 이후 최초로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나라을 세운 중국왕이다. 한단고기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요임금이 중국의 동북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동쪽 바다로 놀러갔다가 용에게 겁탈당해 요임금을 낳는다. 특히 요임금이 천거하여 왕이 된 순임금의 아버지는 고수라는 사람으로 중국이 아닌 동쪽 나라의 관리였다. 한단고기의 연대기를 믿기만 한다면 순임금이 고조선 관리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증거할 수 있다

이 때만해도 중국과 조선이 민족국가로 분리된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중국보다는 우리종족에게 더 가깝다는 의미다.(그러나 일단 국수주의적인 해석은 삼가자)

요순 뒤를 잇는 하나라와 은나라에 와서 드디어 우리는 호랑이의 정체를 본다. 환웅의 배달국에서 함께 살았던 곰과 범은 아마도 누가 진정한 계승권자냐라는 적통의 문제로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는 그 사실을 매우 상징적이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범은 못 참아 떠나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적통을 이었다는 거다.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곰족과 갈라선 범족은 이미 환웅시절부터 광범위하게 대륙에 흩어져있던 夷족(배달족)을 결합하여 곰족의 조선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 첫 나라가 상(은)나라다. 그들이 배달범족이다. 상상을 돕기 위해 이렇게 정리해보자.
한웅의 신시배달국 시절에 많은 종족들이 연합을 이루어 살았다. 물론 그 중 적통은 고조선으로 나라를 이어간 곰족들이지만 다른 많은 종족들(말갈, 선비 등등)과는 형제국이었을 것이다.
적통을 잇는 과정에서 범족이 분리되자 그들은 곰족과 대립하게 되었고 다른 형제국들과는 달리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중국족, 즉 화하족과 혼혈문화를 이룬다. 중국문화 자체가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상당부분 기마종족의 특징을 지키며 나라를 이어 간다. 이 배달범족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고유성을 지켰을까? 지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진흙탕에 묻혀 고유함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한 사료를 근거로 이 흔적을 한나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우선 주나라에 패퇴한 기자가 동북으로 가서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의 왕이 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연대기로 보면 진시왕 시절에 해모수가 부여를 세우고 조선을 폐했으므로, 한나라에 망했다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이 번조선이다.) 성삼문이 읊었다는 백이숙제의 수양산 이야기도 이 시절의 것이다. 하는 짓으로 보아 틀림없이 배달족이다...이야기를 이어보면, 상(은)나라가 망한후 주나라가 섰지만 많은 수의 배달범족이 여전히 중국땅에 살았다. 그래서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고 이 때문에 옛조선의 동이족은 더욱 이들을 동족취급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알고있는 “사기열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 갈래인 배달범족의 나라다. 공자가 인자의 나라인 동쪽 나라로 가고싶다고 한것은 바로 그들의 원래 출신인 배달 나라로 가고싶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모략과 후안무치가 난무한 중원에 비해 동방 고조선의 태평성대는 거의 환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타락한 지금에 와서, 태평성대의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오히려 모사와 정쟁으로 점철된 사기열전은 잘 팔릴지언정 교화와 훈시로 가득한 옛조선의 기록은 정말 재미가 없다. 사기열전에 나오는 춘추시대의 나라들 중 거의 대부분이 배달범족의 나라였다. 이런 기록은 그들이 조선과 적절히 연합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면서 나라를 운영했다는 사소한 기록을 죄다 훑어봐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다. 중원대륙내의 배달범족 국가들은 혼혈문화로 뒤덮이기 시작했던 초대 단군시절부터 조금씩 배달겨레의 순수성, 즉 기마종족적인 요소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상(은)나라는 틀림없이 기마종족적 요소가 강한 북방민족의 후예였고, 주나라 동북을 차지한 연나라는 그 국민들 대다수가 화하족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아우가 풍속을 바꾸는데 삼년이 걸렸다고 고백한 틀림없는 배달범족 국가이고 송(宋)나라와 위(衛)나라도 배달범족국가라는 증거가 많은 나라들이다
배달범족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 한웅배달국 시절에 중국에 터를 잡은 배달국가, 즉 동이(東夷)가 아닌 다른 夷족 국가로는 제나라와 래나라, 오월동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다.
특히 패왕항우로 유명한 초나라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을 구성하는 종족들은 주로 蠻夷(만이), 淮夷(회이), 萊夷(래이) 등의 초기 배달족이다.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에 있었던 아홉가지 夷족(九夷)의 후손들인 셈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문헌으로의 역사란 쥐나족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책에 의지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쓰기 시작한 책에서 시작하는 역사라...
사기열전은 이미 한나라라는 화하족의 나라가 선 다음에 나온 책인데, 여기 보면 진시황은 중국땅에서 배달족의 영향을 몰아내기 위해 장성을 세우고 옛기록을 태우고 유(儒)라고 부르는 지식인들을 매장한다.

儒, 지금은 공자학파로 부르지만 그 때만 해도 공자를 비롯해 제자백가를 모두 유라고 불렀다.
이를 제사장적인 전통을 가진 기마민족의 지식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주 무왕이 기자에게서 배운 사례 등)

단군왕검이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곰족의 것이라면 儒라는 지식인적 전통은 배달 범족의 것이었던 셈이다. 진시황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배달족의 나라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하고 전국을 맞는다. 유방과 항우의 혈전으로 삼천만에 달했던 중원의 인구는 육백만으로 줄어들었다. 배달범족은 이때 씨가 말라버린 셈이다. 이 때부터 허구의 종족 '쥐나 짱골라'가 섰다. 漢나라다. 그 한나라가 사기열전을 썼다!
제 종족 이외의 종족을 죄다 제거하고 그 땅에 있는 옛 것을 죄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역사전환의 출발점"이다...호랑이들은 서쪽으로 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진시왕 때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한나라와 중원을 놓고 일전을 벌인 초(楚)나라는 만이(蠻夷)땅에 살던 웅역이라는 사람의 조상에서 비롯된다고 사기열전에 적혀있다. 근원을 잘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사마천의 의도를 잘 아는 나는 패왕 항우가 배달범족의 마지막 왕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말? 정말!

장기둘 때 생각나겠네? 응!

언제나 초나라를 아래로 취급하는 것, 바꾸면 안되나? 바꾸자! 

  

                                                          ~ 단군조선국 강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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