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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거울


페리클레스 vs. 파비우스 막시무스 영웅 이후 개선이냐, 改惡이냐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그리스 최고의 위기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구한 장군은 페리클레스.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장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이들은 모두 아테네와 로마가 경국(傾國)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등장한 영웅이다. ‘군주의 거울’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을 다르게 평가했다.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연 인간은 개선(改善)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개악(改惡)될 뿐인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는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해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승리의 환호성 때문에 이성의 귀가 멀었다. 그렇게 신중하고 관후했던 사람이 타렌툼의 승리 이후부터 갑자기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보다 40여 년이나 어린 장군의 명성과 인기를 질투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초지일관하는 모습을 보여준 페리클레스를 ‘군주의 거울’로 제시했다.



편집자주


고전의 지혜와 통찰은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여전히 큰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의 시대에 탄생하는 영웅


위기가 닥치면 영웅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듭니다. 수나라 백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이 탄생했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성웅 이순신이 등장한 것도 그 이치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외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단결하는 경향을 보이고, 그 집단적 자위의식이 영웅의 탄생을 유도하게 됩니다. 영웅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위기가 없다는 뜻이기에, 영웅 부재의 시대를 굳이 애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계속되는 절망의 시대에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재앙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위기의 징후가 포착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 최고의 위기는 아마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터졌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을 것이고 고대 로마의 최대 위기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유린했던 ‘포에니 전쟁’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시대의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두 갈림길만이 그리스와 로마의 앞길에 놓여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속국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포에니 전쟁’에 직면했던 로마 역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꺾지 못하면 로마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테네와 로마의 이런 위기 속에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입니다. 아테네와 로마가 경국(傾國)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등장했던 이 두 명의 영웅은 지금도 모든 지도자들의 ‘군주의 거울’로 간주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들입니다. 공정한 평가를 통해 후대 지도자들에게 탁월한 리더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객관적인 인물 평가로 유명했습니다. 들추어보면 흠이 없는 지도자는 없었기에 그의 예리한 비판을 피해 갈 수 있는 영웅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비판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페리클레스가 그만큼 위대한 영웅이었다는 뜻이고, 후대의 지도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페리클레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아테네의 위기와 영웅 페리클레스의 등장


차라리 페르시아 전쟁 때가 훨씬 나았다고 아테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한탄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때 무려 500만 명이 넘는 외국 군대가 그리스에 쳐들어 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며 아테네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야말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최악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살육전에 가까웠습니다. 상대방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전쟁을 반문명적인 행동으로 간주하던 그리스 사람들에게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자행된 섬멸전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상대방이 백기 투항을 해도 군인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두 살해하는 참혹한 전쟁이 자행된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전투를 중단하고 들판에서 자란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임시 휴전을 했습니다. 저녁노을이 찾아오면 휴식과 숙면을 위해 전투를 종료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 군대는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했고 겨울이 지나도록 봉쇄를 풀지 않는 작전을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서 인육을 먹는 처참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는 이런 위기의 시대에 아테네를 ‘탁월함’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예 작심을 한듯이 1절부터 페리클레스의 ‘탁월함’을 극구 칭찬하면서 “탁월함으로 충만한 업적은 곧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 탁월함을 우러러 보게 만드는 동시에 그 일을 달성한 사람을 본받고 싶게 만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야말로 아테네 최고의 ‘군주의 거울’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란 뜻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귀족 집안 출신으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 510∼428)의 제자였습니다. 일식(日蝕)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던 아낙사고라스의 제자답게 페리클레스는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력과 미신에 미혹되지 않는 타고난 논리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특별히 그는 절대로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이 논리적인 연설을 할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고, 이것이 그의 리더십 발휘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페리클레스의 명연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자신을 통제하는 일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테네 의회와 자기 집을 오갔을 뿐 다른 곳으로는 아예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직에 있는 때는 친구와의 저녁식사도 모두 거절했고 모든 개인 살림 지출을 직접 관리해서 아내와 아들의 불평이 터져나올 정도였습니다.


