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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第十四

 

 

074/2343

「太史公」曰 : 余讀《孟子》書, 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 未嘗不廢書而歎也. 曰 : 嗟乎, 利誠亂之始也! 夫子罕言利者, 常防其原也. 故曰“放於利而行, 多怨”. 自天子至於庶人, 好利之獘何以異哉!

「孟軻」, 「騶」人也. 受業「子思」之門人. 道旣通, 游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當是之時, 「秦」用「商君」, 富國彊兵 ; 「楚」·「魏」用「吳起」, 戰勝弱敵 ; 「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 而諸侯東面朝「齊」. 天下方務於合從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其後有「騶子」之屬.

 

 

太史公曰:

余讀孟子書,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未嘗不廢書而歎也。

曰:嗟乎,利誠亂之始也!夫子罕言利者,常防其原也。故曰「放於利而行,多怨」。

自天子至於庶人,好利之弊何以異哉!

태사공이 말한다.

" 내가 일찍이 맹자(孟子)를 읽을 때마다 양혜왕(梁惠王)이 '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아! 이로움이란 진실로 어지러운 것의 시작이구나! 무릇 공자(孔子)가 이로움에 대해 드물게 말한 것은 항상 그 근원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로운 것에 따라 행동하면 남의 원망을 많이 받는다.''라고 하였다.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로움을 좋아해서 생긴 병폐가 어찌 다르겠다고 하겠는가?"

 

 

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

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

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

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

맹가(孟軻)는 추(騶)나라 사람으로,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도(道)에 이미 통하여 제선왕(齊宣王)에게 유세했으나 선왕이 그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양(梁)나라에 갔으나 결국 맹가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던 양혜왕(梁惠王)은 그의 말은 현실과 거리가 멀어 당시의 사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의 정세는 진나라는 이미 상군(商君)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위(魏)와 초(楚) 두 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적군을 물리치고 적국을 약화시켰다.

또한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은 손빈(孫臏)과 전기(田忌)와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제후들로부터 조현을 받고 있었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에 온 힘을 쏟고 있었으며, 전쟁에 능한 것을 현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맹가는 요순(堯舜)과 삼대(三代)의 덕에 대해 말했음으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제후들의 뜻에 부합되지 않아 박대를 받았다.

그래서 유세하는 것을 그만 둔 맹가는 만장(萬章)의 무리들과 함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공자의 뜻을 전하려고 했다. 맹가는 모두 7편의 저서를 지었다. 그 뒤로 추(騶)의 무리들이 있었다.

 

 

 

074/2344

「齊」有三「騶子」. 其前「騶忌」, 以鼓琴干「威王」, 因及國政, 封爲「成侯」而受相印, 先「孟子」.

其次「騶衍」, 後「孟子」. 「騶衍」睹有國者益淫侈, 不能尙德, 若《大雅》整之於身, 施及黎庶矣. 乃深觀陰陽消息而作怪迂之變, 《終始》·《大聖》之篇十餘萬言. 其語閎大不經, 必先驗小物, 推而大之, 至於無垠. 先序今以上至「黃帝」, 學者所共術, 大並世盛衰, 因載其禨祥度制, 推而遠之, 至天地未生, 窈冥不可考而原也. 先列中國名山大川, 通谷禽獸, 水土所殖, 物類所珍, 因而推之, 及海外人之所不能睹. 稱引天地剖判以來, 五德轉移, 治各有宜, 而符應若玆. 以爲儒者所謂中國者, 於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 中國名曰「赤縣神州」. 「赤縣神州」內自有九州, 禹之序九州是也, 不得爲州數. 中國外如「赤縣神州」者九, 乃所謂九州也. 於是有裨海環之, 人民禽獸莫能相通者, 如一區中者, 乃爲一州. 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天地之際焉. 其術皆此類也. 然要其歸, 必止乎仁義節儉, 君臣上下六親之施, 始也濫耳. 王公大人初見其術, 懼然顧化, 其後不能行之.

 

 

齊有三騶子。其前騶忌,

以鼓琴幹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제나라에는 세 명의 추자(騶子)가 있다. 맨 먼저 사람은 추기(騶忌)다.

