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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거울

로마 2대왕 누마가 세운 아름다운 체제, 왜 한순간에 무너졌나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 ‘리쿠르고스와 누마’ 편에서 스파르타의 지도자 리쿠르고스와 로마의 왕 누마를 소개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해 스파르타를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원로원 제도를 도입해서 참주제와 민주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사람들이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못하도록 철로 화폐를 만드는 등 개혁입법에 나섰다.

로마의 입법자 누마는 사제가 왕에게 종교문제를 조언할 수 있도록 했고, 사람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시민의 집단을 민족이 아니라 직업과 기술에 따라 나눠 분열과 갈등을 줄였다. 그런데 두 지도자의 노력은 다른 결과를 보였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입법은 꾸준하게 성과를 냈으나 누마의 입법은 단기 성과에 그쳤다. 이유는 무엇일까. 리쿠르고스는 교육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누마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고 그의 노력은 단기 성과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주


고전에는 현대 지성인들이 되새겨야 할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당한 일, 신기한 일, 혹은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때가 있지요. 지금이 꼭 그런 상황입니다. 기원후 1세기 후반, 그리스 델포이에 살았던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해석하고 있는 제가, 지금 델포이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지난 8주 동안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던 여러 도반(道伴)들과 함께 그리스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와 함께 그리스 여행을 하고 계신 사람들은 정말 멋진 분들입니다. 공직에 계시거나, 일반 기업의 현직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고 바쁜 삶을 살고 계신 최고경영자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저와 함께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공부하고 있고, 호메로스와 플라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 그리스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최근 이룩한 괄목상대는 이런 분들의 부지런함과 노력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분들은 오늘 아침에 아테네공항에 도착했는데, 바로 마라톤 평야로 직행해서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전쟁의 유적지를 돌아봤습니다. 긴 비행기 여행의 여독도 풀리기 전이지만 이분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우스 청동 신상 앞에서 고전기 그리스의 미학에 심취한 이분들의 모습이 청동 신상보다 더 멋져 보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분들은 아테네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델포이로 왔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란 신탁을 받았던 곳,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을 받았던 곳,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하는 패배를 모르는 분’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바로 그 아폴로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아폴로 신전의 사제로 일했지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밤 11시. 어둠이 짙게 내린 델포이의 숲 속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헤겔이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유명한 말입니다. 지금 델포이의 밤을 지키며 구슬피 울고 있는 부엉이 소리를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도 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플루타르코스도 바로 이곳 델포이에서 부엉이 우는 소릴 들으며 <영웅전>을 썼을 것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밤에 날개를 편다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그 사건에 얽혀 있는 교훈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뜻이지요. 플루타르코스가 이곳 델포이에서 한 작업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영웅을 짝을 지어 비교하면서 그 영웅들의 삶에 나타났던 지혜와 통찰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요. 부엉이가 날개를 펴던 늦은 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하며 불면의 밤을 보냈을 바로 그 장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제 가슴이 설렙니다.

지난 회에는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편을 공부했지요? 이번 회에는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와 로마의 입법자 누마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이 글을 델포이에서 쓰고 있는 저나, 한국에서 이 글을 읽게 되실 여러분들 모두를 향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활짝 펼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플루타르코스의 책을 펼칩니다.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 이야기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 사용했던 교육방식을 말합니다.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임전무퇴의 용사를 길러내기 위해 스파르타 사람들은 혹독한 교육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그 덕분에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고의 용사를 길러냈지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했던 레오니다스의 300용사도 바로 이 ‘스파르타식 교육’의 결과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리쿠르고스(Lykrugos)가 바로 그 ‘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해 자신의 조국을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로 만든 지도자입니다. 우선 그는 출신배경부터 남달랐습니다. 스파르타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11대 손이었기 때문이지요. 영웅의 핏줄을 타고난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11대 후손이었고 왕족이기도 했지만 리쿠르고스는 왕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형이 죽자 8개월만 임시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미망인이 된 형수가 8개월 후에 아들을 낳자 리쿠르고스는 조카를 스파르타의 왕으로 정식 선포하고 왕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습니다. 사심 없는 그의 행동 때문인지 스파르타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이 이어졌고 아직 통치하기에는 어린 조카를 위해서 왕위를 맡아달라는 옹립 움직임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왕위를 이어받지 않기 위해 다른 나라로 오랜 기간 동안 외유를 떠납니다.


