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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구려 유물 밀반출 조선족 2명 사형
노컷뉴스  / 기사전송 2004-01-08 11:33 
 

 

 

조선족 주민 ''고구려역사 파괴대신 북에 밀반출이 나아''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고구려 유물을 북한으로 몰래 가져가려던 조선족 주민이 적발돼 2명사형당하고 2명이 25년 징역형을 받았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오늘 보도했습니다. 문제의 유물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린성 지안의 4호고분과 5호고분에 있던 것으로, 사건에 연루된 조선족 주민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조상인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에 의해 은폐되고 파괴되기 때문에 북한으로 반출하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산케이는 중국은 이 사건이 있은 후 고분 등이 있는 현장 일대를 역사적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중국 당국의 이런 강경한 조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고구려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과 관련해 중국이 고구려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CBS문체부 권주만기자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허구의 종족 짱골라  

 

교수 “순수한 은 없다”… 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2-16 03:00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 교수. 회족()인 그는 한족()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 성 친양()에서 톈수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西) 성 남부와 장쑤() 성 서부 및 안후이()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동아시아 역사 연대표 (출처 :  하진님의 블로그)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역사 연대기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현재기준(서기 2007년)까지 중원의 역사 속에서 중국한족(지나족)이 중원을 지배했던 역사는 다음과 같다.

 

- 한나라 (426년) + 송나라 (120년) + 명나라 (265년) + 중화민국이후 (약 95년) = 총 906 년

 

결국 한족이 중원을 모두 지배했던 기간은 배달겨레 한민족이 수천년의 역사를 소유한 것과 비교하여 약 906년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감히 중원 전체의 모든 역사를 소유하려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다른 중원의 왕조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족의 역사에 편입시킬 수 없다.

 

- 하,은,주,의 역사는 중국한족이 자신들의 역사의 시발점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분명 동이족의 역사로 중국한족이 일구어 간 역사는 아니다.

 

- 진나라는 중국한족이 세운나라가 아니다. 진시황도 이족 중의 한사람이다.

 

-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자들은 모두 선비족 출신이다.

 

-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중원의 왕조 중 하나이다.

   거란은 선비족의 한 분파이며, 선비족은 몽골의 한 분파이다.

 

- 원나라는 몽골인들이 세운 중원의 왕조 중 하나이다.

 

- 금나라와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나라이다.

   여진족은 누구인가? 숙신 말갈의 후예이며, 고조선의 한 주축이였으며, 역시 고구려의 한 분파였다.

   이후 여진족은 발해 유민과 금나라의 유민, 반도신라와 고려의 유민 등과 함께 주축이 되어 새로운 여진족으로 거듭나고,

   그후 후금(청나라)를 세웠다.

   이러한 역사는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와 청나라 역사서인 '만주원류고' 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은 배달겨레 한민족의 한 분파들임이 자명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고조선 시대이래 도이로 불리었던 바, 이들이 이족의 한 분파였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은 과거 영국과 호주의 관계처럼 조선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장] 주몽은 한나라를 몰랐을 수도 있다
김부식 <삼국사기>의 'BC 37년 고구려 성립설'의 문제점
김종성 (qqqkim2000) 기자
▲ 대하드라마 <주몽>.
ⓒ 문화방송(MBC)
대하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은 한나라에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 성립 연대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145년에 쓰인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구려가 BC 37년에 성립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나온 다른 사료(역사학 자료)들과 명백한 모순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 성립 연대와 관련하여서는, 지난 2000년 11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조선장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 ‘동아시아의 새 발견’ 심포지엄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석광준 부교수도 이설(異說)을 내놓은 적이 있다.

당시 석 교수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굴된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이 무덤 형식이나 부장품으로 보아 BC 3세기 때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世孫)이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는 BC 37년이 아닌 BC 277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고구려 성립 연대를 BC 277년으로 못박을 수는 없겠지만, <삼국사기>와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는 이전의 사료들이 있다면 그 내용을 일단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럼, 고구려는 과연 언제 건국되었을까? 김부식의 기록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먼저 검토한 뒤에, 광개토대왕비문과 중국측 역사서인 <한서> 등을 통해 고구려 성립 연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BC 37년설의 진원지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열어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에서 빨간 줄을 친 부분이다.

▲ 그림 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다섯 번째 줄에서 김부식은 고구려의 성립 연대를 적고 있다.
ⓒ 김종성
“그(졸본천 부근, 번역자 주) 토양(土壤)이 기름지고(肥美) 산하(山河)가 험고(險固)함을 보고 마침내 도읍(都邑)을 삼고자 하였으나, 궁실(宮室)을 지을 경황이 없어서 다만 비류수변(沸流水邊)에 거처를 짓고 그곳에 거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高)로써 씨(氏)를 삼게 되었다. 이때 주몽이 나이 22세였으니,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이며,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인 甲申(갑신)년이었다.”