제위왕(齊威王)에게 거문고에 빗대어 간언을 올려 국정에 참가하게 된 그는 성후(成侯)에 봉해지고 상국(相國)의 인장을 받았다.

 

其次騶衍,後孟子。騶衍睹有國者益淫侈,不能尚德,若大雅整之於身,施及黎庶矣。

乃深觀陰陽消息而作怪迂之變,終始、大聖之篇十餘萬言。

其語閎大不經,必先驗小物,推而大之,至於無垠。

先序今以上至黃帝,學者所共術,大並世盛衰,

因載其禨祥度制,推而遠之,至天地未生,窈冥不可考而原也。

先列中國名山大川,通穀禽獸,水土所殖,物類所珍,因而推之,及海外人之所不能睹。

稱引天地剖判以來,五德轉移,治各有宜,而符應若茲。

以為儒者所謂中國者,於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中國名曰赤縣神州。

赤縣神州內自有九州,禹之序九州是也,不得為州數。

 

그 다음은 추연(騶衍)으로 맹자보다 후대 사람이다. 나라를 가진 자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음란하고 사치해지는 것을 목도한 추연은 그들에게서는 결코 도덕이 숭상될 수 없음을 알고,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에서 말한 것처럼 먼저 자신의 몸가짐을 단정하게 추스른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덕이 밑의 백성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음양의 소멸과 성장을 깊이 관찰하고, 황당무계하고 현실과 거리가 먼 변화와 환상의 일을 주제로 종시(終始), 대성(大聖) 편 등 10여 만 자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그 말들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종잡을 수 없으나, 먼저 작은 사물을 검증하고 난 후에 그것을 근거로 추론하여 큰 것에 적용해 나가 결국 무한한 곳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우선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먼 상고시대의 황제(黃帝)까지 서술했는데 이는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것으로 대체로 시대의 흥함과 쇠함을 따랐다.

또한 신에게 길흉화복을 구하는 제도를 기재한 후에 그것을 근거로 짐작하여 먼 곳까지 이르렀는데, 천지가 생기기 전의 아련하게 깊고 먼 신비한 세상을 생각하여 그 시초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먼저 중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 심산계곡에 살고 있는 날짐승과 들짐승, 수중이나 뭍에서 번식하는 각종 생물, 그리고 온갖 종류의 진기한 물건들을 서술하고 그것들로 다른 것을 유추하여 사람들이 결코 볼 수 없는 요원한 이역(異域)의 산물까지 논했다.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 오행(五行)이 상생상극(相生相克)하고 순환왕복(循環往復)하여 시대는 저마다 오행에 상응하는 정치제도를 취하고 천명(天命)과 인사(人事)가 상호 감응했음을 밝혔다.

유가에서 말하는 중국은, 천하를 81개로 나누었을 때 단지 그 한 부분만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여긴 추연은 해당하는 이름은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지었다.

적현신주 안에는 9개의 주(州)가 있는데 하우(夏禹)가 정리한 9주(九州)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는 대주(大州)와 같이 논할만한 것이 못 된다

 

中國外如赤縣神州者九,乃所謂九州也。於是有裨海環之,人民禽獸莫能相通者,如一區中者,乃為一州。

如此者九,乃有大瀛海環其外,天地之際焉。其術皆此類也。

然要其歸,必止乎仁義節儉,君臣上下六親之施,始也濫耳。王公大人初見其術,懼然顧化,其後不能行之。

 

중국 이외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대주가 9개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9개의 대주(大州)다. 각각의 대주는 작은 바다가 두르고 있는데, 각 주에 사는 백성들과 짐승들은 서로 통하지 않고 각각의 대주는 중국과 같이 9개의 주(州)로 나뉘고 그 한 구역 안에 있는 것을 1주(一州)라고 했다.

9개의 대주로 이루어진 세상은 큰 바다가 그 밖을 두르고 있는데, 그것이 하늘과 땅의 끝이다. 추연이 기술한 학설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요점은 반드시 인의와 절약, 근검 그리고 군신, 상하, 육친(六親) 사이의 일에 귀착되는데, 그 처음은 넘쳐흐른다.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들이 그의 학설을 처음 들으면 깜짝 놀라 그의 설에 감화되지만, 그러나 후에는 결코 실행할 수 없었다.