리쿠르고스가 처음 도착한 곳은 크레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크레타 왕들의 선정(善政)과 안정된 사회 시스템을 보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사회계급 간의 적대적인 감정을 줄이고 인격과 사회의 고결함을 통해 크레타 사회의 화합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스파르타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발견한 셈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이오니아 지방이었습니다. 그리스 동부의 해안 지역으로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가에 해당됩니다. 당시 그곳은 그리스 문명권에 속해 있었고, 그리스 건축의 ‘이오니아 양식’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리쿠르고스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호메로스의 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책인 <일리아스>와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케로 귀환하던 또 다른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담고 있는 <오디세이아>를 접하게 되고, 이를 그리스 본토에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여기서 배움의 여정을 멈추지 않고 이집트(아이귑토스), 리비아(아프리카), 이베리아(스페인), 심지어 인도까지 방문했다는 일부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세상을 주유(周遊)하면서 문물을 깨치고, 이상적인 정체(政體)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됐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조국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염원이었지요.


스파르타란 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원로원이라는 평형수를 채워 나라의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집권만 하면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들의 고약한 버릇을 견제하고 시민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질책하기 위해 원로원 제도가 도입된 것입니다.


스파르타의 시민과 왕의 초청으로, 리쿠르고스는 결국 스파르타로 돌아옵니다. 신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원과 성원 속에서 그는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입법자가 됩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했던 개혁입법은 28명의 원로원을 확보하고 대의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당시에 스파르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체(政體)는 참주제 아니면 민주제였습니다. 권력을 독점하는 개인이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든지(참주제), 아니면 일반 시민들의 권력을 나눠 가짐으로서 평등권을 보장받는 방식(민주제)이었습니다. 리쿠르고스가 도입한 원로원의 존재는 이 두 제도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참주제를 선호하던 왕들은 권력을 영속적으로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플라톤은 이러한 참주제의 모순을 ‘왕들의 열병’이라 불렀지요. 높은 자리에 오르면 꼭 권력을 독점하려는 모습이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과 같다는 뜻입니다.

또한 민주제의 모순은 일반 시민들이 비이성적인 판단을 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기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해득실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리쿠르고스는 원로원 제도를 도입해서 이 두 가지 모순을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국가라는 배(船)의 바닥짐으로 만들어 배의 균형을 잡음으로써 가장 안전하고 질서 있는 방식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5절). 큰 파도가 밀려오거나 배 내부에 충격이 가해져도 배가 전복되지 않는 것은 배 밑바닥에 바닥짐으로 균형을 잡게 했거나 적절한 양의 평형수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 중 하나가 더 많은 화물을 선적하기 위해 평형수를 평소의 29%만 채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파르타란 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원로원이라는 평형수를 채워 나라의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집권만 하면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들의 고약한 버릇을 견제하고 시민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질책하기 위해 원로원 제도가 도입된 것입니다. 물론 외형적인 민주주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의 권익도 최대한 보장해 줬습니다. 왕이나 원로원에게는 법안의 발의권을 보장했지만 일반 시민들도 ‘거부권’ 행사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지켜 나가도록 했습니다. 또 토지를 재분배해서 일시적인 사회 평등을 시도함과 더불어 사회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특단의 교육 조치를 마련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사람들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명예롭게 여길 수 있도록 혁신적인 개혁 작업을 펼칩니다. 우선 금이나 은으로 만들던 주화 제작을 중단하고 값싸고 무거운 철로 화폐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철로 된 화폐를 모아봤자 집안의 무거운 짐만 될 뿐 환금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스파르타 사람들이 지나친 재산 축적을 시도하거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 위해 과도하게 서로 경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은 공동으로 식사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음식은 늘 검소하게 먹도록 했습니다. 남녀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많이 소유하거나 출세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명예를 얻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물론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별히 리쿠르고스의 입법 때문에 부를 빼앗기고 존재 가치를 훼손당했던 부자들이 그를 공격했습니다. 이들 불만 세력을 대표하던 한 청년이 회의를 주관하고 있던 리쿠르고스의 눈을 가격해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자신을 공격한 그 청년을 데려다가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합니다. 평소에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고 있는지, 또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희생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 같이 생활한 것입니다. 말이나 글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생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처럼 입법자인 리쿠르고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던 부자 청년에게도 교육의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리쿠르고스의 공적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업적은 시민들이 자기만을 위해 살고 싶다는 욕구, 혹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지 않도록 훈련시킨 것이었다.” (리쿠르고스 편 제25절)


리쿠르고스의 이런 업적을 통해 스파르타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자웅을 겨뤘고, 결국 승리를 거뒀던 스파르타의 힘은 바로 입법자 리쿠르고스의 업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의 제도에 무엇인가 부족한 부분이 아직 남아 있다고 선포한 그는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으로 가서 신탁을 받아 오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힙니다. 자신이 신탁을 받고 스파르타로 돌아올 때까지 지금 시행 중인 법을 절대로 수정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스파르타 시민들로부터 받아냅니다. 모든 스파르타 시민들이 리쿠르고스에게 맹세를 다짐했습니다. 델포이에 도착한 리쿠르고스의 행적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아폴로 신전에 도착한 그는 아폴론에게 제를 올리고, 자신이 제정한 법이 좋은 법인지, 나라의 번영과 도덕성을 증진하기에 충분한지 물었다. 아폴론은 리쿠르고스가 제정한 법이 좋은 법이며, 도시는 그의 나라 체제를 지키는 한 계속해서 높은 존경을 살 것이라고 했다.

