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인가 모태있나

한국일보ㅣ 입력시간 : 2008/11/18 02:39:35                        유상호기자 shy@hk.co.kr

 

"원나라 파스파 문자 본 삼았다" 對 "모음 중성체계는 독창적"

 

한국학중앙연구원 발간 <몽고자운>

 

<몽고자운>에 실려 있는 파스파문자.

 

한글은 정말 독창적으로 창제된 문자일까. 학교에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1446년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어 반포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한글과 비슷한 고대 문자는 사실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다.

인도 구자라트 지방과 티베트의 고대 문자, 신대문자(神代文字)로 불리는 일본 아히루(阿比留)문자 등이 그것이다. <세종실록>과 <훈민정음해례>에도 '옛 글을 본떠(倣古篆)'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명기돼 있다.

학계는 여러 문자 중 한글의 연원을 밝혀줄 것으로 몽골의 파스파(八思巴)문자를 주목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를 비교연구해온 국내외 학자들이 참가하는 워크숍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를 18, 19일 연다. 워크숍은 파스파문자로 한자의 표준음을 기록한 <몽고자운(蒙古字韻)>의 국내 영인본 출간을 기념해 마련됐다.

■ "훈민정음은 파스파문자를 본떠 만든 것"

게리 레드야드 콜롬비아대 명예교수(한국사)는 15세기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파헤치며 훈민정음의 기원을 추적한다. 레드야드는 고대 문자들의 자음을 비교해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가 티베트, 더 거슬러 그리스 문자와도 연관이 있음을 주장해온 학자다.

이번 발표 논문 '방고전(倣古篆)의 문제: 파스파문자와 훈민정음'을 통해, 그는 훈민정음이 본을 삼았다고 밝힌 '고전(古篆)'이 파스파문자라며 그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상고주의(尙古主義)의 영향으로 15세기 조선의 학자들이 전서(篆書)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드러낸다. 이는 훈민정음보다 175년 앞서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파스파문자도 마찬가지였는데, 두 문자는 모두 전서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레드야드의 설명이다.

그는 두 문자의 구상ㆍ발명 과정과 구조의 유사성, 원과 조선의 학자들이 문자 창제 후 음운론 연구에 가장 먼저 착수한 점(몽골의 <몽고자운>과 조선의 <동국정운> 발간) 등을 들며 두 문자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게리야드는 이번 논문에서 특히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정치ㆍ문화적 맥락에 주목한다. 원의 통제를 받았던 고려의 문화적 유산과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세종의 가족사적 내력(이씨 왕가의 변경생활)이 그것이다.

그는 통역 교육기관인 사역원에서 파스파문자가 1469년까지 교육됐다는 실록과 <경국대전> 등의 기록을 통해 조선 초까지 이 문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밝힌다. 신숙주, 최세진 등의 언어학 문헌들도 당시 파스파문자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 "훈민정음의 자형(字形)은 독창적인 것"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국문학)도 한글에 대한 국수주의적 태도를 경계한다. 지금으로부터 560여년 전에 음운이라는 단위를 인식해, 한국어의 음운에 맞는 기호체계(훈민정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 교수는 초성자가 한자음의 음모(音母)에 근거해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중성자(모음)만은 새로운 것이라 주장한다. 모음체계의 독창성이 훈민정음이 파스파문자와 구별되는, 다른 문자인 근거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몽고자운>의 분석을 통해 파스파문자는 모두 티베트문자를 변형시킨 것임을 밝힌다. 반면 <훈민정음해례>를 근거로 훈민정음의 기본 초성(ㄱ, ㄴ, ㅁ, ㅅ, ㅇ)은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것이고, 일부 자음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ㅇ'의 제자 방식, 음소 단위 표기법 등에서 파스파문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 교수는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材)를 기호화해 중성체계를 만든 것은 전혀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 파스파문자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티베트 출신 승려 파스파(1235~1280)가 만든 몽골어 문자. 몽골어뿐 아니라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이뤄진 표음문자다. 세계 문자학계에서는 이 문자가 훈민정음 창제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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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글의 파스파 문자 모방설'을 반박하고 있는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왼쪽). 오른쪽은 김정배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유석재 기자

 

 

 

#한글마저 빼앗길 뻔 했다. (+이미 한자韓字는 빼앗겨 왜곡된 상태)

 

 

한글이 중국 문자가 될 뻔했다?
세계 공용어로 가장 적합한 언어
 
▲ 훈민정음 해례본.  ⓒ

요즘 중국어 열풍이 뜨겁다. 조기교육의 중요성 때문인지 중국어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도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중국어를 힘들여 배우지 않아도 될 뻔한 일이 있었다. 과연 그게 어찌된 사연이었을까.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을 지낸 위안스카이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조선에 와서 청일전쟁 직전에 중국으로 돌아간 이른바 조선통이었다. 그는 중국 사람들이 어려운 한자 때문에 문맹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자고 주장했다.

조선에 머물면서 한글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익히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소국의 문자를 쓸 수 없다는 중국 지배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에도 한글의 우수성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언어 연구에서 세계 최고인 영국의 옥스퍼드대 언어대학은 과학성, 독창성, 합리성 등을 기준으로 세계 모든 문자에 대해 순위를 매긴 적이 있었다. 그때 당당히 1위를 차지한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또한 1996년 프랑스에서 세계 언어학자들이 참석한 학술회의에서는 한국어를 세계 공용어로 쓰면 어떻겠냐는 토론이 오간 적도 있었다. 한편 미국 캘리포니아대(UCLA) 제어드 다이어먼드 교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이며, 이 때문에 한국이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다는 논문을 1998년 과학잡지 ‘디스커버’ 6월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과연 한글은 왜 그처럼 우수하고 뛰어난 문자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우선 IT의 대표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와 휴대폰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

컴퓨터 자판을 보면 왼쪽에는 자음이 배열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모음이 배열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양손가락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모든 글자를 컴퓨터 화면에서 자유롭게 조합하고 생성할 수 있다.
휴대폰의 경우 자판은 겨우 12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부터 마치 미래의 정보화 시대를 예견이나 한 것처럼 과학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천지인(天地人)의 원리를 반영한 모음은 하늘을 상징하는 점(ㆍ)과 땅을 나타내는 가로획(ㅡ), 사람을 뜻하는 세로획(ㅣ)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세 자의 조합만으로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10개 단모음은 물론 ‘ㅐ ㅒ ㅔ ㅖ ㅚ ㅘ ㅙ ㅟ ㅝ ㅞ ㅢ’ 등의 복모음까지 모두 만들 수 있다.

또한 자음의 기본글자인 ‘ㄱ ㄴ ㅁ ㅅ ㅇ’은 그 글자를 발음할 때의 혀나 입의 구조 등 발음기관을 본떠 만들어졌다. 여기에 획을 더하면 새로운 글자가 만들어지므로, 매우 체계적인 음성분류를 따르고 있다.

수많은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나 1백자가 넘는 일본의 가타카나 문자를 생각해보면 한글이 얼마나 정보화 시대에 어울리는 첨단 문자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의 조합만으로 1만2천여 자의 음절을 만들 수 있어 외국어 등의 새로운 소리를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글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소리와 움직임을 나타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의 경우 의성어의 수가 적고 의태어라는 용어조차 없을 정도다. 때문에 외국인이 말을 할 때는 제스처를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을 할 때 제스처를 함께 쓴다는 것은 그만큼 언어의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국내 연구팀의 실험에 의하면 의성어나 의태어 단어를 봤을 대뇌의 브로드만 영역 19번이 공통적으로 활성화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위치한 방추열은 얼굴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이는 곧 피험자가 의성어나 의태어로 된 문자만 봐도 뇌에서 영상을 떠올린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부들부들’이란 단어만 봐도 사람이 몸을 떨고 있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수많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지닌 한글로 우리 민족은 풍부한 감성은 물론 영상의 이미지화 능력까지 키울 수 있었다. 이 실험결과대로라면 최근에 한류 붐을 일으키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빼어난 영상미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미래의 과학기술에서도 한글은 단연 독보적인 위력을 가진다. 미래에는 컴퓨터의 자판이 없어지고 음성인식을 이용한 기술이 발달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같은 음소 문자인 알파벳보다 한글이 음성인식에서 뛰어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 영어는 동일한 모음이라도 단어마다 다른 소릿값을 가지는데 비해, 한글은 하나의 모음이 하나의 소릿값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의 경우 ‘에이, 아, 애, 어, 에’ 등의 다양한 발음으로 읽힌다. 따라서 ‘apple’을 컴퓨터가 ‘애플’이라고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모르는 상태에서는 ‘에이플’인지 ‘아플’인지 알 수가 없다. 즉, 컴퓨터에 입력된 단어를 음성으로 바꿀 경우 여러 가지 소리를 낼 수 있는 알파벳보다는 한글로 입력된 문자들의 작업이 훨씬 더 쉽고 편리하다는 것이다.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6년(세종 28년) 10월 9일로부터 꼭 560년이 되는 날이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휴대폰과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대며 영어나 다른 외국어 공부하기도 바쁜데 왜 국어란 과목을 따로 배우야 하는지 불평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성규 편집위원  yess01@hanmail.net    2006.10.08 ⓒScience Times  인터넷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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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한글을 아시나요?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한글을 아시나요?”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도대체 한국 사람 치고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 겨레의 글인 <한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잘 아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늘 말글과 떨어져 살 수가 없다. 무한한 공기 속에 살기에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우리도 말글 속에서 그냥 살아가기에 말글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하지만 말을 못하고 글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또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들이 격찬하는 위대한 글자인데도 정작 제나라 사람들은 그 위대함을 모르고 푸대접하기 일수이다. 남의 나라 글자인 한자와 영어 쓰기에 더 골몰해 있을 정도임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터이다.

1999. 3. 3자 한겨레신문에는 박승규 경북대 강사의 글이 실려 있었다.

