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것까지 두편 남았는데 마지막 한편을 쓸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음냐...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써야할듯합니다. -0-;;;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8) 자녀들과 후손들


이자보는 샤를 6세와의 사이에서 열두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여덟명의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세 아들중 두 아들은 20살이 되기전 사망했으며 막내인 샤를은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국왕 샤를 7세가 됩니다만 이자보와 그는 부모자식간이었지만 정적이었고 그녀와 샤를은 서로를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샤를 6세와 자녀들



이자보에 대한 악의적 이야기중 하나가 그녀가 다른 많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일것입니다. 오를테앙 공작은 물론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만 이것은 대부분 아마도 그녀의 정적이나 그녀의 아들의 앙위계승권리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던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그녀가 미쳐버린 남편을 정부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자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곁에서 여전히 있었으며 샤를은 1408년 경에도 여전히 이자보와 함께 잠자리를 했었습니다. 또 병을 앓고 있는 남편을 위해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기적을 바라면서 교회에 기부등을 했었으며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 역시 허락했었습니다.(중세시대에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은 종교적 열망에 인한 것으로 하나님에게 자녀를 바치는 것은 가장 큰 종교적 희생이기도 했습니다.)


이자보는 당대 많은 왕가의 어머니들처럼 아이들을 일찍 멀리 떠나보내야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아이들은 각자의 궁정을 가지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죠. 하지만 이자보는 아이들의 교유겡 신경을 썼으며 자녀들과 자주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또 1399년에 파리에 흑사병이 돌았을때 이자보는 아이들을 모두 파리 외곽으로 보냈지만 너무 어려서 데리고 갈수 없었던 잔과 함페 파리에 머물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녀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자보와 샤를 6세


이자보와 샤를읜 살아남은 자녀들중 첫째는 딸인 이자벨이었습니다. 이자벨은 두번의 정략결혼을 합니다. 첫번째는 일곱살이었던 1396년 이었습니다. 샤를 6세의 광기가 시작되었기에 프랑스는 잉글랜드와의 안정이 필요했었죠. 리처드 2세 역시 내부적 문제를 해결해야했기에 프랑스와의 전쟁은 한발 물러서려햇었죠. 이렇게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 조약의 일부로 이자벨이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된것입니다. 하지만 이자벨이 11살이 었던 1400년 리처드 2세는 헨리 4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자벨은 남편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으며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을 이어가길 바랬던 헨리 4세가 자신의 장남(헨리 5세_와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에도 거부했습니다. 1401년 프랑스로 돌아온 이자벨은 1406년 다시 한번 더 정략결혼을 합니다. 바로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이었던 오를레앙의 샤를과 결혼한것입니다. 그리고 19살이었던 1409년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죠. 이자벨과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딸 유일한 딸인 잔은 후에 역시 발루아 가문의 방계 가문 출신인 알랑송 공작 장 2세와 결혼했지만 잔은 후손없이 사망했습니다.



리처드 2세와 만나는 이자벨 드 발루아


이자보의 둘째는 딸인 잔이었습니다. 그녀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결혼했는데 장 5세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뒤 잉글랜드의 헨리 4세와 재혼했었고 이때문에 브르타뉴 공작은 헨리 4세의 의붓아들이자 헨리 5세의 의붓동생이기도 했었습니다. 잔은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의 사이에서 세명의 아들과 네명의 딸을 낳았습니다만 세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죠. 잔의 두 아들은 차레로 브르타뉴 공작이 되습니다만, 세아들 모두 후계자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잔 드 발루아

브르타뉴 공작부인


이자보의 셋째는 딸인 마리였습니다. 이자보는 남편의 광기를 낫길 바랬고 딸인 마리를 교회에 바치므로써 남편의 병이 낫길 바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리는 1397년 4살의 나이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1405년 정치적 목적으로 이자보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마리를 결혼시키길 원했는데 마리는 이를 거절했고 15살이었던 1408년 수녀로 서원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녀는 수녀원에서 살았으며 1438년 흑사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마리 드 발루아


이자보의 넷째는 딸인 미셸이었습니다. 미셸은 1409년 정치적 목적으로 부르고뉴 공작의 후계자였던 필리프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미셸은 일찍 죽은 딸외에는 후손이 없었습니다. 미셸을 부르고뉴에서 사랑받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1422년 갑작스럽게 아프다가 사망했기에 미셸이 죽은뒤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미셸 드 발루아

부르고뉴 공작부인


이자보의 다섯째는 아들인 루이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게자로 도팽이었으며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와의 유대 관게가 강했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처럼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을 받아들였으며 강력한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아르마냑파 사이의 중재를 떠 맡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자보는 아들이 프랑스의 평화를 가져올것이라 여겼었지만 그는 1415년 18살에 병으로 사망햇습니다.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의 딸인 마르거리트와 결혼했지만 후손은 없었습니다.



도팽 루이



이자보의 여섯째는 아들인 장이었습니다. 장은 어린시절 홀란드 궁정으로 갔는데, 홀란드,질란드,에노등을 통치했던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의 공작 빌헬름 2세의 외동딸인 자클린과 결혼해서 장인의 영지를 물려받도록 되어있었기에 8살이었던 1406년 자클린과 결혼해서 프랑스를 떠나 살았었죠. 1415년 형인 루이가 사망하자 형의 뒤를 이어 도팽이 되었습니다만 그는 부르고뉴파였던 장인의 영향력아래 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417년 18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었다고 합니다. 장 역시 후손이 없었습니다.


이자보의 일곱째는 카트린이었습니다. 그녀는 1420년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헨리 5세와 정략결혼합니다. 그리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헨리 6세를 낳죠. 하지만 남편이 죽은뒤 그녀는 웨일즈 출신의 기사였던 오웬 튜더와 비밀리에 결혼했으며 둘사이에서는 여러아이가 태어납니다만 비밀 결혼이었기에 아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았습니다.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두 아들인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는 이부형인 헨리 6세에 의해서 궁정에서 키워졌으며 귀족작위를 얻었습니다.특히 에드먼드 튜더는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인 보퍼트 가문 출신인 서머셋 공작의 딸이었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했고 둘의 외아들인 헨리 튜더는 후에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가 되죠. 헨리 6세는 역시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인 앙주의 마르거리트와 결혼했습니다. 마르거리트는 샤를 7세의 왕비였던 앙주의 마리의 조카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들인 에드워드를 얻었지만 장미전쟁 와중에 아들은 물론 헨리 6세마저도 살해당합니다.



카트린 드 발루아

잉글랜드의 왕비

19세기 그림


이자보의 여덟째이자 살아남은 자녀중 막내는 바로 후에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샤를 7세입니다. 샤를 7세는 왕위계승권에서 배제 되었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결국 프랑스의 왕위를 얻게 되죠. 그는 친척이었던 앙주의 마리(샤를 6세의 숙부였던 앙주 공작 루이의 손녀)와 결혼했습니다.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와 손자인 샤를 8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했었습니다만 샤를 8세는 남성 후손을 얻지 못했고, 왕위는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손자였던 루이 12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루이 12세는 후손이 없었기에 역시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후손이었던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죠. (그뒤로는 앙리 2세 나오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 나오고 그렇습니다.)



샤를 7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