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비바람은 성(城)머리에 불고

어둡고 스산한 공기는 누각에 가득한데,

푸른 파도속에 때는 이미 어스름

푸른 산 쓸쓸한 기운은 가을을 감도누나.」

 

<조선 제 15대 임금, "광해군"이 제주 유배생활 중에 지은 詩중에서>

 

제주 올레 20코스는 광해왕이 제주 땅에 한많은 첫발을 내린 곳이다.

당시의 지명으로는 어등포(魚登浦, 지금의 구좌읍 행원리)...

 

참으로 멍청했던 임금(인조)과 붕당 패거리 서인세력에 밀려 폐왕이 된 광해군,

무려 14년 간을 유배지로 전전하다 결국은 여기 척박의 땅,

제주까지 와서 위리안치 되었던 남자, 광해군....

 

그는 이 곳 제주에서 다시 4년여를 더 비참하게 연명하다

왕위 재위 15년, 유배 18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결국은 여기 제주 땅에서 67년의 보령을 마감한다.

 

올레 20코스는 그가 도착했던 길이다.

 

 

여름이면 귀양왔던 왕의 사연만큼이나

숱한 사연과 젊음이 뒤섞여 추억을 만드는 곳,

월정리 해수욕장.

올레 20코스의 6.2km되는 지점이다.

 

 

온통 현무암으로 뒤덮여 검은 섬이 되어버린 제주,

그러나 백옥같이 희디 흰 월정리의 백사장,

이 곳의 백사장은 조개껍질과 산호가 섞인

그야말로 순백의 결정체이다.

 

 

바람이 얼레빗으로 곱게 빗어서 만든 모래결,

바람 방향이 바뀌면 이 모래결도 방향을 바꾼다.

바람은 많은 것을 바뀌게 한다,

나그네의 옷차림도, 왕의 시심(詩心)까지도..

 

 

철부지 나그네는 바람이 불어도 개의치 않는다.

이러고 걷는다.

나는 똑바로 걸었고 앞만 보고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 보니 이 모양이다.

그러고도 후회없이 깔깔거린다. 인생은 다 그렇게 사는거라고...

여행은 이처럼 사람을 속도 없이 마냥 비우게만 만드는 것이다.

 

 

 

 

철 많이 지난 바닷가에는 곳곳에 상념도 많다.

멀리 수평선에 넋을 놓은 나그네,

아마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그 어떤 게 흉중에 있는 모양이다.

 

 

 

 

길은 다시 사연 많은 바다를 벗어놓고 들길로 간다.

방향을 크게 바뀔 때 마다 간세다리가 마중을 한다.

이제는 간세다리가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친숙해졌다.

 

 

 

 

 

 

 

 

카나리엔시스 야자수가 왕성하게 2세를 준비한다.

이 기특한 녀석은 자신의 고향인 지중해의 온화한 안방을

오래전에 떠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머나먼 이국, 제주의 세찬 겨울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만을 가는 강인함을 자랑한다.

 

 

 

 

 

 

제주의 미스 잡견,

혹은 미세스 올레견,

주인대신 남새밭을 홀로 매다가 ,

올레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와서 이방인을 환영한다.

 

 

행원포구에 위치한 올레 스탬핑 포인트.

또한 여기는 학술적으로 검증된 광해왕 최초 기착지이기도.

 

서기 1637년 봄,

우리 땅에 참으로 존재해서는 안될 치욕의 임금인 인조와

탐욕의 화신 인목대비, 그리고 패당 서인 세력에 의해 강화도에서 다시 원지 유배되었던

광해임금이 결국은 그의 죽음의 터가 되고 말았던

이 곳 제주도행의 첫발을 디딘 곳.

 

 

 

그 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파도는 땅을 삼킬 듯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승자들에 의해 이미 역사 속에 철저히 은페되고 엄폐되고 만 것을...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사실은...

아직까지 이 땅 제주에  가장 지위 높은 분으로서, 가장 오랜동안,

 가장 처절하게 살다 가신 분이 광해임금이다.

 

강화섬과 제주섬에 켜켜히  얽힌 광해임금의 이야기에서

이제 그 분에게 족쇄처럼 채워졌던, 그릇된 역사의 허울들을 벗겨내고

가식의 겉껍질을 떨쳐내어 인간 광해, 남자 광해.

그리고 진정한 왕자(王者) 광해로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나그네는 4백 수십 년 전의 애환을 되뇌이며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보다 발 아래에 마련된 비탈길이 더 중요할 때.

 

 

 

 

끊임 없이 동행해 주는 억새꽃과 풍차,

이제 그만 따라와도 되련만.

이 길 끝까지, 멀리서 온 나그네에게 초심처럼 책임을 다하겠단다.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같이 가야지...!

