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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행>에 수록된 사인검. 삼인검과 갑옷

 

③ 조선의 환도

 

동양철학의 세계관을 집약시킨  ‘인검’과 ‘진검’

 

조선의 도검 중에서 관제와 민제, 실전과 의례를 모두 포괄하여 가장 유명한 칼은 주술적 목적하에 제작된 인검(寅劍)이다. 공식적으로 소재가 파악된 관제인검은 30여 점 정도로 대부분 국공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소재가 파악된 개인과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까지를 포함한다면 50여 점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조선의 칼 ‘인검’

 

인검은 요즘 우리 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사인검이나 삼인검의 이름은 물론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드는 칼이다” 라거나 “재앙을 물리친다” 같은 내용까지는 어렵지 않게 알고 있을 정도로 일반에게 폭넓게 인식된 조선의 명검으로 손꼽히는 칼이다.

과거에도 조선의 구한말, 대한제국시절에 조선을 찾아왔던 외교관이나 여행가들 중 샤를 루이 바라 같은 이는 조선의 무기 중에서 인검류의 독특한 외형에서 중국, 일본의 도검들과 명확한 구분을 느꼈던지 그의 조선견문록이 수록된 ‘조선기행’ 의 조선무기관련 기록 삽화(도해참조)에서도 유독 인검은 실물 그대로 묘사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는 매우 독특한 현상인데 현대의 한국인들, 그 중에서도 도검에 관심이 있다는 이들조차 조선시대의 환도에 대해서 정형화된 고유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데 반해서 유독 사인검, 삼인검과 같은 인검계통의 도검은 그 종류와 크기와 형태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이미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칼이다.

동시에 인검이 만들어진 구체적인 의미는 모른다 해도, 일반적인 칼과 다른 부분, 또는 막연하나마 신령함이 깃든 도검이라는 정도는 인지를 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칼이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빈번히 세간에 회자되는 이 칼은 그 유명도 만큼이나 본의가 왜곡되고 잘못 전해진 부분 또한 많다. 특히 인터넷상의 호사가들에 의하여 잘못 알려진 속설과 근거 없는 추론이 확대 재생산되어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 칼이기도 하다. 이토록 유명한 인검 외에도 그와 기능과 성격이 유사한 진검(辰劍)이 또한 존재하는데 여기에서는 인검을 주로하고 진검은 보조적으로 공통적 관련부분에 한해서만 다루도록 한다.

 

인검과 진검에 대한 문헌기록은 민간의 문집 등에 남겨진 선조들의 시가나 한시를 제외할 경우,‘ 조선왕조실록’ 에실린 6편9절의 내용이 공식적인 기록의 전부이다. 실록에 수록된 인검, 진검에 관한 내용에는 이인검, 일인검, 이진검, 일진검이라는 검명은 나타나지 않으며 유물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 지칭하는 인검, 진검이란 사인검, 삼인검, 사진검, 삼진검의 네 가지 칼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설명한다. 이러한 사인검, 삼인검, 사진검, 삼진검이 과연 어떤 목적에 따라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
졌는지 실체를 바로 알면, 도검이란 기물의 만드는 법을 넘어 우리 선조들이 인검, 진검을 제작하면서 의도했던 철학의 심오함과 더불어 형이상학의 과학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검, 진검은 과연 어떤 칼인가?

