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의 저자 레자 아슬란의 신작 <인간화된 신>을 읽었습니다.
제가 가진 몇가지 철학적인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인간이 언어를 넘어서 생각해낼 수 있을까?”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저에게 하나의 질문이 더 생겼습니다.
“인간이 신을 인간의 생각의 넘어 느낄 수 있을까?”입니다.
책이 300페이지 넘지만 실제로는 230페이지 정도의 책입니다.
주석과 참고문헌이 다른 책에 비해서 엄청납니다.
230페이지정도의 실제 내용이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읽기가 굉장히 어려운 책도 아니었습니다.
번역이 생각보다 힘들었을 거 같은데 상당히 잘 되어 있습니다.
종교관련 서적의 경우 너무 많은 의역을 하는 경우,
그 반대의 경우 모두 읽기가 어려운데 그런 부분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좀 비유를 하면 ‘종교로 쓰여진 사피엔스’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과 비견해도 될 정도의 책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앞서 던질 질문에 저 스스로 답을 좀 하고 글들을 남기면서 리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인간이 신을 인간의 생각의 넘어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표현한다. 종교는 무언가 신성시되어서 인간의 쓰는 단어와 표현인데 인간적인 부분을 벗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가 아는 신들은 거의 인간의 형태를 빌려서 이야기를 전달했다. 예수, 알라, 하느님, 부처 등 우리가 아는 신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되어 왔다.
난 무신론자이다. 신에 대해서 내게 묻는다면 무관심이라고 답하고 싶다. 증명할 수 없기에 부정도 긍정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적어도 지금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 속의 신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난 이 생각을 수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 아닌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인간화된 신>에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무언가를 느낀다. 느낀다라고 말하는 거도 단어적 한계일 수 있다. 이런 논란을 말하면 이 그를 마무리할 수 없어서 표현의 한계를 인정하고 말을 이어가겠다. 그 무언가는 알 수 없다. 그 시작은 아마 죽음이었을 것이다. 태어나고 싶어 존재하지 않아서 끝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존재. 그래서 무언가를 정의하려고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통해 무지를 숨기었다. 무지의 영역을 줄어들었다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만 우리는 기존의 무지를 벗어난 것뿐이다. 그 속에 좀 더 진실된 더 큰 무지를 발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도 그 무언가를 믿는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믿는다. 그것도 결국 무언가이다.
인간은 결국 인간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도 인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는 해법은 신을 인간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신은 상상해보라고 요구를 받으면, 어린아이는 예외없이 초인적 능력을 지난 인간으로 묘사한다.
- 7 –
내가 ‘인간화한 신’humanized God이라 칭하는 이 개념은 신이라는 생각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부터 우리 의식에 심어졌다.
- 10 –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트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인도인과 페르시아인, 히브리인과 아랍인 등 모두가 인간적인 언어와 현상으로 각각 고유한 유신론적 체계를 고안해냈다.
- 10 ~ 11 –
요즘의 유대인과 기독교인, 무슬림은 형체가 없고 결코 실수하지 않으며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하고 전지전능한 유일한 신에 대해 신학적으로 ‘옳은’ 믿음을 천명하려고 무지 애쓰면서도 인간의 형상으로 마음속에 상상하고 인간의 언어로 신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 11 –
이 책은 우리가 신을 어떻게 인간화해왔는지를 다룬 역사인 동시에, 인간의 강박적 욕망을 신적인 것에 억지로 떠안기는 충동을 중단하고, 신에 대한 ‘범신론적’ 견해를 더욱더 발전시키고자 호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 13 –
아담과 하와는 내세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번거롭게 매장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죽은 사람을 굳이 매장해야 할 실질적 이유는 없다.
- 22 –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들의 머문 곳은 거이 어디에나 그런 믿음의 흔적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25 –
우리의 선조 아담과 하와는 안개 속을 멍하니 걷다가 계시를 받은 선지자처럼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담과 하와는 사냥 방법과 인지능력과 언어를 물려받았듯이 신앙 체계도 물려받앗다.
