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제나 늘 숨죽인 동초(冬草)처럼

 

 

 

 

제 7 부

 

 

 

 

4. 

 

 

 

 

    그 이후, 나의 아버지를 따라 그렇게 낙향한 우리 가족들은 전부 다 그 삼천포 성당에서 영세

 (세례)를 받았었죠.      

    물론 지금 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때 그 당시 나의 아버지의 천주교 입교와 삼천포 시로의 낙향

 이란 그  선택이 우리 가족 모두들에게 미친 그 여파로서의 운명이나 행 · 불행에 대한 선택으로선 과

 연 참 잘된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록의 대단히 잘 못된 선택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난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자신의 회개와 그 회개적 삶을 위한 천주교 입교와 삼천포 시로의 낙향이 나의 아버지에

 겐 불가피하고도 아주 행복한 선택이었을진 몰라도, 그러나 그로 인한 우리 가족 모두들의 운명과 

 은 완전히 극에서 극으로 뒤바꿔져 버렸었으니까요.

    왜냐하면, 그 예전의 나의 아버지가 비록 개차반 중에서도 최상급의 개차반이긴 했었어도 경제 활

 동을 했었던 그 댓가로 우리 가족 모두들은 별다른 고통이라곤 없이 호의호식(好衣好食)으로 참 잘

 먹고 · 입으며 전혀 남 부럽지 않게 아주 떵떵거리며 살 순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나의 아버지의 천주교 입교와 삼천포 시로의 낙향 후, 경제 활동과는 전혀 무관한 전교(선

 교) 사업에만 전적으로 투신한 탓에 우리 가족 모두들은 그 때 그 당시 삼천포 대다수 사람들처럼 악

 의악식(惡衣惡食)으로 못 먹고 · 못 입는 아주 빈천한 사람들로 전락하고 말아버렸으니까요.  

    아니 그 때 그 당시 삼천포 항의 사람들로부터 “ 집안 사람들은 괜찮은데, 돈이 없어도 너무 없는

 집안 ” 이라는 조롱을 받을 만큼의 철저히 빈한한 집안으로 급추락하고 말아버렸었으니까요.    

    해서 만약에, 그 때 그 당시 나의 아버지가 비록 개차반 중에서도 최상급의 개차반이긴 했었어도

 천주교 입교나 삼천포 시로의 낙향을 하질 않고 부산 시에서 계속 경제 활동을 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가족 모두들의 운명과 행복은 완전히 달라져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 번 해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제 아무리 부모라 한들 제 자식의 정해져 있는 운명을 그 어떻게 거스를래야 거스를 수라곤

 없듯, 그 때 그 당시 나의 아버지의 천주교 입교와 삼천포 시로의 낙향이란 그 선택을 지금껏 우리 가

 족 모두들도 그 어느 누군들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라곤 없는, 그야말로의 ‘ 그 운명적 선택 ’ 이라 여

 기며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죠. 

     

    해서 나의 유년기 시절의 기억이라곤, 그 삼천포 성당에 관한 기억들이 거의 태반이죠.     

    게다가 아주 공교롭게도, 그 삼천포 성당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었던 터라, 이른 아침에 나의 아버지가 성당으로 출근을 할 땐 우리 형제들도

 함께 따라 등교를 했었고, 하교 후엔 곧바로 집에 가질 않고 어김없이 친구들과 그 삼천포 성당으로

 우르르 몰려가 그 삼천포 성당에서 숙제도 하고 · 구슬 따먹기도 하고 · 고무줄 넘기도 하며 한참 놀

 다, 일몰녘에 퇴근하는 나의 아버지와 같이 집으로 가곤 했었죠.

    해서 나의 유년기 시절의 대부분의 기억들이라곤, 그 삼천포 성당과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라

 곤 없죠.     

    해서 그 어쩌면, 나의 수녀원 행도 그 삼천포 성당과 관계된 기억들의 연장선 상에서의 한 맥락이

 었는 지도 모르겠고요.  

    그 삼천포 성당은, 나의 유년기 시절서부터 아주 안락하고도 행복한 느낌을 주는 기억들 뿐이었으

 니, 나의 진로 또한도 계속 그런 안락함과 행복감을 줄 수도원 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어

 쩌면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이었는 지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그 때 그 시기의 난, 카톨릭의 전례(典禮) 음악에 무척 심취해 있기도 했었죠.

