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화의 역할

 

유대교의 계율

 

1999 9, 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루 대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종교적으로 근엄한 분위기가 넘치는 나라는 아니다. 아니면 유태인들은 본래 쾌활한 사람들이라 그들의 종교가 근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표면적인 것들 때문에 이스라엘을 그저 슬쩍 보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은 종교가 이스라엘에서 가지는 역할을 과소평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살아보면 결국 가족과 사회전반에 걸쳐 그들의 종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스라엘에 가면 조그만 키파라고 불리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길에서 보게 된다. 2007년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에 사는 유태인중 17%가 그와 같은 유태정교 신자다. 그리고 약 8%의 유태인은 유태정교보다 더욱 보수적인 유태교도인 하레디 신자이다. 하레디 교도들은 그 60% 정도가 직업을 따로 가지지 않고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그들은 아이를 많이 낳아서 열명정도 아이가 있는 것이 별로 드믈지 않다. 길을 가다가 검정색 옷을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쓰고 귀밑머리를 길게 기른 사람들을 만나면 이들이 하레디 신자다. 안식일 날 차를 타고 이들 앞을 지나면 돌이 날아온다. 사실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하는 자들은 죽이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이 모두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유태인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은 아니며 다만 보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대개는 종교와 전통을 존중한다.

 

그럼 이들이 존중하는 유대교의 계율은 어떤 것일까.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강한 유태인들은 코셔라고 불리는 음식을 먹는다. 유태인들은 일단 피가 섞인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그래서 가축을 도축하면 피를 모두 뺀다. 네 발을 가진 동물을 먹으려면 위가 두 개 이상 있어야 한다.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것만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돼지와 말은 유태인이 먹을 수 없다. 물고기에는 비늘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 뱀장어나 미꾸라지는 그래서 먹을 수 없다. 고기를 먹는 독수리는 먹을 수 없고 새우도 먹을 수 없다. 이러니 코셔 때문에 해외 여행을 갈 때 독실한 유태인들은 종종 음식을 가방 가득 가지고 떠난다.

 

유태인 율법에 따르면 고기와 유제품도 같이 섭취해서는 안 된다. 하루는 우리 딸에게 예루살렘 시내의 버거킹에서 우유를 주다가 제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햄버거 가게에서는 우유나 치즈를 팔지 않거니와 누군가가 우유를 가져와서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유태인은 안식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모세의 십계명중의 하나다. 안식일은 샤밧이라고 불리는데 샤밧은 쉰다 멈춘다는 뜻으로 금요일의 일몰 때부터 토요일밤 세 개의 별이 나타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안식일 식사는 식사인 동시에 예배와 같은 것으로 즐겁게 식사하라는 것 자체가 계율이다. 유태인들은 부모자식이나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 한 주일 동안 곡을 한다. 이것을 시바라고 하는데 샤밧이 되면 이 시바도 멈춰야 한다. 즐겁게 먹고 마셔야지 다른 사람에게 슬픈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샤밧이 되기 전에 몸과 옷을 깨끗이 한다. 샤밧이 되면 노동을 하지 않고 즐겁게 보내고 3번의 성찬을 가지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요리조차도 전날 모두 해놓는다.

 

샤밧의 기간 동안 유태교도들은 세 번의 성찬을 가지는 것 이외에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뭐가 일인가 아닌가는 유태교법률에 의해 엄밀히 정해져 있다. 우회 방법이 있다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유태교도는 전기를 켜거나 꺼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불을 쓸 수 없으므로 성찬의 음식들은 모두 전날 준비해서 음식을 따듯하게 유지시켜 주는 장소에 보관한다. 유태교도는 샤밧에 자동차를 몰거나 타는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행도 할 수 없다. 다만 샤밧에도 친구나 가족을 초대하거나 방문할 수는 있고 기도를 하러 시나고그에 가는 것이 허용되며 유태인의 규약집인 토라를 읽거나 연구하는 것이 허용된다.  