“13년전 한국에 온 네팔 카투만두대학의 한 교수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생긴 일이다. 당시 나는 습관적으로 이름을 한자로 적어주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왜 한국 사람이면서 중국의 글자로 이름을 썼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전혀 얘기치 않은 상황에 매우 당황해, 우리나라는 중국의 옆에 있기 때문에 그동안 중국의 글자를 많이 사용해왔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나라도 중국과 국경을 같이 하고 있지만 중국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한글을 조금 읽을 수 있는데 왜 당신은 한글로 쓰지 않느냐고 다시 반문하였다. 그때 정말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전무후무하게 창피를 당했다. 그의 주장은 한국 사람이 아무리 중국 글자로 이름을 표기하더라도 중국식 발음은 한국 사람의 발음과 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유명사인 이름을 중국글자로 표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 모로 생각하게 해주는 일화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 자랑스러운 한글에 대해 최소한의 상식은 가져야 된지 않을까? 그러면 그 알아야 될 한글에 대한 상식을 구하는 여행을 떠나보자.

훈민정음의 창제

▲ 세종어제 훈민정음
ⓒ 김영조
한글 즉 훈민정음은 언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훈민정음 머리 글에 보면 창제의 동기와 목적에 대해 밝혀 놓았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유통)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겠다. 그야말로 세종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 속에는 민족의식을 깨닫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면 이 훈민정음을 세종은 어떻게 창제하였을까?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 관한 극히 간단한 내용만이 들어있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의 상소문 등을 살펴보면 훈민정음 창제는 어려운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이 한글 창제에 밤낮으로 고생한 나머지 안질이 나서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시종을 줄이고, 모든 절차를 줄이며, 정무까지도 다 정부에 맡겨 버렸는데, ‘훈민정음'의 연구는 요양하러 간 행재소에서까지 골몰하였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훈민정음'이 25년 계해 겨울에 완성되었지만 곧 최만리 등의 격렬한 상소 등 반대가 크게 일어나 세종의 고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 25년(1443년) 계해 12월이요, 그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1446년) 병인 9월이다. 또 정인지의 해례 서문 가운데에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처음으로 만드시어..)”라는 구절도 나오지만 정확한 반포일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훈민정음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단군3세 가륵임금 때인 기원전 2181년에 정음 38자를 만들어‘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명명하여 발표한 것을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시켜 다듬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훈민정음’이 ‘한글’로 된 까닭은?

▲ 훈민정음 영인본(한글학회 펴냄)
ⓒ 한글학회

한글은 세종이 28자를 반포할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렀다. 그런데 양반 식자층에서는 이 훈민정음을 천대하여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 암클, 아랫글이라고 했으며, 한편에서는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근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어, 언문이라는 이름은 ‘상말을 적는 상스러운 글자’라는 뜻이 담긴 사대주의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여, 주시경 선생께서 1913년‘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 반포 8회갑이 되던 병인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하여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부르다가 1928년에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 ‘한글’이 보편적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한글’이라는 이름의 뜻은 ‘한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으뜸가는 글’등으로 풀이된다.

한글의 특징

한글이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이며, 우리 겨레가 쓰는 글자로 반포 당시에는 28글자였으나 현재는 "�咬壙胱" 등 4 글자는 쓰지 않고 24 글자만 쓴다. 한글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든 과학적인 글자이다. 즉 닿소리(자음)는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의 생긴 모양을 본뜨고, 홀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을 본떠서, 글자가 질서 정연하고 체계적인 파생법으로 만들어 졌다.

둘째, 독창적인 글자이다.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글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복잡한 변화를 거쳐 현재의 글자로 완성되었거나, 남의 글자를 흉내 내거나 빌린 것(일본의 ‘가나’, 영어의 ‘알파벳’)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글은 세종이 각고의 노력 끝에 독창적으로 만든 글자이다.

셋째, 한글은 가장 발달한 낱소리(음소) 글자이면서 음절 글자의 특징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한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낱소리(하나의 소리)를 표기하는 것이다. 홀소리와 닿소리 음을 합치면 하나의 글자가 되고, 여기에 받침을 더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글은 그 구성 원리가 간단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대단히 쉽다.

또 한글은 글자 그대로 읽을 뿐 아니라, 인쇄체나 필기체 등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서로 다르고,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이 있으며, 글자대로 읽지 않는다. 그런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이다.

넷째, 한글은 배우기 쉬운 글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정인지의 꼬리글에는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써 있을 정도이다.

다섯째, 글자를 만든 목적과 만든 사람, 만든 때가 분명한 글자이다. 현재 세계에는 5000여개(20세기 초에 프랑스 한림원(Academia de France) 에서는 세계의 언어를 2796개로 보고함)의 말이 있고, 이 중 100여 개 만이 글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글자들도 모두 만든 목적과 만든 사람 그리고 만든 때를 모르고 있다.

여섯째, 글자 쓰기의 폭이 넓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바람 소리, 학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까지 무엇이든지 소리 나는 대로 글자로 쓸 수 있다"고 하였다. 한글 총수는 1만 2천 7백 68자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음을 가진 글자이다.

재미동포 박춘양님이 발표한 것을 보면 한글로 영어발음을 90%이상 표기할 수 있고, 소리의 표현을 8800개나 적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일본어는 300개, 중국말(한자)은 400여개 정도로 우리말의 표현력이 무려 20배가 넘는다.

이 외에 문법적인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얘기된다.
첫째, 닿소리에 있어서 예사소리(보통소리), 거센소리<숨이 거세게 나오는 파열음 : 국어의 'ㅊ', 'ㅋ', 'ㅌ', 'ㅍ' 등. 한자말≒격음(激音)>, 된소리<후두(喉頭) 근육을 긴장하거나 성문(聲門:목청문)을 폐쇄하여 내는 'ㄲ', 'ㄸ', 'ㅃ', 'ㅆ', 'ㅉ' 따위의 소리 한자말≒경음(硬音)>의 차이가 분명하다. 둘째, 임자말(주어)이 잘 생략되고, 높임말(경어)이 발달돼 있다. 셋째, 국어는 몽골어와 같이 주어+목적어+서술어형의 어순으로 형성된다.

그런가 하면 한글의 특징을 도형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경우도 있다.

그 이론에 의하면 한글이 점.선.면으로 이루어진 조형언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자음의 맨 끝자인 "., -, ㅇ"의 집합체 "ㅎ"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직선(線)을 갖고 묘사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을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ㄱ"에서 "ㅍ"까지는 변화의 세계를 묘사하였다고 본다. 점, 선, 면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모든 양상을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모음에서 보이는 변화의 양상도 우리가 이점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문자체를 하나 더 만들고자 하였을 경우 더 이상 만들 여지가 없을 만큼 모음형식을 완벽하게 조형화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외국인도 극찬하는 한글의 우수성

그러면 우리만 한글을 우수한 것으로 주장하는지, 외국에서는 한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보자.

유네스코(UNESCO)에서는 한글을 인류가 발명하거나 발전시킨 세계적 기록 문화유산으로 공인하였을 뿐 아니라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cy Prize)'을 제정하여 해마다 세계 문명퇴치에 공이 큰이들에게 주고 있다.

미국에 널리 알려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 지 1994년 6월호 「쓰기 적합함」이란 기사에서,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한국에서 쓰는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며, 또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또 소설 『대지』의 유명한 여류작가 ‘펄벅’은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하였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극찬하였다.

미국 시카고(Chicago) 대학의 세계적인 언어학자 맥콜리(J. McCawley) 교수는 20여 년 동안이나 동료 언어학자들과 학생들, 친지들을 초대해서 한국음식을 차려놓고, 한글날을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언어학계가 한글날을 찬양하고, 공휴일로 기념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타당한 일이다."고 그는 말한다.

유명한 동아시아 역사가인 하버드대학 라이샤워(O. Reichaurer)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인들은 전적으로 독창적이고 놀라운 음소문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세계 어떤 나라의 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과학적인 표기 체계"라고 말했다. 또 네델란드의 언어학자 보스(F. Vos) 교수는 그의 한국학 논문에서 "한글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평했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영국의 샘슨(G. Sampson) 교수는 "한글이 과학적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한글은 발성기관의 소리내는 모습을 따라 체계적으로 창제된 과학적인 문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문자 자체가 소리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생리학자이며, 프리처상 수상자인 다이아몬드(J. Diamond) 교수, 일본 도꾜 외국어대 아세아 아프리카 연구소장인 우메다 히로유끼(梅田博之) 교수,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삿세(W. Sasse) 교수, 파리 동양학 연구소의 파브르(A. Fabre) 교수, 미국 매릴랜드 대학 언어학과 램지(R. Ramsey) 교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학들이 한글을 극찬하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1986년 5월, 서울대학 이현복 교수는 영국의 리스대학의 음성언어학과를 방문하였다. 그때 리스대학의 제푸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ㄱ-ㅋ-ㄲ’)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고 전한다. 또 샘슨 교수는 한글을 표음문자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feature system)로 까지 분류하였다고 한다.

맺는 말

지금 대기업들은 세계화와 마케팅 논리에 파묻혀 기업의 이름을 영문자화 하고 있는 추세이다. 선경이 ‘SK’로 바꾸더니 한국통신은 ‘KT’로, 포항제철은 ‘POSCO’로, 삼보컴퓨터는 'TG'로 바꾸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들에게 하는 광고에서도 그들의 구호는 영문이다. SK가 ‘OK SK'라고 해서 좀 덕을 보는 듯하니까 이젠 KT는 ’Let's KT'로, LG는 ‘Wlth LG’로 하는데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전화도 쓰지 말아야 할까? 마케팅 전문서적을 보면 섣불리 이니셜로 상호를 바꾸면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는데 대기업들은 왜 이렇게 영문자를 좋아하는지 걱정스럽다.

