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01 통권 567 호 (p100 ~ 109)

[송년호 특별부록 | 한국의 核주권]

북한의 원자력정책
‘조선반도 비핵지대화’라는 기만과 집요함으로 이룬 ‘그들만’의 핵 억제력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swc339@kinu.or.kr

북한은 1980년부터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요구해왔다.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했을 때 한국이 주장한 비핵화 정책을 받아들여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책이었다. 북한의 의도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와해시켜 북한 주도의 통일을 하는 데 있다.

1990년대 초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북한 핵문제가 10여 년이 지난 2006년 대한민국의 안전과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2000년대의 북핵문제는 1990년대 북핵문제에 비해 심각성이 훨씬 큰 사안이다.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뒤 10월20일 평양에서 열린 ‘핵실험 성공 평양시 국민대회’에 참가한 북한군인들.

 

글로벌 시큐러티 사이트가 공개한 북한 영변의 50MW원자로 건설 현장.

 

제2차 북핵위기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대통령특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을 이용한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해 북한 당국이 이를 시인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후 6자회담을 통한 해결 노력이 있었지만,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하고, 유엔 안보리가 6·25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양상이 바뀌었다.

 

북한의 핵정책은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선전용 대외정책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가장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는 군사정책으로 이원화돼 추진되어왔다. 한편으로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며 주한미군과 미국의 핵무기를 겨냥해 한반도를 비핵지대화하자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명분 아래 북한에 산재한 양질의 우라늄광(鑛)을 바탕으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북한이 반핵(反核) 입장을 최초로 공식 표명한 것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비핵지대화를 주장한 것은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조선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제의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북한은 남북한 간의 신뢰구축이나 군축방안을 제의하거나 미국과 협상을 추진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항상 의제에 포함시켰다.

 

대외 선전용 비핵지대화 정책

북한은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주장하는 근거로 주한미군이 대북 억제용으로 한국에 배치한 핵무기의 존재를 들었다. 북한의 비핵지대화 주장이 드러난 최초의 공식기록은 1956년 11월 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한국 국회와 국민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 서한에서 북한은 한국이 군사정전협정을 위반했으며 한반도에 핵무기를 반입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북한은 핵문제를 간헐적으로 제기했지만 본격적인 반핵 캠페인을 벌인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1980년 12월 개최된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의 구체적 실천조치를 제시하며 한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제의했다. 1986년 6월23일에는 한반도의 비핵 평화지대화를 논의하기 위한 남한-북한-미국 3자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1987년 7월23일에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단계에 걸쳐 남북한 군사력을 10만명으로 감축하고 주한미군과 핵무기를 함께 철수하는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한 및 미국 외무장관회담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1988년 11월7일 발표된 한반도 군축방안에서 북한은 ‘1989년 말까지 주한미군과 핵무기를 북위 35도30분까지 철수하고 1990년 말까지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을 제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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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리랑 2호 위성이 찍은 함북 길주군 풍계리 일대. 북한은 이 지역에서 핵실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 북한의 제안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1990년 5월31일 발표된 한반도 군축안(案)에서 북한은 10개항의 신뢰구축 및 군축방안을 제시했다. 이 군축안에서 북한은 한반도를 비핵지대화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한국 내의 모든 핵무기가 즉각 철수되도록 공동 노력할 것 ▲핵무기의 생산과 구입을 금지할 것 ▲핵무기를 적재한 외국 비행기와 함선의 한반도 내 출입과 통과를 금지할 것을 실천방안으로 제시했다.

1991년 7월30일에는 남북한이 1992년 말까지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선언하고 1993년 말까지 주변의 핵보유국들로부터 비핵지대화의 지위를 보장받을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상의 제안을 보면, 북한의 비핵지대화 주장은 한국보다는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미국의 핵전력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1년 12월 기존의 비핵지대화 주장을 접고 한국의 비핵화 정책을 수용해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한국의 비핵화 정책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지 말자는 비핵지대화와 달리 남북한의 핵보유 금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북한의 태도 변화에 당시 많은 사람이 ‘북한의 핵정책이 변했다’고 판단했으나,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 이후 북한이 보인 행태는 이런 변화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전술적인 변화에 불과했음을 증명해주었다.