 

유태인 율법은 모든 것을 아주 자세히 규정해 놓고 있다. 유태인은 모든 것에 매우 꼼꼼하다. 예를 들어 샤밧이 시작될 때 하는 샤밧촛불의 점등은 일몰 18분 이전에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샤밧에 하지 못하는 일들도 39개의 집단으로 분류되어 지정되어 있다. 이 모든 규약의 근거는 성서에 나오는 한두 줄의 글을 가지고 유태인들이 열심히 싸우고 논쟁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해가 질 때쯤 적당히 촛불을 켜자라던가 대충 이런 것들은 안 된다는 식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유태인 학자들이 모여 만든 탈무드는 일만 이천 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유태인은 유태인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뜨거운 논쟁을 하고 기록을 남겨 온 것이다.

 

모든 유태인들이 이런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존중하며 따라서 그 가치는 이스라엘에서 인정받고 있고 그것이 유태인들의 전체의 가치판단에 큰 영향을 준다.

 

문화와 가치 판단

 

거대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종종 문화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많은 사람은 문화를 통해서 먹고 살고 숨을 쉰다. 문화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뭘 입고 뭘 먹고 어떤 집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문화는 말해 준다. 문화는 편리한 비서나 지침서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문화는 가능한 답을 제안해 준다. 문화는 바로 가치판단에 대한 제안을 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핵심적 기능이다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을 보자. 인간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그래서 의미가 없다. 그것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인형이나 로보트만 나오더라도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인간이 관련되어 있고 인간이 사는 모습에 어떤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모두 잠재적인 갈등을 포함한다. 즉 개인의 삶을 택해야 하는가, 가족의 질서를 존중해야 하는가, 돈을 택할 것인가 사랑을 택할 것인가, 화려한 삶을 꿈꿔야 하는가,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하는 여러가지 선택적 상황에 답하는 것이다. 문화적 작품들은 여기에 대해 사람은 모두 다양하게 살아야 한다던가, 이것만은 지키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던가, 이런 것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문학작품들이 모두 단순하게 어떤 교훈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는 그의 책 <인간의 정체성>에서 좋은 문학의 특징은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삶의 다양한 면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교훈으로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문학작품에서 어떤 가치를 느끼고 공감한다. 그 공감은 우리가 가지는 가치판단의 경향성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표면적으로는 갈등 구조가 없어 보이는 문화물들도 사실은 모두 생각해 보면 어떤 가치가 그 가치에 상반되는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거나 그 대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 속에서 아무 일 없이 수행하는 스님의 일상을 보여주면 거기에는 갈등이 없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관객과 이야기 속의 스님과의 갈등이 있다. 즉 스님은 저렇게 사는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동물들만 보여주는 자연다큐는 인간과 관련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동물들에 대해 더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것도 특정 동물이나 특정식물에 대해 알아야 할까. 왜 그들이 저토록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저걸 파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야 할까. 그것도 역시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할 가치 판단에 대한 것이다

 

훌룡한 문화의 특징

 

문화가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라고 할 때 훌룡한 문화란 모든 가능한 상황에 있어서 즉 이미 경험했고 기록되어진 상황뿐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도 행동의 지침을 줄수 있는 종합적이고 다면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럴 수 없을 때 그 상황에서 그 문화는 가치판단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 무력해진 문화는 다른 문화에 쉽게 침투당하고 파괴된다. 때문에 문화는 일반화의 능력이 있어서 새로운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해야 한다. 상식과 문화 모두는 내부적 구조를 가지고 여러 사안이 얽혀 있다.

 

이 내부적 구조는 변화를 어렵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일반화의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모든 사안에 있어서 단순히 따로따로 내려진 가치판단의 목록은 새로운 상황에 대해 전혀 어떤 지침을 내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 한 가지를 기존의 문화에 단순히 추가함으로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러한 판단이 기존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기존의 문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야 한다. 확장성이 없는 문화는 이것이 어려워서 결국 변화에 적응할 수가 없다

 

문화가 제공하는 가장 유용한 결과물은 하나의 가상적 인간형, 종합적 인격이다. 이것이 주로 인간의 형태를 띄는 이유는 뻔하다. 우리가 쥐였으면 이것은 주로 쥐의 형태를 띄었을 것이다. 이 종합적 인격은 심지어 작가가 글이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말하지 않는 어떤 질문에도 답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일본에 대한 소개서 중에 고전으로 통하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있다. 루스 베니딕트는 꼽는 충, , 의리, , 인정 같은 것들을 일본의 덕으로 꼽는다. 그가 이것들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가장 잘 표현준다고 하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은 47낭인의 이야기다.

