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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哲學會

 

니체의 ‘힘에의 의지’: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을 넘어서

손경민

 

 

요 약 문

 

니체의 자유의지론 비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는 결정론, 운명론,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의 옹호자로 종종 오해된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의지론도 결정론도 옹호하지 않으며,그 이분법적 극단을 넘어 생리-심리학에 근거한 ‘힘에의 의지’라는 제3의 영토를 그려 보여준다.
니체는 자유의지론에 담긴 권력의지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자유의지 개념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또한 그는 인간의 부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결정론을 자연과학적, 도덕적 심급에서 각각 비판하여 그것이 결국 숙명론으로 연결되는 약자의 도덕이자 데카당 도덕임을 드러낸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서의 이 세계의 유물론적인 메커니즘을 간파한다. 그러나 그것이 법칙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법칙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 체계를 자연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며, 필연적 법칙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관념을 부정한다. 따라서 니체가 바라본 힘에의 의지로서의 이 세계는 어떠한 통일적인 법칙도 없이 다양한 힘에의 의지들이 전개되고 분화되어 나가는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일 뿐이다. 창조란 바로 이러한 철학적 관점의 토대 위에서 가능해 진다.

 

※ 주요어: 힘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 자유의지론(the theory of free will), 결정론(determinism), 운명론(fatalism), 생리-심리학(physio-psychology).

 

 

1. 머리말

 

니체가 자유의지론을 비판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 때문에 니체가 결정론과 운명론 또는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의 옹호자로 종종 오해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의지론도 결정론도 옹호하지 않고, 그 이분법적인 극단을 넘어서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지식과 물적 현실 사이의 상관적(相關的)인 역학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니체 철학은 ‘생리-심리학(Physio-Psychologie)’에 근거한 힘에의 의지 사상으로 요약된다. 니체의 도덕철학으로서의 힘에의 의지 사상이 갖는 창조적 생성적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자유의지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의 여러 근거들을 고찰할 것이며, 이어서 결정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자연과학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심급에서 각각 고찰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전 형이상학에서의 ‘영혼’ 개념에 대한 니체의 해체적 시도와 그 새로운 적극적인 의미규정들을 고찰하고, 그러한 생리 심리학적 영혼 규정에 기반한 힘에의 의지의 진정한 의미를 숙고해보기로 한다.

 

2. 자유의지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

 

1) 자유의지(freier Wille)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선택과 결정,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자유의지론은 주체론과 쌍을 이루는데, 이 사상들은 서양 근대철학의 이성 중심주의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서양
인의 무한한 자신감을 함축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 자유의지론 안에 힘에의 의지가 숨어있음을 읽어낸다. 즉 자유의지론 안에 음험한 권력의지와 인류의 폭력과 잔인함의 역사가 숨어있음을 폭로한다.

이상주의와 도덕에서 피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 이것이 니체 철학이 갖는 독보적인 특징이자, 그의 철학을 이전의 철학들과 변별시켜주는 면모이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순수정신으로서 자유로운 의지의 주체라고 하는 이론, 그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의심할 바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윤리학인 자유의지론 안에 대체 무슨 권력의 의도, 힘에의 의지가 암시되고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니체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자유의지론 비판의 근거와 내용들을 세밀하게 해부해볼 필요가 있다.

 

니체가 기존 형이상학의 도덕철학적 전제인 자유의지론을 비판하는 첫번째 근거는 그것이 육체와 분리된 이성적 주체를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체는 ‘순수정신(reiner Geist)’으로서 이해된다. 물론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동물들과 구별되며, 이성은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생리학적 존재라는 점 또한 간과되어선 안 된다. 자유의지론은 이 자연적사실로부터 분리된 이상주의(Idealismus) 모델이기에 본래적으로 실재적인 것에 반하는 윤리학으로서 니체에 의해 평가된다.

 

이러한 자유의지론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을 우리는 칸트 윤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 윤리학은 그의 ‘두 세계론’, 즉 ‘참된 세계(wahre Welt)’와 ‘가상의 세계(scheinbare Welt)’라는 두 세계를 가정하는 이론으로부터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낸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감각하는 경험적 현실 세계 즉 현상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라 한낱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물의 진리인 ‘물 자체(Ding an sich)’는 현상계에는 존재하지 않고, 바로 여기-지금의 이 세계를 넘어선 저 예지적인 세계에만 존재할 뿐이다. 진리의 세계인 예지계는 도덕 법칙의 세계이다. 반면에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계는 한낱 물리학적 법칙이 주재하는 세계로서 지성적 사유(verständliches Denken)에 한정된 영역이다. 예지계만이 이성(Vernunft)과 자유(Freiheit)의 영역이다. 따라서 칸트 윤리학에서는 경험적 현실 세계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인 예지계를 도덕 법칙이 주재하는 세계로 가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정당화한다. 이 자유의지는 곧 실천 이성이며, 이러한 의지의 자유를 통해 인간은 바로 도덕적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해 칸트 윤리학은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한다. 먼저 ‘참된 세계’와 ‘가상의 세계’라는 두 세계를 가정하는 이원론 자체가 실재적인 것과 관계없이 허구적으로 날조된 이론임을 니체는 지적한다. 우리
의 실제 세계는 이원론적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일원론적일 뿐이다. 즉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자유의지론은 그 이원론으로부터 ‘순수정신’을 가정하는데, 니체는 육체나 생리학적 삶의 계기와 분리된 순수한 정신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러한 순수한 정신을 가정하는 강박증적인 퓨리턴주의(puritanism) 자체가 이미 이 세상, 자연, 현실성을 부정하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즉 순수정신, 이성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은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pessimism)에 근거하며, 따라서 허무주의(nihilism)라는 것이다.

 

니체 철학에서 ‘삶’이라는 것은 그에 의해 ‘실재(Realität)’, ‘자연(Natur)’, ‘현실성(Wirklichkeit)’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삶, 실재, 자연, 현실성의 문제는 몸과 관련된 생리학적인 문제들과 결부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니체 철학에서 피와 살과 뼈를 지닌 실제의 몸, 생리학적 요소들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삶이나 자연이라는 주제는 나타나지 않는다(다만 그의 초기 철학은 여기서도 약간의 예외들을 남긴다). 이러한 니체의 관점으로부터 자유의지론은 인간의 삶과 실재적인 것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관찰을 포기한 채 허구적으로 그리고 기만적으로 상정된 이론으로서 비판받는다.

