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인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을 읽었다. 서구에서는 2004년에 그리고 한국에서는 2013년에 나온 이 책은 저자에게 러커토시상이라는 영예를 주기도 한 책이다. 



이 책은 6개의 장으로 되어져 있지만 후반부의 두장은 짧다. 5장은 앞에서 나온 내용을 종합하여 말하고 있고 6장은 상보적 과학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에 대한 내용이다. 앞의 4장은 바로 제목에 나온대로 온도계에 대한 여러가지 과학적 발전과 그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1장은 온도를 정하는데 있어서 고정점에 관련된 내용이고 2장은 온도를 어떻게 온도계를 구성하는 물질에 상관없이 측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며 3장은 온도가 일상적 경험의 영역을 넘는 고온와 저온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확장되어 측정되고 정의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4장은 관찰과 측정을 기준으로 해서 정의되었던 온도가 어떻게 추상적 이론의 형태로 정의되어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물질과는 동떨어진 실체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각각의 장은 역사와 분석의 부분으로 되어져 있어서 역사의 부분에서는 과학의 역사를 소개하고 분석은 주로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서 장하석이 보여주고자 하는 중심적 논지는 과학이 발전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방식은 인식적 반복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과학은 토대론적으로 발전하는게 아니라 정합론적으로 발전한다. 이 말의 뜻은 과학은 겉보기와는 달리 어떤 기초적 개념과 원리를 관찰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논리적으로 쌓아올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애매한 관념을 측정과 이론화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하고 그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지는 가운데 만들어 지는 것이다. 즉 그런 반복 과정의 결과 우리는 또렷하게 과학적 이론 혹은 과학적 양을 측정하고 정의하게 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므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예인 확률적 추측을 통해서 설명해 보겠다. 우리가 흐릿한 그림들을 계속 본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 그림속에서 사람의 얼굴같은 것을 어느 순간 발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사실이 단순히 거기에 사람의 얼굴이 있다라는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그림속에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것이 전혀 없으면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림속에 사람의 얼굴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있으면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더 쉽게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얼굴을 본다라는 사실은 감각데이터와 우리 마음속의 경험 혹은 얼굴을 보게 될 확률에 대한 믿음이 조합되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단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의 확률도 달라지게 되고 마음속의 확률이 달라지면 우리의 인식이 달라진다. 인식은 이렇게 경험과 관찰이 서로를 반복하며 수정하는 과정이다. 


장하석은 인식론적 반복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 말은 우리가 여러 그림들을 계속 보면서 인간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만들게 되고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일관성을 가지고 찾게 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걸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정합론이다. 


장하석은 이런 정합론이 단순한 상대주의는 아니라고 말한다. 즉 일관성을 가진 모든 시스템이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는 과학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식론적 반복을 거듭하면서 단순성이라던가 보편성같은 과학의 장점을 개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려고 하는 노력속에서 최선의 것을 찾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감각적 체험과 일관성을 가지므로 그냥 허구를 허공에서 만들어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사회적 소통속에서 이뤄지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사이비종교나 흑마술같은 것과는 다르다. 


과학이 이런 성질을 가졌다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것일텐데 그 이유는 지금 이순간에도 과학교과서들이나 논문들은 수학책처럼 토대론적으로 과학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기초적 토대들위에 새로운 과학적 설명을 쌓아올린 형태로 그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연구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설명들이 적어도 상당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연구의 첫번째 단계는 연구를 할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연구자는 단순히 주제를 설정하고 연구를 하는게 아니다. 연구와 주제설정은 혹은 주제에 등장하는 어떤 추상적 개념은 마치 인식론적 반복과 같은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구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연구의 대상 즉 측정대상이나 분석할 모델을 조금씩 바꾼다. 그렇게 해서 연구가 완결되면 우리는 이러저러한 연구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저러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토대론적으로 쭉 쓰는 것이다. 그래서 완결된 논문은 그 저자가 믿기 힘든 행운아거나 통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종종 저자가 이렇게 해보자고 하면 모든 것이 극명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연구자의 통찰력이외에도 시행착오의 결과를 가지고 성공한 것만 발표하는 것때문에 생기는 착시다. 


장하석은 온도라는 구체적 주제를 통해서 토대론적 과학발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이 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온도를 어떻게 잴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측정을 하고 그다음에는 온도가 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온도의 개념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운데 다시 측정이 이뤄진다. 궁극적으로 오늘날 처럼 온도개념이 또렷해지는것은 추상적인 모델을 통해서 물질의 차원을 떠난 시스템에서 온도개념을 논하고 그것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하학과 현실도형의 관계와 비슷하다. 현실세계에는 기하학에서 말하는 직선이나 삼각형 혹은 원이 없다. 그러나 아마도 현실경험에서 만들어 지기 시작했을 그런 도형의 개념은 추상적 수학적 개념으로 분명해지고 나서 다시 세상을 또렷하게 보이게 만든다. 기하학의 눈으로 보면 이제 세상은 도형들로 채워져 있다. 마찬가지로 카르노의 순환같은 추상적 개념위에서 이상기체를 논하고 그를 통해 온도를 정의하는 것은 언뜻보면 현실시스템을 논하는 것같지만 사실은 추상적 시스템을 현실에 연결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세상에는 기하학적 원이 없고 세상에는 이상기체가 없다. 