이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연도가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즉 BC 37년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건국 연대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으로는 가장 빠른 기록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우리는 3가지 의문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첫째, 고구려가 건국된 지 천년도 훨씬 넘는 시점에서 태어난 김부식이 어떻게 저렇게 단호하게 고구려 성립 연대를 말할 수 있을까? 둘째, 김부식은 왜 천년 전의 연도를 단정적으로 말하면서 정작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는 걸까? 셋째, 김부식이 고구려 건국 연대를 이야기하면서 신라보다 20년 늦게 건국되었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의문은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김부식은 고구려 성립연대가 BC 37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의 설명에 의문을 갖게금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주몽과 광개토왕 간의 세수(世數)에 관한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라고 한 데 반해,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17세손이라고 한 것이다. 광개토왕에게 5명의 직계조상이 더 있었다면, 주몽과 광개토왕의 중간에 약 150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더 생기는 것이고 그만큼 고구려 성립 연대도 앞당겨지게 된다. 그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을 실제로 확인해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에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2세손”이라는 확정적인 기록은 없다. 그것은 ‘고구려 본기’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가계(家系)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 본기’ 1에서는 “유리는 주몽의 맏아들”이라고 하였고, 같은 권13의 ‘고구려 본기’ 2에서는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3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기록을 추적함으로써 주몽과 광개토왕의 세수(世數)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료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삼국사기> 권13~권18의 기록을 <그림 3>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 그림 3
ⓒ 김종성
<그림 3>에 보이는 바와 같이,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19대 군주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과 광개토왕의 세수는 12대다.

그런데 이 그림에 보면, <삼국사기>에 따를 때에 고구려의 군주들 중에서 7명이 직계 계승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4대 민중왕, 6대 대조대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10대 산상왕, 15대 미천왕, 18대 소수림왕이 바로 그들이다. 15대 미천왕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모두 직전 군주와 항렬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가 직전 군주의 아우들이라고 김부식은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2가지 의문점을 품을 수 있다. 첫째,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에 왜 이렇게 방계 계승자가 많은 걸까? 둘째, 상대적으로 사실 확인이 힘든 고구려 초기의 4대~10대 왕 사이에서 ‘아우’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의문 역시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으로 나와 있지만, 장수왕 때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문을 수록하고 있는 <증보문헌비고>를 열어 보기로 한다. 참고로, <증보문헌비고>는 1908년에 국가가 편찬한 백과사전적 저서다. <그림 4>에 보이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빨간 줄 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림 4. 광개토대왕비문을 전하고 있는 <증보문헌비고> 권36.
ⓒ 김종성
“이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며 □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二九(18세, 번역자 주)에 등극하여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는 빠진 글자를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업”이라는 것은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 비문에서 광개토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비해 5세(世)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이 맞다면, 고구려 건국 시점은 BC 37년보다 최소한 150년 정도 더 앞당겨지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240년을 더 앞당겼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 의거하면 최소한 150년 정도를 더 앞당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사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높은가를 고려해 보기로 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언제 기록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삼국사기>는 1145년에 쓰여진 데 비해,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보다 731년이나 더 빠른 광개토대왕비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누가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김부식은 광개토왕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으며 또 광개토왕을 본 적도 없다. 그에 비해,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몇 대 자손인가에 관한 한 김부식보다는 장수왕이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왜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김부식은 기본적으로 신라 중심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폄하하고 신라를 높이는 데에 있었다. <그림 2>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김부식은 고구려 성립이 신라 성립보다 20년 늦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 성립연대를 가급적 늦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부식의 말을 과연 100% 신뢰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김부식은 천년 전의 연대를 말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김부식이 주몽과 동시대의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천년 이상 뒤늦게 태어난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구려 성립 연대를 그토록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장수왕은 정치적 이유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세웠다. 아들이 아버지의 비를 세우면서 자기 집안의 족보를 잘못 적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장수왕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주몽의 몇 세 손인지도 몰랐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고구려 성립연대를 신라보다 앞당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라는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볼 때에 고구려 성립연대를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장수왕이 주몽과 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수를 조작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세수에 관한 김부식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의 말대로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닌 17세손이라면,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시간적 차이도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구려 성립이 BC 37년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김부식이 고구려 왕실의 세수를 잘못 적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성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김부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세수를 조작했을까? 그 방법으로는 2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에 있었을 몇 명의 군주를 없애는 방식이다. 또 한 가지는 직계 계승을 방계 계승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컨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게 아니라 아우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수를 줄일 수 있다.