 

2) 니체가 자유의지론을 비판하는 두 번째 근거는 그것의 실상이 노예의 도덕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을 고찰하기에 앞서 주체 개념에 대한 니체의 언어학적 비판을 살펴볼 것이다. 니체는 이를 통해 주체 개념의
논리학적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주체의 유물론적 형성 과정, 즉 주체화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인 추적을 시도하고, ‘주체-자유의지론’의 노예도덕적 성격을 드러낸다.

 

서양의 근대 철학은 ‘Cogito’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니체는 주체라는 것은 실재와 상관없는 문법의 측면으로부터의 유혹이며, 따라서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서양의 알파벳 언어권에서는 문장에서 주어가 모든 서술의 시초이자 근원으로서 정초된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 문법의 특이성일 뿐이라는 것이 언어의 비교 연구로부터 쉽게 파악된다. 니체는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이러한 언어와 철학, 언어와 세계관 사이의 상관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인도, 그리스, 독일의 모든 철학적 사유 작용이 지니고 있는 놀랄 만한 가족 유사성은 쉽게 설명된다. 언어적 근친성이 있는 바로 그 곳에서는 공통된 문법 철학에 힘입어 ― 즉 유사한 문법적 기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지배되고 인도된다는 것을 나는 의미하는 것이다 ― 철학적 체계의 유사한 전개와 배열을 위한 모든 것이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는 마치 세계 해석의 어떤 다른 가능성을 향한 길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우랄 알타이 언어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이 언어권에서는 주어 개념이 가장 발달되지 않았다) 아마도 인도 게르만족이나 이슬람교도와는 다르게 ‘세계’를 바라볼 것이며, 그들과는 다른 길에 서있게 될 것이다.”1)
따라서 니체는 주체에 대한 믿음은 결국 서양인의 독특한 언어문법에 기인하는 세계관일 뿐 세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언어 속에서 화석화된 이성의 근본 오류”2)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유와 활동에 앞서 그것들을 제약하는 원인으로 정립된 주체라는 기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Cogito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주어 ‘나’는 술어 ‘생각한다’의 앞선 조건이라는 서양인의 문법적 습관에 의한 것이고 논리학자의 미신일 뿐 철학적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 F.W. 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 20, KGW Ⅵ-2, 1968. pp. 28-29. 본문 속의 모든 니체 저서 인용문은 Giorgio Colli․Mazzino Montinari(Hg.),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KGW),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1967-과 Peter Gast에 의해서 재편집된 니체의 Der Wille zur Macht, Alfred Kröner Verlag, Stuttgart 1996를 따랐다. 따라서 이하 니체의 저작에서 인용할 경우, 참고문헌에 표기한 저작 약호와 해당 번호와 페이지만 표시하고, 번호가 없을 경우 약호와 페이지만 표시하기로 한다.
2) GM 제1논문 13, p. 293.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각 개별자들의 작용, 활동, 생성뿐이다. 즉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 ― 그리고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3) 따라서 힘에의 의지에 의한 생성 변화와 작용, 활동에 앞서 미리 존
재하는 고정된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허구적으로 가정된 이상(Ideal)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허구에 불과한 주체를 끝까지 고수해야만 했던 필요성, 주체를 전제해야만 했던 윤리학적 필연성을 니체는 역시 힘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에서 찾는다. 주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권력’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유물론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4)
우리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기존의 가치체계, 외부적 체제, 국가, 법에의해 이미 주체로 규정된 개인, 즉 ‘주체화된’ 개인이다. 실재하는 것은 바로 이 주체화 과정뿐이다. 주체는 없고 오로지 주체화만 존재한다.5) 다양한 개별자들은 권력에 의해서 주체로 만들어져왔고, 주체로 호명되어 왔다.

주체화된 개인, 즉 주체는 한 체제의 도덕적 가치체계에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체제의 노예’이다. 한 체제의 도덕적 가치체계는 이미 권력의 명령이다. 따라서 주체란 사실상 권력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도록 강제 당하는 노예일 뿐이며, 이러한 실제적 본질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한 ‘일반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는 자신에게 할당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달려가는 낙타의 정신이다.6)

 

3) WM 1067.
4) 이렇게 주체가 만들어지는 ‘주체화 과정’의 유물론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니체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제2논문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5) “단일(Un), 주체 (또 객체), 이성이란 것은 없다. 단지 단일화(unification), 주체화(subjectivation),
합리화(rationalisation)의 과정들이 있을 뿐이다. … 단일화, 주체화, 합리화, 중심화(centralisation) 등은 아무런 특권도 갖지 않는다. 그 과정들은 대개 다양성의 증대나 다양한 노선들의 연장과 전개 및 새로운 것의 생산 등을 방해하는 막다른 골목이나 틀로 나타날 뿐이다.”(G. Deleuze, Pourparlers 1972-1990, Les Éditions de Minuit, 1990. pp. 199-200)
6) 니체는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되어가는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단계는 외경심을 지닌 인내력 있는 정신, 많은 무거운 짐을 지는 정신이다. 그의 정신은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라며, 그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주체화된 주체). 그는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정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다 낙타는 사자로 변한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적극적 파괴의 정신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기존의 가치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수 있는 호전적 정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이 되었다. 이 적극적 파괴, 적극적 부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어린아이의 놀이와 같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가능하다. 창조는 긍정적 생성의 ‘놀이’이다. 창조는 정신 이전에 이미 몸에서부터, 이성 이전에 감각에서부터, 그리고 삶의 능동적 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출하는 것이다.
이 때 이성은 창조적인 힘에의 의지의 수단에 불과하다. 어린아이의 놀이와 같은 거룩한 생성의 긍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위대한 부정과 파괴의 정신을 거쳐야만 한다. 여기서의 부정은 무기력한 냉소적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한 긍정적․ 적극적 힘으로서의 부정이다.(Za I, pp. 25-27 참조.)