 

 

<조선기행>에 수록된 사인검 삽화의 실물(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기행>에 수록된 사인검 삽화의 실물(고궁박물관 소장)

 

 

재앙과 사귀를 물리치는 위력 지녀

 

연산군 7년(1501년) 1월 30일 기묘조의 기사를 보면, “...삼인검은 재앙을 물리치는 도구...” 라 되어 있고,

중종 37년(1542년) 4월 27일 정축조의 기사를 보면 “...사인검은 전례에 따라 만든다고는 하나, 다만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좌도에 관계되니...”  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 숙종 12년(1686년) 1월 13일 무진조의 기사를 보면 “...삼인검이란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타조 하는 것을 말함인데,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상에 나오는 위의 세 가지 기록을 보면 사인검과 삼인검을 만든 목적이 재앙을 물리치고 사귀를 물리치기를 바라는 목적 하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벽사의 위력을 지닌 용도로 만들어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리는 등의 주술적, 의기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칼인 것이다. 원나라때 쓰인 ‘송사(宋史)’ 를 보면 인검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가진 칼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宋史》『列仙傳』「呂洞賓」“...관서지방의 은자(逸人) 여동빈은 검쓰는 법을 알았다(有劍術)... 여순양(呂洞賓)은 신령으로부터 검술을 전수(擅劍術)받아 요귀를 베고(斬妖) 마를 물리쳤다(除魔).”

 

이 기록에 의하면 여동빈은 신인으로부터 검술을 배웠고, 그 검술로써 참요제마했다는 것인데, 이어지는 다음의 기록을 보면 그가 사용했던 칼이 어떤 칼인가를 알 수 있다.

 

“...남쪽의 협사들을 살펴보면(南俠展) 여동빈이 이 검을 애호하여(賓愛此劍), 순양검으로(以純陽劍) 간사함을 제거(除奸)하고 악을 없앴다(鋤惡).”

 

즉, 여동빈이 사용했던 칼은 순양검으로 순양검은 ‘요귀를 베고, 마를 물리치며, 간사함을 제거하고 악을 없애는’ 능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여동빈이 가진 순양검의 능력은 앞에 설명된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사인검, 삼인검 관련기록인‘재앙을 물리치는 도구(연산군실록7년)’,‘ 재앙을물리치기위한것(중종37년)’,‘ 사귀를 물리칠 수 있다(숙종 12년)’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인검을 만든 목적과 용도가 순양검의 그것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에 기록된 순양검의 사전적 정의에 의한 내용을 살펴보면 “순양검은 사상과 주역의 이치가 들어있다”고 했고, “인의로 나라의 통치를 이루어지게 하는 정의의 상징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순양검의 쓰임이 “인의로 나라 다스림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 설명하겠지만, 인검의 오행상의 성질은 ‘의(義)’이고, 진검의 오행상 성질은‘인(仁)’인 것 또한 순양검의 정의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순양검과 인검, 진검간의 일치점과 공통분모들을 비교 판단한다면 조선의 인검과 진검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양의 순양검 개념과 기능이 계승 발전된 또 다른 형식의 조선식 순양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떻게 인검과 진검이 순양검으로서의 힘을 얻고, 재앙과 사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위력을 갖추게 되는가에 대한 부분인데, 그 힘을 얻기 위해 조선에서는 음양오행과 천간지지를 기본으로 한 동양철학의 원리를 적용했던 것이다.

 

‘인의를 구현시키는 힘’ 얻기 위해 제조

 

세간에서는 호랑이의 외면에서 풍기는 산중왕(山中王), 또는 백수의 왕이란 이미지에 착안하여 인검의 성격을 용맹함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상식이 사회통념화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원래 인검을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드는 이유는 호랑이의 외형적 용맹함이나 ‘무(武)’의 기운 때문이 아니다. 사인의 간지를 맞추는 이유가 특정기운의 결집을 위함으로 본다면 세간의 속설이 주장하는 인검의 제조목적이 ‘무’적 기운이 강해지는 인의 시기라는 발상은 기본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문’과 ‘무’를 전통적 개념의 음양으로 구분할 때 문은 양, 무는 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음적인 요소로 구성된 무의 기운을 얻기 위해 무의 기운이 집중되는 시기를 고른다면 절대로 사인, 또는 사진의 시기는 해당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음양오행에 있는 것이다.