-45 –
종교에는 통합하는 힘만큼이나 효과적으로 분열시키는 힘이 있다. 요컨대 종교는 포용하면서도 배척한다.
- 53 –
미국의 위대한 인류학자 클리퍼드 거츠가 말했듯이 “아마도 종교는 인간에게 기운을 복돋워주는 만큼 인간을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 57 –
여기에서 우리가 탐구하려는 것은 영혼이라는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든 입증할 만한 객관적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보편적 믿음이 모든 창조에 내재된 신적 존재의 적극적,능동적 개업이라는 개념으로 어떻게 발전했는지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 74 –
고대 경전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이, 에덴동산 이야기도 ‘신화’로 읽혀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화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거짓’false은 아니다. 신화의 의의는 신화에 담긴 내용의 진실 여부truth claim에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한 세계관을 전달하려는 힘에 있다. 신화의 기능은 세상이 ‘어떻게’ 지금처럼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게 아니라 ‘왜’ 지금처럼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 78 –
우리 자신이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창이다. 인간이든 아니든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것에 우리는 개인적 경험을 적용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를 인간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신까지 인간화한다.
- 84 –
우리가 신을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할수록 인간의 속성이 더욱더 신에게 투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치관이 신의 가치관이 되었고, 우리의 특성이 신의 특성이 되었을 것이다.
- 84 ~ 85 –
우리는 사냥을 통해 인간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농업은 인간의 의미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사냥으로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면, 농업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배하며 별과 태영의 움직임에 농사 주기를 맞추어야 했다.
- 87 –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을 영적 차원의 중심에 두었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 위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고 지상의 신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럽과 그리스에서, 또 이란과 인도와 중국은 물론 그 밖의 문명지에서 원시적 애니미즘이 조직화된 종교로 구조적으로 변한 이후에는 각각 인간의 특별한 속성을 하나씩 지닌 인격화, 인간화한 신들이 등장했다. 결국 인간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지닌 유일한 신까지 탄생했다.
- 95 ~ 96 –
신적인 존재를 우리 형상대로 만들어내려는 무의식적인 인지적 충동 – 신적인 존재에 우리 영혼을 부여하는 충동- 으로 시작된 것이 그 후로 영성이 조금씩 발달한 1만 년 동안 신을 더욱더 인간에 흡사하게 만들어가려는 의식적 노력으로 변해갔고, 마침내 신이 그야말로 인간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96 –
아트라하시스의 대홍수에 대한 고대 수메르 서사시가 4000년 이상 전에 쓰였더라도 그 이야기가 무척 귀에 익은 이유는 당연하다. (중략) 어떤 점에서 이 시노하는 전형적인 ‘민족 공동의 기억’이며, 대부분 학자가 이 신화가 먼 옛날 실제로 일어난 재앙적 홍수에 기반했다고 믿는다. (중략) 무대도 다르고, 신도 다르고, 결말도 다르다. 각 서사시가 작가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반영하며 다시 쓰였기 때문이다.
- 101 –
문자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문자의 발명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나누는 경계선이다. 메소포타미아가 문명의 요람으로 알려진 이유는 기원전 네 번째 천 년의 어느 시점에 수메르인들이 추축축한 점토판에 뭉툭한 갈대 펜을 굴려가며 쐐기 모양 문자로 뭔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형문자’cuneiform로 일컬어지는 그 문자 덕분에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극히 추상적인 생각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 103 ~ 104 –
신을 우리 형상대로 만들려는 무의식적이고 내밀한 욕망까지 겉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우리가 신에 대해 뭔가를 쓰려고 할 때, 예컨대 창조가 시작되는 신화적 이야기와 종말론적 대홍수에 대한 논쟁에 신들을 등장시킬 때 신들도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거라고 상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신들에게 인간의 속성과 감정을 심어주고, 인간의 의지와 동기를 옳겨놓는 것이다.