김부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사용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림 3>을 통해 추론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림 3>에 보면, 상대적으로 사실 확인이 힘든 제4대~제10대의 시기에서 유난히 형제 계승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 3>의 세 번째 항목인 ‘세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제4대부터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있다. 아들이 그 다음 왕위를 이었다고 하면 세수가 ‘쭉쭉’ 나갈 텐데, 아우가 왕위를 이었다고 하는 부분이 계속 나옴으로써 세수가 ‘병목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국초의 상황을 보면, 고구려는 일찍부터 부자 승계가 비교적 잘 확립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 점은 주몽의 왕위가 아들 유리에게 무난히 계승된 것을 통해서도 잘 확인할 수 있다. 요즘 드라마 <주몽>에서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처럼, 당시 상황에서는 유리가 고구려 제2대 왕에 등극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에 의하면, 유리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부여를 탈출하여 아버지의 품에 온 것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 19년째 되는 해였다. 그러므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 19년이 되도록 유리는 부여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19년 동안 유리는 고구려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가 돌아온 바로 그 해에 주몽이 죽었고 유리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그에 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왕은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요, 용산(龍山)에 장사하고 동명성왕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이에 의하면, 유리는 고구려에 들어온 지 불과 5개월만에 왕위에 올랐다. 이것은 아버지인 주몽의 왕권이 그만큼 단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는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부자 승계가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었는데, 사실 확인이 힘든 제4대~제10대 부분에서 김부식은 유난히 형제 승계를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김부식이 형제 승계라고 기록한 부분 중에서 몇 개는 실제로 부자 승계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수를 줄이기 위해 그렇게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이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도 있다. 그것은 바로 반고의 <한서>다. <한서> ‘지리지’ 권28하(下)에 나오는 현토군 관련 부분을 <그림 5>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서 빨간 줄을 친 부분이 본문이고, 그 밑의 작은 글씨는 주석이다. 본문의 내용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림 5. <한서> ‘지리지’ 권28하(下)
ⓒ 김종성
“현토군은 호(戶)가 4만 5천 6개이며, 장정(口)이 22만 1845명이다. (그 아래에) 현이 3개 있으니,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다.”

<한서> 기록에 의하면,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 설립 당시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현토군은 언제 설립된 것일까? <그림 5>에서 “현토군”이라고 쓰인 부분의 밑에 보면 주석이 보인다. 그에 의하면,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 즉 BC 107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BC 107년 시점에 이미 고구려가 현토군의 영역 안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는 고구려가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BC 37년 이전에 고구려가 성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기록에서는 현토군 관할구역 안에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고구려현이 현토군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한나라가 실제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역에 대해서도 자국의 행정구역을 설치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부식이 말한 BC 37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중국 역사책에서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이를 통해 고구려 성립연대에 관한 한 광개토대왕비문이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에, 고구려가 BC 37년에 건국되었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허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국 학계의 통설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고구려는 대체 언제 건국된 것일까?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는 BC 277년이라고 못을 박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렇게 꼭 집어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BC 107년 시점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확실한 것은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닌 17세손이기 때문에 고구려 건국 시점도 5세 즉 최소한 150년 정도 더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최소한 BC 200년 전후에는 고구려가 성립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단재 신채호는 가충언이라는 인물이 당나라 고종에게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고 말한 점을 근거로 고구려 건국 연대를 더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당 고종이 7세기 중엽의 인물이므로, 그로부터 900년 전이면 대략 BC 3세기가 된다. 북한측의 BC 277년 건국설과 대체로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BC 277년이라고 꼭 집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구려는 이미 BC 3세기 때에 성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BC 3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게 되면, 고구려가 한나라(BC 202~AD 220)보다도 더 일찍 성립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주몽이 한나라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고대 한중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 고조선이 BC 108년에 멸망했다는 중국측의 기록이 확실하다면, 이는 고조선과 고구려가 일정 기간 동안 병존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고구려가 고조선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서력 기원 전후에 한나라에 대항한 고구려의 용맹한 군주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는 주몽이 아니라 주몽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BC 37년 건국설이 허구이기 때문에 한국 고대사 및 한중관계 역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복원하려면, 김부식을 ‘청문회’에 소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부식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고구려를 폄하하기 위하여 조작한 고구려 성립연대를 깨지 않는 한, 한국 고대사 및 한중관계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에, 어쩌면 실제의 주몽은 한나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한나라보다 먼저 건국되었다면 말이다. 어쩌면 주몽은 중국 전국시대(BC 5~3세기)의 7웅과 경쟁을 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김부식에게서 벗어나면, 이와 같이 역사가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2007-01-26 10:56 ⓒ 2007 OhmyNews

 

▲‘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특히 화하족은 낙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전대륙을 차지했던 배달겨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

조선일보ㅣ 입력 : 2006.06.30 22:55 / 수정 : 2006.06.30 23:00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이룬 나라이지만, 전시설명판에는 중국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漢)왕조에 복속됐다고 적혀있다. /랴오닝성박물관 도록

 