리쿠르고스는 이 신탁을 받아 스파르타에 보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또다시 제를 올리고 친구들과 아들에게 애정 가득한 작별인사를 한 뒤 시민들을 그들이 한 맹세로부터 결코 놓아주지 않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이에 리쿠르고스는 델포이에서 음식을 끊고 죽음을 맞았다.” (24절)


놀라운 결말 아닙니까?

스스로 왕위까지 포기했던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조국 스파르타를 위해서 자결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법을 바꾸지 못하도록 맹세를 받아 놓았으니 결국 리쿠르고스는 델포이에서 곡기를 끊고 자결함으로써 자기 조국의 법을 지킨 것입니다.

델포이에서 <영웅전>을 썼던 플루타르코스는 델포이에서 장렬하게 생을 마감했던 리쿠르고스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리쿠르고스가 설계한 나라 체제는 플라톤과 디오게네스, 제논을 비롯해 이 주제에 관해 인정받는 글을 쓴 모든 사람들이 채택했지만 그들은 말과 글을 남겼을 뿐이다. 반면 리쿠르고스는 말과 글은 남기지 않았으되 모방을 뛰어넘는 실제적인 나라 체제를 남겼다.” (31절)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크르고스가 절제의 교육에 중점을 뒀다면 로마의 입법자 누마는 종교를 이용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종교적 경외심을 심어 주는 것이 그들의 호전적인 성격을 온화한 성격으로 바꾸는 첩경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리쿠르고스가 델포이에서 임종하던 날 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오늘처럼 슬피 울었는지 궁금합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의 이 부분을 쓸 때는 어땠을까요? 그때도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갔을까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델포이의 호텔 옆 숲 속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 한 마리가 슬피 울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델포이에서의 의로운 죽음을 홀로 선택했던 스파르타의 현자를 추도하는 울음소리처럼 들립니다.


로마의 입법자 누마 이야기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로마 시대를 위한 그리스 정신의 가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천박함을 한탄하면서 옛 시대의 깊이와 지혜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 시대에 대한 로망 때문에 고전 공부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경향성의 집대성입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로마 시대의 폭력성과 허장성세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망하고 없어진 나라지만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변하지 않는 지혜의 가치를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를 그렇게 훌륭한 인물로 그렸던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룰 로마의 입법자 누마 왕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대충 짐작하시겠지요? 플루타르코스의 의도를 한마디로 먼저 귀띔해 드린다면 “로마의 입법자 누마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의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로마는 그리스의 사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입법자 누마에 대해서 어떻게 썼을까요? 누마도 대단하지만 리쿠르고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누마(Numa Pompilius)는 로마의 건국왕이었던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로마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기원전 753년 4월21일에 태어났는데 하필 그날이 로물루스가 로마를 창건한 날입니다. 국가 창립 기념일에 태어난 이 아이는 두 번째로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그는 원래 로마인이 아니라 사비니족 출신입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제 ‘사비니 여인의 겁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로물루스가 남초(男超) 사회였던 로마인들의 결혼을 위해 사비니 여인들을 강제로 차지했던 사건이지요. 이 사건으로 로마인들과 사비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사돈 지간이 됐습니다만 고질적인 두 파벌의 정치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누마는 사비니 왕의 사위가 됐지만 아내는 13년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원래부터 절제된 삶을 추구하던 누마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자 아예 시골로 낙향합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갈등과 대립이 그치지 않았기에 왕과 시민들은 누마가 정치 일선으로 돌아오길 간청합니다. 그러자 누마는 이렇게 말했지요.


“로마의 대신 여러분, 로물루스 왕은 여러분에게 여러 전쟁을 물려줬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사의 경험과 능력을 갖춘 왕이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로마 사람들은 전쟁에 익숙해졌고 잇따라 승리한 이후로 전쟁을 하지 못해 안달인가 하면 정복을 통해 성장하려는 욕망에 눈을 감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왕으로 가서 신들을 경배하면,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고 폭력을 증오하라고 가르치면, 나는 우스개 감이 될 것이 뻔합니다.” (5절)


