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숙 <상상정원-푸른 눈>

문성준-

 

 

 

눈으로 그리는 이가 있고, 정동(情動, affect)으로 그리는 이가 있다. 우리의 학문은 전자를 재현(再現, representation), 후자를 표현(表現, expression)이라 나눈다. 하지만 학술적 구분이야 어떻든 예술가들에게는 양자 모두가 시선(世界觀, weltanschauung)이고, 시선은 그들의 이야기가 되어왔다. <상상정원>은 박계숙 작가의 푸른 눈이 하는 이야기이다.

 

푸른 눈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다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여야 하겠지만, 우리에겐 아직 그것을 이해시킬 만큼의 역사가 없다. 이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다. 여전히 예술이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시선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단언할 수 있는 명제는 그것이 주체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대상에 대한 언어는 오히려 주체에 관해 더 많은 말을 한다. 에밀 졸라(Emile Zola)척 클로스(Charles Thomas Close)는 그것을 피해 보려 했지만, 인간이 바벨탑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이었고, 그래서 언제나 실패했다.

 

박계숙 작가는 그들 같은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작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관람객이 당면한 오브제의 눈이다. 작가의 시선(weltanschauung)은 시선(view)이 된다. 동거-존재인 개와 상징-존재인 부엉이의 시선을 오브제로 택하여 자신의 눈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의 제목인 푸른 눈은 그 시선을 직접 드러내는 제목이다.

 

하지만, 모든 직접적 환영은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 푸른 눈(view)이 은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법, 곧 시선(weltanschauung)이다. 그 관계의 내밀함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붓끝을 보아야 한다. 화가의 붓끝은 언제나 내면의 구체이기 때문이다.

 

박계숙 작가는 유화로 수묵을 그린다. 서구 근대 회화의 대표적 유산인 유화와 아크릴을 사용하지만, 그의 작품은 오히려 초충도와 사군자를 닮아있다.

 

질감이 다른 유화나 아크릴로 수묵화를 그리는 것은 고된 일이다. 각 도구는 나름의 발전과 합리성을 구축하며 발전해 왔기 때문에 그 항상성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캔버스에는 먹이 스미기가 어렵듯,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작가가 굳이 이런 지난함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은폐-시선인 수묵적 시선을 잘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묵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서구-유화적 시각과는 달리, 동양-수묵적 시각은 대상과 접해있고, 내밀하게 관계하고, 그러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유화적 주체는 침범할 수 없는 개별적 주체로 화() 하여 객관성 속에서 영토를 구축하였다. 긴 시간 동안 세상(Res extensa)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타자를 보았을 때, 우리는(Res cogitnas)는 거기서 안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엔 감동도 없다. 가까이 가지 않으니 냄새도 없겠지만, 향기도 맡지 못하고, 만지질 않으니 불쾌하지도 않겠지만, 따스함도 없다.

그것이 정물(Still Life)이다. , 죽어서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의미처럼,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서구-유화적 세상이다.

 

Still Life

 

박계숙 작가는 예술가이고, 그러므로 그의 시선은 이와 조금 다르다. 그의 시선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 세계와 만난다. 사실 수묵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서구의 풍경이 관찰자적 시선이라면, 수묵의 풍경은 참여자적 시선이다. 그래서 세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예술은 르포르타주(reportage)가 아니다. 예술가는 객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말하는 존재다. 그것이 학문이 이르지 못한 곳에서의 예술의 역할이고, 작가의 시선은 그런 주관성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선은 정물과도 이야기한다. 정지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던 무정물이 그의 캔버스에서는 느물거린다. 정리 안 된 오브제, 중심 없는 화폭, 구분 없는 색채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주체에게 다가와, 말 그대로 능글맞게 말을 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도, 부엉이도, 정물도, 그의 작품에서는 타자가 아니라 타인(alter ego)이 되어 말을 건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과 부대끼는 동거 주체와 자신의 내밀을 드러내는 상징 주체를 오브제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주체가 말을 거는데, 그 말을 무시할 만한 무던함이 아마 작가에게는 없었을 테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그들의 시선이 있고, 말이 있고, 대화가 있고, 관계가 있고, 작가가 있다. 세상과 나름으로 관계하는 법을 익힌 작가와 세상의 대화가 그의 작품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작품은 구상이지만, 표현주의이기도 하다. 마치 나눔을 넘는 그의 작품처럼 말이다.

 

그렇듯 삶이란, 그리고 자신이란, 현실 너머에서 찾아지는 무엇-이데아가 아니라 존재가 세상과 맺는 관계의 특수한 형식이라고 작가의 눈이 말한다.

 

이번 전시는 그의 내밀한 대화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관람자인 우리가 나의 세상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