- 105 –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누구도 우상을 진짜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 ‘우상이 신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런 양면적 사실을 복잡하지만 무척 중요한 핵심이다. 우리가 신에 대한 글을 쓸 때 그 신에게 인간의 감정과 동기를 본능적으로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112 –
바바라 그라치오시는 대표적 저서 <올림포스의 신들>에서 “그리스 신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는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119 –
그리스 사상가들은 ‘하나의 신’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신을 ‘완전한 본질’, 즉 모든 창조물에 깃든 근원적인 실체로 재정의하려고 애썼다. 게다가 그들은 신을 인간화하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오히려 더 원초적이고 물활론적으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사상한 신은 형체나 몸이 없고 인격과 의지가 없는 ‘탈인간화’한 신이었다.
- 123 –
차라투스트라는 이 신에 ‘지혜로운 주’라는 뜻의 ‘아후라 마즈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아후라 마즈다는 호칭에 불과했다. (중략)
차라투스트라 스피타마는 오늘날 ‘선지자’prophet로 일컬어지는 존재의 역할을 해낸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 132 –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속성도 일신교가 배척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정확히 정의하면, 일신교는 단순히 하나의 신을 배타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숭배는 다른 신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특정한 신을 숭배한다는 뜻에서 ‘일신 숭배’monolatry라 일컬어지며, 종교 역사에서 상당히 흔한 현상이었다. 일신교는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하나의 신을 배타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뜻한다.
- 135 –
아케나텐은 백성들에게 다른 신을 배척하고 오직 아톤만 섬기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에는 ‘신’을 뜻하는 단어의 복수형조차 이집트 어휘에서 지워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삼각기 세 개 또는 ‘깃대’로 표현되던 ‘신들’이라는 복수형 단어가 이집트에서 더는 ‘단어’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 136 –
일신교의 배타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이 일신교를 받아들이기를 꺼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신교가 수천 년동안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을 뿌리내지지 못한 주된 이유는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신적인 존재를 인간화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충동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 137 –
택일신론이 일신교로 거의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티핑 포인트에 있다. 하위 신들의 자질과 속성이 서로 충돌하고 완전히 모순되더라도 최고신이 그것을 착실히 떠맡는 것과 모순되고 충돌하는 속성과 자질을 동시에 애초부터 갖고 있는 단일한 신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물론 이 딜레마를 간단히 해결하는 단순한 방법이 있다. 신을 ‘탈인간화’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에게서 인간의 속성을 모두 떼어내고 크세노파네스와 플라톤 등 그리스 철학자가 그랬듯이 신이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창조적 본질이라고 재정의하는 것이다.
- 144 ~ 145 –
‘탈인관화한 신’이라는 개념이 합당하려면 신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겨야하므로 인지과정이 부정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려 애쓰고, 형상이 없는 존재의 형상을 생각해내려 애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무척 어려운 과제였다.
- 146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 주장을 들었더라면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 족장들은 야훼라는 미디안 부족의 사막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신인 ‘엘’El로 알려진 가나안의 신을 섬겼다.
- 156 –
모세 오경에서 야훼 문서로 엘로힘 문서의 주된 차이는 신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엘로힘 문서에서 신은 ‘엘’ 혹은 ‘엘로힘’(‘엘’의 복수형)이었고, 영어로 번역된 대부분 성경에서 대문자 G를 사용한 God(하느님)로 번역되었다. “After these thing, God(Elohim) Tested Abraham”(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엘로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셨다. 창세기 22:1). 반면 야훼 문서에서 신은 야훼로 알려졌고, 영어 성경에서 대체로 모든 대문자를 사용해 LORD로 번역되었다. “The LORD(Yahweh) said, “Surely I have seen the misery of my people who are in Egypt”(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출애굽기 3:7)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작성된 성직자 문서에서는 야훼라는 이름과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두서없이 사용하며 두 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드러냈다.
