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위키만 읽고 쓰니까 편하군요--;;

이럼 안되는데 말입니다.ㅠ.ㅠ


프랑스 혁명전쟁...28.제노바 기습 (1793)


1793년 8월 툴롱이 왕당파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영국과 에스파냐 함대가 툴롱항을 장악하게 되면서 지중해에 있던 지중해 함대 상당수가 영국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지중해 함대 상당수는 영국군손에 넘어가게 되었지만 일부 배들은 툴롱에서 피신할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안전한 지역을 찾아 북부 이탈리아 항구로 가게 된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 지방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있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랑스의 간섭을 많이 받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뒤 이런 이탈리아에서는 혁명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프랑스와 가까운 제노바 공화국 역시 이런 혁명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제노바 공화국은 혁명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중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제노바의 항구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 모두가 보급할수 있었다. 영국측 대사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항의했었음에도 제노바는 중립을 내세우면서 계속 보급을 했다.


이런 상황은 툴롱에서 벗어난 프랑스 전함이 제노바의 항구로 들어오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미 영국 해군에 의해 장악되었던 리구리아 해(Ligurian sea)에서 전함들과 전투하는것보다는 호의적이었던 제노바등의 이탈리아 항구로 피신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전함들중 36문의 대포를 가진 프리깃인 모데스트(Modest)는 제노바로 피신했으며 40문의 대포를 가진 엥페리유즈(impérieuse)는 토스카나 대공령이었던 리보르노로 피신하게 된다. 두 도시는 모두 프랑스와 프랑스 대혁명에 호의적이었으며 이때문에 프랑스 배들을 항구에 정박하게 허용한 것이었다. 물론 제노바의 영국 대사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토스카나의 영국 대사였던 허비 경(존 어거스투스 허비)은 격렬히 항의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리구리아 해

파란라인 빨간라인 다 합쳐서 대충 저 지역이랩니다.-0-;;;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후드경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선단을 보내게 된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존 겔 제독(Rear Admiral John Gell)으로 그의 기함은 98문의 대포를 가진 전열함 HMS 세인트 조지(St George)였다. 그외에도 3척의 전열함이 더 있었고, 프리깃과 브릭등 일곱척의 더 작은 배들이 함께 함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재미난것은 이 선단에는 찰스 커닝햄이 지휘하던 브릭인 HMS Speedy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배의 함장들은 전부 유능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소설인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HMS Sophie는 토마스 코크런이 이 스피디의 함장일때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함대는 10월 5일 제노바에 도착하게 된다.



존 겔 제독

대충 유능한 사람이랩니다.--;;;

(읽기 귀찮아서 생략)


도착했을때 모데스트는 항구에 두척의 작은 배 옆에 있었고, 영국 선단의 함장들은 문제를 상의한다. 외교적인 해결 방안이 실패해서 제노바가 프랑스 전함을 지원하게 될경우를 대비해서 전함들은 전투하기 최적의 위치로 갔다. 10월 5일 오후 영국 전열함 세척은 조용히 프랑스 전함 양 옆으로 정박했다. 


프랑스 선원들은 영국 전함에 야유를 했었고 그동안 영국 전열함인 베드포드에서는 프랑스 프리깃으로 병사들이 승선했으며 베드포드의 함장인 캡틴 로버트 만은 자신의 배에 있던 해병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프랑스 선원 한명이 죽고 여러명이 다친후에 프랑스 프리깃은 항복했다. 보트로 도망가려던 몇명은 이미 대기중이던 영국 전함의 다른 보트에 의해 제지당했다. 모데스트와 함께 있던 작은 두대의 배 역시 영국의 손에 들어왔다.

이 기습공격은 매우 성공적이다. 프랑스 선원 한명이 죽고 10명이 다쳤지만, 영국 선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이 기습은 곧 리보르노로 피신했던 프리깃 앙페르유즈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앙페르유즈는 서둘로 리보르노를 떠나 라스페치아 근처에서 숨어있었다. 10월 11일 영국 전열함들은 이 배를 발견하고 다음날 배를 장악하려했다. 하지만 프랑스 선원들은 그전날 모두 배에서 탈출했으며 배는 비어있었다. 결국 영국은 이배를 무사히 손에 넣었으며 작전을 무사히 마친 선단은 다시 툴롱으로 돌아갔다. 


찰스 커닝햄

HMS 스피디의 지휘관

그는 이때 공으로 캡틴으로 승진합니다.



두척의 프랑스 배들은 당시 신식배였으며 영국 해군은 이 배들을 바로 자신들의 전함으로 쓰게 된다. 겔의 작전은 성공했지만, 외교적으로는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상황에 대해서 프랑스와 대혁명에 호의적이었던 제노바의 공화주의자들은 굉장히 분개했다.그들은 "모데스트의 학살" 이라면서 영국과 동맹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했다. 이후 제노바는 영국과 다른 동맹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제노바를 통해 툴롱으로 이동하려던 오스트리아군의 입성을 거절했다. 제노바는 영국 대사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비롯한 모든 영국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했으며, 이때문에 겔은 항구를 봉쇄하고 제노바로 가던 중립국 상인 물품들을 모두 압류했다. 


모데스트의 학살

프랑스 화가인 니콜라 오잔이 그린 이 그림에서 비무장한 모데스트의 병사들을 영국군이 학살하는것처럼 묘사하므로써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합니다.-0-;;;;



이후 툴롱에서는 보충병으로 와야했던 오스트리아 군은 툴롱으로 가지 못했던 반면, 프랑스는 툴롱으로 군대를 계속 보냈으며 걸출한 인물이었던 나폴레옹이 툴롱을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영국과 에스파냐 군은 툴롱에서 물러냐야했으며 프랑스는 다시 툴롱을 장악할수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이 있어서 어떻게 될지는 알수 없을 일이었지만, 적어도 오스트리아 보충병들이 툴롱으로 갈수 있었다면 툴롱이 프랑스측으로 다시 넘어가는데 시간이 좀더 걸릴수도 있었을 것이기에 어쩌면 이 작전은 성공한 전투였지만 전쟁에는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할수 있겠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