 

김일성 “핵 개발 의사도 능력도 없다”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한 후속협상에서 다시 비핵지대화의 내용을 주장했다. 북한이 한국의 비핵화 정책을 수용한 것은 소련의 붕괴와 동구 공산정권의 몰락으로 인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김일성 생존 당시부터 2003년 4월 미·중·북 3자회담에서 북한 당국자가 핵 보유를 시인하기 전까지, 핵문제에 대한 북한의 공식 발표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것으로 일관했다. 김일성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처음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1977년 10월 일본 NHK 논설위원장과의 대담에서였다. 김일성은 1991년 9월26일 이와나미(岩波) 서점 사장과 한 대담에서도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단언했다.

1992년 신년사와 같은 해 2월20일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과의 오찬 담화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김일성은 이 오찬 담화에서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만들지도 않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큰 나라들과 핵 대결을 할 생각이 없으며 더욱이 동족을 멸살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원자력 평화적 이용 가장

그러나 김일성이 이 연설을 하던 당시에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을 위반하고 있었다. 공장 규모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을 가동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 두 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10∼14kg을 확보하고 있었다.

2005년 2월10일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북한 외무성의 성명과 2006년 10월9일의 핵실험은 김일성의 연설이 완전히 기만이었음을 입증한다.

북한이 원자력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언제부터 핵무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일본인이 북한의 우라늄광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니 북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라늄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00만t이 넘는 양질의 우라늄이 매장된 우라늄광을 보유한 북한으로서는 원자력을 매력적인 에너지원(源)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25전쟁 이전인 1949년 원산의 소련문화원에서는 원자력의 기초지식을 담은 소련 원전을 한글로 번역한 자료를 토대로 원자력에 대한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평화적 목적으로 시작된 듯한 북한의 원자력 이용 정책이 1980년대 후반부터 핵무기 개발 정책으로 본격 전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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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주장한 김일성(오른쪽)과 김일성의 유훈을 지키겠다고 한 김정일.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한 후 비핵지대화를 추진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군사동맹 와해를 노리고 있다.

1955년 가을 북한 과학원은 핵물리학 관련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6월, 여섯 명의 과학자가 동유럽에서 열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원자력 개발 초기, 소련은 북한의 중요한 외부 지원자였다. 1956년 3월 북한은 모스크바 인근에 위치한 드브나(Dubna)연구소가 다국적 원자력연구센터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면서 소련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했다. 북한 원자력 전문가들이 소련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도 1956년부터였다. 1959년 가을에는 북한과 소련 양국이 원자력 협력에 관한 추가 의정서를 체결했다.

한편, 김일성은 1961년 9월 개최된 제4차 당대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 개발 사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1970년 11월의 제5차 당대회에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문제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북한의 핵정책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연구소와 관련 정부 부처들이다. 내각 소속의 원자력총국 산하에는 두 개의 위원회가 있고 영변과 평양에 각각 한 개씩 연구센터를 두었다.

규모가 가장 큰 영변의 연구센터는 10개의 연구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1952년 12월 당시 과학원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인데 이 연구소는 나남과 원산, 박천에 분소를 두고 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던 1990년대 초, 가동 중이었거나 건설 중이던 주요 시설은 16개에 달했다.

