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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_인문학 산책


평행우주 상상력


나는 관상어, 당신은 관상인


수족관 안에 열대어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관상어라고 한다. 관상어가 사는 수족관은 그것의 우주다.

수족관 안과 밖 사이에는 유리로 된 경계가 존재한다. 유리가 사라지면 관상어의 우주는 붕괴된다. 하지만 세상에 그와 같은 수족관은 수없이 많다. 같은 종의 관상어도 많다.

사람들은 그저 무심하게 자기 눈에 띄는 수족관과 관상어만 볼 뿐 그와 같은 수족관이 이 세상에 몇 개나 있고, 같은 종의 관상어가 몇 마리나 있는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같은 이치로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이름의 수족관에 갇혀 산다.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고,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 있다. 우주에 그와 같은 은하계가 얼마나 많은지 태양계에 갇혀 사는 우리는 모른다. 세상에 널린 수족관이 몇 개나 되는지, 같은 종의 관상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태양계 밖의 무한 우주에 지구와 같은, 지구인과 같은 공간과 존재가 없으라는 법이 없지만 그것을 확인하거나 증명할 방도가 없다. 실제로 있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러니 수족관 안의 물고기는 관상어, 지구라는 수족관에 갇혀 사는 우리는 관상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상어와 관상인 얘기는 비유다. 그런데 이치가 같은 평행우주 얘기를 꺼내 “우리가 사는 우주 말고 다른 우주에도 당신과 같은 존재가 살고 있다”고 하면 대뜸 미친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 외의 우주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온갖 가능성의 우주에 대해 과학자들은 날이면 날마다 떠들어대며 ‘누가 누가 잘하나’ 상상력 대회를 펼친다. 요컨대 모든 우주론은 증명 불가능한 가설일 뿐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동일한 조건의 우주를 상상하는 건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한 양자적 다중우주(Quantum Multiverse)지만,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다중우주에는 누벼 이은 다중우주(Quilted Multiverse), 인플레이션 다중우주(Inflationary Multiverse), 브레인 다중우주(Brane Multiverse), 주기적 다중우주(Cyclic Multiverse), 경관 다중우주(Landscape Multiverse), 홀로그래피 다중우주(Holographic Multiverse), 시뮬레이션 다중우주(Simulated Multiverse), 궁극적 다중우주(Ultimate Multverse) 등이 난무한다.

결론은 한 가지,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모든 가능성의 세계는 과학자들이 수학 방정식으로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우주다. 모든 정황으로 미뤄볼 때 우주가 유일한(Uni) 것이라고 믿으며, 우주를 유니버스(Universe)라고 부르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가 아니니 멀티(Multi)가 되고, 멀티가 되니 당연히 멀티버스(Multiverse)의 개념이 생성된다. 멀티버스에서도 멈추지 않고 메타버스(Metaverse), 제노버스(Xenoverse), 하이퍼버스(Hyperverse), 옴니버스(Omniverse)로까지 확장된다.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나


다른 우주에 나와 같은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여기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런 존재가 하나도 아니고 몇이나 된다면 그 ‘나들’은 또 무엇인가. 우주론이 함부로 다뤄질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존재론적 가치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행우주는 오랫동안 ‘미친 생각’으로 치부되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자리 잡은 이후 평행우주와 다중우주 이론은 과학자 사이에서 상식으로 통용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 모든 상황 변화를 적절하게 압축해 <평행우주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과학계에서 평행우주가 어떤 상식으로 통용되는지 다음 인용을 읽어보면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고향 우주가 거대하기는 하지만 유한하다. 지평선 뒤에는 더 많은 우주들이 있으며, 그 뒤에는 더더욱 많은 우주들이 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우주들은 텔레비전 방송과 같다. 공간, 시간, 에너지와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원자라는 픽셀이 만들어낸 화면이다. 다중우주가 우리의 유한한 우주와 나란히 있는 무한한 우주들로 이뤄져 있다면, 재방송은 피할 수 없다. 물론 텔레비전과 비교한다면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있다. 텔레비전 앞에서 당신은 시청자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당신은 그 장면의 일부이며, 재방송의 일부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 역시 언젠가 이미 존재했으며, 당신이 하는 모든 일도 이미 해본 것이다.