로마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페리클레스의 흉상. 머리가 크고 길어 투구로 가린 모습으로 조각됐다.


페리클레스의 경쟁자는 키몬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적국으로 망명을 떠난 다음 키몬이 아테네의 귀족 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적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부유한 소수보다 가난한 다수”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하고(8절), 평민들에게 토지를 무상 배분해 주고, 연극 공연을 무료로 즐길 수 있게 해줬으며, 배심원으로 일하면 보수를 지급하는 등 서민 우선 정책을 펼쳤습니다. 키몬이 장악하고 있던 아레오파고스(귀족 집단)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아스파시아 흉상.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에게 연설을 가르친 지적인 여성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와 사실혼 관계를 이어갔기 때문에 정적으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를 통치했던 기원전 5세기를 ‘페리클레스의 황금기’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널리 알려진 그의 업적은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대대적인 공공건물의 신축이었습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페리클레스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델로스 동맹의 동맹금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그것이 낭비가 아니라 아테네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혜안이 돋보이는 연설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델로스 동맹금을 각종 사업에 사용하는 것은 적절한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수요가 촉진될 것이고, 그 결과 온갖 기술이 우리 아테네에서 발전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을 움직여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린다면 우리 도시는 아름다워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급자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7절)


페리클레스의 재정 집행 계획에 따라 파르테논 등의 아테네 건축물 건축을 주도했던 사람은 건축가 페이디아스였습니다. 그는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아테나 여신상을 황금으로 주조해서 유명해졌습니다. 사용된 금의 일부를 착복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페리클레스를 흠집 내기 위한 정치적 음모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가 이류작가였다면 이런 식의 영웅담을 계속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영웅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과연 변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과연 개선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원래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는 것인가? 인간은 개선될 수 있는가? 아니면 개악될 뿐인가?

‘페리클레스 vs. 파비우스 막시무스’ 편은 아마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웅전> 최고의 사례일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 편’ 15절에서 영웅 페리클레스도 변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예전같지 않았으며 전처럼 아테네 시민들에게 순종적이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는 키잡이처럼 시민들의 욕망에 이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느슨하고 때로 유약했던, 마치 향기롭고 은은한 선율 같던 과거의 통치방식을 버리고 귀족적이고 왕다운 정치력이라는 맑은 고음을 때린 것이다.” (15절)


페리클레스도 변했습니다.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었던 페리클레스도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나쁜 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좋은 쪽으로의 변화였습니다. 개선된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현실 직시에서 시작됐습니다. 제국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던 아테네는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때부터 페리클레스는 변했다는 것입니다.


“실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있는 그토록 큰 제국에서 온갖 질병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했다. 페리클레스는 이 모든 질병을 일일이 적절하게 다스리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들의 희망과 두려움을 마치 방향타처럼 이용해 그들이 오만할 때 경고를 주고, 좌절해 있을 때 위로를 주었다.” (15절)


그 이후부터 이어지는 페리클레스에 대한 전기적 탐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위기를 극복해 가는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입니다. 그는 “적들에게는 무서운 모습을 보였고 동료 시민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19절). 물론 언제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내와 자식의 일탈이 있었기에 가정의 불행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아스파시아와의 관계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고, 정치적 결정 때문에 대중의 비난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정적들은 그를 위협하고 비난했으며 연극 무대의 합창대는 지저분한 조롱의 노래를 부르며 페리클레스를 비겁한 자”라고 모욕을 주곤 했습니다(33절). 이런 비난과 조롱을 묵묵히 견디던 페리클레스는 결국 아테네에 창궐한 발진 티푸스에 걸려 임종하게 됩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영웅의 최후를 기록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기록을 덧붙였습니다.