이러한 정합론에 대한 설명은 그런데 자연히 한가지 우려를 낳는다. 우리가 인식론적 반복을 통해서 어떤 과학이나 이론이나 개념에 수렴해 간다면 혹시 세상에는 한가지 이상의 수렴점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장하석이 쿤의 패러다임이론에서 이탈하는 지점은 여기다.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의 개념을 과학혁명의 논리에서 소개한 쿤은 과학은 어느 정도 현재의 정상과학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속에서 발전한다고 주장하고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른 패러다임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경쟁적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을 죽이기 때문이다.


장하석은 정상과학이 하나의 일관성있는 시스템으로 중심패러다임을 지키는 상황도 쿤이 말한 것처럼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전체 패러다임의 일부만을 알고 있거나 그 패러다임에서 말하는 개념들을 어떤 한계가 있는 해상도를 가지고 알고 있다. 그 예가 온도다. 우리는 온도를 물리적 실체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측정할 것인가를 세심히 고민하면 우리의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1기압에서 물이 끓는 온도가 100도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물은 조건에 따라 100도보다 빨리 끓기도 하고 나중에 끓기도 한다. 끓는다는 것이 얼마나 펄펄 끓는다는 것인지 애매하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통계적이다. 우리는 물질이 온도를 가진다는 것이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온도는 통계적 개념이므로 원자 한개의 온도가 얼마인가라고 물으면 그 답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말하는 온도와는 큰 차이가 있거나 온도가 의미를 잃는다. 


그러니까 지금이 특정한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도 그 세상은 그 세상의 정상과학이 그냥 믿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왜곡되고 흐릿한 해상도를 가지고 이해된 정상과학이 끊임없이 인식론적 반복에 의해서 다시 정상과학으로 재수렴하고 있는 동적인 상태다. 그런데 그러다가 재수렴이 실패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장하석은 책의 말미에서 상보적 과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상보적 과학이란 우리가 현재의 과학에 이르기 이전의 혼돈상황으로 고의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인식론적 반복을 시도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과학을 더 잘 이해하게 되거나 현재의 과학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을 장하석은 기대한다. 


온도계의 철학은 온도의 역사를 세세히 잘 쓴 책으로 논지가 분명하고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어렵게 읽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과거의 개념적인 혼란시대로 돌아가서 그것이 어떻게 현대의 온도로 수렴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상보적 과학이란 단순히 지금의 온도개념이 진리이니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아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경쟁적 이론들을 우리가 갈 수도 있었던 길들로 진지하게 여기면서 탐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어느 정도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고의로 탈출해야 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희극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길의 가능성을 위해서 일부러 연금술이나 흑마술사의 설명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틀리다고만 하지 말고 말이다. 이게 쉬울리가 없다.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은 장하석이 주장하는 상보적 과학의 접근이 과연 현실적인가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과학은 그 시대의 수많은 천재들이 진리를 찾기를 애쓰며 전투를 벌인결과 발전했다. 과학의 발전은 아인쉬타인과 뉴튼같은 천재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연구가 만들어 낸 우연에도 의지했다. 과연 우리 중 한두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서 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본다고 성과를 얻게 될 것인가? 


예를 들어 동양의 한의학은 서구 의학과 다르다. 오늘날 서구 의사가 한의학을 배워서 그것을 융합하는 단계에 있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의사와 수많은 한의사가 있는데도 진짜 융합의 단계에 이른 것같지는 않다. 그런데 과연 과거로 돌아가 과학을 살펴서 뭔가를 얻기 쉬울까? 


이 문제는 정말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장하석은 온도에 대한 과거의 시도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살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자체의 발전때 만큼 수많은 사람의 비판을 받으며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본인에게는 온도에 관련된 과거의 역사와 생각이 분명하게 인식될지라도 그것은 어느정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역사와 과학은 해상도가 다르달까. 장하석이 상보적 과학에서 이룩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사를 쓰는 것보다 좀 더 자세한 연구와 토의가 필요한 일인데 과연 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기획에 참여할까?


하지만 장하석의 결론 부분을 떼어내고 보아도 물론 이 책은 과학의 발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철학적 접근에 대해서 유익한 좋은 책이다. 그리고 쿤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그리고 내가 약간 비관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생각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학문의 세계는 한없이 넓어지고 있다. 이제 더이상 과학은 2-3백년전쯤에 그러했듯이 유럽의 몇몇 지성인들이 하는 클럽활동같은게 아니다. 엄청나게 많은 과학자들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이렇다고 할 때 과연 이런 시대에 정상과학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이걸 전부다 일관성이 있게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할 때 현대야 말로 장하석이 말하는 다원성이 과학에서 조차도 발현될 가능성이 커져가는 시대가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기적의 베터리를 만들거나 기적의 초전도체를 만드는 것이다. 왜 그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그 기적의 발명은 우리를 지배할지 모르고 먼 미래에 그런 발명은 사실상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알려질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과학커뮤니티가 너무 커져서 정상과학이 자기를 단속하는 능력이 한계를 보이지 않을까? 


아무쪼록 복잡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걸 잘넘겨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면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관심있는 부분이 컸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