지금 일부에서는 한글을 세계공용어로 하자는 운동을 하는 이도 있다. 미국이 세계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난망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려해 볼 값어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내가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겨레의 문화 중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는 질문에 한글을 선택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설문조사의 결과는 그런데도 실제로는 한글이 우리 겨레에게서 푸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은 그야말로 세계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격찬하는 큰 글이다. 이 큰 글을 가진 우리는 긍지를 가져야 될 일이다. 제발 잔칫상을 차려주니까 제 발로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이젠 버려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한글학회 : http://www.hangeul.or.kr/index.htm
한글재단 : http://www.hangul.or.kr/
한글문화연대 : http://www.urimal.org/
우리말 배움터 : http://urimal.cs.pusan.ac.kr/edu_sys_new/frame2.asp
‘잘난척과 무식이 빚어낸 '한글 죽이기', 김영조, 오마이뉴스,
‘한글날을 문화국경일로!, 김영조, 오마이뉴스, 2001

 

김영조 (sol119)

2002-11-12 09:02 ⓒ 2007 OhmyNews

 

 

 

한국방송(KBS)의 '위대한 여정, 한국어' 3부작

 

한국방송은 1년여의 제작 과정을 거쳐 한국어의 탄생과 발달 과정을 조명한 '위대한 여정, 한국어'를 3부작으로 준비하여 2004년 10월 중 9, 10, 17일 저녁 8시에 방송한다.

'한국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떻게 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을까?'란 화두를 가지고, 시베리아의 바이칼에서, 인도양 너머 드라비다에서 한국어와 한국인, 그 문명과 역사의 길을 찾는다. 20만 년 전의 우연한 돌연변이, 언어유전자 FOXP2의 탄생. 그것이 인간과 원숭이의 운명의 갈림이었는데 언어학에서 유전학까지, 고고학에서 인류학까지 한국어의 기원을 추적하는 방대한 시공의 지식 대모험을 시작한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언어의 탄생과 민족의 생성, 민족의 소멸과 언어의 종말 등 무엇이 우리를 우리 민족이게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고구려, 백제, 신라어 그리고 일본어 그들은 서로 통했을까?'하는 물음에도 접근해보는데 마침내 드러난 대륙한어와 열도한어의 존재. 그 충격의 비밀이 밝혀진다.

 

▲ 몽골 아르항가이의 언어바위 / KBS
ⓒ2004 KBS
먼저 제 1부 '말의 탄생-산과 바다를 너머'에선 '언어가 시작되고 퍼져나갔을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한국어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추적한다.

한국어를 처음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킨 것은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트였는데 어떻게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의 한 분파로 규정했을까, 또 그는 어떻게 한국어를 접하고 연구하게 되었을까? 핀란드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람스테드의 친필 한국어 자료들을 최초로 공개하고, 그의 손녀와 학자들을 만나 최초의 한국어계통연구자로서 그의 업적을 알아본다.

또 한국알타이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몽골과 시베리아의 두메에서 한국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유라시아 대륙 25개국 출신 외국인들을 모아 언어 유사성 조사인 '언어 그루핑 실험'을 해본다. '우연한 발견한 언어유전자 FOXP2, 인류이동의 블랙박스 - 세석기가 말하는 한민족의 원형, 북방계 사람들이 당뇨병에 강하다? - 당뇨병이 말해주는 한민족의 기원, 신화가 말해주는 한국어의 또 다른 루트 - 쌀과 함께 남쪽으로부터?'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1부 '말의 탄생-산과 바다를 너머'

 

 

제2부 '말은 민족을 낳고'에서는 2300여 년 전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극적인 '야요이인의 열도대습격'을 이야기한다.

기존의 죠몽인들과는 인종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종이 갑자기 출현하여 쌀과 청동기라는 무기를 가지고 열도를 점령해 나갔는데 그들의 출발지는 바로 한반도, 그들의 문화는 한반도의 청동기 농경문화,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바로 한반도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어서 '일본어의 원류는 2300년 전의 한국어, 북서 20°의 비밀 - 거기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미스테리! 일본어 속의 고구려어, 재미있는 언어실험 - KBS의 아나운서들은 130년전의 한국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나?, 말의 종말, 민족의 소멸 - 만주어의 비극' 등을 펼쳐 보인다.

 

2부 '말은 민족을 낳고'

 

▲ 중국 오로첸족 언어조사 / KBS
ⓒ2004 KBS
제3부 '말의 길-한국어의 선택'은 언어가 생성·소멸·발전하는 특성을 알아보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국에 유학온 일본 소녀 '아이짱'을 통해 한국어가 세계어가 될 수 있을지 모색해본다.

일본의 외진 시골 대마도에서 풍물패를 조직한 당찬 여고생 아이짱은 지금 한국어에 도전하고 있다. 그녀의 꿈은 한국의 대학에 진학하여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익히는 것인데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한국과 한국어를 선택하게 하였을까? 아이짱과 같이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해 한국어의 가능성을 묻는다.

세계에는 6천이 넘는 언어가 존재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는 오직 하나, 영어이고, 한국어는 사용인구 기준으로 12위권의 언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언어가 사멸해 가고 있으며, 세계는 지금 언어 전쟁중이다. 자신의 언어영역을 지켜내고 나아가 자신의 언어영역을 확장시키는 현장을 통해 묻는다. 한국어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더불어 '21세기 신산업 - 언어산업'을 이야기하고, '한국어의 선택 - 한국어의 세계화는 가능한가?'를 진단해본다.

 

3부 '말의 길-한국어의 선택'

 

 

일본에서 `한글부적' 사용, 토속신 섬겨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4-10-05 16:58 |최종수정2004-10-05 16:58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 제558돌 한글날을 나흘 앞둔 가운데 일본에서한글 부적을 사용하며 토속신을 모시는 신사(神社)와 마을이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돼 눈길을 끌고 있다.

5일 부산외대 김문길(金文吉) 교수에 따르면 일본 시코쿠 도쿠시마시 야마시로라는 마을에는 신사와 집집마다 이 지역의 토속신인 `에비스(エビス)'를 섬기고 찬양하자는 내용의 한글 부적을 붙여놓고 있다.

또 이 마을 주민들은 에비스신 축제와 경조사 때 에비스신이 직접 적어줬다는이 부적을 일본어로 낭독하고 있으나 한글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특히 115페이지 분량의 `계시록'을 갖고 있는데 이 계시록의 제목도 `가이ㅣㅏ아(카미야마.神山)의 계시록'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김 교수는관련자료를 공개했다.

계시록에는 생활법규와 신의 계시 등을 담고 있어 주민들은 이 책을 기독교의성경처럼 여기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지역 외에도 오카야마 비전시 가가도와 후쿠오카 히예신사, 나고야신사, 관서지방의 한 역사자료관 등에도 토속신은 다르지만 이들 신을 찬양하는한글 부적을 붙여놓고 있거나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시키히토시 일본 초고대연구소 연구원 등 일본학자들은 이 부적이 고대사회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김 교수는 "1600년대 조선통신사가 전한 한글이 지금까지 전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글이 일본에서 신을 섬기는 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 한글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사진있음)

youngkyu@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1번이 <고대 한글>인 <가림토>

2번은 <훈민정음>

3번은 <고대한글>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금 변형된 <신대문자>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한글)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非新字也>.

언문(한글)은 전조선(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 - 옛글자)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발음을 쓰는 것)과 합자(글자의 조합)가 전혀 옛것과 반대 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단군조선의 문화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한자의 뿌리)가 있었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몽골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작은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일본, 인도, 몽골, 만주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요하문명의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일본 역사책에서는 고대에 문명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을 "신'이라 한다. 

아마도 당시 일본 원주민들과의 수준차이가 워낙 커서 그럴 것이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발해문자 해독 첫 시도 클릭참조>>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클릭참조>>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 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이

(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주: 고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 고대한국-> 배달한국)

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알타이어의 사용범위는 터키, 몽골, 티벳, 만주 퉁구스어, 한국어, 일본어 등이다

 

 

 

훙산·량주 문화, 중원을 향해 달리다

경향신문 / 입력: 2008년 01월 11일 17:16:48

 
“헌원(황제)의 시대에 신농씨의 세력이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헌원이 곰(熊), 큰 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아 헌원이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아 신농씨(염제)를 대신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

중국 역사서 사기 오제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담긴 함의와 선후관계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풀어야 할 것 같다.

#깨지는 중화사상

량주 문화의 본산인 량주 판산 무덤. 한 개의 무덤에서 수많은 옥벽(둥근 옥)이 쏟아졌다. 훙산 옥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역사계는 중원중심, 한족(漢族)중심, 왕조중심의 중화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왜 춘추전국 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그것은 장성이북, 옌산(연산·燕山)이북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이고 단지 중원문화의 수혜를 받은 문화열등지역이라고 폄훼했기 때문입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중국은 예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했다. 얼마나 천대하고 괄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중국학계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BC 3000년) 유적의 출현 때문이었다. 물론 1930~40년대에도 장성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융합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 특징인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통형관)와 중원 양사오(앙소·仰韶)문화의 특징인 홍도 및 채도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우월한 중원의 양사오 문화가 열등한 훙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오랑캐의 소굴인 동북방 뉴허량(우하량·牛河梁)과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무덤(塚) 등 엄청난 제사유적이 3위 일체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 돌무더기가, 차하이-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에서 옥기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휘황찬란한 량주문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

예컨대 량주문화의 대표격인 량주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판산(반산·反山) 12호는 중심대표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옥그릇) 등 옥문화는 휘황찬란 그 자체다.

“훙산문화의 옥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량주보다는 이른 시기인 훙산옥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량주의 옥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이교수)

량주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예기). 훙산옥이 조형적인 반면 량주 옥문화는 세밀화를 그린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과 옥종은 예기이자 위세품이다. 옥종이 의식에 사용됐다면 옥월을 포함한 각종 부월(도끼)은 군권을 뜻한다. 이 판산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과 군권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판산 인근의 모자오산(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량주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를 3개 조성했다. 유적에는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 퇴적층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이곳이 궁전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야오산(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 회색, 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량주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 “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 古國(훙산)과 方國(량주)

문제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의 관계였다.

“량주문화 초기의 옥기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용형 옥기의 원형을 연상시키거든. 이는 량주문화가 훙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거지.”(이교수)

오랑캐의 본거지에서 잇달아 중원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통고적(痛苦的), 즉 쓰라린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황하 중류(중원)는 중국문명의 중원(中原)이 아니었음을….

중국고고학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는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와 상나라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쑤빙치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지. 즉 3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단계론을…. 그러면서 훙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국가단계인 고국, 량주문화를 그 다음 단계, 즉 제후국의 형태인 방국으로 규정한 것이지.”

쑤빙치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왕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지.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거든.”