 

인검의 ‘인’ 과 진검의 ‘진’ 은 기본적으로 십이지에 속한 동물이지만, 그중 이 둘만이 ‘용’ 과 ‘호’ 로 오행의 정방위에 속하는데, 이 경우 호랑이는 오행의 분류에 따라 ‘의(義)’ 의 성격을, 용은 ‘인(仁)’ 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인검의 ‘의’는 군신간의 의리, 주군과 백성간의 의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백성과 문무백관이 군왕을 받들어 재앙을 없애고 의로운 정치를 세상에 펴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진검의 ‘인’ 은 군왕이 백성과 신하들에게 베풀어야 할 덕목인 어짊, 자애로움, 어진 정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와 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음양조견표(陰陽早見表) 오행조견표(五行早見表)

 

 

* 인→ 호→ 의 : ① 오상(五常)의 하나로‘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② 오륜(五倫) 중 하나로‘군신간의 바른 도리’

 

* 진→ 용→ 인 : ① 유교의 가장 중심적인 정치/도덕이념(윤리적인 모든 덕을 기초로 인을 확산,

                          이상적 치국상태에 도달)

                         ② 군왕과 위정자의 덕목

 

인검유물은 박물관에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비해서 유물로서 확인된 진검은 단 한 자루를 제외하곤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이러한 인검의 성격인 ‘의’ 와 진검의 성격인 ‘인’ 을 기준으로 분석한다면, 왜 세간에 군신간의 칼인 인검은 그나마 흔하고, 군왕과 왕족의 칼인 진검은 남아있는 유물이 극히 드문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같은 순양의 기운을 가진 칼일지라도 그 칼에 깃든 시기와 오행에 깃든 속성상 용처와 대상이 달랐기에 신하를 위한 칼의 수는 다수로, 군왕과 왕족을 위한 칼의 수는 소수로 제작했던 것이 유물의 잔존비율을 결정하게 했던 원인이었다. 결론적으로 사인이 겹치는 시기나 사진이 겹치는 시기를 택하여 칼을 만드는 이유가 ‘무’가 강한 시기이기 때문에 칼을 만든다는 이론은, 그 본의가 실종된 현대에 와서 세인들이 용과 호랑이의 외형적 이미지를 바탕으
로 추론한 억측일 뿐이다. 원래 인검과 진검이 천간지지의 총합을 통하여 얻고자 했던 기운은 순양검의 역할인 벽사와 더불어 ‘인의를 구현시키는 힘’ 이었음을 음양오행과 천간지지를 적용시킬 때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양철학과 우주관 녹아든 형이상학의 과학

 

인검과 진검의 본의가 의와 인의 기운을 띤 칼이고, 그 기운을 깃 들이기 위해 천간지지를 특정시점에 취합시켜 만드는 칼이라는 것은 앞에 설명한 바와 같다. 인검과 진검, 특히 사인검과 사진검은 특정시점의 취함을 통해서 순양의 정기를 집결시켜 만들어진 순양검(동일한 논리로 삼인검과 삼진검은 강양(强陽)의 기운을 띤 칼로 이해할 수 있다)인데, 핵심은 왜 사인검과 사진검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순양검으로서의 위력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선조들의 철학과 동양전래의 우주관을 토대로 한 형이상학의 과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검이든 진검이든 간지상의 특정기운이 집중되는 시기, 인의 기운이 집중되는 시기인 사인, 삼인과 진의 기운이 집중되는 시기인 사진, 삼진을 얻기 위한 조건, 특정시기, 시간에 맞추어 제작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천간지지를 기본으로 한 음양오행의 원리 속에서 의도적으로 양(또는 음)의 기운을 조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10천간은 오양오음(五陽五陰)으로 구성되어 있고, 12지지는 육양육음(六陽六陰)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간지지가 결합된 육십갑자는 우주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고, 음과 양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치를 나타낸다.