 

 

074/2345

是以「騶子」重於「齊」. 適「梁」, 「惠王」郊迎, 執賓主之禮. 適「趙」, 「平原君」側行撇席. 如「燕」, 「昭王」擁彗先驅, 請列弟子之座而受業, 築「碣石宮」, 身親往師之. 作《主運》. 其游諸侯見尊禮如此, 豈與「仲尼」菜色「陳」「蔡」, 「孟軻」困於「齊」「梁」同乎哉! 故「武王」以仁義伐「紂」而王, 「伯夷」餓不食「周」粟 ; 「衛」「靈公」問陳, 而「孔子」不答 ; 「梁」「惠王」謀欲攻「趙」, 「孟軻」稱「大王」去「邠」. 此豈有意阿世俗苟合而已哉! 持方柄欲內圜鑿, 其能入乎? 或曰, 「伊尹」負鼎而勉「湯」以王, 「百里奚」飯牛車下而「繆公」用霸, 作先合, 然後引之大道. 「騶衍」其言雖不軌, 儻亦有牛鼎之意乎?

 

是以騶子重於齊。適梁,惠王郊迎,執賓主之禮。

適趙,平原君側行撇席。

如燕,昭王擁彗先驅,請列弟子之座而受業,築碣石宮,身親往師之。作主運。

其游諸侯見尊禮如此,豈與仲尼菜色陳蔡,孟軻困於齊梁同乎哉!

故武王以仁義伐紂而王,伯夷餓不食周粟;

衛靈公問陳,而孔子不答;

梁惠王謀欲攻趙,孟軻稱大王去邠。

此豈有意阿世俗苟合而已哉!持方枘欲內圜鑿,其能入乎?

或曰,伊尹負鼎而勉湯以王,百里奚飯牛車下而繆公用霸,作先合,然後引之大道。

騶衍其言雖不軌,儻亦有牛鼎之意乎?

이것으로 추연은 제(齊)나라에서 존중함을 받게 되었다. 그가 양나라에 갔을 때, 양혜왕이 교외에까지 나와 영접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로써 대우했다.

그리고 조(趙)나라에 갔을 때 평원군(平原君)은 옆으로 걸어가면서 옷자락이 자리를 쓸 정도로 경의를 표시하였다.

연(燕)나라에 가니 소왕(昭王)이 빗자루를 가지고 길을 쓸면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제자의 신분으로 자리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더니 결국 갈석궁(碣石宮)을 건축하여 그를 머무르게 하면서 몸소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이때 '주운(主運)'을 저술했다.

그가 천하를 유세하려 다닐 때 제후들에게 받은 존경과 예우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옛날 공자가 진채(陳蔡) 지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맹자가 제량(齊梁) 지간에서 당한 곤궁한 처지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주무왕이 인의로써 은주(殷紂)를 정벌하여 천자가 되었으나, 이를 반대한 백이(伯夷)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고,

위영공(衛靈公)이 진법에 대해 묻자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으며,

양혜왕이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그 계책을 묻자 맹자는 옛날 주나라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난 것을 칭송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러한 일들이 어찌 세속에 아첨하며 구차하게 다른 사람의 뜻에 영합하려고 해서였겠는가? 네모난 장부를 둥근 구멍에 넣으려고 하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윤(伊尹)이 솥을 짊어지고 탕(湯)임금을 격려하여 왕이 되도록 했으며, 백리해(百里奚)는 수레 아래에서 소를 먹이다가 진목공(秦穆公)에게 등용되어 그를 패자로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먼저 상대방의 뜻에 영합한 이후에 그를 대도(大道)로 인도한 것이라고 했다.

추연의 말은 비록 일반적인 상궤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품고 있는 뜻 역시 백리해가 소를 먹인 것이나 이윤이 솥을 짊어진 것과 같지 않았겠는가!

 

074/2346

自「騶衍」與「齊」之「稷下」先生, 如「淳于髡」·「愼到」·「環淵」·「接子」·「田騈」·「騶奭」之徒, 各著書言治亂之事, 以干世主, 豈可勝道哉!