이미 살펴봤듯 뉴허량은 단·묘·총 등 3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훙산인들의 성지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왕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량주문화(BC 3200~BC 2200년)는 훙산문화에 비해 취락분화의 층위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옥기문화 또한 훨씬 정교했다. 쑤빙치는 이런 량주문화를 ‘방국’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중원을 향해 달려라

그러면서 ‘량주훙산 축록중원(良渚紅山 逐鹿中原)’이란 말로 정리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축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유방과 항우가 중원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에서 딴 이 ‘량주훙산 축록중원’이란 말은 량주문화와 훙산문화가 중원으로 중원으로 질주했다는 뜻이다.

그럼 ‘축록’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중원 양사오 문화의 본거지인 타오쓰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 용(龍)의 본향인 훙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우선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 문화의 접촉. ‘오랑캐의 문화’를 ‘통고’의 과정 끝에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허베이성(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쌍간허(桑幹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훙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과, 양사오 문화의 대표선수인 장미문양의 채도(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가 나란히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쌍간허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훙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용 조각 옥기)이 출토되었다. 중원인 진남(晋南) 타오쓰(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 토기그릇과 외방내원(外方內圓)의 옥벽은 훙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쑤빙치의 결론은 이랬다.

“관중 분지(중원)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양사오 문화)와, 옌산 이북·다링허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 및 빗금토기 옹관(훙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허베이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훙산문화의 꽃인 제단(단)과 신전(묘), 무덤(총)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학계는 이른바 그렇게 창조된 중국문명의 질긴 끈을 베이징 천단(天壇)에서 찾는다. 뉴허량 제단의 앞부분 형태는 천단의 환구이고, 뒷부분은 베이징 천단의 기년전(祈年殿·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와 후대 제왕릉의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훙산문화만이 이렇게 중원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다.

훙산보다 늦은 량주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진남(晋南)의 타오쓰 유적에는 량주식 토기와 옥기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둥반도 남쪽인 쑤베이(蘇北) 화팅(花廳) 유적은 이른바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량주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 옥(玉) 등이 나왔다. 이는 량주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옌원밍(嚴文明)은 이를 두고 “량주문화가 다원커우 문화를 정복했다”고까지 선언했다.

“중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어요. 5000년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 먼저 북(훙산문화)이 중원(양사오 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량주문화·다원커우 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 뭐 이런 식으로 정리했죠.”

중국학계는 모든 문명은 중원에서 나왔다는 ‘일원일체’의 역사관이 훙산·량주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다원일체’의 역사관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고대 전설을 이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아전인수로 끌어들인다.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를 한번 풀어보자.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동북공정은 서막에 불과하다!

  

우실하, <중국의 역사관련 공정의 최종판 요하문명론> (2006.9.13일 국회발표자료)

9월 13일에 국회에서 발표를 했었고 국회방송에서 생방송으로 나갔으며,
9월 17일 국회방송에서 녹화방송을 내보냈던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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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발표(2006.9.13).hwp

 

 

 

동이족의 적자, 신비의 왕국이 기다린다 

사이언스타임즈 / 2008년 01월 31일(목)

▲ 우하량 여신전에서 출토된 곰이빨 

과학이 만드는 세상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홍산문화가 광대한 지역에서 통일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인구가 폭발적인 증가를 갖고 왔다는 점이다. 오한기(敖漢旗) 일대에서 발견된 홍산문화 유적지는 502곳에 달하며 전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규모가 커졌는데 대형 취락군의 경우 6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흥륭와와 조보구문화의 유적지도 대하연안(大河沿岸)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인구가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조직도 상응해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하량 홍산 유적지에서는 발견되는 여신전, 원형과 방형 제단, 거대한 돌무덤과 이들의 체계 있는 배치 등은 당시에 계급이 분화돼 있었고 대단위 동원체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산문화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는 옥기는 조형이나 가공 솜씨를 볼 때 모두 고도로 통일된 규범을 갖고 있다.

이것은 과거 신석기시대로 간주하던 5~6천 년 전에도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국가 추형(雛形, 모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으며 ‘중화문명5천년’을 들고 나온 근거이다.

최근에 중국사회과학원의 왕웨이(王巍)는 홍산문화의 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 문화 발전이 낙후된 곳이라고 여겨졌던 중국 동북 지역의 서부에서 지금으로부터 5천여 년 전에 발달한 문화가 꽃피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로써 선사 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와 발전 수준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홍산유적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 문명을 삼황오제시대가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고고학회 상임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의 글로서도 알 수 있다.

‘우하량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인들이 전설로 간주하던 오제와 연관이 있다. 예를 들면 곰(熊) 숭배를 하나의 증거로 본다면 역사('신선통감')에 기재된 “황제는 원래 웅씨였다”는 것을 연상케 한다.’

중국의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는 홍산문화를 ‘중국문명의 서광’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홍산문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황제 시기의 활동중심은 홍산문화의 전성기와 맞물린다. 홍산문화가 곰과 용(熊龍)을 주요 신으로 숭배한 증거들이 보다 많이 발견된다면 오제전설(五帝傳說)에 관한 기록이 사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옥웅조룡(玉熊雕龍)이 황제(黃帝) 또는 오제전설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는 홍산문화를 갖고 있던 고대국가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중화오천년’ 옛 국가의 상징이다. 또 한 여신상은 홍산인의 여자 조상인 동시에 중화민족의 공통의 조상이다.’

<동이족의 곰>

중국인이 그동안 자신들은 용, 동이족은 곰의 민족이라고 부단히 선전해왔다. 그러더니 근래 그들의 시조라고 인정하는 황제가 곰의 민족이라고까지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산문명에서 발굴되는 것 중에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곰 형태의 각종 유물이다. 우하량 16지점 3호 무덤에서 발견된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불리는 짐승머리형 옥기는 두 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이다. 중국에서는 원래 동물의 모습을 돼지라 했다가 곰으로 바꾼 것이다.

돼지에서 곰으로 바뀐 것은 매우 큰 의미가 들어있다. 원래 중국은 ‘용의 자손’이라 해 용(하늘과 물을 상징)을 추앙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를 의미 있는 동물로 인식해 곰을 도외시했다. 특히 홍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요하 문명 지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진데다가 곰을 홍산문명의 대표 토템이라 할 경우 용과 더불어 곰도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은 그 형태를 대략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앞에서 설명한 C자형과 결상이식이다. 중국학자들은 이 C자형 옥룡의 근원을 돼지 또는 사슴뿔이라고 설명하며 결상이식의 원형은 곰(熊)이라고 설명한다.

▲ 여신전 출토 곰 발톱 

우하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우하량 2지점 4호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도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백기랑영자(白斯郞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불린다. 현재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나 보고된다.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힌다는 설명이다.

웅룡은 우하량뿐 아니라 오한기, 시마무렌 강 이북의 파림우기(巴林右旗)와 파림좌기(巴林左旗), 하북성(河北省)의 위장(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양저(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특히 죽은 자의 가슴팍에 놓이는 옥기는 가장 등급이 높은데 우하량 제2지점 1호총에서 옥룡이 가슴에서 보인다. 이것은 옥룡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동이족으로 인식되는 상나라에도 홍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은허(殷墟)에서도 홍산문화와 유사한 결상이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곽대순은 다음과 같이 우하량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서 곰 형상이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홍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홍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학자 이실(李實)의 설명이다. 그는 홍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근거로 홍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는 것이다.

이실의 주장은 중국학자들을 강타해 홍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곳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가 이를 인정하되 황제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지만 그들이 갑자기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에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 기원전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도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다.

근래 중국인들의 새롭게 변하고 있는 시각이 어떻든 곰 숭배가 동북아시아의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부연할 필요는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은 환웅과 웅녀의 이야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근래 중국이 그동안 주창하던 역사관을 버리면서까지 ‘황제=곰 숭배=홍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것은 그만큼 홍산문화의 중요성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한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소위 동북공정은 물론 ‘서북 서남공정’의 실체이다. 간단하게 말해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중국 문명의 서곡은 우하량에서 열렸다>

현재 중국은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를 중국 상고시대의 사회발전사, 전통문화사, 사상사, 종교사, 건축가, 미술사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화하족의 조상을 제사지냈던 성지로 간주하면서 동방문명의 빛이라고 자랑한다.

▲ 우하량16지점 3호묘 발견 쌍웅수삼공기와 확대도 

중국인들이 홍산문화를 중국의 역사로 인정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홍산문화 유적의 발견으로 요령지역이 먼저 발전돼 중국 문명의 뿌리가 됐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홍산 문화가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했으며 황화문명과 홍산문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과 다름 아니다.

또한 앞에서 설명한 우하량 홍산문화 지역에서 제단, 돌무덤은 물론 신석기시대로 간주되는 빗살무늬토기, 청동시대의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됐다는 것을 볼 때 이들 문화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더구나 이지역의 토템이 곰이라는 것은 한민족에게 많은 것을 연상케 한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는 중국학자들을 놀라게 했고 결국 중국대륙의 앙소-용산문화와 전혀 다른, 요령지역의 홍산문화 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비파형 동검’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곳에서 ‘중국문명’이란 ‘황하문명’을 의미한다.