지금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遼寧)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遼河文明展)’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양사, 더 나아가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려는 기획이다. 요하 유역을 아우르는 ‘요하문명’이 세계적인 문명 발상지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리장성 밖 요서·요동을 포괄하는 요하문명 전체를 자기 역사로 만드는 ‘요하문명 공정’에 중국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동북공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찍이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은 뒤, 장성 밖의 무지몽매한 새외(塞外)민족과 차별을 두었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북방한계선’을 긋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리장성 밖에서 중국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더 발달된 구석기·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됐다. 요하유역의 구석기문화인 영구(營口)의 금우산인(金牛山人)은 북경인(北京人)보다 형질인류학적으로 더 발달된 것이다. 이 지역 사해(査海)의 신석기문화는 서기전 8000년에 이르며, 신석기 말기(서기전 3500년~2500년)의 것이 바로 독특한 옥기 작품을 낳은 홍산문화(紅山文化)다. 이번 전시에서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에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려고 하는 뱀의 도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라의 도우에 많이 나타나는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전시 중 세 번째 테마 ‘화하일통’은 중국(=華夏)이 요하문명을 통일(=一統)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를 이룬 부여(서기전 3세기~서기 5세기)와 고구려는 물론, 삼연(북연-전연-남연)의 유물이 이 주제 아래 전시되고 있었다.

부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부여는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소수 민족의 하나”라고 기술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금귀고리나 철검 등 위세품이 출토된 랴오닝성 서풍현 서차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초기 철기시대 것’이라고만 소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부터는 ‘(중국에 속한) 부여’ 유물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요하지역에서 ‘화하일통’의 역사는 최소한 2500여 년은 됐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내몽골·요하유역의 각 유적과 이 일대 평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요령식 동검, 다뉴세문경, 옥룡(=곡옥) 등을 공유하는 알타이어계 요하문명권이었다. 한국은 요하문명의 굳건한 바탕 위에 중국 문명을 접목하며 역사를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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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이 지역에서는 우리 말고도 타민족들의 영웅 호걸들이 등장해 여러 제국을 건설했지만 결국 중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한 때 요하문명의 패자(覇者)로 비록 중국과 신라의 협공에 멸망했지만 그 정신과 예술은 지금까지 맥맥이 살아 남아,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도록 활력소를 제공해준 요하문명의 유일한 문화국가였다.

북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바꾼 국호)-대진국(발해의 국호)-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이라는 전승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이 요하문명의 완성자이기에, 중국은 사활을 걸고 동북공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국은 고구려를 넘어 한국의 미래까지 노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을 보러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에 발걸음이 멈칫했다. 평양에서 출토된 높이 90㎝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빗살무늬토기. 요하문명의 빗살무늬 토기들 가운데 황제같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우리 문화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졸본부여(고구려)와 동부여 등은 유목과 농경을 함께 하는 대표적인 반농반목 국가입니다.

따라서 북방 영토를 개척하는 하나의 주요한 동기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활인 각궁은 대나무와 참나무, 뽕나무, 벚나무 껍질을 비롯해 물소 뿔, 소 힘줄, 민어 부레, 쇠가죽 등의 8가지 자연재료로 만드는 활이다. 요즘 국제 경기에서 사용하는 양궁보다 사거리가 2배 이상 될 만큼 성능이 우수하다. 또 재료를 다듬고 말리는 데만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제조 과정에서 3천 번 이상의 손질이 갈 만큼 정교한 활이다.

▲ 각궁은 제조 과정에서 3천 번 이상의 손질이 갈 만큼 정교한 활이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일컬었다. 동이족의 ‘이(夷)’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의 합성 문자로서, 우리 조상들이 그만큼 활쏘기와 활 만들기에 능했다는 증거이다.

나무로 만든 목궁이나 대나무로 만든 죽궁보다 단단하고 탄력이 좋은 뿔을 활에다 덧대면 성능이 훨씬 좋아진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각궁이다.

군사 전략 물품, 수입 쉽지 않아

짐승의 뿔 중에서 활 재료로 가장 적합한 것은 물소 뿔이다. 물소 뿔은 한 개의 길이가 2미터나 되므로 줌통에서 도고지까지 뿔로 붙이는 장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물소는 아열대 및 열대 지방에서만 서식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각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삼국시대만 해도 한우의 쇠뿔을 이용한 향각궁을 주로 만들었다. 한우 뿔은 짧아서 3개의 뿔을 덧대야 했고, 또 줌통에서 삼삼이 근처까지만 뿔을 붙일 수 있다. 삼삼이에서 도고지까지는 뽕나무로 이어 붙였다.

그런데 한우 중에서도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만주 지방의 쇠뿔은 길이가 훨씬 길었다. 따라서 화살을 쏘아 날리는 힘도 그만큼 좋았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성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 고구려 벽화 수렵도에 각궁으로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 선조들이 성능 좋은 각궁을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물소 뿔을 수입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입하는 데는 제약이 따랐다. 중국도 물소 뿔이 군사 전략상 주요 물품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거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무역 거래에 의존하기에는 물량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에 대해 해결책을 내놓은 이가 바로 세종대왕이었다. 1428년(세종 10) 세종은 “활을 만드는 데 수우각(水牛角)만한 것이 없다”며 명나라에서 아예 물소를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기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물소는 털이 매우 적고 또한 짧아서 우리나라의 겨울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 점을 세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추위가 덜한 전라도 지방에서 우리를 지어 잘 기른다면 사육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 후로 세종은 틈날 때마다 명나라 황제에게 물소 구매에 대한 청을 올렸는데, 세종이 그처럼 자신 있게 밀어붙인 데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 낙타를 교역하고 싶다고 중국에 청한 적이 있었는데, 중국 황제가 그 값을 받지 않고 낙타 30필을 하사한 적이 있다는 사례를 세종은 주목하고 있었다.

