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연평도)]

하늘, 바다, 사람…백건우의 섬마을 콘서트

 

연평도 동행 취재기

 

 

지난 9월 17일(토), 저녁 6시 30분. 연평도 조기역사박물관 앞 야외무대에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등장했다. 소개하는 사회자도 없고 특별한 무대장치도 없다.

무대 위엔 슈타인웨이 피아노 한 대와 연주자 백건우 씨 혼자만 앉아 있다. 오늘의 관객은 연평도 주민들과 연평바다를 지키는 해병대 병사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찾아온 그의 팬들이다.

 

 

 

 

비가 오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구름 낀 하늘과 쌀쌀한 바닷바람 그리고 솟대장식을 배경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쇼팽의 <뱃노래>를 첫 곡으로 하여 리스트의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랑수아>, 드뷔시의 <기쁨의 섬>,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이 연평바다에 울려 퍼졌다.

 

백건우 씨의 손은 마치 연평주민의 마음을 달래는 듯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보듬었다. 때로는 격정적으로 쿵쾅거리다가 또 나직이 속삭이듯 내려앉는 그의 피아노 선율에 하늘의 갈매기와 바다의 물고기들도 함께 듣는 듯했다. 연주가 깊어지면서 하늘의 구름도 개고 있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앙코르를 외치기 시작했다. 평상시 앙코르 연주를 안 하기로 알려져 있기에 과연 앙코르곡을 해줄지 몰랐지만 사람들은 백건우의 연주를 더 듣고 싶어 했다. 무대 옆 대기실에 들어갔던 백건우 씨는 리스트의 <잊혀진 왈츠>로 환호에 답했다.

 

 

 

 

전날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취재 결정에 따라 새벽밥을 먹고 인천 연안부두로 향했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MBC제작팀의 강 부장을 찾으라는 발행인의 말만 믿고 연평도로 가는 것이다.

 

아침 8시 인천 연안부두. 다행히 표가 있었다. 연평도 가는 배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없다. 그런데 풍랑이 거세면 출항이 취소된단다. 다음날 못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의 여행은 ‘모험’이 될 것 같았다.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모든 걸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배에 올랐다.

 

연평도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경, 조기 철에는 고기잡이배가 하도 많아 정박한 배를 타고 넘어 건너편 섬에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설이 되어 버렸다.

지난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마을 곳곳에 상흔이 남아 있다. 해양경찰서 건물도 시커멓게 그을려 있고 그 옆에 건물은 완전히 부서져 있다.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다지만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선착장에서부터 마을 진입로 곳곳에 백건우 콘서트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백건우 씨의 콘서트가 연평도, 위도, 욕지도에서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뭔가 와 닿는 느낌이 있었다. 연평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섬으로 얼마 전 포격사건이 있었다. 위도는 1993년 292명의 생명을 앗아간 여객선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와 2003년 방폐장 유치문제로 갈등을 겪은 섬이다.

욕지도는 부인 윤정희 씨가 영화 <화려한 외출>을 촬영한 곳이다. 이번 콘서트는 부인과의 추억여행을 문화적으로 소외된 섬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백건우 씨는 콘서트가 있기 여러 달 전부터 커다란 한국지도를 연습실 벽에 붙여놓고 틈만 나면 지도를 들여다봤다고 한다.

세 섬을 최종 선택한 이도 백건우 씨.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봤던 바다와 바닷가 사람들을 잊지 못해서 섬마을 콘서트는 이루어진 것이다.

 

연주회장인 조기역사관을 찾은 시각은 오후 1시, 연평도 서북해안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조기역사관은 전망이 아주 좋았다. 입구에는 청사초롱이 걸려 있고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먼저 강 부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훨씬 우아한 모습의 여성이다. 소개를 하고 편의를 봐줄 것을 부탁했더니 친절하게 맞아준다. 마침 백건우 씨의 오전 연습이 끝나고 점심식사를 해야 하니 같이 가자고 한다.