 

천연우라늄 이용

1965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IRT-2000 연구용 원자로가 영변의 연구단지에 세워졌다. 소련은 이 원자로에 필요한 농축도 10%의 핵연료를 1973년까지 북한에 제공했다. 1970년대에 북한은 정련과 변환 그리고 핵연료 제조 같은 핵연료주기 개발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1974년 북한의 과학자들은 IRT-2000 원자로를 개량해서 농축도 80%의 핵연료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한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인민군은 1951년 10월, 국군 포로를 중심으로 한 4000∼5000명 규모의 20여단을 창설했는데 이 부대는 영변지역 일대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북한이 5MWe 원자로의 설계에 착수한 것은 1980년 7월이다. 이 원자로는 1987년 12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5MWe 원자로는 1950년대 중반 프랑스가 개발한 G1형 원자로와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원자로의 주요 목적은 플루토늄 생산에 있는데, 최대 가동시 연간 11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북한이 왜 이런 형의 원자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북한 땅에 매장된 풍부한 천연우라늄을 원료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핵연료의 대외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플루토늄 생산율이 높다. ▲당시 북한은 우라늄 농축기술이나 중수(重水) 생산기술이 없었다.

북한은 5MWe 원자로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연구용 시설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이 원자로는 주민들에게 약간의 전기와 온수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5MWe 원자로가 전력(電力)보다는 핵무기용 플루토늄 제조에 적합한 원자로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판단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로 잠시 주춤했다가 1990년대 중반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재개되었다. 제2차 북핵위기가 촉발된 2002년 10월부터는 공개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핵능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왔다.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를 위반하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한 예가 클린턴 행정부 당시인 1999년 미 의회의 대북정책 검토그룹이 작성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북한이 1994년 이후 핵개발을 위해 파키스탄과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는 방안을 모색해왔고 유럽과 일본에서 2중 용도 품목을 획득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과 핵 관련 고폭실험을 포함한 핵개발을 지속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significant evidence)’가 있다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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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도움으로 핵 개발

2003년 7월9일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은 국회정보위원회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북한이 제네바합의 체결 이후 중단했던 고폭실험을 1997년부터 영변의 북서쪽 40km 지점에 있는 평북 구성시 용덕동에서 재개했다. 2002년 9월까지 70여 차례 고폭실험을 실시했으며, 우리 정부는 이런 사실을 1998년 4월부터 파악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2002년 10월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자, 한국 정부는 ‘북한의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지하고 추적해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준 당시 국방장관은 2002년 10월1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한미 정보당국은 1994년 제네바합의로 봉쇄된 플루토늄 생산 시설 이외에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에 관련된 첩보에 주목하고 긴밀한 정보협력을 유지해왔다”고 공개했다.

같은 해 10월24일 신건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우리측이 확보한 시점은 1999년 초이고, 관련 정보를 미국에 통보해서 한미 정보공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2003년 1월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도 핵개발 의사가 없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정부성명을 발표했다.

“핵무기 전파방지조약(NPT)에서의 탈퇴는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압살책동과 그에 추종한 국제원자력기구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응당한 자위적 조치이다. 우리는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하지만 핵무기를 만들 의사는 없으며 현 단계에서 우리의 핵 활동은 오직 전력생산을 비롯한 평화적 목적에 국한될 것이다.”

하지만 2003년 4월 하순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에서 이근 북한 수석대표는 켈리 차관보에게 핵무기 보유 사실을 시인했다. 이것은 책임 있는 북한 당국자가 핵 보유 사실을 공개한 최초의 발언이었다. 2003년 6월부터 북한은 ‘핵 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대외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2차 북핵위기부터 핵 억제력 과시