 

 

이러한 주체 철학과 연결된 자유의지론은 ‘자유’라는 말을 둘러싸고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노예가 진정한 자유를 가질 수 있는가? 노예가 지닌 복종에의 의무가 자유인가? 라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이
문제를 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론에는 자유가 없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말했던 주체의 자유의지란 특정한 체제와 법과 도덕(즉 권력의 명령)이 할당한 의무를 수행하는 의지에 있어서 자유롭다는 것에 다
름 아니다. 자유의지론은 곧 의무 윤리학이다. 의무를 수행하도록 강제당하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것, 이것은 언어적 모순이며 형이상학적 기만이다. 칸트 윤리학은 바로 이러한 기만의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니체
는 칸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늙은 칸트는 경직되고 점잖은 위선으로 그 자신의 ‘정언명법(kategorischer Imperativ)’으로 이끄는 변증법의 뒷 골목으로 우리를 유인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연극은 우리같이 버릇없는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7)

칸트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는 것을 의욕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는 것은 실천이성의 주체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언명법은 보편타당한 이성의 객관적 규준이 아니라, 오직 권력의 명령일 뿐이다.8)

정언명법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공정한 이성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다. 정언명법이라는 도덕철학적 장치는 지배 권력의 명령을 기만적으로 관철시키고 인간을 지배질서에 복종시키기 위한 “도덕 설교자들의 노회한 간계”의 산물이다. 절대적인 도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명명한 ‘권력’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자유의지론에 내재한 음험한 힘에의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니체는 자유의지론은 결국 자유가 아니라 굴종만을 말하고 있으며,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주체는 사실상 부자유하게 강제된 노예에 다름 아니며, 자유의지론이 제시하는 도덕은 주인의 도덕이 아니라 노예의 도덕이며 동시에 약자의 도덕이라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7) JGB 5, p. 13.
8) “정언명법에는 잔인함의 냄새가 난다. … ”(GM 제2논문 6, p. 316.)

 

 

3) 니체가 자유의지론을 비판하는 세 번째 근거는 이러한 자유의지론에 내재한 힘에의 의지의 강압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그 힘에의 의지, 권력의지는 바로 개개인의 인간에게 책임을 부과하고 죄를 묻고 형벌을 집
행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자유의지론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개인의 행위의 모든 책임을 그 개인에게 돌리고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가함으로써 모든 개인을 더욱 더 지배적 가치체계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주체-자유의지론’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 따라서 너의 모든 행위는 네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행위의 책임은 바로 너에게 있다.” 라고 말함으로써 오로지 개인에게 의무를 가득 짐 지우기 위해, 그리고 그를 단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 그것이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론의 논리 체계는 개인의 모든 선택이 언제나 주체적인 선택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외부 원인들에 의해 이미 제약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사회․문화적인 네트워크를 고려하지 않으며, 개인은 언제나 그러한 인과의 그물망 안에 있는 존재라는 점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로써 인간의 모든 행위들에 있어서 사회의 책임은 면제된다.

책임은 오로지 개인에게만 있고, 가차 없이 단죄되고 처벌되어야 할 것은 오직 그 행위의 주체인 개인일 뿐이다. 이것이 자유의지론의 윤리학적 전략이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단죄되고 처벌되는가? 그가 속한 사회의 가치체계와 규범을 위반한 인간이다. 쉽게 말해 그러한 인간은 범죄자라 불린다.
그러나 한 개인을 순식간에 범죄자로 낙인찍어 매도하는 가공할 위력을 갖는 그 사회의 가치체계와 규범이라는 것은 과연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인가?

니체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니체의 도덕 비판의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사회의 가치체계, 즉 도덕이라는 것은 특정한 지배 권력의 의지를 함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은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인간 앞에 주어지지만, 사실상 그것은 절대적인 것도 완전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철학자-심리학자는 바로 그 도덕의 전략을 꿰뚫어보고 의심해야 하며, 문제를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도덕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했지만, 니체는 ‘보편성’이라는 의미규정 저변에 이미 권력의 함의가, 힘에의 의지가 숨겨져 있음을 간파한다. 하나의 예로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
난 ‘정의로운 국가’의 예술가들의 위상을 생각해보자. 플라톤의 ‘정의로운국가’는 통치자, 수호자 및 전사, 시민(생산자, 상인)이라는 세 계층이 국가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이다. 이 세 계층은 주어진 업무(work), 직업(occupation)에 의해서 구별되고 정체성이 부여되며, 이 국가에서는 이러한 직업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개인은 배제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이 국가는 국가의 정의, 곧 통일적인 질서를 위해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의 창작행위는 국가의 전체 목적에 부합하게 사전검열을 통해 철저히 통
제되며,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난 개인의 창조적 예술행위는 반국가적․반사회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9)

한 사회의 동일한 가치체계를 ‘정의(justice)’라는 이름으로 절대시할 때, 즉 거기에 담겨있는권력의 함의를 보지 못할 때, ‘정의’라는 이름을 가장한 독단론적인 폭력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경우 개별자들의 고유한 삶의 영토와 내재성의 지대는 짓밟히고 생성과 창조는 단죄된다. 생성적인 삶이 갖는 다양한 노선들, 그 창조적 힘들의 생산을 막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포섭하고 동일화하려는 권력의지의 폭력이 도덕, 정의, 법, 규범이라는 객관성으로 점잖은 척 가장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자유의지론은 이렇듯 개인을 처벌하고, 인간의 창조적 생성적인 삶을 부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니체는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에 내재하는 독단론적인 폭력을 드러내고, 도덕을 안정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지배 권력은 얼마나 많은 잔인한 형벌을 고안해냈는지를 계보학적으로 밝혀낸다.

“그리스도교는 사형집행인의 형이상학”10)이라는 니체의 말은 이러한 자유의지론에 담긴 도덕 설교가들, 형이상학자들, 그리스도교 사제들의 가공할 권력의지와 잔인함과 폭력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덕과 이성과 자유의 저변에는 무시무시한 형벌들과 고문도구들과 섬뜩한 피의 냄새와 고통의 파토스가 언제나 존재해왔으며, 그것들은 인간을 현 체제의 도덕 질서에 고분고분하게 길들이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 도덕적인 인간, 책임을 지는 인간은 이러한 강압적인 ‘주체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고, 그로써 가능했던 것이다.11) 이처럼 니체는 도덕의 역사적 기원을 계보학적․유물론적으로 추적하여 그 충격적 본질을 밝혀내고, 이전까지의 철학자들이 주장해왔던 자유의지론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 힘에의 의지란 인간들을 노예로 길들이려는 의지, 병들게 만들려는 의지, 무력화시키고 왜소화시키려는 의지, 삶의 생성적 힘을 거세시키고 단죄함으로써 자기 삶을 부정하게 만들려는 의지, 자기 삶과 자기 존재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려는 의지이며, 곧 인류의 힘을 약화시키고 하강시키려는 의지이고, 삶을 부정하는 페시미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려는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Prediger des Todes)”12)의 힘에의 의지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러한 자유의지론 비판을 통해 결국 인간의 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인간이 부자유한 존재임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니체는 결정론의 옹호자인가?