 

47낭인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47낭인이 모시고 있던 영주가 모욕을 당하고 죽었다. 복수를해야 하는 의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경우 이 영주에 대한 의리라는 의무는 쇼균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고 있었다. 47인의 낭인은 이 충성과 의리의 상충된 요구를 모두 지키기 위해 의리에 따라 원수를 갚고 불충에 사죄하기 위해서 모두 자결을 하고 만다. 그들은 이 복수전을 위해 그들의 개인의 명예를 희생함은 물론 그들의 아내를 져버리고 여동생을 희생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누구와 누구간의 은원에 이야기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의리, 특히 상하간의 은원를 얼마나 열심히 지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숨 이상의 것을 내놓고 그것을 지켜낸 47인의 낭인은 진정한 영웅으로 찬양된다. 이 이야기는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가치는 은혜에 대한 보답을 지키는 정신이며 만약 세상이 혼잡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의리와 충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본은 사무라이라는 인격체를 만든다. 사무라이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만화에 등장하면서 다면적 인격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 가상의 공간에 있는 사무라이는 일본 대중에게 답한다. 당신은 갈등의 순간에 있는가? 그렇다면 물어라, 사무라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인격들 중에는 서부의 정의의 카우보이, 서부 개척자, 영웅, 법의 수호자인 보안관등이 있다. 그것은 지금 여러모로 계승되어 배트맨 같은 것으로도 모습이 바뀌어서 존재한다. 서부극에 익숙한 사람은 존 웨인을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트맨을 생각해 보라. 어떤 상황에 도달했을때 존웨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배트맨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거기에는 답이 있다. 그 인격은 과거의 인물이라도 현재의 가치판단 문제에도 문제없이 답을 내려준다. 그것이 문화적 인격의 유용성이다

 

예를 들어 크게 인기가 있었던 드라마 대장금을 생각해 보자. 그 이야기는 하나의 인간 장금이의 성격을 묘사해 낸다. 그리고 드라마에 빠져든 사람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장금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라고 질문하면 가치 판단에 대한 어떤 제안을 받을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임의적으로 장금이라는 캐릭터에 새로운 사실들을 마구 첨가할 수는 없다. 장금이라는 캐릭터는 내부적 철학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생각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행동을 따라하며 유교적 전통을 믿는 사람은 공자나 맹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노장을 믿는 사람은 노자나 장자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들이 남긴 말 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들과 일체가 되어서 그들이 내리는 가치판단을 느끼려고 한다. 거기에는 항상 해석 될 부분, 명확히 글로 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문화 주는 가치 판단은 단순한 각 상황에 대한 행동 지침의 두서없는 총합이 아니다. 그런 문화는 저질이라 오래 존속할 수가 없다

 

한국 문화의 문제

 

문제는 한국이다. 우리는 한국문화를 대표할 강력한 문화적 인격체를 상상할수 있는가? 우리도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비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선비라는 가상적 인격체에게 물으면 답을 준다. 그것이 한국문화였다

 

전통의 그것은 선비이지만 선비는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인격의 모형으로 남은 게 아니라 처절히 상처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다. 거의 모든 전통에서 유교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한다며 사실상 전통에서 무조건 벗어나는 것이 진보적인 것, 현명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 같다

 

