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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표준영정(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④ 최무선과 화약병기

 

화약무기 규격화∙표준화 유럽보다 3세기 앞섰다

 

최근까지도 우리들은 최무선에 의해 화약이 발명되었고, 우리나라는 그때부터 화약병기가 사용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고려말에 이루어진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세계 최초도 아니고, 또 당시 고려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약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고려는 최무선 이전에 화약을 가지고 불꽃놀이도 하였고, 또 무기로도 사용했다는 것이 기록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1104년(숙종 9), 고려는 북쪽의 여진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하였는데, 이 때 발화대(發火隊)라는 특수부대가 편성 운용되었다. 발화대가 일반적인 화공부대인지, 아니면 화기를 장비한 부대였는지 아직까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당시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몽골이 이미 화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고려와 몽골의 교류가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화약병기에 대한 인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135년(인종 13)에 등장하는 화구나 1274년(충렬왕 원년) 여원연합군이 일본 정벌시에 사용하였다는 이른바 철포도 화약병기의 일종이다. 이밖에 ‘고려사’ 열전에는 화약병기로 추정되는 여러 용어들이 나오고 있다.

 

최무선 이전에도 화약 사용 기록 여럿

 

화약병기에 대한 보다 확실한 기록은 1356년(공민왕 5) 9월 고려의 중신들이 서북면방어군을 사열하고, 총통을 발사하니 그 화살이 순천사 남쪽까지 가서 땅에 떨어져 깊이 박혔다는 기록이다. 또 고려가 명나라에 화약병기를 요청하는 기록도 있는데, 1373년(공민왕 22) 11월, 공민왕이 장자온을 명나라에 보내 왜구들을 상대할 배에서 사용할 화약병기와 화약 지원을 요청하였고, 다음해인 1374년 5월 8일, 명나라로부터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기타 필요한 여러 가지 약품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최무선 이전에 이미 화기와 화약이 도입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특히 고려말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왜구를 상대할 신병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고려에서의 독자적인 화약 제조의 필요성은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약병기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화약과 화약병기의 자체생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 수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양권은 이미 금속활자 문화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화기의 주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려의 금속기술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이미 청동기 제품이 대량 생산되어 보급되었고, 거대한 불상을 창조해낼 수 있을 정도로 제철기술이 발전하였다. 또 거푸집의 기술과 규격화된 제품의 대량생산 기술이 집약된 청동활자, 중국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고려동(高麗銅)’-놋, 팔만대장경판에 쓰였던 순도 97.1~99.6%의 마구리 구리판 등은 고려의 놀라운 동제련기술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려의 금속기술 수준은 화약병기의 제조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보인다. 다만 화약을 어떻게 제조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시 화기의 효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중국은 주변국가보다도 우세한 무기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화약의 제조법을 극비에 부쳐 그 기술의 국외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였기 때문에 고려는 화약 제조기술을 쉽게 습득할 수 없었다. 화약의 주요 성분인 유황∙목탄∙염초의 세 가지 중 유황과 목탄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염초만은 제조에 많은 기술적 노하우가 필요하였다. 실로 화약 제조는 염초의 제조 기술에 그 열쇠가 달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당시 고려는 아직까지 화약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화약이 당시 서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결정적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무선은 다른 사람들이 그저 불꽃놀이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화약이 당시 창궐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결정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전술상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흔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말들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 채 많은 일을 그저 지나쳐 버리는 수가 많았는데, 최무선은 비범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실용성있는 염초 제조법을 습득하여 자체생산한 사람이 최무선이었던 것이다.