이것은 누마의 말인 동시에 기원후 2세기 초반의 로마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플루타르코스의 입장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전쟁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고 심지어 정복을 통해서 성장하려는 욕망에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 시절에 로마는 정복을 통한 제국의 확장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델포이의 사제였던 플루타르코스는 지금 누마의 입을 빌려 전쟁을 통한 제국 확장에만 눈이 먼 로마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마는 원래 왕이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시민들의 간곡한 설득 때문에 왕권을 이어받기로 결심합니다. 아버지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사비니인들도 간청했습니다. 누마로 하여금 왕이 돼 “시민들을 통합하고 융합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6절)


이렇게 해서 누마 왕의 로마 입법이 시작됩니다. 스파르타에 리크르고스가 있었다면 로마에는 누마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플루타르코스는 누마의 입법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무쇠를 불에 달구어 무르게 하듯 로마인들의 거칠고 호전적인 성질을 보다 온화하고 정의로운 성질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입니다. (8절)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크르고스가 절제의 교육에 중점을 뒀다면 로마의 입법자 누마는 종교를 이용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종교적 경외심을 심어 주는 것이 그들의 호전적인 성격을 온화한 성격으로 바꾸는 첩경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마가 도입한 제도가 바로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와 베스타(Vesta) 여사제 제도였습니다. ‘대 사제’로 번역할 수 있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왕에게 종교문제를 조언할 수 있는 지도자로 로마 사회의 도덕성을 고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순결을 지키며 신성한 불을 관리하는 베스타 여사제의 존재도 로마 사회가 종교적 위엄을 갖추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누마 왕은 이런 종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로마 시민들의 도덕성을 증대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처럼 토지를 재산에 상관없이 재분배했고 민족이 아니라 직업과 기술에 따라 시민들의 집단을 나눔으로써 로마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투르날리아 축제도 만들었는데 일종의 서민들의 축제인 이날은 노예들도 주인과 함께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들에게도 일시적인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평등의식을 고취시킨 것입니다. 누마왕의 이런 노력 덕분에 전투적이던 로마 사람들의 호전성이 크게 완화됐습니다. 로마의 2대 왕이었던 누마가 집권했던 43년간 단 한 번의 전쟁도 없었던 것이 그 단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마 왕의 마지막 임종 장면도 리쿠르고스만큼 장엄합니다. 전례 없던 로마의 평화기를 누렸던 누마 왕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법령이 기록된 책을 무덤에 같이 묻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법전의 내용은 이미 로마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놓았으니 그토록 귀한 비밀을 생명이 없는 종잇장에 맡겨 둬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2절)


그리스와 로마의 비교: 절제의 교육이 관건이다


<영웅전>을 통해 그리스와 로마의 가치를 비교했던 플루타르코스는 제일 먼저 ‘테세우스와 로물루스’를 비교한 다음 ‘리쿠르고스와 누마’를 비교했습니다. 두 사람 다 입법자로서 훌륭한 삶을 살았고 장엄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습니다.

왕족이었던 리쿠르고스는 끝까지 왕위를 사양하면서 입법자로서의 위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반대로 로마의 누마 왕은 아버지와 사비니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차이점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관통했던 핵심 가치의 차이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의 삶은 스파르타인들에게 절제를 교육시켜 지속가능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보일지 모르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스파르타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흠모하는 정치 체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책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모델로 본 나라가 바로 리쿠르고스가 만든 스파르타였습니다.


그러나 누마 왕의 평화를 위한 입법은 단기 결과로 머물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로마의 평화가 유지됐지만 ‘그가 죽고 나자 나라의 체제나 목표, 즉 로마와 다른 나라 간의 평화와 우정의 지속은 그와 함께 땅위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기록돼 있습니다(리쿠르고스와 누마의 비교).

플루타르코스는 지금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을 제시했지만 로마의 누마 왕은 단기간의 성과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래와 같은 다소 가혹한 평가를 통해 누마 왕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누마 왕이 죽자) 다시 이탈리아는 죽은 자들의 피로 뒤범벅이 됐다. 따라서 그가 키운 정의라는 아름다운 구조물은 잠깐 동안도 홀로 서 있지 못했는데 그것은 교육이라는 결합체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리쿠르고스와 누마의 비교)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의 ‘리쿠르고스와 누마’ 편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절제에 대한 철저한 교육만이 그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물질적 소유나 제국의 확장에 눈이 멀었던 로마 사회는 누마 왕의 입법 이후에도 고질적인 갈등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대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더 많은 소유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더 명예로운 삶이라고 가르쳤던 리쿠르고스의 방식이 더 훌륭하고 탁월했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더 많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의 자세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델포이의 사제 플루타르코스는 밤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영웅전>을 썼을 것입니다.

역시 미네르바의 밤 부엉이는 어둠이 내려왔을 때 날개를 펼칩니다. 리쿠르고스와 플루타르코스가 부엉이 우는 소릴 들었을 델포이의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재)플라톤아카데미 연구책임 교수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 동아비즈니스리뷰 D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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