'토목의 변'으로 물소 뿔 거래 금지

하지만 명나라의 반응은 세종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중국 조정의 예부를 통하기도 하고 황제에게 직접 주청하기도 했으나, 중국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냥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군사 전략물자인 물소가 낙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세종은 간과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물소 뿔의 수입이 완전히 막혀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1449년(세종 31) 명나라의 영종 황제가 하북성 토목에서 몽고의 오이라트 족과 전투를 벌이다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토목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그 이후 중국은 군사전략상 물소 뿔의 거래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 물소 뿔은 길이가 2미터나 되는 데다 단단하고 탄력이 좋아 활 재료로 최적이다 
그러자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중국에서 온 사신에게 암수 물소 20두를 섬에 놓아길러서 활 제조에 사용하고 싶으니 황제에게 말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된다.

조선의 물소 사육에 대한 이런 소망은 중국이 아니라 뜻밖에도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1461년(세조 7) 평소 조선과 친근하여 사신 및 조공을 보내오던 백제 계통의 일본 호족인 대내전에서 암수 물소 두 마리를 바쳤다.

이 물소는 유구국(琉球國 ; 15~19세기 오키나와 등의 류큐 제도에 있었던 류큐왕국)의 것으로서, 대내전이 4마리를 수입해 그 중 2마리를 조선에 바친 것이다. 그 후 일본 대내전은 번식을 시키지 못해 물소의 종자가 끊어졌지만, 조선의 물소는 칙사 대우를 받으며 번식에 성공했다.

세조는 물소를 기후가 따뜻한 경상도 웅천(지금의 진해 일대)에서 기르게 하다가, 이듬해에는 창덕궁 후원에 데려와 사복시(조선시대 궁중의 가마 및 말ㆍ소들을 관리하던 관청) 관원들로 하여금 사육법과 질병 치료법 등을 익히도록 한 후 보살피게 했다.

그 물소 2마리가 새끼에 새끼를 낳아 번식해 성종 때는 조선에서 기르는 물소의 수가 약 70마리에 이르게 되었다.

 

물소가 어느 정도 많아지자 성종은 자신의 즉위에 찬조한 공신들에게 물소를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1488년(성종 19) 6월 4일자의 성종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심회, 윤필상, 홍응, 이극배, 노사신, 윤호, 이철견, 한치례에게 물소 암수 각각 1두씩을 내려주고 잘 기르라고 하였다.”

 

▲ 동남아시아에서 물소는 가축화되어 농경용과 사역용으로 길러져 왔다

1497년(연산군 3) 6월 연산군은 각도 감사에게 글을 내려 “우리나라에서 물소를 많이 기르는데 밭갈이에 익숙하지 못하니 실용에 도움될 것 같지 않다. 각 고을에서 농구를 갖추어 갈기를 익혀 보게 하여, 밭갈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 아뢰라”고 했다.

중종 때인 1509년(중종 4) 5월에는 급기야 대사간 최숙생 등이 각관에서 기르는 물소는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해만 있으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물소는 섬으로 추방된 듯하다.

그해 7월 20일 병조 겸판서 유순정 등이 조정에 나가 아뢴 내용을 보면 “섬으로 추방된 물소들이 필시 주리고 얼어서 모두 죽었을 것”이라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농경용으로 이용하게 하자고 되어 있다.

그 후로도 계속 병조 등에서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기르게 하자거나 섬에 방목하며 추워서 죽는 물소가 많으니 좋지 않다는 말을 아뢴 것을 볼 때 중중은 세종이나 세조, 성종처럼 물소를 그리 귀하게 여긴 것 같지는 않다.

중종 이후 물소의 직접 사육을 포기한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총이란 새로운 무기의 위력을 접한 뒤부터 각궁에 대해서 그리 집착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4세기말 이후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우리의 땅 ‘간도(間島)’, 이대로 멈추고 말 것인가

 

앞으로 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돌아오는 2009년 9월 4일은 간도를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된다. 우리 세대에서 ‘되찾아야 할 우리의 땅’ 간도(間島)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잊혀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9월4일은 국치일로 남게 될 것이다.