백건우·윤정희 씨, 강 부장, 나 이렇게 넷이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그런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부인 윤정희 씨가 어제 먹은 간장게장이 탈이 낫는지 배가 아프다고 한다. 여기는 병원도 없다. 마침 내가 수지침을 배운 적이 있어서 수지침의 경혈자리를 중심으로 손을 마사지하자, 핏기 없던 손에 화색이 돌아온다. 그 사이에 강 부장은 보건소에 가서 약을 지어왔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백건우 씨도 안도의 숨을 쉰다. 그 와중에도 윤정희 씨가 한마디 한다. “식당에 가서 얘기하지 마세요.” 식당 주인이 미안해 할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백건우 씨가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한다. 바닷가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멋있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여러 장을 찍는다. 또 뻘에 세워둔 막대기를 보고 뭐냐고 주민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조수간만을 이용한 고기잡이 그물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궁금하면 못 참는 듯 신기한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를 않는다. 바닷가에는 죽은 꽃게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5시 30분, 이제 연주회장으로 올라갈 시간이 되었다. 윤정희 씨는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연주회에 늘 동행한다고 했다. 영화 <시>를 찍을 때도 계약서에 남편의 연주회가 있으면 촬영 스케줄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조항을 넣을 정도. 연주회 시간이 다가오자 조기역사관은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앞마당에 놓인 400여 석의 의자가 꽉 차고 주최 측에서 준비한 담요 500장도 동이 났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주변 높은 곳에 올라가 백건우 씨를 기다렸다.

 

연주회를 기다리는 동안 이 연주회는 그야말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식 연주회장도 아니고 클래식을 아는 청중도 아니다. 모든 게 변수일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올지, 바람이 거세게 불지, 북한의 포격이 또 있을지, 청중이 얼마나 올지, 피아노 소리가 제대로 들릴지, 무엇보다 청중들이 감동할지,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가운데서 백건우 씨는 섬마을 콘서트를 열기로 한 것이다.

 

내세운 조건은 단 하나,

“연주회가 끝나고 나면 마을주민들과 막걸리 파티를 하고 싶습니다.”

 

무대에 백건우 씨가 나타나자 청중들은 무대를 주목했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는 불과 1m, 바로 앞에서 세계적인 피아노의 거장 백건우 씨가 연평주민을 위해 연주를 하는 것이다.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팔순을 넘긴 노인까지 음악 앞에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 선율은 하늘과 바다와 사람을 휘저어놓았다. 그의 섬세한 피아노 손놀림은 빠르게 느리게 부드럽게 거칠게 건반을 쓰다듬었다. 그의 발도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음악이 흘러들어가자 연평도는 평화가 되었다.

 

앙코르곡인 <잊혀진 왈츠>가 끝나고 백건우 씨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사람들은 설레는 가슴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연평중학교의 한 여학생이 자기가 직접 만든 꽃다발이라며 종이로 만든 장미꽃다발을 선물했다.

 

연주회가 끝나고 연평부녀회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주민들과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상에는 조기매운탕, 꽃게튀김, 바지락전에 막걸리가 놓였다. 국회의원, 군장성, 군수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백건우·윤정희 씨 부부는 연평도 주민들과 얘기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사인 요청과 사진촬영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말했다.

 

“처음 하는 섬마을 콘서트라서 걱정했는데 사람들의 표정에서 감동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모험이었습니다.”

 

다음날 풍랑이 거세 여객선이 뜨지 못했다. 해경에선 백건우 씨를 위해 순시선을 보내주었다.

윤정희 씨는 돌아오는 배 안에서 여학생에게서 받은 종이꽃다발을 꼭 품고 있었다.

/ 서울

 

 

 

 

<파워인터뷰>

백건우 “섬마을콘서트, 아내 윤정희와의 꿈”

 

피아니스트 백건우

 

석양이 물들기 시작한 하늘과 짙푸른 바다, 활처럼 휘어진 해변을 배경 삼은 원형 무대에 검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서 있다. 숨을 멎게 할 듯 완벽한 구도에 귀를 간지럽히는 낮은 파도소리와 손가락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시원한 해풍까지 밀려온다. 순결한 오감이 원시인처럼 살아난다.

21일 오후 6시30분 전북 부안군 위도해수욕장에 마련된 피아니스트 백건우(65)씨의 섬마을 콘서트장. 객석은 채 정리되지 않았지만 검은색 일색의 백건우씨가 공연시간에 맞춰 등장했다.