“테오프라스토스가 그의 저서 <윤리>에서 사람의 성격이,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따라 변하고 육체적 고통에 의해 높은 기상을 버리도록 강요받는지 탐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역병 때문에 몸져누웠던 페리클레스는 문병 온 친구에게 집안 여인들이 목에 걸고 있는 부적을 보여주면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허용할 만큼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나타냈다.” (38절)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도 죽음과 역병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성격을 바꾸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을 통해 우리는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의 집필 동기가 단순하게 페리클레스 같은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영웅도 최후의 순간에 부적과 같은 미신에 의존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이라는 대작을 통해 성찰하고 싶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본성은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개악돼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탁월한 ‘군주의 거울’이었던 페리클레스도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나쁜 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좋은 쪽으로의 변화였습니다. 개선된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현실 직시에서 시작됐습니다.


로마의 위기와 영웅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등장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 BC 280∼203)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맞붙었던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의 시험대였다면 포에니 전쟁의 위기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까지 발발했던 로마와 카르타고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말합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의 각축전이었다면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벌어진 두 나라의 운명을 건 지루한 전쟁이었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남하하면서 본격화됐기 때문에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스페인 지역에서 행군을 시작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는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로마를 압박했고 그에 맞섰던 장군이 바로 파비우스 막시무스였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늘 신중하게 행동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위기에 처한 로마를 구하기 위한 적임자로 지목됐고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진 전쟁 수행을 위한 독재관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는 한니발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는 지연 작전을 선택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호전적이었던 로마 시민들은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작전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누키우스라는 또 다른 독재관을 임명해 두 명이 함께 작전을 펼치도록 했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보다 먼저 전공(戰功)을 세우고 싶었던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을 우습게 보고 진격하다가 죽을 고비를 맞게 됩니다. 군사전략의 천재였던 한니발은 미누키우스의 군대를 협곡에 몰아넣고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경쟁자인 미누키우스와 그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웠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결단과 용기가 없었다면 미누키우스와 그의 군대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료 독재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던 미누키우스는 “큰소리로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아버지로 불렀고, 그의 부하들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부하들을 ‘보호자’로 불렀다”고 합니다.(8절)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런 신중하고 관후(寬厚)한 성격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성격이 바뀝니다. 아니,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심성의 본색이 드러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관후한 사람이란 따뜻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런 따뜻한 성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부하 군사들이나 동료 시민들을 대할 때 늘 인간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장교들이 사병을 함부로 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동맹국의 시민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런 관후했던 성격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말과 개를 조련하는 사람도 짐승의 고집과 사나운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불만을 없애기 위해 막대기나 굵은 목줄보다는 따뜻한 보살핌과 친절함, 그리고 먹이에 의존하는데 사람을 지휘하는 자들이 호의와 친절을 바탕으로 삼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20절)


여기까지가 그의 훌륭함이었습니다. 신중하고, 합리적이었으며, 관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성격이 바뀝니다. 아니,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심성의 본색이 드러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당시 한니발 장군의 군대는 이탈리아 남부의 전략도시 타렌툼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이 도시를 되찾기 위해 기발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레기움이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동원해 타렌툼과 레기움 사이 지역을 공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한니발이 타렌툼에 주둔하고 있던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중간 지역으로 이동할 틈을 노려 타렌툼을 수복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천하의 명장 한니발이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략에 말려들었고, 타렌툼은 다시 로마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자신의 야심에 굴복한 듯하다.(22절)” 기발한 작전으로 전략의 귀재를 전략으로 물리쳤으니 보통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그런 승리의 환호성 때문에 이성의 귀가 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중하고 관후했던 사람이 타렌툼의 승리 이후부터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면 타렌툼에서 노획한 거대한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을 로마시내 한복판에 세우고 그 옆에 자신의 기마상을 전시한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하는 허무맹랑한 행동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 “별난 행동”을 처음에는 무심코 받아들였습니다.(22절) 그러나 변해버린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점점 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BC 236∼183)를 모함하고 탄핵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대대로 로마를 통치해 오던 귀족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부친과 삼촌은 모두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이미 로마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니발의 후발 부대를 전멸시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잔류하고 있던 한니발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카르타고를 선제 공격해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면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결국 퇴각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그때부터 외부의 적인 한니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젊은 경쟁자였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자신보다 40여 년이나 어린 장군의 명성과 인기를 부러워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작전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는 “로마가 어리석은 젊은이의 인도에 따라 멀고도 치명적인 위협을 향해 지나치게 서둘러 가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25절)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예전의 신중하고 관후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견제하기 위해 전쟁 예산도 삭감했고 군대 규모도 줄여 버렸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이런 옹졸한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물론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처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반대한 것은 극심한 조심성과 분별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시기심과 경쟁심 때문에, 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커지고 있는 영향력을 꺾기 위해 더욱 거칠고 강력하게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25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원정을 감행했고 자마 전투(BC 202)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승전보가 듣기 싫었던지 자마 전투 승리 1 년 전에 로마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남겨진 재산은 철로 된 동전꾸러미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들은 그의 장례식을 위해 “로마에서 가장 액수가 적은 동전을 기부”했습니다.(27절)