 

최무선은 이원이라는 중국인으로부터 화약의 핵심기술인 염초 제조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원과 명의 교체기로 화약 제조기술에 대한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져 화약 제조기술이 유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시대의 화약은 유황, 염초, 숯가루를 섞어 만들었는데, 화약을 제조하기 위한 여러 공정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웠던 것이 염초 제조 공정이었다. 최무선은 바로 이 염초의 정제 방법을 처음으로 연구해 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약의 성분 구성은 염초석 75%, 유황 10%, 목탄 15% 정도로 되어 있다. 최무선은 수차례의 실험을 통해서 최적의 혼합 비율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화약ㆍ화약병기 자체 생산해 군사적으로 활용

 

최무선이 화약을 본격적으로 제조한 시기는 1377년(우왕 3)이다.
최무선은 수차례에 걸친 시험을 거쳐 화약을 제조하였고,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火都監)이라는 화기 제조기관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약병기의 제조 업무를 주관하였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곧 고려가 화약과 화약병기의 자체 생산, 그것도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고려는 이제 동양권에서 중국에 이어 두번째의 화기 보유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화통도감에서는 화약과 함께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철탄자(鐵彈子)∙오룡전(五龍箭)∙유화(柳花)∙주화(走火)∙촉천화(燭天火) 등 18종에 달하는 화약병기를 제작하였다.

 

고려는 이들 화기들을 군사적으로 널리 활용하였는데, 이를 위해 화기 운용부대인 화통방사군(火放射軍)도 설치하였다. 나아가 해전에서의 화포 활용을 위해 누선(樓船)이라는 새로운 전함도 건조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화기 운용의 성과는 바로 나타났는데, 화기로 무장된 고려의 전함은 왜구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1380(우왕 6)에 벌어진 진포해전과 1383년에 벌어진 남해의 관음포해전이 그것이다.

두 차례의 해전에서 고려의 화약병기는 왜구 토벌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군사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진포해전은 우리 나라의 해전사상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었다는 점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해전술상에 있어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그러나 아쉽게도 고려의 화약병기는 남아 있는 유물이 없다. 다만,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몇 점 있다. 하나는 경희대 박물관의 고총통 2점이다. 외형적으로는 길이 23.7~24cm, 구경 1.6cm로 명나라 초기의 총통과 유사한데, 내부 구조가 조선 세종 말기의 독자적인 총통 형태와 다르고, 오히려 스웨덴의 로셸트 소총통 및 중국의 14세기 총통과 유사하다. 따라서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제작되었거나 적어도 세종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화기로 추정되는 또 다른 유물은 아리사카(有坂藏)가 쓴‘병기고’에 언급된 유물이다. 길이 35􀅭36㎝, 구경 14㎜∙21㎜의 청동제 화기 2점인데, 표면에‘ 숙자유승(叔字鍮勝), 무게 4근 8냥, 길이 1자 9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아리사카는 이 유물을 12세기 이전 조선의 화창(火槍)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최근에 유물 한 점이 새로 등장하여 세간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998년 4월 문화재 사기 사건의 증거물로 압수된 총통인데, 길이 30.2cm 지름 구경 2.7cm이다. 특히 표면에 ‘홍무 18년(우왕 11년, 1385) 7월에 양광도 내상에서 원수 왕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고 새겨져 있다. 이 총통을 둘러싸고 진위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총통의 형태나 명문, 유물의 상태, 성분비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을 좀 더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만, 이 유물이 고려의 총통으로 입증된다면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화약병기가 된다.

 

 

(가) 무격목형 총통의 내부구조

 

(나) 격목형 총통의 내부구조

 

(다) 토격형 총통의 내부구조

 

 

총신 내부에 격목 끼워 화약 폭발 효과 극대화

 

전통시대에 있어서 화약병기는 크기별로 분류하여 대형 화기와 소형 화기로 나누기도 하고, 총통의 내부 구조에 따라 무격목형과 격목형, 토격형 등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점화 방식에 따라 지화식(指火式)과 화승식(火繩式), 수석식(燧石式), 뇌관식(雷管式)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화기 중에서 화승식인 조총과 뇌관식 총을 제외한 모든 화기, 일반적으로 총통으로 불리는 화약병기는 직접 손으로 화약선에 불을 붙이는 지화식이라 할 수 있다. 조총은 지화식에서 발전한 화승식 소총이고, 구한말에 사용된 뇌관식 총은 화승식보다 진일보한 형식의 화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지화식 화약병기를 중심으로 구조와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지화식 화약 병기는 <표 1>과 같이 흔히 병사들이 직접 휴대하고 다니면서 사용하는 소형 화기와 대형화포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지화식 화약병기 현황