‘핵 억제력(Nuclear Deterrence)’이란 상대의 공격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핵무장력을 갖춤으로써 상대의 공격을 사전에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북한이 억제력이란 단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2차 북핵위기가 불거진 2002년 10월이었다. 북한이 제네바합의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위반하며 비밀리에 HEU 프로그램을 추진해왔다는 사실이 공개돼 제2차 북핵위기가 촉발되자,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제임스 켈리 특사와 회담한 내용을 소개하고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작은 나라인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 해결방식의 기준점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에 대한 위협의 제거이다. 이 기준점을 충족시키는 데는 협상의 방법도 있을 수 있고 ‘억제력’의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될수록 전자를 바라고 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1주일 후인 2002년 11월2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사실 조미(朝美) 사이에 지금 같은 적대관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경제형편도 어려운 때에 그처럼 많은 품을 들여가며 방위력 강화에 힘을 넣고 특수무기까지 만들겠는가? 명백히 하건대 미국의 선(先) 핵포기 주장은 새로운 충돌을 불러오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에 상응한 대응책을 강화하는 데로 떠밀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핵무기(특수무기)를 만드는 데 큰 비용이 소요되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영변에서 핵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는 시점이자 NPT에서 공식 탈퇴하기 직전인 2002년 12월29일 외무성 대변인은 NPT의 특수지위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민족의 존엄과 생존권을 위해 부득불 그 위협에 대항해 필요한 자위적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함으로써 군사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것임을 시사했다.

2003년 1월10일 NPT에서 탈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북한당국은 핵무기를 만들 의사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북한이 취한 일련의 행동은 NPT 탈퇴는 북한이 국제법적 규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핵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핵 개발 위해 NPT 탈퇴

그 후 북한은 2003년 3월 발발한 이라크 전쟁을 북한이 막강한 물리적·군사적 억제력을 보유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선전하면서 “오직 물리적인 억제력, 그 어떤 첨단무기에 의한 공격도 압도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적 억제력을 갖추어야만 전쟁을 막고 나라와 민족의 안전을 수호할 수 있다는 것이 이라크전쟁의 교훈”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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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쟁이 미국의 완승으로 끝난 것으로 평가되던 2003년 5월13일 조선중앙통신사 상보(詳報)는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을 궤멸시킨 미국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피력하면서 자위적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강력한 결의를 또다시 표명했다.

2003년 6월6일 외무성 대변인은 핵무기 개발이 국제법 위반이 아닌, 지극히 정당한 결정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공화국은 국제법 절차대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와의 담보협정의 구속에서도 벗어난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핵 억제력을 갖추는 문제에서 미국과 기타 핵 억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이 아무런 국제법적 구속도 받지 않고 있는 것과 꼭 같은 법적 지위에 있다.”

NPT 회원국이 아닌 상태에서 핵보유국임을 천명한 북한의 행위가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는 정당한 조치였다는 주장은 2006년 10월9일의 핵실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제1차 6자회담이 끝난 직후 발표된 2003년 9월1일자 ‘노동신문’ 논평은 북한의 핵 억제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논평에 따르면, 북한은 핵 억제력에 대해 자주권 수호, 자위수단이자 방어적 성격, 주체적인 방법 및 이전 금지라는 네 가지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논평은 첫째, 자주권과 관련해서 “우리에게는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핵 억제력이 필요한 것이다. 핵 억제력 강화는 주권국가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

둘째, 자위수단의 측면에서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핵무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들은 미국의 핵위협에 대처하여 자위적 국방력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핵 억제력은 미국의 대(對)조선 핵 선제공격, 무력침공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핵 개발은 방어적 성격을 띤 것이며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백남순 북한 외무상은 2004년 4월 북한을 방문한 해리슨(Selig Harrison)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핵개발 계획이 순전히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핵 억제력은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개발해서 보유하게 된 것”이라며 주체성을 강조한다. 북한은 핵실험도 100% 자체 기술로 성공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넷째, 핵 억제력을 보유하되 핵무기를 다른 나라에 이전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논평은 “우리는 우리의 핵 억제력을 대양 건너 미국에 가지고 가서 미국과 싸움하겠다고 한 적이 없으며 그것을 다른 나라에 팔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2006년 10월3일 핵실험을 실시하겠다는 외무성 성명을 발표하면서도 “절대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핵무기를 통한 위협과 핵 이전을 철저히 불허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핵무기나 핵물질을 이전할 경우 미국으로부터 군사적인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 철수가 진짜 목표