 

9) Plato, The Republic, G.M.A. Grube, rev. C.D.C. Reeve, Hackett Publishing Company,Indianapolis․Cambridge, 1997 참조. 예술가의 위상에 관한 부분은 특히 Republic Ⅱ-Ⅲ과 Ⅹ를 참조할 것.
10) GD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 7, p. 90.
11) “모든 ‘좋은 것(gute Dinge)’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공포가 있단 말인가! … ”(GM 제2논문 3, p. 313)

 

 

3. 결정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

 

가. 결정론의 근저의 물리학적 사고방식과 니체의 비판

 

슈베펜호이저(G. Schweppenhäuser)는 니체의 자유의지론 비판을 근거로 ‘힘에의 의지’ 사상을 결정론, 운명론, 신비주의로 해석한다. 그는 니체가 인간의 부자유를 주장했으며, 그러한 결정론적․운명론적 구상이 데카르트로 소급되는 라플라스(Laplace)의 인과 기계론적 기획, 즉 프랑스 계몽주의로부터 기계적․유물론적 이론들을 자연과학적으로 계속 발전시키면서 19세기의 사유를 지배해왔던 라플라스의 기획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계속하여 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 사상은 과학적 자연 설명의 이성주의적 패러다임을 비이성적 원리로 대치하고 불가피하고 숙명적인 필연성의 지배를 공표하는 것이며, 비이성적인 힘에의 의지의 일원론은 근대의 자연과학적인 인식 요구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신화론적인 지배의 숭상으로 잘못 빠진다고 비판한다.13)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자유의지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만 주목한 채 결정론과 숙명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간과한 데서 비롯되는 오해일 뿐이다. 니체의 다음 구절을 보자.

 

"만일 누군가가 이와 같이 ‘자유의지’라는 이 유명한 개념의 조야한 단순함을 간파하고, 이 개념을 자신의 머리에서 삭제한다면, 이제 나는 그 사람에게 자신의 ‘계몽적 태도(Aufklärung)’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저 ‘자유의지’라는 모순적인 개념을 역전시킨 것 또한 자신의 머리에서 삭제하도록 요청한다: 즉 원인과 결과의 잘못된 사용의 소산(所産)인 ‘부자유 의지(unfreier Wille)’ 말이다."14)

 

이처럼 니체는 자유의지도, 그것을 역전시킨 부자유 의지도 옹호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론이 엄밀히 말해 인간의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만을 논하고 있다면, 반대로 물리학적 인과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결정론의 대
상들은 오로지 영혼으로부터 분리된 육체, 물질, 감각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니체는 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주장하므로 그가 자유의지론에도 물리학적 결정론에도 찬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유의지론은 목적론적 사고방식에 근거하는 도덕 사상이지만 결정론은 일차적으로 물리학적 사고방식에 의해 뒷받침되는 자연과학 사상이다. 결정론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필연적인 인과 법칙으로 설명한다. 세계의 전과정은 물리학적인 합법칙성 및 인과의 필연적 연관에 의해 이미 정해져있다. 따라서 의지의 자유라는 것은 부정된다.

 

물론 니체는 이러한 인과(Ursache und Wirkung) 개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인과 개념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과 개념은 세계의 제(諸) 현상들을 언어적으로 ‘기술’ 하고 ‘이해’하기 위한 ‘관습적 허구’로만 쓰여야 하며, 세계 설명의 도구로 쓰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에 ‘법칙’이라는 것, ‘인과의 필연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인 기호 체계를 사물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론적 사고, 부자유 의지에 대한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과학적이라기보다 사실은 ‘신화적(mythologisch)’인 것일 뿐이다.15)

니체는 이러한 물리학적 결정론의 한계를 “영원히 대중적인 감각주의(volkstümlichen Sensualismus)의 진
리 규준에 따르는 것”16)이라고 지적한다. 즉 그러한 이론에는 보다 높은 영혼이나 고귀함에 관한 숙고는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주의는 영혼 개념을 도외시한다. 이것은 서양의 근대 이후의 과학주의와 기술문명의 발달, 그리고 이에 힘입은 근대 산업사회의 천박성에 대한 니체의 경고이다. 그러나 니체의 근대 물리학주의와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은 ‘존재로의 회귀’를 역설하는 하이데거의 기술문명 비판과는 매우 상이하다.17)

니체의 관점은 하이데거적인 ‘존재 환원주의’와는 다르다. 니체는 근대 기술문명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본질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따라서 현실에 대한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학 발달이 인류 역사에 끼친 공과 과를 충분히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니체는 극단적인 물리학적 사고방식은 “오로지 ‘조악한(grobe)’ 노동을 해야만 하는 미래의 기계 노동자와 교량 건설자와 같은 거칠고 근면한 종족에게 가장 적합할 것”18)이라고 말하며, 근대 과학과 기술문명의 무제약적인 과잉 성장이 인류에게 가져다줄 폐해에 대해서 경고한다. 이는 서양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물리학적 세계관과 정치․사회․문화간의 역학 관계에 대한, 즉 지식과 물적 현실과의 유기적인 관련성에 대한 통찰이다. 물리학주의에 편향된 문명의 발달은 개인들이 오로지 국가 산업을 일구는 역군으로 동원되고 오로지 산업 발달을 위해 쉼 없이 복무하는 노동자로서 존재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천박한 사회의 도래를 막기 위해 철학은 정신과 물질 간의 균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함을 니체는 주문하는 것이다.

 

14) JGB 21, p. 29.
15) 같은 책, pp. 29-30 참조.
16) 같은 책 14, p. 22.