인사말을 생략한 채 주민들을 향해 느리고 진지하게 고개를 숙인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바다와 하늘을 보다 쇼팽의 '뱃노래'를 연주했다. 거장의 피아노 선율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듯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계속 안부를 주고받았고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전화벨도 잊을 만하면 울려댔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20일 전북 부안군 위도해수욕장에서 ‘섬마을 콘서트’ 리허설을 진행하던 중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자신의 피아노 선율을 느끼려는 듯 구름으로 장관을 이룬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위도 = 신창섭기자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베네치아 곤돌라의 뱃사공처럼 한가롭고 유려하면서도 끈기 있게 주민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어진 리스트의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랑수아'. 그는 바다의 물결을 연속적으로 묘사한 트레몰로와 반복되는 저음부의 카리스마 넘치는 반주로 격랑을 만들어냈다.

감은 눈을 뜨면 쓰나미가 밀려들어 무대와 객석은 물론 위도 전체를 삼킬 것 같은 위압감을 느낄 때 쯤 객석의 소음도 신기하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드뷔시의 '기쁨의 섬'으로 주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리듬과 찬란하게 반짝이는 음색은 위도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는 듯했다.

마침 이날은 18년 전인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건으로 위도 앞바다에서 참사를 당한 292명에 대한 제삿날(음력 8월24일)이었다. 드디어 주민들과의 교감이 시작되고 석양의 잔영마저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베토벤의 소나타 '월광'으로 달을 불러냈다. 그제야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섬마을 주민들에게 그나마 가장 익숙한 '월광'을 굳이 마지막 순서로 내민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익숙한 곡조가 아니라 백건우의 살아 있는 연주로 소통하겠다는, 위험 부담이 있지만 진지한 시도. 그가 추구해온 음악세계의 한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로서 백건우와 소통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연주회를 하루 앞둔 20일 오후 그와 같은 배를 타고 위도로 들어갔고 무대준비와 리허설 내내 주변을 어슬렁거렸으며 저녁식사까지 함께 했지만 그는 가벼운 질문에도 말을 아꼈다. 연주회를 앞두고는 다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지 않는 그에게 인터뷰를 위해 2∼3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부인 윤정희(67)씨가 틈틈이 그의 음악과 일상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포기하고 돌아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국도변에서 이곳 특산물인 무화과를 샀다는 말에 관심을 보인 기억이 나 연주회 당일 아침식사를 하는 그에게 무화과를 디저트로 건넸다.

인터뷰 성사 여부를 떠나 그가 섬주민과 진지하게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독자들을 대신해 그와 소통하려는 '진정성'이라도 보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그는 윤정희씨가 식당 옆집 마당에 있는 무화과를 구경하러 간다면서 고마움을 표시했고 길지 않은 인터뷰 시간이 주어졌다.

위도해수욕장의 관리사무실에 마련된 연습실에서 '마음 바쁜' 인터뷰가 시작됐다(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질문을 기준으로 백건우씨와 윤정희씨의 답변을 재구성해 정리했다).

 

―어제부터 선생님과 함께 다니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음악가로서는 대단히 소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바로 백건우가 관객과 소통하려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식이라기보다 저는 늘 이런 걸 희망했고 예전부터 그러고 싶었습니다.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하려면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대일로, 인간 대 인간으로 가식 없이 소통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누구나 자기가 할 말이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이번에 섬마을콘서트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뭔가 하고 싶은 말, 전달할 메시지가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제가 직접 보고, 얘기를 듣고, 이해를 하고,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콘서트가 끝난 뒤에 뒤풀이를 통해 주민들과 직접 만나는 시간을 갖고 있고 앞으로도 가질 예정입니다."

 

그는 공연 전날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많은 주민을 만났다. 전교생이 24명인 위도초등학교 교장과 교감, 숙소로 삼은 펜션 주인, 위도 맥가이버로 불리는 위도초등학교 교직원 B(57)씨, 위도 유일의 공용버스 운전사. 그는 모두와 반갑게 악수하고 자리와 술잔을 권했다.

위도 맥가이버답게 요리사이자 가수이기도 한 B씨가 직접 떠온 생선회를 길가에서 꺾은 코스모스로 장식해 내놓을 때는 수차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어 B씨가 주변의 권유로 트로트 2곡을 구성지게 부른 뒤 직접 제작한 자신의 CD를 건넬 때 그의 소탈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CD를 받자마자 비닐포장을 뜯어낸 뒤 B씨에게 사인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와 인구 1300여명인 섬의 스타가수가 사인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이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섬'입니까.

