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좋다오

이렇게 살아라!-도움 주고받기

마태복음 6:1-4 / 김병삼 목사

 

하지만 다 알아!

누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가진 세 가지의 본능을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이 가지거나 먹고 싶어 하는 소유욕,

두 번째는 무언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정치적인 명예욕이 여기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 하는 종교적 도덕적 욕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누가복음 10장 30절 이하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라고 시작하는 이 이야기.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만일 강도 만나서 피를 흘리는 현장이 예루살렘 성전 앞이었다면 그들이 그냥 지나갔을까요? 우리는 선행과 구제, 의라는 것들을 행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까요? 공중파 TV 카메라가 여러분을 종일 따라다닌다면 여러분은 참 선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지난 주간 교회 직원들과 함께 제주도에 위로회를 갔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무엇을 할 수 없어서 세 조로 나누어서 움직였습니다. 저와 아내는 네 번째 조가 되어서 둘이 올레길 4코스를 걸었습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아내가 말합니다. “우리가 걷는 거 보면 부부인 줄 다 알아!”

가만히 보니 저는 열심히 걷고 아내는 뒤에서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걷느냐가 중요하구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선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죠.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누구나 선을 행할 수 있는 환경에서가 아니라 누구도 선을 행하기 쉽지 않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더욱 은밀한 중에 아름다운 일을 이룰 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칭찬이나 존경을 선한 일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일 뿐입니다. 동기나 목적으로 행하는 선은 의미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도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사람 앞에 은밀한 선이 가장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의 착한 일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진실 된 사랑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노먼 루이스가 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라는 책에 예화입니다.

스탠포드 켈리가 수년간 사역했던 아이티는 세계에서 극빈한 나라 중 하나이다. 그 나라의 어느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축하하며 각 교인이 사랑의 헌금을 드렸다. 한 십 대 소년이 드린 봉투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석 달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켈리는 소년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켈리는 마을에서 그를 만나 헌금의 경위를 설명해 달라고 강권한 결과, 소년이 헌금을 위해 말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왜 교회 축하연에는 오지 않았을까? 그는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입고 갈 옷이 없었어요.” 그 소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켈리는 여러 교회에서 이 소년의 이야기를 전했다.

 

어느 날 집회가 끝나고 나서, 부유한 차림의 여인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며 소년에게 옷을 사주라고 했다. 켈리는 실망했다. 그리고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제가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런 옷값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소년의 헌금이 하나님께 귀했던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을 위해 귀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 된 당신이 베풀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돈으로 베푸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돌아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섬김을 하는 것이다. 쉬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의’에 대하여…

이제 마태복음 6장으로 넘어갑니다. 5장에서는 우리 삶의 도덕적인 ‘의’에 대하여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셨다면, 6장에서는 ‘종교적인 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결국, 6장 전체의 주제는 우리의 ‘의’가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이나 이교도들, 비종교인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1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5장의 말씀과 조금 상충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아니, 바로 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니 조금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들의 ‘다른 약함’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죠. 빛을 사람에게 비치라는 것은 소심하여 드러내지 못하는 믿음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 앞에 경건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를 드러내려는 과장된 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잘 구분해야 할 부분입니다.

 

존 스토트의 [산상수훈]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숨기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보여 주어야” 하고 “보여주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숨겨야” 한다. 우리의 선행은 공개되어서 우리의 빛이 비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적 경건은 비밀에 부쳐 우리가 그것을 자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게다가 두 교훈의 목적은 같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보면 1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연극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여라. 그것이 멋진 연극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은 박수를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산상수훈을 계속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참 ‘성숙함’과 관계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조급했던 것이 있습니다. 만나 교회를 알리고, 한국교회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누군가 우리가 하는 선행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성숙하고 나니, 만나 교회의 선행이 아닌, 하나님의 선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이 가려져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면…. 이전에는 ‘나’가 주인 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은 ‘나의 의를 내세우지 않는 의로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죠. 이제 나타나는 것은 절제되는데,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로움에 대한 자랑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의로운 고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로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닌 의로운 행위가 무엇일까요? 한국 교회의 대형화를 비판하면서 이제 우리는 교회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외치는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회가 커가는 길을 그대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일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의가 드러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박수를 보내시지 않는 일은 선한 일,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의’는 연극이 아닌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땅한 일을 신기하게 연극처럼 바라보기도 하지요. 분명한 것은 ‘의’는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절이 오늘의 말씀과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오늘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주제의 가장 명확한 실천이 아닐까요?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이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주님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분명히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은 철저하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입은 자들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참다운 의를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빌은 흐트러진 머리와 헐렁한 옷차림으로 유명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매일 똑같은 청바지에 구멍 난 티셔츠를 입고 늘 똑같은 샌들을 신고 다녔다.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는 아주 영리했고 전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을 정도로 똑똑했다.

 

어는 날 학교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뜨거워진 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교목은 빌에게 좋은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했다.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 길을 한 번 건너면 작고 보수적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할 때 다들 옷을 잘 차려 있었다.

 

첫날 예배시간에 빌이 느직이 교회에 들어섰을 때, 그 교회 성도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빌은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늘 입는 구멍 난 티셔츠에 청바지, 샌들 차림으로 강대상을 향해 중앙통로를 걸어 내려갔다. 빌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자리가 없었다.

 

결국, 빌은 맨 앞줄까지 와서도 빈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강대상이 정면으로 보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례하게 행동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빌은 대학 강의실에 빈자리가 없을 때와 똑같이 행동했다.