17) 하이데거는 􋺷기술에 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에서 근대 과학기술의 본질을 “닦달 또는 몰아세움(Ge-stell)”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고 사물뿐 아니라 인간조차 도구적인 부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문요청하고 몰아세우는 기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Ge-stell’이라는 본질규정은 궁극적으로 현실에 대한 지극히 페시미즘적인 진단에 근거한 것이다. 게다가 “근대 기술문명이라는 것의 단 하나의 ‘본질’을 규정지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조야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봄직하다. 바로 이 본질주의는 니체 철학에 대립된다.

니체는 근대 과학과 기술문명의 위험성을 비판할지 언정 그것의 단 하나의 본질 같은 것을 찾진 않는다. 니체의 관점에서 단 하나의 본질을 규정하고 개념화하려 하는 것은 이미 실재적인 것에 반하는 일이며, 뭐든 ‘개념의 미라들’로 만들길 좋아하는 ‘학자들’의 취미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섬세한 철학자-심리학자의 시선에 반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상술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만이 인간을 위험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게 해주며, 진리를 탈은폐(Entbergung)시키고 자유(Freiheit)를 얻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극단적인 정신주의와 현실 부정적인 염세주의에 기반한 ‘존재 환원주의’이다. 하이데거는 근대적 기술(Technik)을 끊임없이 고대 그리스적 테크네(τἑχνη)와 대립시키며, 기술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고대 그리스를 예찬한다. 그는 τἑχνη는 Technik 과는 달리 단지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아름다움의 광채 안으로 현출하는 예술까지도 의미하는 개념이었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고대로의 회귀 본능을 드러내며, 또 다른 중심으로의 환원주의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인류역사가 이룩한 근대성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섬세하게 고찰하지 못하고 오로지 근대 이후에 빚어진 결과들을 부정적으로만 보는데, 이러한 페시미즘적 태도의 결과는 ‘근대 이전으로의 회귀’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M. Heidegger, Die Frage nach der Technik, Bd. 7, Verlag Günther Neske Pfullingen, 1954를 참조할 것)
18) JGB 14, p. 23.

 

나. 결정론의 근저에 있는 도덕 비판, 그리고 자연주의 문학에 관하여

 

이러한 니체의 비판의 주된 목적은 단지 물리학적 결정론의 학문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파생되는 가치들, 즉 도덕적 가치체계를 문제 삼는 것이다. 니체에게 모든 담론들은
‘텍스트(Text)’가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이다.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역시 해석자의 ‘관점’이 담겨 있으며, 힘에의 의지가 내재해 있다. 즉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과학적 객관성을 표방하는 담론들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도덕’이다. 모든 담론들에 내재한 도덕을, 권력의지를, 힘을 꿰뚫어보는 것, 이것은 니체가 말한 섬세한 심리학자로서의 철학자들만의 몫이다.

니체는 먼저 결정론에 내재한 본능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들은 어떤 것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고, 어떤 비난도 받고 싶어 하지 않으며, 내면적인 자기 경멸(Selbst-Verachtung)로 인해 자신의 책임을 다른 어떤 것에 전가(abwälzen)시키길 원한다. 이들은 책을 저술하게 되면 오늘날 범죄자의 편을 들곤 한다.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동정(socialistischem Mitleiden)은 그들의 가장 기분 좋은 가면이다.19)

19) 같은 책 21, p. 30.

 

인간이 아무리 인과의 세계 속에 있다 한들 그 세계에 필연적으로 예속되는 운명의 노예는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질 수 있고, 이러한 인간은 실로 강한 자이다.
그것은 무한한 자기긍정과 자부심, 자기 확신성이라는 용기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약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외부에 전가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의 실수나 어리석음으로 인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 가족, 사회를 원망하거나, 심지어 신이나 운명 같은 초자연적 원인에 책임을 돌린다. 모든 것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었던 외부의 어떤 요인 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위안’한다.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은 세계의 필연성이라는 거대한 법칙의 늪으로부터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론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숙명론과 결정론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인간은 그저 세계의 알 수 없는 거대한 필연성의 법칙의 힘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일 뿐이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는 무력하고도 무력한 존재일 뿐인 것이다. 능동적인 힘에의 의지가 결여된 인간, 자기 확신에 따라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기를 포기한 수동적인 인간은 쉽게 운명이라는 핑계로 도피한다.

 

니체는 이러한 결정론과 운명론을 약자의 도덕으로 간주한다. 운명론자들은 자기 삶을 부정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약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삶이 고통 받고 있기에 고통 받는 타인에게 눈을 돌리고 동정 속에서 기
쁨을 찾는다. 강자들은 자기긍정, 즉 자신의 힘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데서 생성적인 즐거움을 찾는다면, 약자들은 오로지 약자들끼리의 공존과 동정과 사랑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
즐거움을 느낀다.
연약한 양떼들이 무리를 지어 뭉쳐있듯이 약자들은 서로 뭉치려 하며 그 공존 속에서 함께 슬퍼하고 서로를 위안하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더욱 더 정신의 건강을 잃고 병약해지고, 한층 더 데카당스가 된다. 이것이 동정의 도덕이 인류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정심은 타인의 삶을 고양시키기보다 더욱 더 하강시킨다. 이들은 오로지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된 자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갖고 자선을 하려 한다. 동정의 도덕은 인간은 누구나 고유한 힘에의 의지, 생-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그저 타인을 가엾게 여기고 도우려고 한다.

니체는 이러한 숙명론자들의 동정과 자선은 타인을 자기보다 약자로 간주하는 데서 오는 우월감과 쾌감에서 촉발되는 잔인하고도 가식적인 감정과 행위라고 말한다. 값싼 동정심은 타인의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동정의 바이러스는 인류를 데카당스로 만들고, 연약한 가축떼로 길들인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심과 자선을 참된 사랑이자 선한 본성으로 간주했고, 또한 인간 전체의 숙명과 고통에 대한 동정 그리고 그것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울음이야말로 순수하고 참된 사랑의 징표라고 보았다.20)

그러나 니체가 볼 때 그것은 인간의 지독한 허위이고 위선적인 감정이다. 동정하는 자가 갖는 우월감과 쾌감은 결코 자기긍정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면적인 자기부정과 자기경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것,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 자신의 위선을 스스로 알아챌 정직성이 결여된 것, 이러한 태도들이 바로 타인을 동정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약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약자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약함’ 을 ‘선함’으로 둔갑시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그로써 자신을 위안한다.자기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들은 ‘선함’이라는 우아한 베일 아래에 자신을 숨긴다.

