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중순.
       한경진은 오사카에 있었다.
       박억조와 함께 일본으로 온 한경진은 시즈요의 소개로 오사카
     지역 고무공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오사카 코베 나고야 이 세 지역이 하나의 띠로 연결되어
     공업지대를 있었다. 관서공업지역이다.
       한반도에 비해 장마전선이 빨리 찾아오는 일본은 4월이면 일부
     지역은 장마철에 들어선다.
       코베로 향하던 한경진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도돈보리에 있는 한 다방에 뛰어 들어 비를 피하고 있었다.
       커피를 시켜 한 모금 마시고 있는 한경진 앞에
        혹시 가와모토 준꼬 상이 신가요?
       다방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와모토 준꼬는 한경진의 창시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그렇습니다만
       한경진은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대는 아가씨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쪽 테이블에 계신 손님이 물어 봐 달라고 했습니다
       한경진이 아가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구석진 테이블에 샐러리맨 차림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청년을 확인하는 순간 한경진은 숨이 콱 막히는 충동을
     느꼈다.
       한경진을 확인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왔다.
        준꼬!
       남자가 낮게 불렀다.
        유지로 상.......?
       한경진이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을 확인하듯 중얼거렸다.
       청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경진에게는 첫 사랑의 남자고 소녀를 여인으로 만들어 준
     사까모토 유지로다.
       두 사람은 멍한 눈으로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의 패전 직후 시모노세끼 부두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5년만에 만나는 순간이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만나 보고싶다
       이것이 한경진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유지로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런 유지로를 지금 만났다.
       한경진은 유지로를 만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의외로
     담담한데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자기가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5년이라는 세월의 벽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자기 마음속에 새로이 자리 잡은 고진영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부근에 있는 한 작은 요릿집 방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준꼬 상이 북조선에 있는 줄 알았는데...부산에서
     공장사장이 되어 있다니....
        사장이라고 하지만 고용 사장이예요
        5년이라는 세월이 우리를 많이도 변하게 해 놓았군요
        유지로 상은?
        지난해에 결혼을 했지요. 준꼬 상은....?
        아직요. 하지만 어떤 분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몸이예요
       일본에서 어떤 분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말은 파트론이나
     내연의 관계에 있는 남자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한경진이 물었다.
        상사회사 샐러리맨이지요.
       상사회사란 종합상사를 뜻한다.
       사까모토가 명함을 꺼내 건너 주었다.
       도바시상사 해외영업과 과장 대리.
       이것이 명함에 적힌 사까모토 유지로의 직함이 였다.
        도바시 상사.........?
       명함을 본 한경진은 도바시라는 이름이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지요?
        도바시....라는....이름 어디서..듣던 기억이 나요
        우리 도바시 상사가 외국과 거래는 하지만 한국하고는 아직
     거래가 없는데.....
        회사가 아니라 도바시라는 이름예요
        우리 사장 성이 도바시지만 준꼬 상하고는 인연이 없을
     거예요. 준꼬 상은 종전 때에 일본에 있었지만 사장은
     상하이에서 종전을 맞은 분이지요
       상하이라는 말에 한경진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요. 상하이예요. 이제 생각났어요
        준꼬 상이 도바시 사장을 안다는 거요?
        아니예요. 내가 아니예요.
        그럼?
        도바시라는 분 종전 때 현역 육군대좌 아니었어요
        아니?. 준꼬 상이 그걸 어떻게?
        상하이 도바시 기관 책임자인 도바시 대좌를 어떻게 알지요?
       우지로의 눈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그래요. 그 도바시 대좌요.
        그런 도바시 사장을 준꼬 상이 어떻게?
       우지로가 같은 질문을 한다.
        나를 돌봐 주는 남자가 종전 때까지 도바시 상사에서
     근무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요
        지금 준꼬 상은 도바시 상사에 근무하던 사람이라고 했소?
       유지로가 놀라 묻는다.
        네
       한경진은 자기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상하이 도바시 상사에
     근무하던 사람이라는 말에 유지로가 왜 저토록 놀라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소?
        그래요. 그 사람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상하이 도바시 상사에 조선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유지로 상은 상하이 도바시 상사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요?
       한경진이 의아해 묻는다. 자기가 아는 우지로는 입대와 함께
     패전 때까지 계속 동경 육군성에서 근무했다.
        그때 준꼬 상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도 도바시 기관의
     멤버였소
        유지로 상은 도쿄의 육군성에 근무했잖아요
        내가 상학부 출신이라는 인연 때문에 육군성이 주관하는
     도바시 기관 멤버가 되었지요. 말하자면 도바시 상사의 본국
     관리자 같은 위치였소. 그래서 난 도바시 상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랬군요
        도바시 상사에는 한국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마끼야
     도시유끼 그건 창시개명한 이름이고 본명은 한정태였지요
        한정태요?
        그 사람이 당신이 돌보고 있을 줄이야
        아니예요. 나를 돌봐 주는 그 사람은 한정태가 아니예요. 난
     한정태라는 사람도 알아요
        준꼬 상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 도바시 기관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소. 도바시 기관에는 한국 사람이 한 사람 뿐이었소
        아니예요. 또 있어요. 한정태 씨와 같이 근무했다고 했어요.
       직책도 한정태씨 보다 높았다고 했어요. 이제 생각났어요.
     한정태 씨가 직속 계장으로 모시고 있던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유지로가 단정하듯 말했다.
        유지로 상은 그걸 어떻게 단정하지요?
        한정태 그러니까 마끼야가 소속되어 있던 부서는 도바시기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 였소. 멤버도
     소수정예였지요. 계장 이하 모두 다섯 사람의 활약은 지금도
     도바시 상사에서 화제가 되고 있지요. 계장은 하야마
     히데후미라는 상하이 대학을 나온 상하이 출신의 일본
     사람이었소.
        그럴 리가?
        그 사람의 일본식 이름이 뭐지요?
        그건 몰라요. 물어 보지 않았어요
        도바시 사장은 지금도 하야마의 행방불명을 아쉬워하고 있을
     만치 유능한 사람이 였던 모양이요
        도바시 상사는 혹시 옛날 멤버들이 그대로 모인 회사 아닌
     가요?
        여전히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군요. 종전 직후 모두가 파괴된
     일본에서는 직장을 구한다는 건 하나의 행운처럼 여겨졌지요.
     그때 도바시 대좌가 나서서 옛 멤버를 모아 우리끼리 힘을 합쳐
     살길을 찾아 보자고 설립한 회사가 지금의 도바시 상사요
        그럼 상하이에서 한정태 씨가 소속되어 있던 부서 멤버들도
     모두 모여 있나요
        한정태 그리고 하야마 계장만 빼고는 모두 모여 있지요
        명함을 보니 도바시 상사 본사가 오사카에 있는 것 같은데 그
     분들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나 게 해 주실 수 없겠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
        나에게 그 분 사진이 있어요. 확인하고 싶어요
        준꼬 상이 사진을 가지고 있어요?, 나도 확인하고 싶소. 지금
     우리 회사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