 

(윤정희)"이 사람의 오래된 꿈입니다. 섬을 정말 좋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했습니다. 이번에 공연을 하게 된 3개의 섬 중 욕지도는 제가 1977년 김수용 감독님과 영화 '화려한 외출'을 찍은 곳입니다. 당시 이 사람과 결혼한 지 1년 되는 해였는데 직접 욕지도로 와서 촬영현장을 지켜보고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욕지도가 너무 아름다웠던 기억이 나서 선정했습니다.

연평도는 북한의 포격으로 아픔을 겪었다는 스토리를, 위도는 서해훼리호 참사 이야기를 듣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인 정현종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읊었듯이 그도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의 섬을 꿈꾸어왔던 것이다.

 

―세계적 명성을 떨친 국내 연주자 중 중소도시 등 지방연주를 한 것도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윤정희)"1990년대부터 중소도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당시로는 시설이 대단히 열악했습니다. 그랜드피아노를 갖춘 경우도 많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전주에 연주를 하러 갔는데 연주장이 아니라 영화관이었습니다. 영화 포스터 옆에 백건우 연주회 포스트가 붙어 있어 함께 웃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소도시에서 연주회를 하면 많은 어머니가 제 손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자기 딸이 피아노 공부를 하는데 공연을 보기 위해 대도시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다면서요."

 

―쇼팽보다 리스트를 더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백건우식 소통과 관련이 있습니까.

 

"쇼팽과 리스트는 서로의 세계가 다릅니다. 쇼팽은 내면세계를 꾸준히 추구한 반면 리스트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혀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시대를 대변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물론 회화, 문학, 철학, 종교 등 모든 면에서 굉장히 많은 연구를 하고 직접 그 분야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분의 그런 열린 마음이 마음에 듭니다."

 

―연평도 콘서트를 마친 뒤 '아름다운 모험'이었다고 표현하셨는데 모험이었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거뒀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럼요. 제가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을 이루고 또 여러 사람이 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은 연주자로서 정말 값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정희)연평도 공연이 끝나고 주민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클래식을 자주 접하던 분들이 아닌데도 그렇게 다들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1972년 라벨의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한 작곡가를 천착해 그 작곡가를 전인격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연주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연주는 백건우가 작곡가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특별히 드라마틱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생각하기에 한 작품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고, 더구나 한 작곡가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연주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작곡가가 어떤 곡을 썼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으며 일생을 통해 무엇을 추구했는지, 나아가 당시 어디서 영감을 받았고 음악세계를 이루는데 어떤 것들이 도움이 됐는지 연구함으로써 한 곡을 치더라도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해서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 같습니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평화의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북한의 포격에 피해를 본 연평도 공연 후에 특별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연평도를 제안했을 때 저는 대찬성이었습니다. 조그마한 마음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또 그렇게들 받아주시니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한 주민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슬픔의 섬이 기쁨의 섬이 됐다'고."

 

―연평도 연주 후에 '육지에는 군사분계선이 있지만 바다에는 선이 없다'는 말씀을 한 것으로 압니다.

 

"사실 (어디나) 선이 없는 것 아닙니까. 또 없어야 되고요. 그런 바람을 표현한 말입니다."

 

―처음 음악에 입문할 때는 최고의 난해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신동, 천재로 평가받으셨는데 이후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자기 길을 걸어오셔서 이젠 '음악의 구도자'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음악세계를 구축한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상에 피아니스트는 수없이 많습니다. 몇년이 지나면 중국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만 수백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피아니스트는 더 많아질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가 없는 피아니스트는 무의미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요즘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정보가 너무나 많이 쏟아지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그런 정보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만의 세계를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겁니다.

자기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 특히 창작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방황하다 철이 들어 음악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 동기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믿음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해도 지금까지 나온 위대한 연주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면 시작할 필요가 없었겠죠.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사람마다 서로 다르구나, 손 모양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르고 다들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구나, 그것을 살리면 나도 뭔가 보탬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열살에 국립교향악단과의 협연을 통해 데뷔한 그는 열다섯에 혼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 음악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집안은 넉넉지 않았고 조국인 대한민국도 당시는 든든한 배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화와 그림, 사진에 빠져서 피아노를 멀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천재성을 감안하면 젊은 시절 권위 있는 상을 휩쓰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저는 그런 것이 참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너도나도 빨리 성공하고, 빨리 돈 벌고, 빨리 이름을 알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니까. 그러나 그건 마치 파우스트가 자기 영혼을 팔아버리듯 (세속의) 흐름에 휘말리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화려할지는 모르지만 거짓된 삶입니다. 정말로 음악을 위해 태어났다면 갈 길이 아닙니다."