 

20) A.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Stuttgart und Frankfurt am Main) 1968, §66-67, pp. 501-514 참조.

 

 

결정론과 운명론의 데카당적 본능, 그것과 동정의 도덕과의 관련성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해석이 약자에 대한 무자비함이나 정치적 우파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정의 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
판은 약자에 대한 무자비함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긍정을 주문하는 것이다. 생성과 창조,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출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이렇게 자기확신감을 갖는 강자가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느낀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부언하고 있다.21)

엄밀히 말하면 니체는 동정의 도덕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Mitleiden)이 문자 그대로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데카당스의 도덕이고, 약자를 더욱 더 나른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해악적인 감정이지만, 피로하고 좌절해있는 약자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그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힘을 북돋아주어 그의 삶을 고양시키고 상승시켜준다면 그것은 가식적인 행위라기보다 진정한 애정에서 나온 자비심이며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인 것이다.

두 번째로 니체의 동정의 도덕 비판이 정치적 우파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해석 역시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성급한 해석일 뿐이다. 현대의 좌파 정치학은 작금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문제들이 개인의 동정심이나 자선이나 기부의 정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구조개선 노력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니체가 동정의 도덕에 내재한 쇠퇴적인 본능과 자기기만적인 본질을 비판했다고 해서 정치적 우파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부당하다.

 

흥미로운 점은 니체는 이러한 물리학적 결정론을 도덕의 지평으로 넓혀서 결정론과 숙명론, 그리고 약자의 도덕, 동정의 도덕과 연계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에 이러한 결정론과 숙명론이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는 친화성이 있다.22) 자연주의의 근저에는 “사회주의적 동정”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에밀 졸라, 플로베르 등은 니체가 비판적으로 거명하는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들인데, 그 중에서도 니체가 비판하는 동정의 도덕과 데카당스에 가장 충실히 부합하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이다.

니체는 데카당스의 사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종종 거론하곤 한다. 그는 니체에 의해 ‘러시아적 숙명론’(russischer Fatalismus)과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데카당스의 상징적 존재로 평가된다.23) 니체는 러시아 소설의 자연주의를 그리스도교 신약성경과 비교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저 진기하고도 병든 세계는 ― 즉 마치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사회의 찌꺼기와 신경증과 ‘어린애 같은(kindlich)’ 백치들이 밀회하고 있는 것 같은 세계는 ― (후략)”24)

이러한 니체의 평가는 하우저(A. Hauser)의 다음과 같은 도스토예프스키 해석과 비교해볼 만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에는 발자크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치고 모욕당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이 있다.”25)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 태도의 근거는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의 다음 구절에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21) JGB 293, p. 246.
22) 이러한 양자의 친화성을 아르놀트 하우저(A. Hauser)는 특히 발자크에 대한 사회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동조적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사회주의자와 자연주의자는 모두 발자크의 작품을(특히 초기의 것을)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A. Hauser,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현대편)􋺸, 백낙청․염무웅 공역, 창작과 비평사, 1974, p. 22 이하 참조)

23) 야스퍼스(K. Jaspers)는 니체가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부류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야스퍼스가 이들에 대한 니체의 관점과 해석들을 좀 더 세밀하게 연구했더라면, 그리고 니체 철학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이처럼 부당한 주장을 하진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야스퍼스의 특유한 니체관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니체의 의의를 모든 극단적인 것, 모든 대립들을 거부한 철학자로 결론내리고 있다. 니체가 이분법에 근거한 모든 극단적인 것을 실재에 반하는 것으로서 거부한 것은 맞다. 그러나 니체가 고작 그러한 부정을 외치는 사상가에 그쳤다면 그것은 실로 ‘허무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를 허무주의자로 보든, 더 발전된 형태의 다원주의자로 보든 그것은 철학자로서의 니체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삶의 긍정에 기인한 새로운 가치의 창조이지, 단순한 부정과 파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용주의적 긍정도 니체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야스퍼스가 니체의 것이라고 주장한 모든 대립들을 거부하는 다원주의는, 니체가 일정 부분 긍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대해서 누차 지적했던 불교 사상에 차라리 더 가깝다. 니체에게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이 데카당스인 것처럼 불교도 역시 데카당스 종교로 평가된다. 야스퍼스는 니체를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니체를 도스토예프스키에 연결시키는 유사한 오류를 재생산한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K. Jaspers, Nietzsche und das Christentum, R. Piper&Co.Verlag, München 1952를 참조하라)
24) AC 31, pp. 199-200.
25) 아놀트 하우저(A. Hauser),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현대편)􋺸, 백낙청․염무웅 공역, 창작과 비평사, 1974, p. 147.

 

 

"자연은 예술적으로 평가하자면 원본(Modell)은 될 수 없다. 자연은 과장하고 왜곡하며 틈을 남긴다. 자연은 우연(Zufall)이다. ‘자연에 따르는(nach der Natur)’ 연구는 내가 보기에는 나쁜 징후인 것 같다: 이것은 종속, 약함, 숙명론(Fatalismus)을 드러내며 ― 사소한 것들 앞에서 이처럼 굽실거리는 것은 예술가 전체의 체면을 깎는 일이다. 있는 대로(was ist) 본다는 것 ― 이것은 다른 유의 정신에, 곧 반예술적(anti-artistisch)이고 사실적인 정신에 속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wer)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26)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시선과 숙명론적 입장에서 그들을 묘사하는 것, 인간의 무거운 삶의 짐과 고통, 질곡과 악취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 세계의 가혹한 필연성의 법칙 즉 운명에 노예처럼 쇠사슬로
결박당해 있는 무력한, 너무나도 무력한 인간들을 주제로 다루는 것, 이러한 의미의 자연주의는 동정의 도덕이며, 진정한 예술가가 할 일이 못된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인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란 가혹한 운명에 의해 고통받는 나약한 대중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안주하거나 그들에 대한 동정심에 호소하기보다, 개별적인 다양한 인간들의 생성적이고도 창조적인 삶과 능동적인 힘에의 의지를 그려 보여주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가란 곧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이고,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다. 니체의 관점에서, 철학자, 심리학자, 예술가는 분리될 수 없다. 니체가 자연주의 문학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결코 교조적이거나 무분별하지 않다는 사실은, 역시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로 분류되는 스탕달과 모파상에 대한 니체의 각별한 애정과 호의에서 알 수 있다. 니체가 지적하는 결정적 문제는, 단지 자연주의의 문학적 기법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러한 문학에 동반되는 숙명론과 결정론의 암울하고 병적이고 무력하고 데카당적인 사상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탕달과 모파상의 자연주의 문학은 니체에 의해, 도스토예프스키나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평가받는 것이다.