다중우주에는 우리와 마지막 원자까지 똑같은 세계들이 존재한다. 그 세계는 태양계, 지구, 사람들까지 우리 은하계와 똑같은, 말하자면 복사판이다. 대다수 우주들에서 당신의 분신은 당신 행동의 세세한 것까지 그대로 따라 한다. 다른 우주들에서는 정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당신은 앉아 있는데, 분신은 일어서거나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다.


-토비아스 휘르터·막스 라우너의 <평행우주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중 재방송이거나 라이브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위의 모든 인생은 드라마를 지니고 있다. 존재 자체가 드라마인 동시에 배역이고 스토리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우주는 형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 코스모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소설가로서 오랫동안 이 분야에 관해 공부하고 사유하며 문학적 활용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평행우주가 어차피 증명할 수 없는 상상력 게임장이라면 그것을 탁월하게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일 것이다.

외계 행성에서 온 소녀와 지구의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도 모두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나는 순수한 절대 에너지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지만 필요에 따라 특정 행성의 물리적 진동에 맞춰 물질적 형상을 나타낼 수 있어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 3차원 지구의 환경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소통과 교류를 위해 사전 준비를 하기도 하죠. 나는 여러 차원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견인 학습을 진행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차원의 진동 속에서 수련을 받아왔어요. 그 때문에 지구처럼 왜곡된 진동 속에서도 별달리 장애를 느끼지는 않아요. 이런 문제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리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동 원리를 이해해야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극미 세계의 인과법칙을 지구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을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죠.

모든 물질적 형상에는 초의식적 지성이 관여되어 있고, 물리적 우주는 지성과 질료의 결합이에요. 의식에너지가 물질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의식에너지로 돌아가는 패턴이 우주적인 윤회 방식이죠. 그와 같은 패턴 때문에 이 우주에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인간들만 그것을 믿고 그것에 갇혀 살 뿐이죠.”



“그렇게 소모적인 윤회방식이 왜 필요한 거지?

물질이 좋으면 물질로 존재하고 의식에너지가 좋으면 그걸로 존재하면 끝이잖아.

왜 그렇게 자꾸 왔다 갔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3차원의 내부 우주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물질이 진화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지만 3차원 우주 밖의 외계 우주까지 모두 그런 건 아니에요. 적어도 3차원의 내부 우주에서는 물질을 통한 진화 학습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인생이라는 스토리 프로그램이 주어져요.

물질세계에서 인생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인간의 의식은 지속적으로 프로그램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돼 있어요. 현실 의식이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박상우의 장편 소설 <비밀 문장> 중



평행우주, 깨어남의 방정식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 많은 계(界)가 존재한다. 사람이 만든 경계가 무수한 계를 낳아 동물계, 식물계, 인간계가 확연히 구분된다. 사람 사는 세상도 각각 경계가 이루어져 노동계, 실업계, 재계, 미술계, 음악계, 영화계, 문학계, 언론계, 교직계 등으로 나뉜다. 그것이 모여 세계를 이루니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상계라고 한다.


계와 계가 경계를 만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과 쟁투가 끊이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속한 계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계가 서로 맞물려 에너지 연동이 일어나고 있으나 오직 자신이 속한 계만 존재하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계만 앞세우면 드넓은 세상과의 소통과 화합에 근원적인 한계를 노출한다. 반대로 경계를 갖지 않으면 거칠 것이 없고 구애받을 게 없다. 경계를 갖지 않는 건 모든 존재를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평행우주에 다른 ‘나들’이 존재한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나와 에너지 차원에서 연동하는 ‘또 다른 나들’이기 때문이다. 우주 전체의 에너지장은 하나로 연결되고 동시에 연동한다.

요컨대 평행우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우주의 존재를 타자로 분별하기 위한 인식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임을 인식하는 깨어남의 방정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평행우주론이 ‘모든 것의 이론(The Theory of Everything)’으로 자리 잡고, 그것은 또한 ‘지금, 이곳’에서 힘겨운 인생 드라마를 펼쳐가는 3차원 존재의 근본 인식으로 심화될 것이다. 모든 우주에 적용 가능한 모든 것의 이론, 그것이 바로 사랑이니까.


글 박상우(소설가) 일러스트 김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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