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다녀와서
내 리듬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오늘도 남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지금까지 자서 애들 점심도 굶겼다는ㅠㅠㅠ
벌써 일주일도 넘었는데
이런 게으름을
체력이 떨어진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막상 인도로 떠날 때는
딸내미와의 동행을 신중히 생각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괜시리 생고생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지구력이 없고 입도 짧은 아이에게
인도여행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딸내미는 꼭 가야 한단다.
가고 싶고 이미 친구들에게도 자랑을 다 해 놓았으므로.......
그리고 돌아와서는 나보다
인도를, 아니 인도 사람들을 더 그리워한다.
인도의 무엇에 우리가 반했을까?
숙소가 깨끗하고 좋았던 것도
음식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던 것도
기차나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쾌적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차를 세 번 탔는데 한 번은 두 시간 넘게 연착했고 한 번은 안개를 이유로 아예 빠져 버렸다.
덕분에 뒷 기차를 대책도 없이 타야 했고 빈 자리 17좌석에 가이드까지 35명이 앉아야 했다.
그것뿐이랴? 예정 도착시각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많게는 곱절 이상 기차에 시달려야 했다.
버스라고 다르랴? 비포장 도로를 끝도 없이 달려 골이 띵하기도 했고
네팔 국경을 넘을 때는 심한 꼬부랑길이 이어져 멀미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나도 살짝 울렁거렸다.
도로 사정이 나쁘고 안개가 심해서 속력을 내지 못해
다섯 시간째 화장실을 못 가고 얼굴이 노랗게 뜨기까지 했다.
어느 호텔에서는 그릇이 더러워서 도저히 먹고 싶지 않기도 했고
어떤 샘은 밤새 추위에 떨고 서러움의 눈물을 터트리기까지 하셨다.
새벽 6시부터 도시락 싸 들고 움직였건만
관람시간이 끝나 먼 발치에서 돌아서야 했던 것만도 세 번,
갠지스강에서의 힌두의식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용을 써 봤지만
(그리고 바라나시 근처까지는 시간을 맞추었지만)
역주행한 차들 때문에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 자리에 묶여 발만 동동거려야 했다.
차라리 걸어가겠다는 샘들도 있었지만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길을 걸어가봤자 의식이 끝나는 8시까지 도착할 수도 없단다.
이쯤되면
'주여! 뜻대로 하소서' 할밖에.
네팔 국경을 넘으면서 경비행기를 타자는 의견에 중지가 모아지는 듯 했지만
사고가 나면 보험도 안 될 뿐더러 여행사에서 책임을 지지 않을 거라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버스 속 난상토론을 보면서 '목숨 걸고 인도 탈출?' 스스로가 난민처럼 느껴졌다.
(목숨이 걸린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으므로 반대의견을 존중하여 버스여행을 계속했다.)
교통과 숙소와 음식과 화장실 문제에 가이드 문제도 더해졌다.
어떤 이유에선지 가이드가 바뀌었는데 씽이라는 이름의 그 가이드의 한국어 실력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여섯 살 아이 수준이었다.
유적지 앞에서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옆 사람과 앞 사람의 말이 다 달랐다.
나중에는 아예 듣지 않고 내 느낌을 중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인도여행은 '산 너머 산'이었지만
아쉬움 속에 여행을 마쳤고
집에 돌아와서는 마치 꿈을 꾸고 온 것처럼 몽롱했다.
피곤함에 절은 몽롱함은 결단코 아니었다.
누군가 인도에서 가장 좋은 볼거리는 검은 눈동자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기차여행에서 만난 인도인들의 검은 눈동자는 신비함으로 다가왔다.
그 눈동자 속에 체념을 담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영국에 이백 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문화를 지켜낸 사람들,
우리 눈에 지나치게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보일 정도로 여유있는 사람들.......
그 인도 사람들이기에
타지마할도 카쥬라호도 아잔타 석굴도 가능했던 거 아닐까 싶다.
살다가
자신이 싫어지거나
사는 것이 시큰둥해질 때
배낭에 옷가지 대충 챙겨 떠나면 좋을 곳이 인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향한 그악스러움이 속절없이 느껴질 것 같다.
남편은 인도가 무섭게 변할 거라고 하지만
인도의 고집이 세계화로부터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그래서 언제가 됐든 내가 다시 인도를 찾게 되면
내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