 

 

조선 초기의 소형 화기의 구조는 총신 부위인 부리부(嘴部), 격목부(激木部), 약통부(藥筒部)와 손잡이 형태의 자루가 끼워지는 부분인 병부(柄部)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말에 완성되었으며, 이전의 중국의 화약병기를 모방하는 단계에서 독자적인 형태로 정착되면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주목할 부분은 격목부다. 격목부은 약통 속에 넣은 화약이 폭발할 때 폭발가스의 유출을 방지하여 폭발력을 크게 함으로써 총통이나 포의 성능을 좋게 하기 위해 약통의 앞부분에 끼우는 나무인 격목을 장치하는 부분이다.

 

격목부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 화약병기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고 있는데, 총신의 내부구조가 무격목형(無激木形)과 격목형(激木形), 토격형(土隔形)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무격목형은 주로 려말선초에 중국제를 모방해서 제작하던 단계에 나타난 총통이라 할 수 있고, 격목형은 세종 말기에 대대적인 화기 개량을 통해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총통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총통은 발사물이 화살(箭)에서 탄환으로 바뀌면서 토격형의 총통이 등장하게 되었다.

 

같은 양의 화약이 폭발하였을 때 무격목형과 격목형 총통의 격목이 화약의 폭발력에 의해 각각 받는 힘은 무격목형보다 격목형이 크다. 약통의 내부 폭발압력이 같을 경우 격목에 작용하는 힘은 격목의 단면적에 비례하므로 격목의 단면적이 큰 격목형 총통에서 발사되는 전이 더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격목형 총통은 화살이나 탄환을 넣는 부리의 내부가 직선이 아니라 경사져 있기 때문에 발사물이 똑바로 날아가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무격목형 내부 구조를 가진 총통은 격목형 내부 구조를 가진 총통보다 오래된 형태의 총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총통 중에서는 경희대박물관의 고소총통이 무격목형 총통과 같은 내부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무격목형 총통에서는 탄환은 쏠 수 없고 반드시 화살만 쏘아야 했다. 왜냐 하면 탄환을 발사할 때는 격목을 사용하지 않고 토격, 즉 화약을 약통에 넣은 뒤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다진 뒤 환을 넣고 쏘았는데 무격목형의 약통 내부는 부리 내하경보다 넓기 때문에 약통 내부에 흙이 들어가면 화약이 폭발할 때 총통이 파열되거나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살을 한 개만 사용할 경우에는 화살 뒤 끝부분이 격목 역할을 할 수 있어 격목 없이도 화살을 쏠 수 있었다.

 

논란이 되는 유물의 명문 부분

 

경희대 소장 고총통

 

육군박물관 소장 세총통(보물 854호)

 

육군박물관 소장 삼총통

 

 

무격목형 총통에서 토격형 총통으로 발전

 

격목형 총통의 내부는 화살을 사용하는 총통에 가장 알맞은 구조로 되어 있다. 화살을 사용하는 총통에서는 격목을 사용하여야 약통에서 화약의 폭발로 발생하는 연소 가스의 압력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는데, 격목형 총통의 내부구조는 격목통의 내부가 안쪽(약통)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져 격목을 격목통에 꼭 맞게 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격목이 격목통에 꼭 맞게 제작되어야 화약 폭발에 따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즉 총통에서 화살을 발사할 때 화살의 발사 속도, 즉 화살의 사거리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부 구조를 가진 총통들은 세종 27년 각종 화기의 획기적인 개량 이후 제작된 것들로 거의가 이러한 형의 총통들이다.