 

12지 중 양에 속한 것은 자, 축, 인, 진, 오, 신의 여섯 동물이며, 음에 속한 것은 인, 사, 미, 유, 술, 해의 여섯 동물이다. 이 12지는 양의 기운을 띤 천간 갑, 병, 무, 경, 임과 음의 기운을 띤 천간 을,정, 기, 신, 계의 10간과 합해져서 60갑자를 형성, 무한순환하게 되는데, 이중에서 자, 인, 진, 오, 신의 다섯 지지는 언제나 양의 천간 갑, 병, 무, 경, 임의 다섯 지지와만 결합하여 양의 간지만을 형성하게 된다.

즉, 인은 병인-무인-경인-임인-갑인의 양-양, 진도 무진-경진-임진-갑진-병진의 양-양으로만 간지를 이루어 영구히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재확인할 사항은 인과 진외에 양-양의 간지를 이루는 자, 오, 신의 세 지지에 대한 부분이다.

자의 경우 갑자-병자-무자-경자-임자의 양-양을, 오의 경우 경오-임오-갑오-병오-무오의 양-양을, 신의 경우 임신-갑신-병신-무신-경신의 양-양을 이루며 인, 진과 동일한 양-양의 순환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자, 오, 신 세지지를 순양검의 범주에 차용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오행에 직접적으로 속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십천간과 십이지지는 오행상으로 세부 분류되지만, 기본적으로 오행의 방위에 일방일수로 적용되는 오신수(五神獸)인 중구진(中句陣), 동청룡(東靑龍), 서백호(西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12지지 중에서 인과 진이 오행의 호와 용으로 정방위에 해당되는 동물과 일치함을 이해할 때, 왜 벽사의 보검으로 호를 상징하는 인검과 용을 상징하는 진검이 특별히 선정되어 제작∙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인년, 인월, 인일, 인시나 진년, 진월, 진일, 진시와 같은 특정한 천간지지의 취합으로 순양의 기운을 집결시켜 참요제마(斬妖除魔), 제간서악(除奸鋤惡)할 수 있는 벽사의 순양검(사인검, 사진검)을 만들고, 오행의 용호와 오륜을 적용하여 인의로써 나라의 통치를 이루게 하는 순양검의 궁극적인 덕목을 부여한 것이다.

 

 

애자문 금입사 사인검(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형 금입사 사인검 검신(경인미술관 소장)

 

 

철학과 과학을 총합한 공예의 정수

 

이외에도 인검과 진검은 검신에 입사된 북두칠성을 포함한 이십팔수 천문도에 담겨진 북두의 구궁과 오행의 사신수, 27자 검결이 수행하는 천신과 지신의 강림과 신력을 이용한 벽사와 수호 등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위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날을 제작하는 특정한 시간의 선정부터 인검에 적용되는 벽사를 위한 불가의 길상문양, 검두, 검패의 연화문이나, 애자문양, 검신에 입사된 천지간 신력을 얻고자 했던 기원이 새겨진 주문, 불가의 범어와 실담어로 새
겨진 벽사의 경문, 천지간의 운행과 만물의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하는 등, 어느 것 하나도 간과하거나, 생략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순양의 개념에 버금가는 심오한 고대의 과학과 철학의 이치하에 선조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구성된 현묘한 우주관의 반영이다. 이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상생과 조화를 이루고 총제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벽사의 위력과 순양의 기운을 집결시킨 인검과 진검은 우리 선조들의 우주와 천지만물에 대한 철학과 세계관을 확고하게 대변해주는 결정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검은 신령한 위력과 순양의 정기가 충만한 벽사의 의미가 깃든 조선을 대표하는 칼로서 군신간의 의리와 주군에 대한 충절을 묵시적으로 상징함과 동시에 나라 다스림의 궁극적 귀결인 국태민안과 태평성대의 구가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칼이다.
이러한 인검은 매우 세심한 준비와 정성이 집결되어 만들어진 칼이며, 중국(순양검 자체는 존재하지만, 인검/진검처럼 구체적인 제시가 된 예는 없다)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보배인 보검인 것이다.