이것은 해방 이후의 경험도 영향을 준 것이지만 일제 시대가 만들어 내기도 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어떤 의미로 사무라이가 선비를 쳐죽인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선비는 비루하여 사무라이에게 죽었으니 너희들도 이제부터 사무라이로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 교육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선비는 부활하지 못했다. 선비의 부활이니 계승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과거로의 회귀라며 펄쩍 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선비는 이름이 선비인 것이지 역사 그대로의 선비여서도 안되고 일수도 없다. 카우보이도 사무라이도 역사 그대로의 인격체가 아니다. 심지어 예수나 부처나 공자도 끝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이다. 문화적 인격체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 항상 진화하고 발전한다한국문화가 제시하는 인간형을 이제와서는 꼭 선비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다만 문화의 완벽한 비약은 불가능 하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전통을 발전시키는 한도내에서 비약을 꿈꿀 수 있을 뿐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문제는 피할 수 없으며 외국의 가치관을 통째로 수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치 판단의 부분은 과학 같은 논리나 지식의 영역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조선의 후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듯이 선비의 계승이라는 문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지나갈 것이 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한다. 이것을 허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사람도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순수히 허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미국은 당연하고 일본 같은 나라만 봐도 쉽사리 훨씬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방향의 생각은 매우 허망하다.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한 마디로 한국인의 정체성은 유전자에서 나온다는 말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한국인 답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단일 민족의 피 즉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졌다는 이야기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미국인도 일본인도 이렇게 미국인과 일본인을 정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인도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다. 발전한 나라는 미국인답다는것, 일본인답다는것, 로마인 답다는 것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는다. 추상적 가치가 보다 큰 비중을 가지고 그 나라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자유의 가치건 은원을 아는 가치건 준법정신이건 그것은 추상적 가치다. 그것으로 미국인은 미국인 다운 미국인을 말한다. 일본인은 일본인다운 일본인을 말한다.

 

우리는 고작 혈통의 순수성을 말해야 할까노랑머리를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한국인인가 아닌가? 우리는 화를 내야하는가 별일 아닌가.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는 그녀가 한국인답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행동이야 어쨌건 치마저고리를 입고다니면 한국인 다운 것일까? 그것은 혈통일까? 한국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우리의 가치는 무엇 인가. 한국 사회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통일성의 문제

 

여기서 나는 다시 통일성의 문제를 강조하고 싶다. 문화는 수많은 사안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통일적 구조를 가지고 내려주는 것이다. 내부적 논리에 모순이 있는 문화, 편협한 문화는 그 적용에 있어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용하지 못하다

 

통일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문화의 생산과 배포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문화는 수많은 경험이 종합되어 이룩되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쉽사리 창조되고 개량될 수 없다. 문화는 단순한 경험의 나열과 규칙의 나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응축해서 통일성이 있고 일반성이 있게 만들어 내야 쓸모 있는 문화가 만들어진다조금 다르게 말하면 철학이 있고 일관성이 있는 위선적이지 않은 인간형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의 문제는 특히 생활의 복잡성이 전과 비교할수 없게 달라진 오늘날 그러하다. 수백 년 전의 농부에게 모든 일은 정해져 있고 가치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몇 번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전세계의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살아가는 시대에 조잡하고 임의적으로 조합한 문화는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는 그러고 싶다고 해도 권력이 있고 부자인 사람들이나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쉽사리 즉석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체 모순이 심한 문화는 결국 그 문화를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날 힘에 의한 무력통치보다 민주정부가 더 효율적인 이유다. 지배 계층은 계속 사회적 성공의 게임법칙, 즉 가치 판단의 규칙을 바꾸고 지배적 문화를 새로이 수정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많고 복잡한 사회가 되어 버린 오늘날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억지로 계속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 사회는 자체의 정체성과 문화를 잃고 윤리적 붕괴를 일으킬 것이다. 사회 공동체가 망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문화는 쉽사리 섞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두 가지 문화는 가치판단에 있어서 충돌을 일으키고 그 충돌은 대부분의 경우 한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결국 문화의 충돌은 발전적 계승이 없는 경우 내부적 모순으로 가득찬 가치관을 만들어 내거나 한쪽 문화를 완전히 파괴하게 되거나 싸움이 끝없이 계속되게 만든다

 