간도(間島)란 무엇인가. 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이 곳은 지금 중국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땅이며 우리의 영토이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문에 근거한 조선도<백산학회 제공>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청에 간도 땅을 넘겼다. 그 후 1909년 9월4일 청·일 간도협약을 통해 조선과 청의 국경을 두만강과 압록강 경계선으로 획정 지었다. 결국 을사조약은 일제가 강압적으로 맺은 대표적인 국제조약으로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이며 국제적으로도 확인된 상황이다.

설령 간도협약이 유효하더라도 당사국인 청-일간에만 효력이 발생하며 의도적으로 배제된 대한제국에는 아무런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정당한 권리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간도(間島)문제 정부 ‘천하태평’…정치인들도 무관심

 

하지만 역대 정부나 정치권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천하태평이다. 그동안 역사와 영토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더라도 이런 우려가 절실히 드러난다. 굴욕외교로 비난을 샀던 1992년 한·중수교 당시에도 우리 정부는 일부에서 제기했던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특히 2004년 1월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졌을때도 “중국의 역사왜곡 행위를 정치문제화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저자세를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분통이 터진다. 일본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독도와 동해에 대해서도 5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이의제기를 해오고 있고, 특히 독도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사사건건 간섭하고 항의를 해오고 있다. 이는 독도 영유권과 독도가 한국땅으로 굳어지는 것을 저지하고, 국제법상 영토시효론에 근거해 유사시 연고권을 빼앗으려는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중국은 더하다.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염려해 일찌감치 영유권 분쟁의 가능성이 있는 동북3성(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지역 단속에 나섰다. 북한이 붕괴될 경우 이 지역으로 넘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한민족의 근거지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또 간도지역이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던 것처럼 통일 후 한국인의 또 다른 근거지가 되는 것을 미리 막으려는 의도도 내포돼 있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은 벌써 수십년전부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계산된 준비를 해오고 있는 반면, 우리 정부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며 단순 대응으로 넘어가려고만 하고 있다. 간도 등 고구려사 문제도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덮어버리려 하고 있다.

더욱이 국민의 안위와 국가보전에 필요한 지식을 갖춰야 할 정치인들 대다수는 역사적 무지와 무관심속에 정권의 치적을 쌓는 데에만 급급하고 국가의 미래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 육락현 회장은 “간도영유권의 중요성은 다가 올 통일시대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상”이라며 “우리정부는 조선족이 해체되기 전에 간도영유권을 분명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육 회장은 이어 “정치인들도 선거철 등 특정일에만 나라위하는 척 하지말고 자발적인 국민운동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간도(間島)는 왜 우리땅인가

 

첫째, 원래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선이 아니었다.
- 우선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여러 지도들이 간도와 우리땅임을 증명하고 있다. 프랑스인 지도 제작자 레지는 비망록에 “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정계비구역약도(규장각15504)’와 ‘백두산 정계비도(규장각26676)’, ‘로마 교황청의 조선말의 조선지도’(1924년 제작) 등 당시의 수많은 지도들은 동간도를 토문강 동쪽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의 연길로 이어지는 구격이 표시돼 있다. 이런 자료들로 살펴볼 때 적어도 1909년 간도협약 이전까지는 이같은 국경선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가 간도를 선점적으로 개간했다.
- 간도지역은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봉금지역으로 양국이 공동관리하는 무주지였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 되는데 간도에 대한 우리의 개간은 무주지 선점이론에 의한 영토획득의 의미가 있다.

셋째, 조선이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 조선은 1900년과 1903년에 서간도와 동간도(북간도)를 행정적으로 각각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세금을 징수하여 행정과 군인훈련비로 충당했다. 이런 사실들은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도 똑같이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간도는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가

 

간도는 좁은 의미로 볼 때 백두산 정계비에서 언급된 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동 지역인 동간도 혹은 북간도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압록강 이북 지역인 서간도도 포함한 남만주 전체를 가리킨다.

간도 영유권 분쟁 당시 우리 선조들은 동으로는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에 이르는 연해주를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압록강 대안을 포함해서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양과 심양 일대(소위 심요선)까지의 봉금(封禁)지역이 포함된다.

 

간도의 면적은 얼마나 되나

 

학자들마다 간도의 면적에 대해 설명하는 바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백두산 정계비가 정한 국경을 지도 위에 표시해보면 그 크기는 한반도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여기에 압록강 대안지역인 서간도까지 포함하면 간도의 면적은 한반도의 1.5배에 해당한다.

일부에서는 간도의 크기를 한반도 면적의 약 10분의 1 정도인 2만1000㎢라고 하는데 이는 일제의 간도파출소가 관할하던 일부 지역만 산정한 잘못된 수치다.