 

26) GD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7, pp. 109-110.

 

 

4. 힘에의 의지 사상: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을 넘어선 제3의 영토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자유의지론도, 결정론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니체의 힘에의 의지 사상이 결정론, 운명론, 신비주의로 오해되는 것은, “기계론적mechanistisch(또는 ‘유물론적materiell’) 세계”, “의지의 인과성(Causalität des Willens)”, “기계적인(mechanisch) 사건”27),“세계는 ‘필연적(notwendig)’이고 ‘예측 가능한(berechenbar)’ 진행 과정을 갖는다.”28) 등과 같은 니체의 표현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용어나 문장들을 전체 맥락에서 분리함으로써 니체가 필연적인 인과의 결정론을 주장했다거나 신비주의자라거나 하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해선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이와 동시에 이 세계에는 어떤 법칙(Gesetz)의 지배도 없고 오히려 법칙들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29)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란 개별자들을 구속하는 필연적인 인과의 법칙이 아니며, 힘에의 의지로서의 이 세계는 결코 운명론과 숙명론의 무게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가 아니다. 세계는 단지 발산적인 힘과 생 충동과 의지들로 인한 가지각색의 생성 변화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힘에의 의지의 세계에는 법칙이라는 것이 없다.

 

27) JGB 36, pp. 50-51.

28) 같은 책 22, p. 31.
29) 같은 곳 참조.

 

그렇다면 니체가 제시하고자 하는 도덕 철학은 어떤 것인가? 그의 힘에의 의지 사상이 하나의 도덕철학, 세계를 보는 하나의 가치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적 함의를 지니는가?

니체가 “무엇보다도 생명이 있는 것은 자신의 힘을 발산(auslassen)하고자 한다 ― 생명 그 자체(Leben selbst)는 힘에의 의지이다 ―”30)라고 언명할 때, 이러한 니체의 힘에의 의지 이론과 이전 형이상학자들의 자유의지론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차이는 바로 ‘영혼(Seele)’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에서부터 비롯된다. 니체의 다음 구절을 보자.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영혼’의 문제에 접촉하자마자 그것을 잃고 마는 자연주의자들(Naturalisten)의 미숙함과 마주치곤 하는데, 여기에서 ‘영혼’ 자체를 버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귀한 가설 가운데 하나를 단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영혼의 가설을 새롭게 파악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길은 열려 있다. ‘사멸하는 영혼(sterbliche Seele)’, ‘다수의 주체(주관)로서의 영혼(Seele als Subjekts-Vielheit)’과 ‘충동과 정서의 사회구조로서의 영혼(Seele als Gesellschaftsbau der Triebe und Affekte)’ 같은 개념들은 앞으로 학문에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31)

 

30) 같은 책 13, p. 21.
31) 같은 책 12, p. 21.

 

니체는 인간이 영혼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따라서 영혼이라는 정신적 기제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물리학적인 인과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자연주의자들의 결정론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한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주의적 전통을 갖는 영혼에 대한 서양인의 통례적 관념들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을 해체한다. 영혼불멸의 관념 대신에 사멸하는 영혼이라는 관념, 단일한 주체로서의 영혼 대신에 다양한 주체로서의
영혼, 순수정신 대신에 충동과 정서와 사유의 복합체로서의 영혼이 그 해체적 사유의 결과들이다
.32)

 

32) “자아는 사소한 과거는 잊어버리거나 그것을 유용한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가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아 자체는 부단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별적인 사건은 그것이 부단히 변화하는 자아 전체에 미치는 궁극적인 영향에 따라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

자아는 기존의 행동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간다. 자아는 불변의 실체가 아닌데도 우리는 자아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에 의해서 알아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아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자아의 자기 창조 활동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자아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박찬국, 􋺷니체 인간에 대해서 말하다􋺸, 철학과 현실사, 2008. p. 139)

 

 

이러한 영혼과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규정으로부터 니체의 힘에의 의지 사상은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이라는 이분법을 유유히 빠져나가 제3의 영토를 구성한다. 힘에의 의지는 주체의 자유의지도 아니고, 하나의 필연적인 인과의 법칙도 아니다. 전자가 아닌 이유는 인간은 순수정신이 아닌 살아서 약동하는 육체를 가진 유물론적이고 생리학적인 존재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후자가 아닌 이유는 인간은 단지 필연적인 유
물론적 메카니즘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려는 정신적 의지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영혼-육체 결합체일 뿐이며, 순수영혼도 순수물질도 아니다. 니체는 정신주의와 자연주의 그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즉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실재성의 관점에서 두 입장 사이의 균형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영혼이 육체와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현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즉 니체는 학문, 지식, 앎의 정신적 영역과 정치․경제․사회적인 제반의 물적 현실 사이의 역학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란 우리의 생 충동이며, 모든 생명이 각자의 삶에 따라 갖는 다양한 욕망과 정열의 총체이다. 이러한 의지의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과도 다르고, 이전의 형이상학자들의 의지 개념과도 다르다. 니
체가 뜻하는 바의 인간의 의지작용, 의지함(Wollen)이란 통일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복합적인 것(etwas Complicirtes)이다. 의지작용 안에는 첫째, 감정 또는 느낌(Gefühl)의 다양함이 있고, 둘째, 사고 또는 생각하는 작용(Denken)이 포함되며, 셋째, 정서(Affekt)가 있다. 즉 의지한다는 것, 의지는 다양한 감정과 사고, 정서의 복합체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복합체를 바탕으로 한 명령적 의지와 복종적 의지(하위의 의지) 사이의 역학관계 또는 지배 관계이다.33)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사유(Denken)를 의지(Wille)와 분리하는 것은 단지 언어적․개념적으로만 그리고 철학자들의 선입견으로부터만 그러할 뿐, 우리의 실제 삶의 영역에서 사유와 의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엄밀히 말해 인간의 사유 역시 그 인간의 의지작용에 포함되는 것이며, 따라서 순수정신으로서의 사유란 철학적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충동의 생 전체는 힘에의 의지의 전개와 분화 과정으로서 설명될수 있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생명의 원형 또는 원초적인 형태(Vorform des Lebens)이며, 의지의 한 가지 근본형(EineGrundform des Willens)인데, 이러한 힘에의 의지가 우리의 삶의 전개와 더불어 형성되고 분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내면으로부터(von innen) 보여진 세계, 그 내면의 ‘지적 성격(intelligiblen Charakter)’을 향해 규정되고 기술된 세계 ― 이는 바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34)