홍산문화가 중국이 견지했던 중국문화와 전혀 다른 동이족의 문화이며 연대도 앞선 것이 분명해지자 중국의 태도는 돌변한다. 과거에 동이 즉 북방 민족의 유산을 부정하던 인식에서 탈피해 이들 문화를 중국문화의 틀 안에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종래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지만 근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강조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른바 중화문화(中華文化)의 다원화(多元化)로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을 대두시켰다. 또한 우하량유적에서 발견된 옥기(玉器)와 제단(祭壇)이 그 후의 왕실건축(王室建築)의 기원이 됐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이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면서 접목돼간다는 주장했다. 즉 홍산문화는 앙소문화 계통의 원시문화로서 결국은 앙소문화의 변형체로서 중국문화발생의 한 근원이 되기 때문에 요하유역은 중국문명발상지의 하나가 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과는 특징이 다르지만, 중국의 역사 속에 편입해 중화문화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우하량16지점 4호묘 발굴 모습 

이를 홍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서자봉(徐子峰) 적봉대학교 교수는 황하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요하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지만 요하문명과 황하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설명한다. 그 단적인 예가 동이계의 대표인 치우와 중원의 황제가 싸웠다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국학계가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요하문명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임을 천명한다. 중국이 요하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이른바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그 무대는 요하 유역뿐 아니라 중국의 하북성, 요령성, 내몽고(內蒙古)자치주, 길림성, 흑룡강성은 물론 중국의 산동반도, 그리고 한반도까지를 포함한다. 이형구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중해 문명이 서양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했듯,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요동과 만주, 한반도, 일본의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

<신비의 왕국 이제 시작이다>

중국이 그동안 얻은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고대국가 문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학자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갖고 오게 했다. 이를 역으로 설명하면 홍산 문화 지역에서 동이족의 국가 즉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중국학자들이 증명해 준 것이다. 즉 중국이 주장하는 ‘중화5천년’이야말로 바로 한민족의 역사가 5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적석총과 석관묘의 진원을 시베리아로 보지만 홍산문화지역에서는 이보다 2000년 앞서 같은 유물이 나왔다. 이는 우리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제를 같이 썼다는 것은 문화 및 인류의 동질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

라는 이형구의 언급은 우리나라의 역사도 시베리아와 같은 북방계기원설 외에도 발해연안설(渤海沿岸說)로 설명된다. 이는 한국문화의 시원도 북방시베리아설, 요하발해연안설, 그리고 남방기원설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고학계의 한창균과 윤내현 이후 복기대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조선민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맥족 문화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홍산문화로 대표되는 요하지역의 선대문화가 고조선 문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동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단군조선의 실체여부를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들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문제는 물론, 요하문명론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도 된다.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등을 필두로 중국의 중원이나 장강지역보다 앞선 신석기문화는 요하 일대에서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펼치면서 요하문명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를 제치고 1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문명으로 정립하고 있지만 이들 주도 세력은 황하문명을 이끈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요서, 요동을 포함한 만주-한반도를 이어 일본으로까지 이어지는 문화권은 세계적으로 신석기 문화권을 대표하는 (1) 거석문화권, (2) 채도문화권, (3) 빗살무늬문화권이 수용되고 융합되는 유일한 지역이다. 이것은 채도문화권만을 수용한 중원 지역과는 처음부터 이질적인 문명권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원전 4000년경에는 중원 앙소문화의 채도문화권도 요서지역과 교류를 하지만 그전에 이미 요서지역에는 독자적인 문명권이 형성돼 있었다. 예맥계의 우리 민족은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3천 년 경에 이미 국가(신비의 왕국)를 형성해 중원문화에 영향을 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었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연결되는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토대로 요하문명론을 개발해 자신들의 역사를 확장하는데 주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만을 수용하는데 급급해 우리의 역사를 도외시하는 우를 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시원문화로서 요하 일대에서 발달된 독자적인 문명권이 있었으며 그것도 단군조선보다 거의 1천 년 전에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요하일대에 살았던 사람들 일부가 중국의 선조가 됐을 개연성도 마냥 부정만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주도 세력의 일부가 예맥의 선조들이며 그 주맥이 4700년 전의 치우,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으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는 것이 결코 상상의 일만은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민족이라는 개념에만 천착하지 않더라도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민족의 선조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여하튼 한민족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홍산문화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가 우리들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저작권자 2008.01.31 ⓒ ScienceTimes

 

#위대한 한글의 우수성


전세계 언어학자치고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한글은 과연 다른 문자와 비교하여 얼마나 우수한 문자일까, 위대한 문자일까?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 문자는 로마자와 한자인데, 이것들은 각기 3천년 이상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한자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한자가 쓰이는 동안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불완전한 문자라는 말이다.
 
 로마자가 불완전한 것도 두말할 필요 없다. 로마자 표기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유독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거의 완벽한 한글에 비해
로마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수를 써도 한글로 쓴 것을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한글이 로마자보다 시원찮은 문자라면 오히려 한 번 정해진 로마자 표기에 모두들 감탄하기 바빠서 딴죽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자가 지닌 결정적인 약점은 모음이다. A, E, I, O, U 다섯 글자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는 게 반자음인 W, Y이다.
그러니 한글로는 간단히 표시되는 'ㅓ, ㅕ, ㅡ, ㅢ' 등은 원천적으로 표기 불가능하다. 'ㅐ, ㅒ, ㅚ' 등도 불가능하다.
반면에 한글에는 모음이 무려 10개나 되는데다가 이를 응용하면 얼마든지 이중 모음을 더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모음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렸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를 불과 30년도 안 되어 완벽하게 옛글을 재창제하셨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재창제 완료하고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반포함.)
 
 로마자는 멀리 이집트로 그 기원이 올라간다. 아직도 이집트 글자를 상형문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아니다. 그것은 표음 문자이다.
이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 로제타 돌을 해독한 저 유명한 언어 천재, 16살에 대학 교수가 된 샹폴리옹(Champollion)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가져온 로제타 지역의 괴상한 돌을 그 이전 사람은
모두 그림을 보고 추호도 의심없이 상형 문자로 알고 그 뜻을 읽어내려고 머리가 빠지고 벗겨지고 희어지도록 아둥바둥 애만 태웠다.
 
 샹폴리옹은 그러나 그 아래 쓰인 그리스 문자에 힌트를 얻어 그것이 상형 문자가 아닌 표음 문자라는 과감한 가정을 하고 연구한 결과,
마침내 이를 다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동그라미가 왕을 뜻한다든지 하여 약간의 표의 문자적 요소도 있긴 있었다.
 
 문제는 이 이집트 문자가 너무 복잡했다는 데 있었다. 그 그림을 일일이 외워서 그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를 아주 간단히 바꾼 인종이 나왔다.
그가 바로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나와 지중해를 휘어잡아 곳곳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인이다.
그들이 건설한 도시로 제일 유명한 게 바로 한니발의 카르타고이다.
 
 이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과 군사 중심의 인종이라서 복잡한 문자는 영 생리에 안 맞았다. 그래서 이를 대폭 간소화한 것이다.
거의 그림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추상화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 성경을 기록한 셈족의 문자이다.
 이것도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다가 현재는 야훼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 이름을 입으로 감히 발음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발음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호와나 야훼나 문자 상으로는 똑같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둘 다 'YHWH'이다.
사실 음운 현상에서 모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지만 자음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대로 사람들은 이런 문자를 큰 불편함 없이 쓸 수 있었다. 대신에 그 발음을 정확히 하려면 굉장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통 머리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모음을 발명하고 또 글자 모양도 더욱 간단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종이 바로 저 유명한 그리스인이다.
이들 때문에 비로소 문자가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도 누구나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다.
말은 어차피 누구나 아는 일이고 이제 이를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 익히는 데 허비하는 시간 대신 생각하는 시간에 투자함으로써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폭발적으로 늘어 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남한 정도 되는 그리스가 그 후 얼마나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는지는 삼척 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음에 이은 모음의 발명이었다.
 
 이것은 후에 아라비아 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수학적 지식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것과 유사한 엄청난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리스에서 나온 영어 단어 rational(합리적인)은 원래 구구단을 욀 수 있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문자로 기록한 구구단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해 버리면 천치 아닌 한 누구나 몇 대 회초리만 맞으면 초등학교 2학년이라도 외울 수 있다.
 
 그리스인은 이 모음을 발명한 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알파벳의 제일 첫 자와 끝 자를 모음으로 장식했다.
그게 바로 알파(A)와 오메가(Ω)이다. 각각 'ㅏ', 'ㅗ' 발음이다. 알파벳이란 말도 첫 두 자, 곧 모음 하나와 자음 하나를 일컫는다.
로마자로 말하면 에이비(AB)나 마찬가지이다. 알파베타(Alphabeta)라고 하던 것을 나중에 영어에서 알파벳(Alphabet)이라고 한 것이다.
 
 표음 문자는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데,
페니키아문자 같은 자음만으로 된 것, 일본의 가나와 같은 자음과 모음을 함께 발음하는 음절 문자,
로마자나 한글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어 있는 알파벳(음소 문자)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음소 문자가 가장 발달한 것임을 두말할 필요 없다.
만약 음절 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우리 나라같이 음이 다양한 말은 최소한 3천 자가 필요하다.
이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소리를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하여 적는 데, 인류는 무려 3천년이 걸렸던 것이다.


 한글의 위대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몇 개만 더 들자.
  소리와 발음 기관의 완벽한 연관성이다. 로마자는 소리와 문자는 전혀 별개이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이집트에서 예를 들면 '소'할 때 'ㅅ' 소리가 나니까 '소'를 그려 놓고 이를 'ㅅ'이라고 하자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말이 다른 페니키아, 그리스로, 로마로 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그런데 1940년 영주의 희방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은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서양에서 음성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겨우 [d, t], [b, p], [s, z], [v, f], [g, k] 등을 짝지어 유성음 무성음을 구별해 놓고 득의만면하고 있었는데,
15세기초에 벌써 이런 것을 완벽하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g, k]를 혀가 입천장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아예 글자 모양과 비슷하게 [ㄱ, ㅋ]
더 나아가 된소리까지 표현하여 [ㄱ, ㅋ, ㄲ]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ㅋ, ㅌ, ㅍ, ㅎ]에서 보듯이 기본자 [ㄱ, ㄷ, ㅁ, ㅇ]에서 격음일 경우에 힘이 더 드는 걸 감안하여 줄을 한 두 개 더 그었던 것이다.
 
 이 원리를 응용하여 한글을 가르치면(이런 교재가 빨리 나오기 바란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일주일 이내에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한글은 정말 배우기 쉽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머리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어떤 외국인에게도 금방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다가 새로운 것을 연관시키면 아주 쉽게 배우고 잊어 버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음은 더욱 경이롭다. 천지인과 발음 기관을 같이 본떴다.
하늘은 둥그니까 간단히 아래 아 [·], 땅은 평평하니까 [ㅡ],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할 수가 없다.
실지로 발음을 해 보면 전세계의 모든 발음이 [·]할 때는 입이 둥글게 크게 벌어진다.
[ㅡ]는 입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혀가 평평해진다. [ㅣ]는 혀가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세워진다.
 