나는 낭만적 생각으로 문화적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같이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사회의 정체성을 세우는 문제가 매우 시급하다. 문화적 다원주의란 주체적 윤리의식, 주체적 문화, 주체적 정체성이 굳건하여 포용성이 클 때 가능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문화적 다원주의란 한 나라에서 일본법, 미국법, 사우디 아라비아의 법, 한국법을 모두 같이 유효한 것으로 고려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일본과 한국의 자동차는 운전 방향이 반대다. 길에서 자동차들이 정면충돌하고 서로가 옳다고 싸울 것이다

 

문화의 핵심적 기능이라고 말한 가치판단이 흐트러지면 공동체적 정체성이 달라진다.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생각하고 혈통적으로 완벽한 한국인이라도 그 머리에 들어 있는 가치관이 개척자 정신이고 사무라이 정신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한국사람이 아니다

 

그 가치관에 따르면 일본의 천황을 접견하는 일에는 황송해하고 우리나라 고궁자리를 밀어버리는 일에는 별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으며 일본식 문화상품을 들여와 일본문화 테마파크를 만드는 일에는 보람을 느끼지만 우리 고향산천을 훼손하고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영구히 파괴하는 것은 선을 위한 악의 제거,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발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사무라이 정신을 따르는 그의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주인과 손님을 구분할 능력이 안되면 다원주의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 결과는 여러 민족들, 여러 문화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심하면 내전을 하는 분쟁국가의 꼴이 될 뿐이다주인 없는 집에서 불편한 것은 주인이어야 할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난장판 속에서 손님도 불편하다. 이 집안의 법도가 어찌 되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개혁을 원할 때 우리는 종합적 생활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기존의 생활 패턴은 그대로 두고 자연을 보호하자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의 생활 패턴은 복잡한 문화적 구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기 위해 장조가 지은 <유몽영>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장조는 중국 청나라 초기의 사람으로 <유몽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살면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을 적어놓은 소품집이다.

 

태평한 세상을 만나 호수와 산이 있는 고장에 나서 관장은 청렴하면서 고요하고 집안 살림은 넉넉하며 아내는 현숙하고 자식은 총명하고 지혜롭다. 인생이 이와 같다면 온전한 복이라고 할 만하다.”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는 사람을 그윽하게 하며 국화는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은 사람을 담백하게 한다. 봄 해당화는 사람을 요염하게 하고 모란은 사람을 호방하게 하며, 파초와 대나무는 사람을 운치있게 하고 가을 해당화는 사람을 어여쁘게 한다. 소나무는 사람을 빼어나게 하고 오동은 사람을 해맑게 하며 버들은 사람에게 느낌을 갖게끔 한다.”

 

선비가 달밤에 달구경을 하면서 술을 한 잔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라. 집 앞에 심은 나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국화를 구경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동네의 동산에 올라 동내풍경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술 한 잔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지 않고 안주가 적다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은가? 이 선비는 마구 폭식하고 다이어트 하느라 고생할까? 동네의 터를 몽땅 헐어서 커다란 고층아파트로 동네를 다 채우자고 할까

 

내가 이런 예들을 들고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옛 생활태도를 찬양하기 위해서나 유럽이나 서양의 문화보다 동양의 문화가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아마도 서양의 시를 인용해서도 꼭같이 내가 원하는 것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환기시키고 싶은 명백한 사실은 어떤 가치는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생활의 변화에 의해서만 달성될수 있지 한 가지만 바꿔서 어떤 가치를 달성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자연보호를 하자고 백마디 천마디를 하며 사실을 나열하고 명분을 나열해 봐도 사실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 가치판단이 안 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다른 가치판단들과 종합적 결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꽃이 좋다는 것, 깨끗한 강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먹고사는 것은 안 중요한가?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사람들에게 납득될 때만 자연은 아름답게 보존될 수 있다. 사실과 논리로 가치판단을 바꾸는 것은 한계가 크고 본래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가치는 사실로부터 유추되지 않는다. 어떤 특정사안 하나만을 가지고 세상을 구분하고 개혁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은 되지도 않을 것이며 엉뚱한 결과를 낳아 결국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적 가치판단의 체계, 새로운 문화를 실험하고 실제로 구현하지 않고서 어떤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정도 나름이겠지만 무책임한 것이 될 수 있다잘 달리는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는 비행기보다 유용하다. 자신의 윤리적, 가치판단적 체계가 자신의 생활에서 어떻게 종합적인 영향을 발휘하는가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새로운 가치판단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 기계적 과학적 시각에 물든 사람들은 조화는 특히 잘 잊어버린다. 사물이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며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객관적 존재라는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부품은 하나만 갈아끼울 수 있다. 인간사회는 그렇지 않다. 이래서 종종 가장 냉철하고 엄밀한 논리적인 결론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이것은 특히 큰 문제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거론할 것이다.