 

이번 호로서 우리 나라의 전통무기에 관한 12회의 칼럼 중 조선의 칼에 배려되었던 총 3회에 걸친 연재를 마친다. 이번 칼럼의 주제였던 인검과 진검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속설도 많고,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에 대한 억측과 오류가 난무하는 칼인데, 일단 인검과 진검에 깃든 형이상학의 과학에 대한 설명은 사인검, 사진검의 본의인 순양검의 개념에 대해서만 다뤘다. 칼럼에 소개되었던 우리 도검에 대한 내용들은 도검에 깃든 선조들의 오묘한 우주관과 높은 지혜에 관한 지극히 작은 부분의 소개였음을 알려드리며, 지면관계상 그 실체를 제대로 담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많았기에 독자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글 | 이석재 _ 전통무기연구가,

 

/ THE SCIENCE & TECHNOLOGY

 

 

 

 

 

 

 

 

조선시대의 무예

 

조선의 칼과 무예

 

현재 조선시대의 무예 관련 재현행사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 식·광화문 파수의식 그리고 궁궐호위군 사열의식인 첩종(疊鐘) 등으로, 경복궁 근정전 및 흥례문·광화문 일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 행사들은 조선전기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 오위의 군 사들이 시행했던 임무와 역할을 절차에 따라 재현하는데, 오늘 날의 시각으로 현대화하여 하나의 문화유산 콘텐츠로써 대중들 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문화유산 콘 텐츠는 문화상품 이전에 또 하나의 문화가치를 창출하는 대안 이다.

 

이 중 ‘첩종(疊鐘)’은 『경국대전』 권4(병전 첩종조)에 어전(御前) 사열(査閱) 및 비상대기에 사용했던 큰 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첩종(疊鐘)의식’ 이란 국왕의 명령으로 궁궐에 입직한 군사뿐 아 니라 문무백관과 중앙군인 오위의 병사들까지 모두 집합해 군 사 점검을 받는 사열의식을 말한다. 이는 평상시 비상훈련 대비 와 실제 비상시에 왕권을 신속히 보호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키 려는 조치에서 시행되었다.

재현행사에서는 첩종 종소리에 따 라 궁궐 호위군의 어전 사열과 조선전기 궁궐 호위군 편제에 의 한 오위군(五衛軍)의 주요 진법의 전술훈련 모습, 무예 시범 등 을 시연한다.

 

이러한 재현행사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칼을 사용 하는 도검무예이다. 도검무예는 16세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 선의 훈련도감에 최초로 수용되어 어영청, 금위영 등 도성을 지키는 삼군문과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지키는 총융청과 수어청 그리고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에 단계적으로 보급되면서 18 세기를 기점으로 군영에 정착·보급되어 군사들에게 다양하게 전수되었다.

 

16세기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를 토대로 1598년(선조 31) 한교가 『무예제보』를 저술하여 장도(長 刀)와 등패(藤牌)의 도검무예가 실렸다. 특히 장도(쌍수도)로 불 리는 왜의 대표적인 도검무예를 수록하여 왜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저술된 『무예제보번역속집』에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협도곤(挾刀棍), 왜검(倭劍) 등 3기가 추가되었다. 이 도검무예들은 보군과 함께 마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중 왜검기법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투항한 여여문(呂汝文)과 산소우(山所于) 등의 항왜병을 통하여 교습되었고, 아동대를 편성하여 살수 중에서 왜검을 습득하게 하였다. 이후 무관 김체건(金體乾)은 국내의 동래왜관과 국외의 일본 통신사행을 통해 배워온 왜검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군사들에게 전수하면서 점차 정착되었다.

 

 

 

18세기 도검무예는 정조대 편찬된 『무예도보통지』 권2에 실려 있는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왜검교전(倭劍交 戰)의 4기와 권3에 실려 있는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월도(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의 6기 등 보군이 사용하는 도검무예 10기로 정리되었다.