 

바로 그때 예배당 뒤쪽에 있던 집사가 일어나 빌에게 다가왔다. 그는 80대 노인으로 아주 기품 있는 신사였다. 은발에 안경을 쓰고 비싼 정장을 입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통로를 따라 걸어왔다. 소란이 일자 설교자는 설교를 멈추고 집사가 앞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 이상한 젊은이에게 다른 자리를 찾아보라거나 예배당에서 나가달라고 말할 거로 생각했다. 규율이 잘 잡힌 80대 노인은 규율이 잡히지 않은 젊은 대학생의 행동거지를 이해하지 못할 거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빌의 옆자리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앉았다. 덕분에 빌은 바닥에 혼자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다. 강대상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고 온 교인이 손뼉을 쳤다. 목사가 말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한 설교는 아마 한두 주일 동안 기억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본 이 설교는 남은 인생 동안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구제’에 대하여…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본문 2절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구제할 때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구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의심의 여지 없이 행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행함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관계있는 일’입니다. 그분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성경으로 더 보겠습니다.

 

남을 위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너희 자신이 주목받지 않도록 하여라. 분명 너희도 내가 ‘연극배우’라고 부르는 이들의 행동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회며 큰길을 무대로 알고는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으면 긍휼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한다. 물론 그들은 박수를 받지만, 그것이 전부다. 너희는 남을 도울 때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소리 내지 말고 은밀히 도와주어라. 사랑으로 너희를 잉태하신 너희 하나님도 무대 뒤에서 일하시고, 너희를 은밀히 도와주신다.

 

‘구제’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외식’과 관계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은밀한 마음의 생각을 지적하셨던 것처럼 구제의 문제도 같은 맥락입니다. “문제는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는 손이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의 가능성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것이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는 탐욕스런 갈망이 아니었을까요?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오늘 말씀 중의 또 재미있는 표현이 있죠?  “나팔을 불지 말라!”

우리가 단순히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한테 “주둥아리로 나팔 불지 마!”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이나 회당에 있는 특별한 상자에 돈을 놓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주러 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나팔을 부는 이유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와라! 돈을 주겠다!” 그러나 주님은 역시 그들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분명 가난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나팔을 부는 체할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들의 갈채와 칭찬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이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듯합니다.

남을 위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너희 자신이 주목받지 않도록 하여라. 분명 너희도 내가 ‘연극배우’라고 부르는 이들의 행동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회며 큰길을 무대로 알고는,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으면 긍휼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한다. 물론 그들은 박수를 받지만, 그것이 전부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깊이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누구를 돕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과연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오랜 논쟁이 있었습니다. 꼭 교회에서 누군가를 도우면서 드러내야 합니까? 혹 어떤 이는 우리 교회가 하는 것을 누군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양심에 손을 얹고 ‘알리거나 숨겨야 하는 동기가 무엇이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화자찬을 하는 순간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받았다.”라는 말도 원어에 보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아페초’라는 희랍어인데 당시 상거래에서 사용되던 전문용어였습니다. 즉 “총액을 다 받고 영수증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문 3절 말씀을 볼까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요?

이 말씀의 진의는 헌금을 하던 구제를 하던 자신 스스로 의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이것이 자꾸 의식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의를 즐기고 빠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목회자들끼리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교인들이 차를 사줄 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누가 사주는 차를 타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를 사준 사람은 늘 목사님이 탄 차를 볼 때마다 자신이 산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고, 목사도 그 차를 탈 때마다 사준 사람을 의식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지만, ‘하나님을 의식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 교회를 건축하고 나면 나중에 화근거리가 있습니다. 당시는 필요해서, 믿음의 고백으로 교회에 필요한 성물들을 해 놓지만, 그것을 바꿀 때가 되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습니다. 자신의 헌신의 증거가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이 참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전철에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꼭 멀리 가십시오. 양보한 후에 그분 앞에 그대로 서 있으면 양보받은 분이 미안하고 불안합니다. 양보받은 사람의 마음마저 편하게 해주어야 진짜 양보입니다. “내가 이만큼 나눴다!”라는 공로의식은 나눔이란 보석에서 불순물과 같은 것입니다. 보석은 불순물이 적을수록 가치가 올라가듯이 공로의식의 불순물이 없어야 그 나눔이 금강석처럼 영롱한 나눔이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계속해서 ‘행동이 아닌 마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제’의 행위는 자비의 행동입니다. 누군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비의 행동이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의 유익이 아니라 그것을 주는 우리의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이타주의가 왜곡된 이기주의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제의 특징은 자축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스스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본문 4절의 말씀인데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제할 때 어떤 상도 바라지 말고 하라고 하셨는데, 사람의 갈채도 자신의 허영심도 채우지 않도록 오직 구제하고 잊어버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겠다니요? 그러면 우리가 구제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고 하라는 것인가요?

 

세상 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상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요? 어쨌든 두 가지가 다 동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갚으시는 상급은 우리가 바라는 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구제할 때,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이 경감되고, 그들의 필요가 채워질 때, 굶주린 사람이 먹게 되고,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게 될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은밀한 기쁨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상과 우리가 바라는 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또 존재합니다.

우리가 상을 받을 때, 그것이 알려져 존경을 받을 때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힘들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기꺼이 믿음으로 행했을지라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참다운 상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갚으심은 도움을 받은 자에게 채워지는 잔잔한 미소가 아닐까요? 나에게 찾아오는 상급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채워지는 은혜를 바라보는 기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가장 값진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이기심을 벗어난 진정한 구제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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