일반적으로 핵 억제력은 적대국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에 의한 보복능력을 보유함으로써 상대의 공격을 사전 저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핵 억제전략은 그동안 미국과 러시아 등 주요 핵보유국의 군사안보전략의 일부였다. 그런데 북한이 핵 억제력 보유를 공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 억제력은 핵무장 옵션을 포기한 한국에는 중대한 안보위협이자 시급하고 철저한 대응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북핵문제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핵무기와 관련한 북한의 방침과 행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만과 집요함’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외부적으로 이를 철저히 부인하고 기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핵 개발에 대한 철저한 부인 속에 이뤄진 북한의 주요 기만행위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1991년 12월 한국과 비핵화 공동선언을 체결하면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을 갖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개월 후 실시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결과 북한은 이미 재처리시설을 보유하고 있고, 세 차례 이상 재처리를 실시해 플루토늄을 추출한 사실이 밝혀졌다.

둘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이 선언의 이행을 약속한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르면 북한은 우라늄 농축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칸(Abdul Qadeer Khan) 박사가 주도한 핵 밀거래 네트워크가 발각됨으로써 북한은 1990년대 이후 파키스탄으로부터 농축 관련 기술과 장비를 들여오며 긴밀히 협력했음이 드러났다. 북한은 아직도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2006년 9월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칸 박사와 북한사이의 핵 밀거래 상황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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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북한은 2003년 1월 NPT에서 탈퇴하면서 핵개발 의사가 없다는 정부 성명을 발표했지만 2003년 4월 하순,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에서 이근 수석대표가 켈리 차관보에게 핵무기 보유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불과 3개월 만에 성명을 뒤집었다. 그리고 2006년 10월 9일 실시한 핵실험을 통해서 그들이 주장해온 ‘핵 억제력’이 말장난이 아니라 분명한 실체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이번 핵실험은 완벽한 성공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핵 억제력의 증강을 공언해온 북한이 핵개발의 마지막 금지선인 핵실험을 실시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핵실험을 감행하기 이전의 북한과 이후의 북한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북한은 실체를 과시한 핵무기를 바탕으로 더욱 공세적인 핵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핵능력을 강화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대남·대미용 비핵지대 창설 정책을 강하게 추진할 것이다.

 

핵을 매개로 한 북한 주도의 통일

문제는 북한의 비핵지대 창설 정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주한미군 철수라는 데 있다. 지금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앞서 밝힌 대로 1990년대 초 남북기본합의서 협상 때 그들이 제기했던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이다. 이 주장을 수용하게 되면, 한미 군사동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미군의 한반도 출입은 물론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군사훈련까지 금지되기 때문이다.

미군이 한국에서 전술핵을 철수한 1991년 이후에도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을 핵전쟁 연습훈련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결국 북한의 주장은 ‘비핵화’라는 모자를 쓰긴 했지만 그 내용은 ‘비핵지대화’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북한 정권의 주한미군 철수 의지는 집요하다. 핵이 없던 1980년대까지는 재래식 전력 감축을 매개로 주한미군과 핵 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는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미국과 핵군축 협상을 하자고 나설 것이다.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핵을 매개로 외세를 배격하고 남북통일을 주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북한 정권에 있어서 비핵화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닌 것이다.

전성훔
1962년 수원 출생
고려대 산업공학과, 캐나다 워털루대 대학원 졸업(경영과학박사)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남북관계발전위원
現 원자력이용개발 전문위원
논문 ‘핵보유국 북한과 한국의 선택’ 등

김정일 정권이 핵을 포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핵무기가 국력의 상징이자 선군정치의 귀중한 결실이기 때문이다. 핵은 김정일의 통치이념인 선군정치로 탄생했으므로 선군정치를 지속시키는 보루가 될 것이다.

문제는 핵을 가진 북한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있다. 한미 양국은 앞으로 북핵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원하는 주한미군 철수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우리는 생존이 걸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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