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 식구와 한방을 둘로 갈라
안방 윗방으로 정하고
그 윗방에서 우리 네식구가 피난살이를 시작 했다.
고된 피난길에 얻은 병으로
문규가 귀병이 도져 마침내 곪기 시작하고
아픔을 호소하며 자주 울며 보챈다.
그러나
내가 해줄수있는 치료란게
시커먼 이불솜을 뜯어 성냥개피에 말아 귓속의 고름을 닦아주고
읍내에서 구해온 긴기랍(항생제)을 숫가락에 조금 찍어
다른 먹거리와 함께 입에 넣고 강제로 삼키게 할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읍내엔 의원도 없었고
100여리 이상 떨어진 대전에나 나가야 치료를 받을수 있겠지만
난리통에 어디를 가거나 치료를 받겠다고 움직일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도
배운자와 못배운자사이에 이념의 갈등이 암암리에 자연히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의 피난길이 여기가 끝인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이 시골에도 가진자와 못 가진자.
배운자와 못배운자사이에 이념의 갈등이 암암리에 자연히 싹트기 시작했다.
며칠전 부터는 낮과 밤을 구분하여
국군과 인민군놈들이 출몰하며 동리인들의 무고한 고발에
도피와 은둔의 나날을 보내게 되어 피를 말리는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나는 문규와 필규를 업었고
병필삼촌과 남편은 보따리 몇개를 지개에 지고
으슥한 밤을 틈타 또다시 피난길에 나서야만 했다,
(자료사진)
얼마간 머물었던 문간방에는
시아버님만 남아계시고
우리식구 모두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야 했다.
팔매실(보은군 회북면 송평리:옛날 고려장터)의 밤길은 정말 험했다.
낮에는 국군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고
다시 밤이되면 인민군들이 혈안이되어 국군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기에
마을에 젊은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한곳에 머무를수가 없었다.
밤에는 인민군이,
낮에는 국군이 교대로 마을을 뒤지며 쑥밭을 만들고
마을 주민들이 발고한 사람들을 찾아 잡아갔다.
그러던중 우연히 인민군들이 남편을 찾는다는 것을 어른들이 귀뜀을 해 주었기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