 

격목형 총통이 처음 제작된 세종 말기에는 발사물로 화살만 사용하지만‘화포식언해’에 보면 격목형 총통에서도 탄환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발사의 종류에 따라 격목을 사용하기도 하고 토격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발사물이 화살일 때는 격목을 사용하고 탄환일 때는 토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격목형 총통에서 전을 발사할 때는 나무로 만든 격목을 사용하고 탄환을 발사할 때는 흙을 이용한 토격을 사용하였다. 토격은 약통에 화약을 넣고 그 위를 흙으로 다지면서 막아 주는 격목통이 필요 없다. 이러한 까닭에 탄환을 발사물로 사용하는 토격형 총
통에서는 부리의 내경과 약통의 내경이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토격형 총통과 같이 부리부의 내경과 약통의 내경이 같은 승자총통에서는 격목을 사용할 수 없는데 이는 ‘화포식언해’ 의 승자총통에 관한 기록에도 보인다. 즉, 승자총통은 한 냥의 화약을 사용하고 토격의 두께는 6분이며, 철환 15개나 피령목전을 사용하며, 600보를 날아가고, 격목은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소형 총통의 내부 구조는 발사물인 화살의 사거리를 크게 하고,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기 위하여 무격목형 총통에서 격목형 총통으로 변하였고, 총통의 발사물이 화살에서 탄환으로 바뀌면서 총통의 내부 구조도 격목형에서 토격형 총통으로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실제 유물의 형태를 비교해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같은 명칭의 총통이라도 제작시기가 언제였느냐에 따라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아대박물관 소장 사전총통

 

전쟁기념관 소장 사전장총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승자총통(보물 648호)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팔전총통

 

 

냉각제 역할 총통 부리부, 중국보다 훨씬 과학적

 

두번째로 부리부에 있는 마디(竹節)이다. 우리 나라의 총통은 중국이나 외국의 총통보다 마디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총신 부위에 있는 마디의 수효를 비교해보면, 크기가 비슷한 중국제 화약병기는 2~3개인데 반해 조선의 총통은 5~6개로 중국제보다 훨씬 많다.
총통의 마디가 많으면 총통의 겉면적이 넓어져 자연히 공기와의 접촉 면적이 늘어나므로 냉각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냉각핀 역할을 비롯해 폭발할 때의 높은 압력에서도 총통이 견딜 수 있게 총통의 강도를 보강해 주는 역할 등을 하기 때문에 중국제에 비해 훨씬 더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세번째로 다량의 화살을 장전하여 발사한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의 총통은 사전총통, 팔전총통 등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로 화살을 발사했다. 총통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것은 유럽이나 중국 초기의 화포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선에서는 보다 많은 화살을 정확하게 발사하기 위한 연구가 행해졌으며, 그 결과 세종 때는 한번에 4~12개에 이르는 많은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초기의 화약병기에는 강선이 없었기 때문에 탄환보다는 화살이 화살대와 화살깃의 작용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며 날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총통에 여러 개의 화살을 넣어 쏘면 제각각 불규칙하게 날아가기 쉬우므로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상당히 정교한 사격기술이 필요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종말기에 기술적인 개량이 이루어졌고, 일발다전법이 완성됨으로써 안정적으로 많은 화살을 발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모든 화약무기에 대한 성능시험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그것의 단점을 분석하여 개선대책을 세움으로써 전해져오던 화약무기를 더욱 발전 완성하였다. 나아가 여러 가지 화약무기들에 대한 전면적인 규격화, 표준화 실시를 위해‘총통등록’을 편찬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던 것이다.

‘총통등록’의 발행은 병기 기술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이 시기 우리 나라의 병기 제작법이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화약무기가 병기에 도입되어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다량생산, 계열생산 문제가 제기되고 그에 따라 설계의 규격화, 표준화, 제작기술공정의 합리화, 제품의 검사, 시험, 규정의 완성과 같은 문제가 반드시 제기된다. 서구 유럽에서의 화약무기에 대한 규격화는 18세기 중엽에 실현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유럽에 비해 3세기나 앞선 15세기 중엽에 이미 그러한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한 과학성을 느낄 수 있다

 

 

글 | 박재광 _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출처 :

/ THE SCIENCE & TECHNOLOGY

 

과학과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