    특히, 이 종철 신부(神父) 님이 만들어 놓은 많은 음악들 중에서도 이 순애 님의 작사에 곡을 붙인 

 ‘ 주여, 당신 종이 여기 ’ 라는 음악을 무척 좋아했었죠.   

    ‘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려 왔나이다. 십자가를 지고 여기 여기 왔나

 이다.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려 왔나이다.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오롯이 왔

 나이다. 하얀 소복 차려 여기 왔나이다. 한평생 주님 함께 살고파 왔나이다.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

 어 주소서.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소서. 주여, 당신 품 안에 나를 받아 주소서. 내 쉴 곳 주님

 의 품 영원히 잠 들렵니다. ’ 라는 가사로 된 이 곡을 너무너무 좋아해 참 많이 키타를 치며 부르곤 

 었죠.

    특히, 온 사위가 소리없이 잠든 캄캄한 한밤중에 하얀 촛불을 켠 채 나 홀로 깨어 이 노래를 가만가

 만 부르고 있으면, 나의 온 몸엔 소름이 다 돋고 심장까지도 얼어 붙어버리는 듯한 전율과 함께 깜

 깜박거리며 이리 저리 흔들리곤 하던 촛불의 불꽃마저도 딱 정지해 그 노래에 빠져드는 듯한 감동이

 느껴지기도 해 참 많이도 부르곤 했었죠.

 

    해서 난, 나의 진로를 그 때 그 당시 이태리에 본원(本院)을 둔 채 한국 분원(分原)으로서 우리 나라

 에 진출해 있던, 경남 진주시로 흐르는 남강 하구변의 무수한 모래들이 흘러들어와 토지를 이룬 곳이

 라 땅콩과 당근를 주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의 어느 한 곳에 위치해 있던 외국계의 조그마

 한 수녀원인 ‘ 예수의 작은자매 전교 수녀회 ’ 란 수녀원에 입회한 후, 그 곳인 한국 분원 수녀원에서

 일정 기간(예비 수련기)을 지내다 본원이 있는 이태리로 유학한 뒤, 그 곳 이태리에서 전례음악을 공

 부해 내가 좋아하는 이종철 신부(神父) 님같은 좋은 전례음악은 물론 신(神)을 찬미하는 음악을 작곡

 하는 수녀가 되겠다는 결단을 딱 내려놓고 있었죠. 

     헌데 나의 아버진, 나의 진로를 남들 다하는 결혼이 아닌 수녀원 행으로 결정 짓자, 그렇게 결정한

 나보다도 훨씬 더 많이 좋아했었죠. 

    “ 난, 내 자식들 중 아들 하나쯤은 신부(神父)가 됐으면 좋겠다고 내심으로 바래왔었는데, 두 아들

 중 하나도 신부가 되겠다는 자식이 없어 좀 섭섭했었는데, 딸인 네가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아들이

 신부가 되겠다는 것 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에 수녀 하나가 난다니 이 얼마나 다행이

 냐. ” 라며, 참 좋아했었죠 

 

     아니 나의 아버진, 내가 수녀가 되겠다는 말에 나의 어머니가 “ 여잔, 시집 가 애를 낳아야 어른이

 되는 건데, 수녀가 웬 말이냐, 수녀가 … . ” 라며 대뜸 울음보부터 터뜨리자 “ 우리 재야가 어디 죽을

 데라도 가나? 수녀가 되러 가지, 수녀가. 어른은, 꼭 시집 가 애를 낳아야만 되나? 수녀가 되도, 어른

 은 되지. 누가, 마더 데레사같은 수녀님을 시집 안 가 애도 안 낳아 본 어린애라고 하든? 우리 재야도

 , 수녀원에 가 마더 데레사같은 훌륭한 수녀님은 못 되도, 그 수녀님의 반에 반만 되도 어른이 되고 우

 리 집안의 영광인데 울긴 왜 우냐? ” 라며 화를 내 타박을 주었을 만큼으로 정말로 참 많이 좋아했었

 죠.

    그리곤 또 나의 아버진, 아직 수녀원에도 가지 않고 준비 중인 날 “ 우리 수녀님 · 우리 수녀님 ” 이

 란 경어까지도 불사하지 않았을 정도로, 참말이지 나의 아버진 참 많이도 좋아했었죠.

 

    참말이지, 아직 수녀원에도 가지 않고 준비 중인 날 “ 우리 수녀님 · 우리 수녀님 ” 이란 경어까지도

 불사하지 않았을 정도로 나의 아버진 참 많이도 좋아했었죠.

    그 참말이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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