 

간도를 찾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국제법상 강제로 주권을 침탈한 국가가 맺은 조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간도협약 역시 효력을 상실했어야 마땅하다. 중·일간에는 1941년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합의가 있었고, 한·일간에도 1910년 8월 22일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는 확인이 있었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광복 후 혼란기, 한국전쟁, 남북분단의 상황을 거치면서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효력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은 간도협약은 국제법의 통념상 틀림없이 무효화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의 입장은

 

북한은 간도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간도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북한의 태도에 대해 중국과 사회주의 이념을 함께 하는 형제국가라는 난처한 입장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보다는 북한과 중국이 맺은 비밀조약이 북한의 입을 막고 있다는 해석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북한은 1974년 중국과 ‘조·중 변계조약’을 맺고 새로운 국경선을 획정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비밀조약으로, 정확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남북이 통일될 경우 ‘조·중 변계조약’은 비합법적 정부간에 체결된 조약이라는 이유로 무효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도 가정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정부가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나서는 것이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중국과 국제사회에 즉각 알려야 한다. 이를 통해 간도 문제를 국제사회의 이슈로 부각시키고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임을 공인받아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간의 영유권 분쟁시 현지 주민의 의사가 중요한 결정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는 전체 주민의 40%선((2004년 추정)으로 떨어지는 등 10년 내에 조선족자치주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다.

따라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 확보에 있어서 재중동포의 와해를 막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은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또 중국의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표가 간도영유권의 고착화에 있음을 간파하고 역으로 우리는 간도의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정한 헌법 제3조의 내용을 북방영토를 포함한 내용으로 수정해 교과서 및 역사서, 각종 지도에 간도지역이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도움말=한국간도학회·간도되찾기운동본부>

 

 

 

 

 

 

 

[기고/신용철]물에 잠기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6-05-22 02:59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의 긍지인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는 동명성왕의 개국 설화에는 우발수(), 압록강, 졸본천(), 비류(), 엄류수(), 곤연(), 하백() 등의 강이나 물과 관계되는 단어가 무려 9개나 나온다. 이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백두산뿐만 아니라 압록강이나 호수 등의 물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바다이름 발)’자 역시 물과 관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2360기의 고분이 중국 압록강변 운봉(·중국 발음으로는 윈펑)댐의 수몰지구에서 발견됐다. 이곳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50km, 고구려의 수도인 지안()에서 45km라고 하니 실로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의 역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고분들이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의 침략으로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되어 247년 동황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의 관심을 의식해서인지 발굴을 하지 않은 채 댐에 물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측이 공동조사를 제의하기 전에 서둘러 다시 수몰시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중국의 장푸유() 창바이산()문화연구회장은 성()의 축조 양식이 고구려나 발해 등의 것과 차이가 있으므로, 중국 한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의 전문가들은 흙으로 쌓은 한대의 것과 달리 돌로 쌓은 성은 당연히 고구려의 것임을 주장하지만, 중국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상태라 발굴을 통한 입증은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이미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려는 판국에 우리의 주장이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선 운봉댐의 공동 소유자(1964년에 공동 건설)인 북한은 왜 중국 측에 아무런 주장이나 항의를 못하느냐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항의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우리와 미국 등에 대해 그처럼 강경하게 ‘주체()’를 외치는 북한이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중국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약해지는지…. 물론 6·25전쟁 때 남한이 미국의 도움을 받았듯이 북한 측은 중국에 신세를 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역사나 영토 문제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지금 중국이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두만강 하구와 나선의 공동 개발, 동북 3성()의 역점 개발, 발해(·보하이)만 유역 대개발 등으로 인해 우리 영토의 자주권이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해체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끈질긴 소수민족 정책 즉, 최근의 ‘동북공정’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만이라도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데 자기의 목소리를 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서, 그리고 미래의 생존을 위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을 잃지 않는 지혜와 용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고분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 물속으로 잠겨 버렸다. 한편 중국은 상하이() 푸둥() 지구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발해만 유역의 대개발’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오랫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랴오둥() 반도를 비롯하여 허베이() 성, 랴오닝() 성 등의 연안과 우리 한반도의 북부 서해안 일대가 모두 그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은 뻔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역사가 물에 잠기듯이 ‘발해왕국’은 겨우 바다 이름에서나 찾게 될 것이니 서글픈 일이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중국사

 

ⓒ 동아일보 & donga.com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이유

 

수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침공할 때부터 668년 당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끈질긴 침공 기사를 읽으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수와 당은 고구려와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처럼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는데 이곳에서는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진시황제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한족과 북방기마민족(흉노)이다. 한족의 왕조가 쇠퇴하면 북방기마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진시황 이후 중원 패권 북방기마민족이 차지

 

그 시작이 오호십육국(1五胡十六國)이었고 이를 회복하고 중국을 통합한 나라가 수와 당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매우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시대를 '혼란기' 혹은 '암흑기'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서진이 흉노족에게 점령당한 후 한족이 대거 강남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위나라를 이어받은 서진이 단명하자, 사마예가 강남땅에서 동진을 일으키고 화북지역에는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라 해서 갈, 저, 흉노, 선비, 강족 등 많은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저족 출신의 부견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전진왕조를 세우고 강남의 동진과 대치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족은 외래문명에 대해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민족인 다수의 기마민족 왕조가 세워지자 자연적으로 한족도 외래 문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불교수용도 그 중 하나로 설명된다.