 여기서 각각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등이 나오는데, 물론 처음에는 [ㅣ, ㅡ]에 앞 뒤 또는 위 아래에 '아래 아'자를 덧보탠 것이었다.
이것도 경이로운 것이 세계 모든 발음이 [ㅏ] 발음을 할 때는 반드시 숨을 내쉬게 되어 있고, [ㅓ]할 때는 숨을 들이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 밖과 안에 '점'을 찍은 것이다. [ㅗ, 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ㅗ]는 반드시 아래로 내리쉬고, [ㅜ]는 아래에서 위로 치받치게 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한글은 누가 보아도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 있다.
왜? 모음은 반드시 가운데, 또는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척 보고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가 없다.
 한글은 소리나는 단위가 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여 한 자 한 자에 자모를 붙여 놓아 소리 단위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마자는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음절 구분을 못한다. 한글은 바보라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한글을 아는 사람은 바보라도 로마자 아는 천재와 같은 급이 된다는 말이다.
음소 문자이면서 음절 문자의 장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다시 위력을 떨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한글에서 뒤지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24자가 하나의 디지털로서 무한한 조합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완성형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찬진의 한글은 조합형을 택했던 것이다. 역시 똑똑한 조상 덕에 간단히 미국의 천재를 바보로 만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완성형을 표준으로 삼은 일은 정말 개탄스런 일이다.
디지털이란 것도 기껏해야 [0]과 [1]이라는 두 문자를 이용한 이진법을 무한히 연결하는 것인데,
한글은 그 자체가 무한히 응용할 수 있는 24개의 디지털 기호이다.
지금은 겨우 워드프로세서에 응용하는 정도이지만, 이를 잘 응용하면 엄청나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면서도 음절 단위로 쓰게 됨으로써 정보화 시대에 또 하나의 경이적인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병우식 자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과학적인 한글의 장점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널리 보급된 것과는 달리 왼손은 초성을 치고 오른손은 중성과 종성을 동시에 치는 원리이다.
한 글자를 한 번에 치는 방식이다. 그러면 아무리 손가락이 굳은 사람도 1분에 쉽게 3백 타 이상을 친다.
 
 무려 1분에 1300타, 1400타까지 가능하다.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쓸 수 있다. 속기사는 전부 공병우식을 쓰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정보화 시대에 이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위정자 때문에 공병우씨가 그렇게 평생을 애썼는데도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2년 전인가 삼성에서 공병우식 자판을 만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현재 방식으로는 아무리 빨라야 7백 타, 8백 타가 한계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대왕은 한국의 바보도 외국의 천재와 비슷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서양 바보들에게 배워서 도리어 바보가 된 위정자가 서양 흉내내느라고 우리 좋은 것을 다 버렸으니 말이다.
 
 한글의 위대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표음 문자이면서 표의 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 전용을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한글의 이 장점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글은 음절 단위로 쓰기 때문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음절 문자의 장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원을 밝혀 적을 수 있어서 표의 문자 구실도 제법 훌륭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말로 구별해서 설명하기로 하자.
 
 우리말 -- 훈민정음 해례에서 종성부용초성법을 택해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조선 중기의 8종성법에서 한글학회에서 이를 다시 살린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뭇잎'-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나문닙'이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그러면 도대체 말로 할 때와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어원을 밝혀 '나무'에다가 관형격 조사 '의'에 해당하는 사이시옷 'ㅅ' 거기다가 주둥아리 입이 아니라 받침에 'ㅍ'을 써서 '잎'이라고 함으로써
척 보면 이것이 나무에 달린 잎이구나, 라고 알게 된다.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한글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이것을'-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이거슬'로 적는다고 해 보자.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것을'은 '이것'과 '을'을 합한 것임을 아주 간단히 나타낸다. 뜻이 금방 머리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
 
 '있다'-이것을 '이따'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이것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한글의 이런 장점은 뜻글자인 한자도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음성을 나타내되, 시각적인 효과로 뜻글자 구실도 훌륭히 해 내는 것이다.
 
 한자말--이것도 아주 잘 나타낸다.
 
 '천리만리'-이것을 '철리말리'라고 쓴다고 해 보자.
그러면 말할 때와는 달리 도대체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가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천리만리'라고 쓰면 초등학생도 '천 명, 만 명', '천 개 만 개' '천 원 만 원'의 '천, 만'이란 걸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이런 걸 좀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한자까지 가르쳐 주면 더 좋지만, 그에 앞서 바보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런 걸 가르쳐 주면
설령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말뜻을 아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바보 학생도 천재가 되어 새로운 말을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
 
 대신 천재, 천사, 천국, 천치, 천성 등의 '천'은 '하늘, 타고난'의 뜻이 있다는 것도 꼭 알려 주어야 한다.
물론 한자를 곁들이면 더욱 좋고. 그러나 이를 꼭 한자를 병기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도만 가르쳐 주면 아주 정확한 언어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가 어느 정도 되는 학생들은 한자를, 한문을 꼭 가르쳐서 조상들이 한문으로 남긴 엄청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한글은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경이의 문자이다.
 
 한글의 장점은 연구하면 할수록 계속 쏟아져 나올 게 틀림없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 글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한글을 재창제한 세종대왕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첫째, 세종대왕은 두 가지만 스스로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와 작곡이다.
나머지는 누가 했는지, 그 본인의 이름이 거의 다 밝혀져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왕의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공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것도 대부분 '어제(御製)'란 말을 붙였을 것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매우 겸손했던 세종대왕이 음운학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말도 아주 직설적이었다.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에 자모가 몇 개 있느냐? 만약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너희가 (이두를 정리한) 설총만 옳게 여기고 임금의 일은 그르게 여기니 어찌된 일이냐?"
 
  둘째, 당시 학자들은 오로지 유학이었다. 집현전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이런 따위의 음성학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연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설령 연구에 일부 참여했다고 해도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문 숭배가 종교의 수준까지 이르렀던 때이다.
실지로 신숙주, 성삼문이 만주로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한글 창제 이후의 일이다.
 
 이들은 완벽을 기하려는 세종대왕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찬에게는 무슨 훈민정음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는 게 아니었고 동국정운을 정확히 만들기 위해 쥐나 음운에 대해 물어봤던 것이다.
 
 설령 직접 창제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관계없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은, 한글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뺀 것도 못난 위정자들 탓이라고 본다.
모든 공휴일을 다 폐지해도 한글날은 공휴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들고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들어 주는 한글을 기리는 날을 공휴일로 안하고 도대체 무엇을 공휴일로 한단 말인가.
열심히만 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한글 재창제하는 것처럼 창의적으로 머리를 쓰면 열흘 놀고 하루 일해도 능히 선진국을 앞설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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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쉽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어렵죠. 그러나 외국어는 한국어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모든 것은 투자한 만큼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외국 것이라 맹신하지 말고 우리 것이라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나 균형되고 공정하게 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글과 한국어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혹시 알파벳과 영어가 동의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이 혼란스러운 현실을 이겨나가는 데에는 무엇보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겠습니다!

 

 

  

중국의 역사왜곡…그들은 뿌리없는 혼혈종족 

한겨레 / 편집시각 2004.02.05(목) 14:33 KST

요즘 중국은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라며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
 

오늘날 중국의 뿌리는 황화문명이다. 반면에 한국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렀고 그 문명을 동이(東夷)문명이라고 칭할 수 있다. 맹자는 순임금을 동이사람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동이문명은 순임금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반면에 황하문명은 주(周)나라가 일구어낸 문명이다. 주나라의 창업주는 문왕이며 그는 서이(西夷) 사람이라고 『맹자』가 증명했다. 문왕은 순임금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이 때문에 공자, 맹자, 노자, 장자에 이르기까지 순임금을 요임금과 함께 요순이라고 칭하며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했다.

 

서이는 이족(夷族)의 한갈래였고 이족은 9개의 종족이 있어서 『논어』에서는 구이(九夷)라고 칭하기도 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구이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자 어떤 사람이 “좁은 곳인데 어찌 살려고 하십니까?” 라는 물음에 공자는 “군자가 사는데 어찌 좁다고 하겠는가?”라는 대화가 나온다.

 

송나라 때 주희는 누(陋)를 ‘누추하다’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나라 이후에 사용했던 뜻이다. 공자가 지었다는 『춘추』에서 ‘좁다’라는 뜻으로 썼다. 또한 한나라 때 허신의 『설문해자』에서도 ‘좁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구이(九夷)는 좁지만 군자가 사는 땅으로서 문명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유물로 보았을 때 주나라의 황하문명은 동이문명을 수입해서 일어난 문명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불고 있는 한류열풍과 같은 종류로서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황하문명은 황하 이남, 양자강 이북의 중원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동이문명은 황하이북인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중국문명의 뿌리라며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황하문명의 주나라는 결국 서이 사람이 세운 문명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뿌리는 이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은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고 하여 변방을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조상을 동이라고 하여 오랑캐로 불렀던 것이다. 주나라는 견융의 침입을 받아 호경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때를 동주시대 또는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는데 공자가 지은 『춘추』는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인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위하여 쓴 역사책이다. 이 때 오랑캐는 주로 견융 즉 서융을 가리킨다.

 

또 당시 북적인 호(胡)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그들을 막기 위하여 진시황제 때 세워진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이 밖에도 오늘날 티벳지역의 남만의 침입을 받았다. 이러한 침입으로 인하여 중국은 혼혈민족이 되었다. 본래 중국은 이족의 한 갈래인 서이의 나라였지만 서융, 남만, 북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혼혈민족이 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화하계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이의 침입을 받아 혼혈된 계통이다.

 

또한 서이의 문왕이 동이의 순임금을 모범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의 종주국은 동이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이족의 역사인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가 나온다. 따라서 그들은 고구려를 동이의 역사라고 보고 있다.

 

물론 중국의 뿌리는 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독립적인 종족이 아니라 이족의 한 갈래였고 지속적인 침입을 받아 혼혈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뿌리가 없는 셈이다. 구태여 규정한다면 그들의 종주국은 동이족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그들은 뿌리 없는 혼혈종족으로서 사생아라고 칭할 수밖에 없다.