 

여기서 니체는 ‘지적 성격’에 따옴표를 찍으며 강조하고 있다. 니체는 인간 존재를 영혼-육체 결합체로서 간주했고, 정신과 물질의 끊임없는 상관적 역학 관계에 관해서 역설했다. 인간 역시 생리학적 존재로서의 동물이지만, 인간이 특별한 동물인 이유, 인간의 힘에의 의지가 단순히 동물의 생 충동과 다른 이유가 니체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니체의 이러한 ‘생리-심리학적’ 관점을 이해한다면, 그가 자유의지론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혼’을 도외시하는 자연과학자의 물리학적 사고에 대하여도 비판적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3) JGB 19, pp. 25-28 참조.
34) 같은 책 36, p. 51.

 

 

5. 결 론

 

니체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현실적 감각과 역사적 감각이라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이분법과 성급한 개념의 박제화는 언제나 이러한 현실 감각과 역사적 감각이 결여된 학적 산물일 뿐이며, 참된 철학적-심리학적 통찰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제3의 영토를 그려 보여주는 니체의 철학적 작업은 삶을 바라보는 현실적 감각과 역사적 감각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연구를 끝맺으며 니체의 관점을 간명하게 정리해줄 만한 선불교의 선문답 하나를 들려주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승려 백장(720~814)이 한 노인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 어느 학인이 ‘크게 수행을 하는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느냐’고 묻기에,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백 생 동안 여우로 윤회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스님께서 한 말씀(一轉語)으로 여우의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 노인은 곧바로 이어서 물었다.

“크게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백장 스님이 말했다.
“인과에 어두워지지(昧) 않는다.”
노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35)

 

35) 오윤희, 􋺷매트릭스,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禪􋺸, 호미, 2003. pp. 194-195.

 

 

모든 인간은 인과에 떨어진다. 크게 수행을 한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노인의 생각은 틀렸다. 그러나 크게 수행을 한 사람일수록 인과에 어두워지지 않는다.

니체는 이를 자기긍정과 자기확신감에 넘치는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강자라고 말한다. 백장 승려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관점에서도 모든 인간은 인과에 떨어진다. 즉 세계는 니체 그 자신의 말대로 “유물론적인 세계”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론은 이미 부적절한 근거 위에서 세워진 신기루다. 그러나 니체는 또 한번 말한다.

모든 인간은 인과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 세상에는 어떤 법칙의 지배도 없고 법칙이란 것이 완전히 결여된 채, 오로지 다양한 힘에의 의지들만이 끊임없이 운동할 뿐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법칙의 필연성을 믿는 결정론과 운명론은 오로지 쇠퇴한 힘의 본능을 가진 약자들, 곧 데카당들의 신앙일 뿐이라고 말이다.

자기 긍정적이고 건강한 자들, 창조적 생성적 힘에의 의지를 가진 자들은 세계의 유물론적 인과 속에 있으면서도 결코 운명이라는 거대한 필연성에 굴복하지 않는다.

즉 그러한 자는 인과에 떨어지면서도 결코 인과에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며 니체적 의미의 진정한 자유이다.

 

 

참 고 문 헌

 

1차 문헌 -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저작
AC Der Antichrist, KGW Ⅵ-3, Berlin․New York 1969.
GM Zur Genealogie der Moral, KGW Ⅵ-2, Berlin․New York 1968.
GD Götzen-Dämmerung, KGW Ⅵ-3, Berlin․New York 1969.
JGB Jenseits von Gut und Böse, KGW Ⅵ-2, Berlin․New York 1968.
WM Der Wille zur Macht, Alfred Kröner Verlag, Stuttgart 1996.
Za Also sprach Zarathustra, KGW Ⅵ-1, Berlin․New York 1968.

2차 문헌
김정현, 「칸트의 자유의지 개념에 대한 니체의 비판」, 􋺷철학연구􋺸 제16집, 고려대학교 철학회, 1991. 12. pp. 20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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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weppenhäuser, G., 􋺷니체의 도덕철학􋺸, 홍기수 옮김, UUP, 1999.
Plato, The Republic, G.M.A. Grube, rev. C.D.C. Reeve,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dianapolis․Cambridge 1997.

 

 

Abstract

 

Nietzsche's 'Will to Power': Beyond the Theory of Free Will and Determinism

― Sohn, Kyung-Min ―

 

Nietzsche’s critique of the Theory of Free Will is well known. Because of that, he is often misunderstood as a supporter of determinism, fatalism, and unreasonable mysticism. However, Nietzsche does not support either the theory of free will or determinism and travels beyond the extreme of a dichotomy, so presents the third territory called ‘Will to Power’ based on physio-psychology. Nietzsche genealogically traces the will to power in the theory of free will and reveals the falsities of the concept of free will. In addition, he criticizes determinism which advocates a human’s lack of free will(unfree will) in natural science and on a moral level, hence he discloses that the determinism leading to fatalism is not only a moral of the weak but also a moral of décadent. He penetrates the material mechanism of the world as the will to power, but he denies it has laws. He regards laws as the things that human beings invent. These laws are no more than a system of signs applied to nature and Nietzsche denies this idea that necessary laws govern the world. Therefore, this world as will to power by Nietzsche is a constant, becoming course which various wills to power develop and differentiate without any unified laws. Creation can be possible on the basis of such a philosophical perspective.

 

※ Key Words: the will to power, the theory of free will, determinism, fatalism, physiopsychology.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