정조대 도검무예는 조선, 명, 왜 등 동북아시아 삼국의 도검형 태를 금식(今式), 화식(華式), 왜식(倭式) 으로 구분하였다. 도검무예는 쌍수도, 예도, 왜검, 왜검교전, 제독검, 본국검, 쌍검, 등패 등으로 구분했지만, 실제 도검기법을 재현할 때에는 모두 동일하게 요도를 공통으로 가지고 시행하였다.

 

도검무예에 나오는 ‘세’를 기준으로 공격과 방어, 공방의 세 가지 기법으로 구분하여 그 10기의 특성을 살펴보면, 예도, 왜검의 토유류(土由流)·운광류(運光流)·유피류 (柳彼流), 본국검, 월도, 협도, 등패는 공격 위주의 기법, 쌍수도와 쌍검은 방어 위주 의 기법이었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방기법은 왜검의 천유류(千柳 流), 왜검교전, 제독검 등이었다.

 

 

 

18세기 이후 도검무예에 나타난 특성은 군영으로의 보급과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대전통편』, 『만기요람』 등의 사료를 이용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도검무예에 나오는 시취규정은 『대전통편』에서는 관무재(觀武才)와 중일(中日) 시사이다. 관무재(觀武才)에서는 용검, 쌍검, 제독검, 언월도, 왜검, 왜검교전, 본국검, 예도, 등패, 협도 등의 10기를 보군의 도검무 예로 지정하였다. 이는 체계적인 살수 양성을 위한 군사 훈련 목적으로 보인다. 중일(中日)에서는 살수가 검예(劍藝) 1기만을 시험 보았으나, 도검무예 종류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또한 『만기요람』 중순에서는 왜검교전수가 예도와 협도를, 예도와 협도수가 왜검교전수를 중복해서 응시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는 군사들이 여러 종류의 도검무예를 전체적으로 훈련하기보다는 1인 1기의 전문화 된 도검무예 지식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훈련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한 제도라 볼 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 도검무예가 근접전에서 가장 효율성이 높다는 실상을 파악하였고, 마침내 도검 무예의 검술을 수용하고, 법전에 시험과목으로 선정하는 등 도검무예를 정착시켜 나갔다.

 

18세기 이후 도검무예가 갖는 의의는 정조대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24기가 어영청, 장용영의 군사들에게 전체적으로 보급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어영청 군사들에게 도검무예가 보급되고 전수된 것은 1인 1기의 도검무예 군사들을 배출하려는 군영의 의도와 군사들이 포상을 통한 경제적인 이익을 함께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도검무예를 선호하게 되 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도검무예는 제도적으로 중앙의 군사들에게 보급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며, 『어영청중순등록』, 『장용영고사』 등의 군영등록을 통해 어영청과 장용영의 군사들에게 실제적으로 용검, 평검, 제독검, 예도, 협 도, 등패, 신검, 본국검, 왜검, 왜검교전, 쌍검 등의 도검무예가 전수·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후기 도검무예가 갖는 의의는 군사무예에서 개인무예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상무예 6기를 제외한 보군이 사용하는 도검무예가 갖는 위상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18기 중 10기를 차지하는 높은 점 유율에서 드러났다. 더불어 도검무예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법제도적인 장치와 군영의 군사들에게 다양한 도검무예를 습득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1인 1기의 도검무예에 대한 전문적인 살수 양성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무예 관련 재현행사에 공연콘텐 츠로 시범을 보이는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들은 우리의 전통무예를 홍보하는 무형의 전통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무형의 전통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택견처럼 전승체계를 갖출 수 있는 인간문화재와 종목 지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조선시대의 무예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질 때 우리의 전통무예는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글˚곽낙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정보화실 전임연구원 / 한국무예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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