 

하니리포터 이종우 기자 daecho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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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의 주역은 동이족이었다”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8.10.13 (월) 17:55, 최종수정 2008.10.13 (월) 18:02

 

은나라 갑골문, 만주지방 옥도에서도 발견
학자들 “문화적 주체는 동일민족일 가능성”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갑골문자(사진)라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1899년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인류 문자의 역사는 은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를 통해 전설상의 왕조였다고 치부되던 은나라가 실재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은나라의 수도로 추정되던 은허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1928년부터 갑골문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중일전쟁 등으로 중단된 시기를 포함해 1986년까지 발굴은 지속됐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갑골이 15만점, 왕릉으로 확인된 고분이 13기였다. 출토 유물의 양과 질로 볼 때 은허는 상왕조 후기 수도였다는 게 입증됐다. 중국에서는 갑골문자와 은허의 발굴을 기념하는 학회가 이달 29일부터 사흘간 열린다.

은허 유적은 단순히 중국 유적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점을 치는 데 주로 사용한 갑골만 해도 한반도 각지에서 출토됐으며, 충남 부여에서도 소 발굽을 지져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한반도 고대문화와도 밀접하다”고 밝히고 있다.

은나라를 세웠던 문화 주체가 동이족이었다는 주장이 넘치는 상황에서 눈길을 끄는 학술대회 ‘홍산문화와 갑골문자’가 열렸다.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10일 열린 행사에서 정건재 전남과학대학 동북아문화연구소 소장은 ‘홍산문화(紅山文化) 명문 옥도(玉刀)에서 발견한 천부경 갑골문자’라는 발표문을 내놓았다. 그는 “은나라의 갑골문으로 쓰인 고조선 천부경과 동일한 문자가 홍산문화 옥도에서 발견됐다”며 현대어로 표시한 종(終)자 등 모두 3종의 문자를 공개했다.

이에 대해 꿰이준이 중국 화동사범대학 교수는 “홍산문화(요하문명)→고조선 천부경→갑골문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주체는 동일 민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홍산문화 옥도에서 발견된 문자들을 통해서 이를 입증할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한겨레 | 기사입력 2004.08.1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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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고대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이 중앙정부·당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중국 쪽 주장과는 달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위 지도자들의 승인과 비준 아래 추진돼왔음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13일 <한겨레>가 확인한 중국공산당 헤이룽장성 헤이허시위원회 선전부 간행 <헤이허일보> 기사 등의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지난해 8월5일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제3차회의가 헤이허시에서 열린 사실을 보도(사진)하면서 “전체 이름이 ‘동북변경역사와 현상 시리즈 연구공정’인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지시해 승인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고구려사 왜곡에 앞장선 대표적인 연구기관 가운데 한 곳인 지린성 퉁화사범대학의 고구려연구소 내부자료에 따르면, 이 연구소가 1998년 주최한 고구려 학술 토론회가 중국 중앙 영도자들의 고구려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현재 주석), 리란칭 당시 국가 부총리, 첸치천 당시 국무위원, 리톄잉 당시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겸 서기(현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겸 동북공정 고문), 딩관건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 겸 중앙서기처 서기 등 동지들이 잇따른 중요한 지시를 내렸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 역사와 문화 연구가 극히 대대적으로 추동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자료는 또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새 천년이 시작될 즈음 ‘국가 중점 공정항목’인 ‘동북변경역사와 현상 시리즈 연구공정’이 시작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는 98년 6월26~28일 퉁화시에서 퉁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가 지린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과 공동으로 ‘전국 제1차 고구려 학술 토론회’를 연 뒤 이 토론회 내용을 <당대중국변강연구> 제32기에 싣자 후진타오 등 많은 중앙 영도자들이 고구려사 연구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중국 랴오닝성 문사연구관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이곳 쑨진이 연구관이 쓴 고구려 역사 관련 서적이 “중앙과 랴오닝성 지도자들의 중시와 지지를 받았으며, 후진타오, 딩관건, 리란칭, 첸치천, 리톄잉 동지의 중요한 지시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쑨진이 연구관이 쓴 <동북아역사지리연구>(2000)는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고구려사 등을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지리 연구서다.

     

    이런 자료들은 “동북공정이 ‘지방정부’에서 추진하는 것이어서 중앙정부가 통제하기 어렵다”는 중국 외교부의 설명이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중국 중앙정부 최고 지도자들의 승인과 지시 아래 진행돼왔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6일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이 중국을 방문해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항의했을 때 “중국은 역사 왜곡의 의도가 없으며, 동북공정은 지방정부의 일이이서 통제가 어렵다”고 해명한 바 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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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중앙일보ㅣ2008.10.22 02:17 입력 / 2008.10.22 16:51 수정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최형규 기자 [chkcy@joongang.co.kr]

     

     

     

    `중국 한족, 단일 혈통 아니다`

    중앙일보ㅣ 2004.09.08 18:26 입력 / 2004.09.09 08:16 수정

     

    난링·우이산맥 경계로 남북 차이 뚜렷

     

    중국의 한족(漢族)은 한 핏줄이 아닌 다종족(多種族)의 문화적 형성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중국과학원의 연구 조사팀이 남북 각 지역 한족의 혈액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결과다.

    북경과기보(北京科技報)는 8일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연구원의 최근 저서 '중국 성씨:집단 유전과 인구 분포(中國姓氏:群體遺傳和人口分布)'를 소개하면서 "중국 남부와 북부 한족 사이에는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이 차이는 남북 한족과 인근 소수민족 간의 차이보다도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생물 유전자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중국의 한족은 단지 문화적인 공동체일 뿐 혈연적인 연대는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또 지금까지 한족 사이의 혈통이 남부 양쯔강(揚子江)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다는 속설이 내려왔으나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북 간 한족 차이는 푸젠(福建)성 우이산(武夷山)과 후난(湖南).광둥(廣東)을 가르는 난링(南嶺)산맥을 기점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조사 보고서는 1918년에 처음 중국인 혈액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 뒤 만들어진 305건의 문헌자료(조사대상 사람 수는 90만9900명)를 대상으로 혈액 특성의 지역적 분포를 다시 분석한 것이다.

    주로 혈액형과 혈액 속의 효소 또는 단백질의 분포가 지역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초점을 뒀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 한족의 혈액적 친연성은 주로 성씨(姓氏)를 중심으로 강하게 보존돼 왔다.

    또 성씨 분포를 조사해보면 남북 한족 간의 혈통적 차이는 송대(宋代)에서 이미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명대(明代) 이후 남북 한족 분포는 현재 상태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성씨의 역사는 4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한족 혈통의 근원지는 중국 서북부와 중북부의 중원(中原)지역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혔다. 아울러 "한족에 의해 만들어진 성씨도 나중에 수많은 주변 민족이 차용해 쓰면서 성씨 집단의 규모가 커졌다"고 소개했다.

    북방 한족은 주변의 흉노(匈奴)와 선비(鮮卑).돌궐(突厥) 및 몽골족과 혈연적으로 합쳐졌으며 남방의 한족들은 원래 그 지역에 거주해 왔던 남월(南越)과 교지(交趾) 등의 남(南)몽골족과 피가 섞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책은 "북방지역이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보여 민족 사이의 혼혈과 언어의 통일이 빨리 이뤄진 반면 남부는 통행이 불편한 우이산과 난링산맥으로 인종 간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남부 한족 사이에는 언어와 혈통 계통이 서로 갈라진 '종족의 섬(族群島)' 형태가 관찰된다고 이 보고서는 전했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짱골라 한족은 실제로는 소수민족 객가족일 뿐이며, 동아시아 사람들의 진정한 정체는 모두 배달겨레의 후손인 것이다.

    '홍산-요하 문명'과 '양주-장강 문명'을 이룩하고 동아시아를 제패해온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배달겨레.

    배달겨레 삼황오제와 치우천황의 시대.

    배달겨레 9夷의 후예들인 상(은)나라와 주나라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북부여와 졸본부여(고구려), 백제(남부여), 신라, 가야 등의 열국시대.

    배달 북적계와 서융계 및 남만계들의 이합집산 5호16국시대
    ('배달 북적계와 서융계>>>흉노, 선비, 갈족 ,저족, 강족 등'과 '배달 남만계>>>묘족, 월족, 장족 등').

    수나라(배달 흉노계 선비족 왕조)와 당나라(배달 흉노계 선비족 왕조).

    일본(백제계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유민으로 이루어진 왕조)

    배달 흉노계와 남만계들의 이합집산 5대10국시대.

    대진국 발해(배달 예맥-부여계 구려-말갈 왕조)와 금나라(배달 예맥-부여계 여진족 왕조).
    배달 예맥-부여계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시대에 따라 달리 불리나 사실은 모두 동일민족을 지칭합니다.

    중세고려와 요나라(배달 흉노계 거란족 왕조) 및 원나라(배달 흉노계 몽골족 왕조).

    근세조선과 후금 청나라(배달 예맥-부여계 만주족 왕조).

    터키(배달 흉노계 돌궐=투르크족 왕조)와 위구르(배달 흉노계 돌궐=투르크족 왕조) 및 헝가리(배달 흉노계 서흉노=훈족 왕조)

    티베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배달 융족계와 흉노계 혼혈)

     

    <<평저선과 첨저선을 함께 운용한 한국해양사 클릭참조>>

     

    <<문명교류, 벼농사와 고인돌 클릭참조>>   <<KBS 스페셜 설기획 - 인류 오디세이 클릭참조>>

     

     

    <<개의 조상은 동아시아 늑대 클릭참조>>   <<'키(신장)의 변화'와 '인류 역사' 클릭참조>>

     

     <<주몽은 한나라를 몰랐을 수도 있다 클릭참조>>   <<한국 배(선박)의 역사 클릭참조>> 

     

     

     

    초종교국가연합, 21∼24일 서울서 ''몽골반점동족''국제대회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4-09-19 15:27 |최종수정2004-09-19 15:27

     

     

    세계 '몽골리안' 한데 뭉쳐 평화운동

     

    세계 처음으로 몽골반점을 가진 종족들의 지도자 회의가 열린다. 또 몽골반점 종족 국제기구가 창설된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회장 곽정환)은 초종교초국가평화의회(IIPC)와 공동으로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11개국 13개 ‘몽골반점 종족(몽골리안)’이 참가하는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평화의 시원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몽골리안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과 문화적 각성을 통해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한편, 세계적인 ‘몽골리안 협력 벨트’를 조성한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몽골반점이란 갓난아이의 엉덩이 위쪽에 생긴 푸른 반점으로 한국·몽골 등 동북아에 거주하는 북방계 종족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몽골리안의 형질적 특성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 바아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리안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 두 그룹으로 분화된다. 옛 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 코리야크족 캄차달족 길리야크족 아이누족 아메리카인디언 등이 있고, 새 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 위구르족 핀족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만주·네이멍구·위구르(신장성), 몽골,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헝가리, 핀란드, 북미인디언, 남미인디언, 에스키모 등 13개국에서 총 500여명의 정치 종교 학계 비정부기구(NGO) 등 지도자들이 참가해 세계 평화를 위한 몽골리안의 역할과 협력 방안 등을 모색할 계획이다.