 

맺는 말

 

문화의 원형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우리가 대개 성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예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는 훗날의 사람들이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문화의 원형들이다. 한국은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여러 가지 문화의 원형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통일성을 만들어낸 하나의 독립적 문화적 원형으로 한국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하나의 독립적 문화는 하나의 독립적 가치판단의 체계이며 이것이야말로 대안적 삶에 대한 답이다. 한국문화에 대한 인기가 어느정도 아시아권에 있을수 있는 이유는 부족한 대로 일본과 한국이 서구에 적응하고도 전통적 가치관을 지켜낸 대안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정치나 경제는 한국의 문화가 만들어 낸 토양에 달린 열매다. 상당 부분 전통 윤리의 장점에 따라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비약없이 즉 남의 것을 그냥 들여오는 일 없이 우리에게 맞게 계승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은 실질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중국에 흡수되어 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모든 가치판단을 남의 것에 기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종합적 삶의 관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통일성을 강조하고 비약의 어려움과 단순한 교잡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문화적 쇄국주의이며 보수주의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정당한 비판이다.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상식과 대중문화는 결국 도구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한국의 법체계나 일본의 법체계처럼 지역에 따라 다른 체계가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도로교통법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좋다. 자신의 정체성이 미약할 때 우리는 오히려 친구를 사귈 수 없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도피하게 된다. 세계인이 되려면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 사회의 정체성이 오히려 뚜렷해야 하고 그 기반으로 다른 문화, 관습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단순히 니꺼 내거 다 따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개방적인 것이 아니라 비극적 혼란을 방관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식과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가치판단이 우리가 내리는 개인적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상식과 대중문화에 대해 언급한 것들은 오히려 주로 그것을 넘어 서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가진 상식의 원천을 직시하고 우리가 대중문화에서 받은 영향을 이해함으로 해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가지 문화적 가치판단의 원형이 된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계시라도 받아서 무조건 뭐가 좋은지 나쁜지 아는 것일까?  우리는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가치판단을 넘어서 스스로는 어떻게 좋고 나쁜 것을 판단 할 수 있는 것일까. 가치 판단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주로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껏 그렇게 해왔듯이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시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첨부하며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사람들에게 다르샨을 주는 것이 싫다고 불평한다. 다르샨이란 힌두교의 전통으로 상스러운 신이나 사람, 물건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간디는 그의 얼굴을 보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보여주는 행사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따를만한 인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다는 것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사방에서 옳은 말들을 듣는다. 책이 많고 사람도 많고 인터넷이 있는 시대인 요즘 우리는 그 질을 따지지 않는다면 무수한 조언들을 들을 수 있다. 그 조언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안목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일관된 인격체로서 가치판단을 행하는 일일 것이다. 단순히 좋은 충고의 단순 집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존경할 만한 인격과 마주치고 그 전체를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장자에는 성인의 글을 성인의 찌꺼기라고 하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책에서 발견하는 동서양의 오래 된 위대한 인물보다 때로는 뒷집의 슈퍼 주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책에 남아 있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일부며 흔적이지만 동네의 슈퍼 주인 아저씨는 하나의 전체적 인격으로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람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직관적인 이해를 얻는 것이 지식과 논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지혜는 학력과는 무관하다는 말을 종종하는 것이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드러커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평생동안 만난 여러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가장 먼저 그의 할머니를 거론한다. 그리고 그의 할머니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는가를 말해주는 일화들을 나열한 후에 실은 그의 할머니는 지혜로웠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지식인은 아니었으나 직관적으로 항상 옳은 판단을 내려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데올로기나 경제학적 숫자놀음이나 허례허식에 놀아난 바보는 오히려 할머니보다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던 주변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피터드러커가 자서전의 첫머리에서 그녀를 언급한 것은 그녀가 그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와 많은 시간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격과의 깊은 접촉이 없이 피상적으로 교실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비디오 교재들로만 아이를 키워서는 안된다. 아이는 보고 배울 종합적 인격의 예를 가질 수가 없으므로 인격적 불안정성을 키우게 되는 것 같다. 지식만 있지 가치판단이 안 된다. 따라서 아이는 정해진 일과에서 벗어나서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에 부딛히면 공황상태로 빠져들어간다.