 

―평소 '음악은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음악은 연주자를 비추는 거울이다'는 말씀을 해왔습니다. 연주를 통해 비춰지는 인간 백건우는 어떤 모습입니까.

 

"내가 아무리 남의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결국은 자기를 그리는 것밖에 안됩니다. 우리가 신이 될 수 없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상대하고 인간에게 호소합니다. 바로 그것이 음악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섬에 살면서 처음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연주하는 곡이 독일의 어떤 작곡가의 곡이고 어떤 화음과 리듬을 사용했다고 설명하려 한다면 섬마을 주민들이 (제 연주를)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소리(음악)에 인간의 진실된 심정을 담는다면 누군들 이해를 못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음악이 갖는 힘이고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기자로서 이번 섬마을콘서트의 화두는 '소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소통장애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위도만 하더라도 방폐장 유치를 둘러싼 소통문제로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사실 트위트,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활발해지면서 오히려 진정한 소통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인터넷에만 의존하다 보니까 인간적인 대화가 끊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도 될 수 있으면 직접 만나서 대화하려고 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전화로라도 목소리를 들으려 합니다. 그냥 문자로 메시지를 남기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아직 인터넷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섬마을콘서트는 요즘 많이 시도되는 재능기부, 나눔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에서도 나눔 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기 자신의 행복보다는 남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맞는 말 같습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너무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리 개런티가 많아도 상업적 공연은 결코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타부부답게 한번쯤은 함께 광고에 나설 만도 한데 그런 기억도 없습니다. 부에 대해 특별한 철학이 있습니까.

 

(윤정희)"결혼생활 35년 동안 그이에게 최소한 수백건의 광고요청이 들어왔을 겁니다. 저와 함께 출연해달라는 요청도 많았고요. 그런데 단 한 건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음악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여기서 뭘 더 욕심을 내나'하는 입장이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부부는 인생관이 비슷합니다."

 

―딸이 한명 있는 것으로 압니다.

 

"파리에서 바이올린 연주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악하는 것을 강요한 적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재능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배려했을 뿐입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금실은…

젓갈 잔뜩 묻은 아내의 밥 반쯤 덜어다 뚝딱

 

 

▲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부인 윤정희씨가 21일 전북 부안군 위도해수욕장에서 ‘섬마을 콘서트’를 앞두고 해변을 산책하고 있다. 위도=신창섭기자

 

대식가로 알려진 백건우씨는 공연 전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밥을 다 먹자 윤정희씨의 밥을 반쯤 덜어다 먹었다. 섬주민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고 윤정희씨 밥에 젓갈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금실이 좋은 부부로도 유명합니다. 부부싸움은 하지 않습니까.

 

(윤정희)“견해차가 없다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성격상 오래 참지 못하고 곧바로 풀어버립니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서로 보완적입니다. 먹는 거, 여행하는 걸 둘 다 좋아합니다.

이 사람은 워낙 영화를 좋아해 하루에 최소한 1편을 봅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 나중에 영화감독을 할 거라고 해서 그럼 ‘바이바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저는 클래식 음악이 없으면 못 살죠.”

 

―파리에서는 같은 집에 30년째 사시고 명품 같은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으시고 굉장히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정희)“그이도 그렇지만 저도 카메라 앞에서 영화배우이지 평소에는 가정주부이고 형제간에는 장녀일 뿐입니다. 가정교육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어머님은 항상 겸손해야 하고 장녀로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걸 명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윤정희씨는 영화를 몇편 정도 하셨습니까.

 

“주인공으로만 300편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영화가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고 그래서 많은 영화를 찍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가 위도에 온다고 지인에게 우리를 챙겨줄 것을 부탁한 신성일씨와는 주인공으로만 99편을 찍었습니다. 100편을 채우려고 좋은 영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기록은 향후 수백년이 지나도 깨어지지 않을 세계적 기록이니까 100편을 찍고난 뒤 기네스기록에 등재하라’고 권유하자 말을 아끼던 백건우씨가 금실을 자랑이라도 하듯 “정말 대단한 기록입니다. 꼭 등재해야 합니다”라며 쌍지팡이를 들고 나섰다.

 

/ 문화일보 2011.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