    ‘심정문화 세계와 영구적인 평화의 실현―몽골반점 종족의 역사, 문화, 가정 전통의 의의’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는 ▲몽골리안의 근원과 가정문화의 재발견(김충렬 고려대 교수·철학) ▲동북아시아 국가의 문화적 교류(박흥순 선문대 교수·국제학) ▲몽골리안의 평화와 심정문화(신현덕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교양학) 등 8개의 전체 및 그룹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몽골리안의 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호 내 알흔섬이 러시아 후지르 마을 언덕 너머로 신비스럽게 바라다 보인다.

    특히 23일에는 ‘21세기 국제평화 하이웨이 프로젝트’ 설명회와 ‘지구촌 평화와 복지를 위한 고찰―몽골리안 연대·협력의 길’을 주제로 한 종합 심포지엄이 마련되며, ‘몽골반점동족 세계평화연합’이 창설돼 국제평화기구로 출범할 계획이다.

    회의 의장인 곽정환 IIFWP회장은 “인류를 한가족으로 묶기 위해 참사랑·참생명·참가정 운동을 펼쳐온 문선명 총재의 주창으로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평화회의’를 열게 됐다”고 회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곽 회장은 이어 “몽골리안은 시원의 시대부터 인류 평화와 복지를 갈망했던 종족이었으나 오늘날 정체성과 존재의 근본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며 “몽골리안 문화와 정신적 원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구촌 화해·협력 시대에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IIFWP는 전·현직 국가수반, 종교 지도자 등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연대해 인종·국가 간 갈등, 종교분쟁 등 지구촌 난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에는 분쟁지역인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정성수기자/hulk@segye.com

    ■ 몽골리안이란

    우리나라 대다수 갓난아이들은 엉덩이에 청색 반점이 있는데, 이는 삼신할머니가 아기를 받다가 아기가 숨을 쉬지 않자 엉덩이를 때려서 생긴 멍 자국이라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청색 반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몽골반점’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몽골리안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몽골반점은 의학적으로 진피의 심층에 있는 방추형 또는 분지형의 멜라닌 색소세포가 모여 표피를 통해 보이는 것으로, 생후 2세까지는 빛깔이 진하다가 점차 옅어져 11∼12세가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어린이에게서는 90 % 이상이 나타난다.

    상고시대로부터 평화와 복지를 찾아 세계를 순례한 몽골리안 종족의 선조들은 인류 문화사에 귀한 자원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인류사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그 시원지는 러시아 동시베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바이칼호 수내 알흔섬으로 전해진다. 바이칼호 자체가 수많은 북방 종족 신화의 탄생지다.

    실제 몽골리안은 중앙아시아에만 거주하지 않는다. 고대 몽골리안 후손들은 한국, 일본, 중국 서북부, 중동,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몽골리안 배경을 가진 종족은 공통적으로 하늘을 모시는 제천의식과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체 생활, 자연친화적인 사고, 영적인 세계관 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원형들은 몽골리안의 생활문화와 심층 무의식의 세계에 용해돼 여전히 남아 있다.

    정성수기자

     

     

    ▲  청나라 를 거치면서 완성된 현재의 중국  영토. 간도와 티베트, 위그르, 청해 지방이 무력으로 점령되었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배달 부여계 여진족이 일어나 ‘후금(後金)’을 세웠다. 금나라도 그랬지만 후금도 배달 흉노계 몽골족을 잘 다뤘다. 후금은 호르친부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힘을 얻은 호르친부가 칭기즈 칸의 후예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칭기즈 칸의 적통이 사라졌다.

    여진족은 호르친부와 ‘만몽(滿蒙)동맹’을 맺고 여진8기군과 몽고8기군을 동원해 명나라로 쳐들어가 청나라를 열었다. 호르친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지배하게 된 청나라 조정은 몽골족을 포함한 북방족을 우대했다. 이러한 청나라는 강희제 때 몽골 전역을 지배했다.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몽골 초원을 중국 영역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복속되지 않은 티베트도 지배했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는 키르키스에 패한 후 지금의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포진한 배달 돌궐계 위구르족을 장악했다. 건륭제는 미얀마와 베트남 접경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해 지금의 운남성과 옛백제의 후예 광서장족자치구도 확실한 청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배달 흉노계 몽골족 왕조 원나라 이후 중국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것이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족을 몰살하려고 했다. 당시 몽골 초원의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남쪽에 있는 친청(親淸)의 호르친부 후예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 적개심을 품은 채 북쪽에서 흩어져 있는 다른 몽골족이었다.

    청나라는 독립을 추구하는 북쪽의 몽골족을 궤멸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라마불교를 전파시켰다. 라마불교에선 장자(長子)를 제외한 모든 아들은 출가해야 하므로 몽골의 인구 증가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청나라는 매독을 퍼뜨렸다. 중국인들이 몽골인을 궤멸시키기 위해 고의로 매독을 퍼뜨렸다는 것은, 중국인이 없는 자리에서 몽골인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로 인해 독립을 추구하던 몽골족은 종족이 거의 끊어지는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때인 1911년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열었다. 중화민국은 정변(政變)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렸기에 고구려-발해 후예 청나라 영토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몽골과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을 중화민국의 영토로 삼게 된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조선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기에 조선은 중화민국의 국경선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신해혁명 1년 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배달 흉노계 몽골족 원 왕조가 요사·금사를 만들어 몽골은 물론이고 요나라(배달 흉노계 거란족 왕조)와 후금(배달 부여계 여진족 왕조)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켰다면, 고구려-발해 후예 청나라는 몽골(배달 흉노계)과 여진(배달 부여계)·위구르(배달 돌궐계)·티베트(배달 융족계와 흉노계의 혼혈)를 중국 영토로 집어넣어준 셈이 된 것이다.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근맥()”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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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인 거주 ‘할힌골’ 동몽골의 지명?

     

    동몽골 지역은 부여, 선비 등 유목기마국가가 기반했던 곳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곳이 한동안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몽골 국립대학에서 한국관계를 가르치는 바투르 국제관계학과 교수도 “이 지역은 삼국유사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삼국유사에 백제인들은 ‘할힌골’에 살았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할힌골이 동몽골 안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할힌골은 1939년 일본이 러시아-몽골 연합군에게 패퇴해,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야생마늘과 쑥이 자생하며, 고려성이라는 유적도 남아 있다.

     

     

     

     

    ▲  황제헌원이 사로잡혀 치우천왕 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그림. 김산호화백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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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 찾아 몽골고원으로 향하는 터키 클릭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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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대진국 발해의 강역 클릭참조>>   <<시대별 한국 옛 토목건축 클릭참조>>

     

    ▲‘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특히 화하족은 낙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전대륙을 차지했던 배달겨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한국형' 암각화 내몽고서 첫 발견 클릭참조>>   <<KBS 스페셜 설기획 - 인류 오디세이 클릭참조>>

      

    <<태극기의 유래와 배달겨레 클릭참조>>   <<"유학은 동이족의 마음을 담은 사상" 클릭참조>>

     

     

    "최고문명은 어디에"..中 문명공정 세부연구 개시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8-28 13:57 |최종수정2008-08-28 14:50

     

    (선양=연합뉴스) 조계창 특파원 = 중국 고대문명의 근원을 파헤치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 세부연구가 본격 착수됐다.

    28일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 웹사이트에 따르면 중화문명탐원공정의 세부과제인 '홍산옥기공예연구(紅山玉器工藝硏究)'와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 역사전 취락형태연구가 최근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츠펑(赤峯)시의 아오한치(敖漢旗)에서 시작됐다.

    중국 과기부와 국가문물국의 공동 주관 아래 지난 2001년부터 시작된 중화문명탐원공정은 신화와 전설 시대로 알려진 3황5제 시대를 역사에 편입하고, 이를 통해 중화문명이 이집트나 수메르문명보다 오래된 세계 최고(最高) 문명임을 밝히려는 중대 과학연구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세부과제 연구착수에 앞서 올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우한치의 자오라이허(叫來河) 유역의 싱룽와(興隆窪), 자오바오거우(趙寶溝). 훙산(紅山), 샤오허옌(小河沿) 유적지 160여 곳에 대한 사전 조사를 벌여 자료 정리 및 표지 작업을 이미 끝마쳤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들 지역에서 발견된 옥기와 탄화 좁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 세부과제 연구에는 세계적인 옥기 전문학자인 홍콩 중원(中文)대학의 덩충(鄧聰)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네이멍구공작대장인 류궈샹(劉國祥) 교수, 츠펑학원 홍산문화국제연구중심의 시융제(席永杰) 주임 등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항공대의 우실하 교수는 이날 연합뉴스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중화문명탐원공정이 세부연구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기본적인 이론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세부연구를 통해 중원의 황화문명과는 애초 이질적이었던 랴오허(遼河)문명을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만들어 이 일대에서 발원한 맥족, 흉노족, 조선족, 여진족 등 북방 고대민족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행보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phillife@yna.co.kr

    blog.yna.co.kr/phillife

    저작권자(c)연합뉴스.

     

    <<동이족의 예(羿)와 봉몽(逢蒙) 신화 클릭참조>>   <<인삼은 조선시대의 반도체였다 클릭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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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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