 

모범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아이의 인격적 모범이 반드시 부모일 필요는 없겠지만 부모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중요한 모범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해주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모가 사소한 일상을 같이 하면서 보다 완성된 인격을 보여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보통 후진적이라 생각하는 조선시대식의 교육이 어느 정도 현대교육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식을 배우는 데는 사람이 아니라 책이면 충분하고 비디오면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혜를 배우는 것, 즉 총체적 가치판단을 배우는 것은 먹고 자고 마시는 일상을 다 보고 겪는 것,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예절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간에 지켜지는 법도를 체험하는 것, 그런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학부모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가르키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지혜의 전수라는 게 가능할까? 어린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해야 하는 가장 큰 체험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선생님과의 교감이 아닐까? 물론 이 모든 것은 스승에게 배울 지혜가 있는 경우의 일이며 대중 교육의 상황에서 충분한 스승감을 구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아이만의 문제는 당연히 아닐것이다. 어론들도 인격적 스승이나 모범이 필요하다. 어른들은 물론 예수니 부처니 공자니 하는 과거의 성인들의 말을 묵상하고 되새기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모범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어른들도 계속 가치판단의 문제를 공부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멘토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멘토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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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계적 과학적 시각에 물든 사람들은 조화는 특히 잘 잊어버린다사물이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며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객관적 존재라는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자동차의 부품은 하나만 갈아끼울 수 있다인간사회는 그렇지 않다이래서 종종 가장 냉철하고 엄밀한 논리적인 결론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이것은 특히 큰 문제다그래서 나중에 다시 거론할 것이다.

 

맺는 말

 

