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통상 분할하여 정복한다 (divide and conquer)의 원칙을 따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해의 대상을 재창출하려고 한다. 즉 복잡한 것은 여러가지 부분으로 이뤄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어떤 기본적 구성요소로 이뤄져 있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구성요소의 성질을 이해하려고 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다시 재합성하여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을 재창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은 머리와 몸통 팔과 다리등으로 이뤄져 있다던가 세계는 주로 유라시아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랄리아 대륙 남극대륙등으로 이뤄져 있다던가 하는 식의 설명이 이것이며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원자론도 마찬가지다. 분할하여 정복한다라는 원칙이 극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대상은 기계다. 우리는 자동차를 부품으로 분류하고 각 부품의 역할과 성질을 이해함으로써 자동차라는 기계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생명체나 사회 같은 대상은 기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우리가 그것들을 어떤 기본적 구성요소들로 나누던간에 각자의 구성요소는 기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애매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각의 부분들의 관계는 이제 엄밀한 수학적 논리적 관계라기 보다는 확률적 관계를 가진다.

 

자동차에서 악셀을 밟으면 엔진은 출력을 증가시킨다. 즉 한쪽의 입력이나 상태에 대해 다른 쪽의 반응이나 출력은 정확한 대응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회사나 국가에서 혹은 인간의 몸에서 누군가가 어떤 명령을 발동시켰다고 해서 전체적인 반응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말을 들어도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그 말의 해석은 달라진다.

 

우리는 이같은 현실앞에서도 진정한 이해는 기계적인 이해밖에 없다는 신념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애매함이나 불확실성은 우리의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정보를 쌓고 기계적인 이해가 가능해지도록 계속 노력할 수 있다. 아직 답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과학적 접근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수수께기를 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은 존중할 만한 것이며 사실일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언제 그런 이해가 가능해 질것인가는 알수 없다. 게다가 그런 이해가 가능해지기 전에는 과학인 것같기도 하고 과학이 아닌 것같기도 한 것들이 우리를 잠식한다. 

 

신경과학의 역사에서 골상학은 종종 웃음거리로 기억된다. 두개골의 모양이 그 사람의 정신적 특성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한때 진지하게 과학으로 여겨졌다. 극도로 단순화하면 골상학같은 것은 내 친구중에 눈이 큰 놈들은 전부 사기꾼이더라는 관측결과에 따라 눈이 크면 사기꾼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연구는 물론 상관관계의 통계적 분석에 기반한다. 그 분석이 정확하냐 안하냐는 두번째 문제다. 골상학적 주장에 대해 진짜로 많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통계적으로 그 주장은 옳지않더라라고 반박하는 것은 전체 문제의 일부만 보는 것이다. 진짜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진지한 과학으로 여기는 주장들은 과연 그 본질에 있어서 골상학과 정말 다른가 하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더 좋은 통계에 근거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뇌과학도 그 본질은 대부분 통계적 상관관계의 연구다. 즉 당신이 섹스를 생각하면 대개의 경우 뇌의 어느 부분에 활동이 증가한다같은 이야기다. 뇌과학 교과서는 뇌의 기능이 어떻게 분류되며 뇌의 어느 부분이 어느 기능과 관련된다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같은 관찰은 물론 현실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외부조건에 달려있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인간이라도 방의 분위기에 따라 어제 겪었던 경험에 따라 내적인 반응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 심지어 뇌에 손상을 입은 인간은 뇌의 구조가 달라진다고 믿어진다.

 

나는 상관관계의 연구가 그 자체로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메뚜기수가 늘어나는 해에는 항상 가뭄이 든다라는 믿을 만한 통계가 있다면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바보다. 문제는 우리가 전체를 부분으로 분할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사실이 상관관계의 연구와 합쳐질 때 생긴다. 당신이 고장률이 10%인 부품 백개나 천개를 합치면 그렇게 만든 기계는 작동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왜냐면 언제나 몇개의 부품은 고장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관관계의 연구로 쌓은 지식이 분할하여 정복한다는 프로그램과 합쳐지면 하나 하나의 연구는 매우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그럴듯한 것같은데 현실적인 문제에는 항상 별로 효과가 발휘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합치는 부분이 그냥 전체를 한꺼번에 연구하는 것 이상으로 큰 불확실성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뇌과학을 경제학이나 역사처럼 우울한 학문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설명을 만들어 낼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제를 살리거나 역사를 만들어 내는 분야에 가면 갑자기 그런 학문들은 무능해진다. 물론 우리는 그런 학문의 본래 목적은 그런게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이해가 분할하여 정복한다는 프로그램과 기계적 논리적 이해일 때 이런 주장들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예측능력이 없는 이론은 매우 위험하거나 무의미하다. 잘못된 예측을 믿고 행동하게 하고 실은 모르는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안다는 착각은 새로운 증거를 무시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지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일찌기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현대의 복잡계 연구가들도 문제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다. 게다가 이런 지적이 모든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이 다 쓸모없다는 주장을 하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뇌과학분야에서 뇌를 논하는 방식은 우리가 자동차를 연구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짧게 말하면 나도 모른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다만 나는 재창출에서 대화로 관점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친구와 대화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친구와 부드러운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친구의 마음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통해서 친구의 언어를 해석해 내는 것이다.

 

그 모델은 과학과 다른 몇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확률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계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저러하게 내가 말하면 상대방이 이러저러하게 행동할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상당한 수준에서 확신을 할지는 몰라도 100% 확신할 수는 없다. 사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우리가 대화를 하는 근본 이유다. 우리는 토스터기나 티비와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할지 모르는 부분이 있기에 대화의 욕망이 생기고 대화가 필요하다.

 

두번째로 대화는 상호작용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나의 행동이 크고 적게 상대방을 바꾼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상호작용속에서 일종의 동적평형에 이르는 것에 대한 모델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점을 주가 예측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야기 해볼수 있다. 우리가 주가의 움직임에 대해 기계적 예측 프로그램을 가지고있다고 하자. 문제는 우리의 예측 프로그램이 과연 스스로를 그 예측안에 넣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내가 그 예측 프로그램을 가지고 주식을 사고 팔아도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그 예측 프로그램을 써도 주가는 예측대로 흘러가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모델은 소통의 방식에 대한 것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친절하게 친구로서의 신의를 지키면서 소통한다면 상대방의 심리는 이러저러한 영역안에 있을 것이다라는 식이다.

 

세번째로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모델은 반드시 상대방 마음의 재창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소통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서의 목적만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친구의 마음에 대한 모델이 진실과는 전혀 달라도 정해진 맥락에서 정해진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늘을 날고 싶은데 꼭 새의 생리학을 그대로 재창출하는 기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 하늘을 날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상호작용을 통해서 상대를 우리가 희망하는 수준으로 이해가능한 존재로 남아있게 하는 것을 대화라고 할 때 뇌나 경제나 사회를 연구할 방향은 이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학문이 달성하게 되는 것은 뇌의 재창출이 아니라 뇌와 소통하는 것이다. 사회나 경제의 원천적 재구성이 아니라 그것들과의 대화이며 개혁이다. 우리가 친한 친구를 가지게 되거나 사랑에 빠질때 우리는 서로를 잘 느끼고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행동을 쉽게 예측한다. 우리는 같은 것을 노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과학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입장을 바꿔야할 때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