 

自騶衍與齊之稷下先生,如淳於髡、慎到、環淵、接子、田駢、騶奭之徒,各著書言治亂之事,以幹世主,豈可勝道哉!

 

추연을 비롯하여 제나라의 직하(稷下)에 모여 살았던 학자들, 즉 순우곤(淳于髡) 신도(愼到), 환연(環淵), 접자(接子), 전병(田騈), 추석(騶奭)과 같은 무리가 각자 글을 지어 혼란한 세상을 다스리는 일들을 논술하여 이로써 당시의 군주들에게 읽혀지기를 간구하였으니, 그것들을 어찌 이루 다 언급할 수 있겠는가?

 

 

074/2347

「淳于髡」, 「齊」人也. 博聞彊記, 學無所主. 其諫說, 慕「晏嬰」之爲人也, 然而承意觀色爲務. 客有見「髡」於「梁」「惠王」, 「惠王」屛左右, 獨坐而再見之, 終無言也. 「惠王」怪之, 以讓客曰 : “子之稱「淳于先生」, 「管」·「晏」不及, 及見寡人, 寡人未有得也. 豈寡人不足爲言邪? 何故哉?” 客以謂「髡」. 「髡」曰 : “固也. 吾前見王, 王志在驅逐 ; 後復見王, 王志在音聲 : 吾是以黙然.” 客具以報王, 王大駭, 曰 : “嗟乎. 「淳于先生」誠聖人也! 前「淳于先生」之來, 人有獻善馬者, 寡人未及視, 會先生至. 後先生之來, 人有獻謳者, 未及試, 亦會先生來. 寡人雖屛人, 然私心在彼, 有之.” 後「淳于髡」見, 壹語連三日三夜無倦. 「惠王」欲以卿相位待之, 「髡」因謝去. 於是送以安車駕駟, 束帛加璧, 黃金百鎰. 終身不仕.

「愼到」, 「趙」人. 「田騈」·「接子」, 「齊」人. 「環淵」, 「楚」人. 皆學「黃」「老」道德之術, 因發明序其指意. 故「愼到」著十二論, 「環淵」著上下篇, 而「田騈」·「接子」皆有所論焉.

「騶奭」者, 「齊」諸「騶子」, 亦頗采「騶衍」之術以紀文.

於是「齊王」嘉之, 自如「淳于髡」以下, 皆命曰列大夫, 爲開第康莊之衢, 高門大屋, 尊寵之. 覽天下諸侯賓客, 言「齊」能致天下賢士也.

 

 

淳于髡,齊人也。博聞彊記,學無所主。其諫說,慕晏嬰之為人也,然而承意觀色為務。

客有見髡於梁惠王,惠王屏左右,獨坐而再見之,終無言也。惠王怪之,以讓客曰:

「子之稱淳于先生,管、晏不及,及見寡人,寡人未有得也。豈寡人不足為言邪?何故哉?」

客以謂髡。髡曰:「固也。吾前見王,王志在驅逐;後複見王,王志在音聲:吾是以默然。」

客具以報王,王大駭,曰:

「嗟乎,淳于先生誠聖人也!前淳于先生之來,人有獻善馬者,寡人未及視,會先生至。後先生之來,人有獻謳者,未及試,亦會先生來。寡人雖屏人,然私心在彼,有之。」

後淳於髡見,壹語連三日三夜無倦。惠王欲以卿相位待之,髡因謝去。

於是送以安車駕駟,束帛加璧,黃金槽鎰。終身不仕。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학문에 주된 견해가 없었다. 그의 풍간(風諫)과 유세는 안영(晏嬰)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뜻을 이어받고 안색을 살피는 데에만 힘썼다.

어느 식객이 순우곤에게 양혜왕의 접견을 주선해주었다. 혜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앉아 두 번이나 그를 보았지만 순우곤은 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혜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소개한 식객을 꾸짖으며 말했다.

 

" 그대가 순우곤 선생은 관중(管仲)과 안영도 미치지 못한다고 칭찬하여 과인이 그의 접견을 허락했지만 그에게서 얻은 것이 없었다. 그를 상대하여 말하기에 과인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인가?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식객이 혜왕의 말을 전하자 순우곤이 설명했다.