문화의 원형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우리가 대개 성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다예를 들어 예수부처공자소크라테스는 훗날의 사람들이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문화의 원형들이다한국은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여러 가지 문화의 원형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통일성을 만들어낸 하나의 독립적 문화적 원형으로 한국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하나의 독립적 문화는 하나의 독립적 가치판단의 체계이며 이것이야말로 대안적 삶에 대한 답이다.한국문화에 대한 인기가 어느정도 아시아권에 있을수 있는 이유는 부족한 대로 일본과 한국이 서구에 적응하고도 전통적 가치관을 지켜낸 대안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거꾸로 말하면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정치나 경제는 한국의 문화가 만들어 낸 토양에 달린 열매다상당 부분 전통 윤리의 장점에 따라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비약없이 즉 남의 것을 그냥 들여오는 일 없이 우리에게 맞게 계승 발전시켜야만 한다그렇지 못하면 한국은 실질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중국에 흡수되어 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모든 가치판단을 남의 것에 기준하기 때문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종합적 삶의 관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통일성을 강조하고 비약의 어려움과 단순한 교잡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문화적 쇄국주의이며 보수주의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어느 정도는 정당한 비판이다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하나는 상식과 대중문화는 결국 도구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단지 한국의 법체계나 일본의 법체계처럼 지역에 따라 다른 체계가 있을 뿐이다한국에서는 한국의 도로교통법을 존중해야 한다그것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좋다자신의 정체성이 미약할 때 우리는 오히려 친구를 사귈 수 없다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도피하게 된다.세계인이 되려면 한국인의 정체성한국 사회의 정체성이 오히려 뚜렷해야 하고 그 기반으로 다른 문화관습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단순히 니꺼 내거 다 따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개방적인 것이 아니라 비극적 혼란을 방관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식과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가치판단이 우리가 내리는 개인적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내가 상식과 대중문화에 대해 언급한 것들은 오히려 주로 그것을 넘어 서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다자신이 가진 상식의 원천을 직시하고 우리가 대중문화에서 받은 영향을 이해함으로 해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가지 문화적 가치판단의 원형이 된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계시라도 받아서 무조건 뭐가 좋은지 나쁜지 아는 것일까 우리는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가치판단을 넘어서 스스로는 어떻게 좋고 나쁜 것을 판단 할 수 있는 것일까가치 판단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주로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따라서 이제껏 그렇게 해왔듯이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그리고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시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첨부하며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사람들에게 다르샨을 주는 것이 싫다고 불평한다다르샨이란 힌두교의 전통으로 상스러운 신이나 사람물건을 바라보는 행위이다간디는 그의 얼굴을 보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보여주는 행사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따를만한 인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다는 것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우리는 사방에서 옳은 말들을 듣는다책이 많고 사람도 많고 인터넷이 있는 시대인 요즘 우리는 그 질을 따지지 않는다면 무수한 조언들을 들을 수 있다그 조언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안목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일관된 인격체로서 가치판단을 행하는 일일 것이다단순히 좋은 충고의 단순 집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그러기 위해서 존경할 만한 인격과 마주치고 그 전체를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장자에는 성인의 글을 성인의 찌꺼기라고 하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책에서 발견하는 동서양의 오래 된 위대한 인물보다 때로는 뒷집의 슈퍼 주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책에 남아 있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일부며 흔적이지만 동네의 슈퍼 주인 아저씨는 하나의 전체적 인격으로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왜 사람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직관적인 이해를 얻는 것이 지식과 논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이 때문에 지혜는 학력과는 무관하다는 말을 종종하는 것이다.

 

경영학의 대가피터드러커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평생동안 만난 여러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가장 먼저 그의 할머니를 거론한다그리고 그의 할머니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는가를 말해주는 일화들을 나열한 후에 실은 그의 할머니는 지혜로웠던 것이라고 말한다그녀는 지식인은 아니었으나 직관적으로 항상 옳은 판단을 내려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데올로기나 경제학적 숫자놀음이나 허례허식에 놀아난 바보는 오히려 할머니보다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던 주변사람이었다는 것이다피터드러커가 자서전의 첫머리에서 그녀를 언급한 것은 그녀가 그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와 많은 시간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격과의 깊은 접촉이 없이 피상적으로 교실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비디오 교재들로만 아이를 키워서는 안된다아이는 보고 배울 종합적 인격의 예를 가질 수가 없으므로 인격적 불안정성을 키우게 되는 것 같다지식만 있지 가치판단이 안 된다따라서 아이는 정해진 일과에서 벗어나서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에 부딛히면 공황상태로 빠져들어간다.

 

모범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아이의 인격적 모범이 반드시 부모일 필요는 없겠지만 부모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중요한 모범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해주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모가 사소한 일상을 같이 하면서 보다 완성된 인격을 보여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보통 후진적이라 생각하는 조선시대식의 교육이 어느 정도 현대교육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지식을 배우는 데는 사람이 아니라 책이면 충분하고 비디오면 충분할지 모른다그러나 지혜를 배우는 것즉 총체적 가치판단을 배우는 것은 먹고 자고 마시는 일상을 다 보고 겪는 것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예절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간에 지켜지는 법도를 체험하는 것그런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학부모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가르키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지혜의 전수라는 게 가능할까어린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해야 하는 가장 큰 체험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선생님과의 교감이 아닐까물론 이 모든 것은 스승에게 배울 지혜가 있는 경우의 일이며 대중 교육의 상황에서 충분한 스승감을 구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아이만의 문제는 당연히 아닐것이다어론들도 인격적 스승이나 모범이 필요하다어른들은 물론 예수니 부처니 공자니 하는 과거의 성인들의 말을 묵상하고 되새기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모범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어른들도 계속 가치판단의 문제를 공부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소위 멘토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일 것이다우리가 멘토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