고구려 멸망 때의 상황.

후한 말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됐는데 이는 북방의 소위 ‘오랑캐 왕조' 즉 기마유목민족 계열이 들어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중국사에서 이 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한잡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이민족과 한족이 같은 화북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의 통치를 사실상 흉노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할 결과로 볼 수 있다. 북조 중에서도 북위 효문제 시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폈는데 그는 선비족이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과 결혼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문제 ·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이민족 출신


그런데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와 당나라도 족보를 따진다면 모두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이라는 점이다. 수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 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도 한족 출신이 아니다. 이연도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연은 당 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노자의 성은 이씨임)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학자들은 이연이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이 이씨 성을 하사하는 관례에 따라 이씨 성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당태종의 충복으로 볼 수 있는 장손무기는 당고조 이연과 같은 척발씨로 북위 때 전공을 많이 세워 성씨를 장손(長孫)으로 바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북주의 표기대장군이고 아버지는 수나라의 우효위장군이며 그의 여동생이 태종의 처 문덕황후다. 그는 혈통이 척발씨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세민과 절친하게 지냈다.

태종의 또 다른 충복인 우지녕도 선비족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동주총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내사사인을 지내는 등 정통적인 북방기마민족 가문이다.

중국을 사실상 통치한 오호십육국들의 원래 시발점은 고구려처럼 북방기마민족으로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집단도 경우에 따라서는 통일왕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고구려 정복에 성공한 당 고종,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해 천하를 통일했으나 왕비인 측천무후가 690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건해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됨으로써 가장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혔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 중국 선제공격 사실 잘 알려져

 

요동방어선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국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중국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 배달 흉노계 거란족 출신 설인귀

 

설인귀(薛仁貴)는 당(唐)의 태종(太宗, 598~649)과 고종(高宗, 628~683) 시기에 활약한 장수(將帥)로 613년에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山西省 河津)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예(禮), 자(字)는 인귀(仁貴)입니다. 농민 출신으로 기마와 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설인귀는 흉노계 선비족 왕조였던 북위의 장군 설안도의 후손입니다. 하동 설씨 집안이죠.

설인귀(薛仁貴)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한 상태였죠. 하지만 일개 농민 출신으로 대장군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설인귀가 태어난 산서성에 대해 좀더 얘기하자면,
산서성은 5호16국 시대에 후조(319~351), 전연(337~370), 전진(351~394), 후연(384∼409) 같은 여러 북방 유목 민족들의 나라들이 차례차례 통치했었습니다. 이들 나라들은 배달 흉노계 선비족 왕조 북위(386~534)에 의해 통일되는데, 건국 초기에 북위의 수도는 산서성 북부의 다퉁이었죠.

또 배달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618~907) 시대에 이 지역은 황하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하동(河東)이라고 불렸습니다.
5대10국(907~960) 시대동안 5개 왕조 중에 3개의 나라가, 10국 중에 1개의 나라가 산서성에서 발흥하였습니다.

산서성과 하북성 등은 배달겨레 후예들인 흉노족, 선비족, 거란족, 갈족, 예맥족, 여진족 등 북방민족들의 지배를 받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허구의 종족 한족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조작일 뿐이죠.

 
중국 유전연구소는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했다면서 충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또  회족(回族)인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습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죠.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죠.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습니다.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사내용 (이 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본 블로그의 /역사/면에 있는 [FㅗU-_-CㅗK 탐원공정, 쥐나 짱골라의 허구적 망상], [유라시아 대륙의 제국들 계보],

[한국의 안경과 유리], ['졸본부여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한국의 국제 교류'], [고고학적 발굴과 중국 사료로 추적한 고조선의 비밀],

[단군 어머니 웅녀(熊女)의 자취,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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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형제 터키], [멀고도 가까운 사이, 왜열도쥬신], [삼전도의 진실, 만주쥬신]을

 

 

 

배달계로 홑꽃. 꽃색깔이 순백색이며, 국내육성종이다.

 

 

 

/지식창고(과학&생물 등)/면에 있는 [유전자로 밝혀보는 배달겨레의 뿌리]를

 

 

 

아사달계로 홑꽃. 도입종과 자생종간의 교배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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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단심계로 홑꽃. 꽃잎 바탕색이 청색을 나타낸다.

 

 

 

/식문화&요리/면에 있는 [고추·마늘·콩과 인간의 수명]을

 

 

 

홍단심계로 겹꽃. 색채가 화려하고 꽃모양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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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심계로 홑꽃. 흰꽃잎에 중심은 붉은 것을 백단심계라 한다.

 

 

 

/유물,유적,문화재/면에 있는 [가야 여전사들의 신비를 찾아서]를

 

 

 

홍단심계로 반겹꽃. 국내 재래종이다.

 

 

 

/자주국방다물, 밀리터리/면에 있는 [고구려의 국력, 로마와의 가상대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