"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전에 왕을 뵈었을 때 왕의 뜻은 달리는 말에 있었습니다. 뒤에 다시 왕을 뵈오니 왕의 뜻은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제가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식객이 왕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하자 혜왕이 매우 놀라 말했다.

" 아! 진실로 순우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로다! 전에 순우곤 선생이 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바쳤는데, 마침 과인이 그 말을 보기도 전에 선생이 도착했소. 뒤에 다시 선생이 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노래 잘하는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마침 그를 시험해보기도 전에 역시 선생이 도착했었소. 과인이 비록 사람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그것들에 있었으니, 바로 그런 일로 인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소. "

 

뒤에 순우곤이 왕을 뵙고 한 번 이야기하니 3일 밤낮을 계속해도 혜왕은 결코 싫어하거나 피곤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혜왕이 경상(卿相) 지위로 그를 대우하려고 하였으나 순우곤은 사양하고 물러갔다.

그래서 순우곤을 혜왕이 전송하면서 4마리의 말이 끄는, 호화로운 휘장이 쳐진 수레에 그를 태우고 비단과 벽옥 및 황금 100일(鎰)을 하사했다. 순우곤은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慎到,趙人。田駢、接子,齊人。環淵,楚人。

皆學黃老道德之術,因發明序其指意。故慎到著十二論,環淵著上下篇,而田駢、接子皆有所論焉。


신도는 제나라 사람이고 전병, 접자는 제나라 사람이다.

환연(環淵)은 초나라 사람이다. 모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도덕에 관한 학술을 배워 그 뜻을 발휘하고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래서 신도가 12편의 이론을 저술하고, 환연이 상, 하 편을 저술하였으며, 전병과 접자도 각각 저술한 바가 있었다.

 

騶奭者,齊諸騶子,亦頗采騶衍之術以紀文。

추석은 제나라의 여러 추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역시 비교적 많은 부분에서 추연의 학설을 채택하여 글을 지었다.

 

於是齊王嘉之,自如淳於髡以下,皆命曰列大夫,為開第康莊之衢,高門大屋,尊寵之。

覽天下諸侯賓客,言齊能致天下賢士也。

제나라 왕이 좋아하여 순우곤으로부터 그 이하 여러 학자들을 다 열대부(列大夫)라는 작위를 내리고, 그들을 위하여 번화한 거리에 저택을 짓고 높은 문과 커다란 집에 살게 하면서 그들을 존경하고 총애했다.

그리고는 이러한 일들을 천하의 제후들과 빈객들에게 보여서 제나라는 천하의 현능한 선비들을 초빙해서 높이 받들고 있다고 말하게 했다.

 

 

 

074/2348

「荀卿」, 「趙」人. 年五十始來游學於「齊」. 「騶衍」之術迂大而閎辯 ; 「奭」也文具難施 ; 「淳于髡」久與處, 時有得善言. 故「齊」人頌曰 : “談天「衍」, 雕龍「奭」, 炙轂過「髡」.” 「田騈」之屬皆已死「齊」「襄王」時, 而「荀卿」最爲老師. 「齊」尙脩列大夫之缺, 而「荀卿」三爲祭酒焉. 「齊」人或讒「荀卿」, 「荀卿」乃適「楚」, 而「春申君」以爲「蘭陵」令. 「春申君」死而「荀卿」廢, 因家「蘭陵」. 「李斯」嘗爲弟子, 已而相「秦」. 「荀卿」嫉濁世之政, 亡國亂君相屬, 不遂大道而營於巫祝, 信禨祥, 鄙儒小拘, 如「莊周」等又猾稽亂俗, 於是推「儒」·「墨」·道德之行事興壞, 序列著數萬言而卒. 因葬「蘭陵」.