- 158 –
야훼와 엘은 결국 이스라엘에 융합되었지만 융합의 역사는 성직자 문서의 예상보다 더 험난했다. (중략) 신명기 이른바 ‘모세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구절에서 그 점진적인 과정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엘리온께서 민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시고, 인류를 갈라 흩으실 때, 신들의 수효만큼 경계를 그으시고 민족들을 내셨지만, 야곱이 야훼의 몫이 되고 이스라엘이 그가 차지한 유산이 되었다. (신명기 32:8-9)
- 164 ~ 165 –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교는 이렇게 탄생했다. 아브라함과 계약이나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파괴된 성전의 잿더미에서, 패배한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패배한 민족의 거부감에서 유대교는 잉태되었다.
- 170 –
요한볶음의 저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는 헬레니즘 철학에 심취하고 그리스어를 말하는 로마 시민이었던 게 분명하다*여하튼 사도 요한은 아니었다. 요한복음은 기원후 100녀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즈음 사도 요한은 죽은 지 오래된 뒤였다) 요한복음을 읽은 사람들도 헬레니즘 세계에서 살며 그리스어를 말하는 로마 시민들이었다. 따라서 요한이 복음서를 시작하며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의미-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창조의 근원적 힘-에서 그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 173 –
예수의 신격화가 대부분 사례와 다른 점은 예수 자신의 지위보다 그가 구현하려는 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고대 근동의 다른 모든 ‘신인’은 많은 신 중 하나가 취한 인간의 다양한 현상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예수는 우주의 유일한 신이 취한 단 하나의 인간적 형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178 –
“하나의 광선이 태양에서 나오면 한 부분이 전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광선은 여전히 태양 광선이기 때문에 그 광선에서 태양이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태양의 본성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확장된 것이다. 따라서 신으로 나오는 것도 신이고 신의 아들이므로 그 둘은 하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혁신적 신학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 단어가 바로 ‘트리니아타스’Trinitas, 즉 ‘삼위일체’다.
- 191 –
기독교는 인간에게 원초적이고 깊이 내재된 충동에 철저히 순응하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기독교의 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 193 –
정확히 말하면, 무함마드는 야훼를 알라로 대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야훼와 알라를 ‘동일한 신’으로 보았을 뿐이다.
- 203 –
무함마드는 의식적으로 알라의 탈인간화를 시도한 듯하다. 물론 무함마드가 우상 숭배를 경멸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메카를 정복한 무함마드는 가장 먼저 카바에서 모든 우상을 꺼내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쿠란은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한 구절로 가득하다. 알라는 ‘양손으로 인류를 보듬은 존재’로 묘사되고, ‘만물을 꿰뚫어보는 눈’과 얼굴-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알라의 얼굴’-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수라 2:11)
- 205 –
교리에서 말하는 알라와 쿠란에서 묘사된 알라는 명백한 모순된다. 이 외견상 모순을 확실히 해결하는 방법은 쿠란의 묘사를 신의 겉모습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 읽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쿠란의 묘사는 타우히드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 된다.
- 206 –
결론적으로,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가 아니다.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 215 –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읽었을 대 나는 아담과 하와처럼 벌을 받지 않으려면 신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담과 하와는 신을 거역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게 분명한 듯하다. 어쩌면 이 오래된 인류 공동의 기억에서 더 깊은 진리가 감추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 217 –
반드시 종교로 통해 범신론에 도달한 필요는 없다. 철학을 통해서도 범신론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 (중략)
아니면 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과학에 집중하는 방법도 있다. (중략)
어느 쪽으로 통하든 간에 “모둔 것은 하나이고 하나가 모든 것이다”All in one, and one is All라는 근본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 하나’가 무엇이고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며 어떻게 경험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몫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그 하나’는 내가 신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 220 ~ 221 –
선택은 당신 몫이다. 신의 존재를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신을 정의해보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신화 속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본받아 금지된 과일을 먹어보라.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신이다!
- 224 –
신과 관련된 책을 번역할 때마다 항상 걱정인 것은 기존 종교의 반발 가능성이다. 나 자신도 기독교인이다. 내가 배운 기독교는 배척의 종교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의 종교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는 애초부터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한복음 8장)라는 가르침을 곱씹는다면 누구도 이 책에 돌을 던지지 못할 것이다.
- 2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