 

 

 

 

 

 

여전히 길은 충분히 다채롭다.

큰 오르막도 없는데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발바닥은 지구 중력에 의해 온도가 발화점까지 오르고.

 

 

 

 

아침부터 온통 뿌연 흐림으로 시작했는데,

왼종일 햇볕 구경하기가 힘든다.

얼굴 탈 일 없어서 차라리 좋다.

 

 

 

 

 

 

 

 

풀꽃 하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모두들 인사를 한다.

초면이라고...

그래서 반갑다고...!

 

 

이 세상에 길은 많다.

벼룻길, 푸서릿길, 자드락길, 등굽잇길, 거님길....

제주 올레길에는 이런 길들이 다 있다.

여기는 전형적인 푸서릿길...

 

 

등굽잇길과 마을 거님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거기에 비례해서 나그네의 피로지수는 급격히 쌓여만 가고...

 

배추꽃도 소리한다,

나도 엄연히 이 땅, 제주의 꽃이라고..

 

 

구슬 수선화도(흰꽃나도샤프란) 한마디 한다,

야생에 있을 망정, 나도 이 땅의 엄연한 꽃띠 주인공이라고....

역시 제주는 따뜻한 고장이다.

이 계절에 보기 힘든 귀한 꽃들을

이처럼 겨울 목전에 야생의 길섶에서 만날 수 있다는 행운을 베푼다.

 

 

 

 

벌써 눈에 익어버린 마을 길과 해안길이 무한 반복을 한다.

꼬불꼬불, 지그재그, 돌고돌고...

어쩌면 이 길은 아까 지나왔던 그 길이 아닐까....

 

 

어느 고마우신 분이 당신의 텃밭을 내어 주셨다.

이 밭 주인의 배려가 없었다면

아마도 또 다시 네 발 달린 흉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도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많이~!

"없는 듯 아니온 듯 흔적 남기지 않고 조심해서 지나가겠습니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가야할 길은 아직도 요원한데,

발바닥에서는 이미 발화가 시작 되었고,

그토록 거나하게 섭취했던 점심식사도 이미 칼로리로 방전되었고...

 

 

오늘이 음력 초 열흘이었던가...

남의 속도 모르고 성질 급한 달이 먼저 하늘을 밝히고 나섰다.

갈 길 남은 나그네는 예나 지금이나

달 밝은  밤 길은 서럽다.

 

 

나그네의 발걸음을 염려한 가로등도 생색을 낸다.

따뜻한 물, 기름기 둥둥 떠도 좋으니 자양분 그윽한 고깃국,

그리고 밀감 막걸리 한 사발....캬~~!!!

가로등 불 속에서 먹을 게 마구 날아다닌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음이 지금 내 마음이다.

 

 

그래도 이정표는 닥치고 계속 가란다, 쭈~욱!

가라면 가야지~

에고 팔 다리 허리야~!

 

 

 

 

바야흐로 도착지 권역에 당도한 듯,

친구는 최종 목적지까지 "불과"1km "밖에" 안 남았다고 귀띰한다.

흐미~! 1km씩이나...!

 

 

결국 나머지 최종 1km는 대부분의 포유류의 자세처럼 네발로 기었다.

배낭이랑 철천지 원수같은 카메라는 친구에게 맡기고...

고마우이, 친구~! 복 받을겨~!

 

 

하도리 해녀 박물관...20코스의 끝점!

새벽잠 떨치고 나와서 달이 중천에 떴을 때야 마무리 했다.

누가 상을 준다고 했으면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습관성 도발...

 

 

비로소 다 왔다.

제주 올레 20코스, 평짓길 16.5km.

지침서에는 다섯 시간이면 족하다고 했는데...

나는 무려...여덟 시간을 걸었다.

한 시간 반 이상, 풍성하고도 영양가 있는 점심 식사를 했고

아늑하고 의미있고 풍광 좋은 데서는 어김없이 신발까지 벗고 쉬었다.

 

반드시 정해진 시간내에 도착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노동이다.

내 돈 들여서 노동을 해야할 까닭이 없다.

 

바람의 길, 20코스,

왕이 왔던 길, 올레 20코스.

사단 법인 제주 올레에서는 가을에 가야할 좋은 코스로,

3, 9, 12, 20 코스를 추천했다.

오늘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다시 등산화를 벗는다.

내일, 제주 올레가 대단원의 순환고리를 연결하는 날,

나는 다시 여기에서 등산화를 신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뿌듯한 성취감을 위해 파티를 열 것이다.

오늘 저녁, 가자, 친구야,

젖과 꿀이 흐르고 술이 익어가는 우리의 만찬장으로~!

이 밤엔 내가 지갑채 쏠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