 

荀卿,趙人。年五十始來遊學於齊。騶衍之術迂大而閎辯;

奭也文具難施;淳於髡久與處,時有得善言。故齊人頌曰:

「談天衍,雕龍奭,炙轂過髡。」

田駢之屬皆已死齊襄王時,而荀卿最為老師。

齊尚脩列大夫之缺,而荀卿三為祭酒焉。齊人或讒荀卿,荀卿乃適楚,而春申君以為蘭陵令。

春申君死而荀卿廢,因家蘭陵。

 

순경(荀卿)은 조나라 사람이다. 그의 나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와서 학설을 유세했다. 추연의 학술은 굽고 크게 과장되어 웅변적이었다.

추석 역시 문장은 좋으나 시행되기가 어려웠다. 순우곤과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때때로 유익한 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나라 사람들이 세 사람을 각각 칭송하여 말했다.

 

" 하늘을 말하는 자는 추연이고, 문장에 용을 새기는 자는 추석이며, 지혜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사람은 순우곤이다."

 

제양왕(齊襄王) 때에 이르자 전병과 그 무리들은 모두 죽고 순경이 가장 지위가 높은 스승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여전히 열대부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였는데, 순경은 3차례나 직하의 좨주(祭酒)가 되었다. 어떤 제나라 사람의 모함을 받은 순경이 초나라로 가자 춘신군(春申君)은 그를 난릉령(蘭陵令)으로 삼았다.

춘신군이 죽자 순경의 관직은 면직되었으나 그는 계속 난릉에 머물러 살았다.

 

 

李斯嘗為弟子,已而相秦。

荀卿嫉濁世之政,亡國亂君相屬,不遂大道而營於巫祝,信禨祥,鄙儒小拘,

如莊周等又猾稽亂俗,於是推儒、墨、道德之行事興壞,序列著數萬言而卒。因葬蘭陵。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던 이사(李斯)는 후에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세상에 혼탁한 정치가 행해지는 것과, 나라를 망치는 혼미한 군주가 계속 왕위에 올라 대도를 따르지 않고 무당의 기원(祈願)에 미혹되고 길흉의 징조를 믿는 것과, 저속한 유자들이 작은 일에 연연해하는 것과,

더불어 장주(莊周)와 같은 무리들이 언변에 능하여 세속을 어지럽히는 것 등을 싫어한 순경은 유가, 묵가, 도가(道家)가 행한 성취와 실패를 고찰한 후 그것들을 차례로 정리하여 수만 자의 글자로 된 저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는 난릉에 묻혔다.

 

 

074/2349

而「趙」亦有「公孫龍」爲堅白同異之辯, 「劇子」之言 ; 「魏」有「李悝」, 盡地力之敎 ; 「楚」有「尸子」·「長盧」 ; 「阿」之「吁子」焉. 自如「孟子」至于「吁子」, 世多有其書, 故不論其傳云.

蓋「墨翟」, 「宋」之大夫, 善守禦, 爲節用. 或曰並「孔子」時, 或曰在其後.

 

 

而趙亦有公孫龍為堅白同異之辯,劇子之言;

魏有李悝,盡地力之教;

楚有屍子、長盧;阿之籲子焉。

自如孟子至於籲子,世多有其書,故不論其傳雲。

조나라에는 공손룡(公孫龍)이 있었는데 그는 견백동이(堅白同異)의 궤변을 제기했다. 또 언설에 능한 극자(劇子)가 있었다.

위(魏)나라의 이회(李悝)는 진지력지교(盡地力之敎)를 주장했는데 땅의 힘을 잘 이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설이다.

초나라에는 시자(尸子), 장로(長盧)가 있었고, 제나라의 아읍(阿邑)에는 우영(吁嬰)이 있었다.

맹자로부터 우영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그들의 많은 저술이 알려졌다. 그런 까닭에 그 내용을 논하지는 않겠다.

 


蓋墨翟,宋之大夫,善守禦,為節用。

或曰並孔子時,或曰在其後。


묵적(墨翟)은 송(宋)나라의 대부로서 수성(守成)과 방어의 전술에 능하였으며 근검절약할 것을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공자(孔子)와 같은 때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보다 뒤에 살았던 사람이라고도 했다.

 


六國之末,戰勝相雄。軻游齊、魏,其說不通。退而著述,稱吾道窮。蘭陵事楚,騶衍談空。康莊雖列,莫見收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