1원짜리 동전을 모아 장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무려 5번이나 로마 집정관에 올랐고 독재관을 지낸 인물치고는 정말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개선되는가, 아니면 개악되는가?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생애를 열거한 다음, 두 사람을 비교합니다. 당연히 아테네 사람 페리클레스는 높이 치켜세우고 로마 사람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깎아내립니다.


불행으로 인해 겸손해지고 필요에 의해 현명한 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비교적 쉬워 보이는 반면 번영으로 인해 고무돼 있고 오만함과 무모함으로 부풀어 오른 나라 사람들의 고삐를 잡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비교’ 1 절)


한마디로 페리클레스가 더 본받을 것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비우스 막시무스 시대의 로마는 한니발 침공이라는 역경에 처해 있었기에 통치하기가 쉬웠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 기고만장해진 아테네인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수행했던 페리클레스가 더욱 위대한 인물이란 것입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타렌툼을 수복한 것이 그의 유일한 승리였다면 페리클레스는 평생 9번의 승전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사망한 다음 아테네와 로마에서 벌어진 일도 두 사람의 능력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죽고 난 다음 아테네에 큰 위기가 닥친 반면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죽음 이후에 로마는 더욱 번성했습니다. 로마의 새로운 지도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지혜와 용기’ 덕분에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고 새로운 제국의 꿈을 펼치게 됩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시기심과 경쟁심에 눈이 멀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음해하는 옹졸한 정략을 펴다가 시민들의 지탄을 받으며 임종하고 말았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동상.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쇤부른 궁전 정원



플루타르코스는 지금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영웅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기계적으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는 플루타르코스의 진짜 의도는 “과연 인간은 개선(改善)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개악(改惡)될 뿐인가”라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약 2000년 전에 던진 이 질문은 지금도 우리에게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얼마 전에 만났던 한 기업의 인사 교육 담당 임원께서도 이 문제를 10년 넘게 고민해 왔다고 합니다.

그분의 관찰에 의하면 “직원들에게 아무리 좋은 교육을 시켜도 업무에 임하는 근본 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관점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직원 교육의 효능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분의 결론이었습니다.


위대한 전략가였던 한니발 장군의 동상. 루브르박물관 소장.


정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이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경우처럼 개선되지 않고 개악만 된다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의 노력도 다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통찰력 있는 냉소적인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교육이란 무릇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적용될 때를 제외하면 별 의미가 없는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희망은 페리클레스의 사례입니다. 그는 완전히 변해서 개선의 방향으로 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악되지는 않았던 인물입니다. 역병에 걸려 부적을 달고 다니는 집안 여인들을 말리지 않을 정도로 변했지만 그래도 그런 변화는 용인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초지일관(初志一貫)했던 인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지금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군주의 거울’은 초지일관하는 지도자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초지일관의 리더십을 통해 난세의 영웅이 됐고 그의 탁월함은 아래 문장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우리가 대망(待望)하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있는 큰 제국에서 온갖 질병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했다.

페리클레스는 이 모든 질병을 일일이 적절하게 다스리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들의 희망과 두려움을 마치 방향타처럼 이용해, 그들이 오만할 때 경고를 주고, 좌절해 있을 때 위로를 줬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재)플라톤아카데미 연구책임 교수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 동아비즈니스리뷰 D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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