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작가 안용학 작품 "계곡"

 

 

貧交行(빈교행: 가난한 사귐) 
 
翻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
번수작운복수우 분분경박하수수
君不見管鮑貧時交 此道今人棄如土
군불견관포빈시교 차도금인기여토
 
손바닥 뒤집으면 구름 되고 손바닥 엎으면 비가 되니,
어지럽고 경박한 세상 어찌 꼭 헤아려야 하나.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관중과 포숙 가난할 때의 사귐을!
이 도를 요즘 사람들 흙처럼 내버리네.

 

두보(杜甫)의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북(湖北) 양양(襄陽) 사람이다. 사실 두보는 하남(河南) 공현(鞏縣)의 요만(瑤灣)에서 태어났으나 선대(先代)가 두릉(杜陵)에서 양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당서(唐書)는 두보를 양양 사람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시인 두심언(杜審言)이었고, 아버지 두한(杜閑)은 봉천령(奉天令)이란 작은 벼슬을 하였으나, 집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보는 병도 많았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14~15세 때에 유명한 문사(文士)들과 수창(酬唱)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다. 20세 되던 해에는 집을 떠나 3~4년 동안 남으로 오(吳)·월(越)을 유람하며 역사 문물, 풍광에 심취하였다. 24세 때에는 낙양(洛陽)으로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실의에 잠겨 산동(山東), 하남(河南) 일대를 장유(壯游)하였다. 이 시기 이백(李白), 고적(高適) 등과 같은 일류 시인들과 창화(唱和)하며 시교를 맺기도 하였다.
 
두보는 35세 되던 해인 천보(天寶) 5년(746)에 다시 장안으로 가 10년 가까이 곤궁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품은 뜻을 펼 수 없어 울적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천보(天寶) 11년(752) 두보의 나이 42세 되던 해에 성대하게 제전(祭典)이 베풀어졌을 때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올려 본인의 가세(家世), 학문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고 등용을 희망하였다. 현종(玄宗)은 두보의 글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재상에게 그를 집현전으로 불러들여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 뒤 두보에게 하서현위(河西縣尉)를 제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 = 무기고 관리)으로 임명하였다. 두보는 장안의 10년 동안의 간고한 현실 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여인행(麗人行), 병거행(兵車行), 자경부봉선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詠懷五百字) 등과 같은 사실주의적 시를 써 나갔다.
 
그리고 안사(安史)의 난은 찬란했던 당의 역사에 내리막길을 걷게 하였고, 두보 생활사에 있어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천보 15년(756) 6월에 동관(潼關)을 지키지 못하여 장안이 함락되자 두보는 봉선(奉先)을 떠나 부주(?州 = 현 섬서(陝西) 부현(?縣))로 향하였다. 섬서(陝西), 하남(河南), 산서(山西) 등이 전화에 휘말려들었을 때 숙종(肅宗)이 감숙(甘肅) 영무(靈武)에서 즉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주에서 영무로 달려가는 도중 적군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춘망(春望)」, 「월야(月夜)」 등은 장안에 감금되었을 때에 지은 시이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지 2년째 되던 해에도 두보는 장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춘망(春望)」, 「애강두(哀江頭)」, 「애왕손(哀王孫)」 등의 시를 통하여 국가, 백성들의 고통을 여실히 묘사하였다. 「춘망(春望)」을 예로 든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山河)는 그냥 있어,
장안(長安)에 봄이 와서 초목이 우거졌다.
시세(時勢)를 슬퍼해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란다.
봉화(烽火)가 삼월까지 계속하나니,
집의 편지는 만금(萬金)만큼 값지다.
흰 머리털 긁을수록 자꾸만 빠지나니,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하겠구나.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감시화천루,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봉화연삼월,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백두소경단, 혼욕불승잠.
 
두보는 지덕 2년(757)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봉상(鳳翔)으로 가 숙종을 배알하였다. 숙종은 두보를 좌습유(左拾遺, 황제 명령의 타당성을 검토하여 간하는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친구 방관(房琯)의 죄를 옹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처자가 있는 부주 강촌(羌村)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의 비참한 정경이 「강촌(羌村)」, 「북정(北征)」, 「삼리(三吏)」, 「삼별(三別)」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건원(乾元) 원년(元年, 758)에 사사명(史思明)의 변란을 피하여 장안을 떠나 산물이 풍부한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를 찾아갔다. 성도의 생활은 엄무(嚴武), 배면(裴冕), 고적(高適) 등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이였다. 성도 서쪽 교외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草堂)을 짓고 야로(野老)들과 교유하였다. 대종(代宗) 광덕(廣德) 2년(764)에는 서천병마사(西川兵馬使) 서지도(徐知道)의 난을 진압한 뒤, 두보는 절도참모(節度參謀) 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의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뒤에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년 뒤에 엄무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호북(湖北), 호남(湖南)의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초옥위추풍소파가(草屋爲秋風所破歌)」, 「문관군수하남하북(聞官軍收河南河北)」, 「우정오랑(又呈吳郞)」, 「제장(諸將)」, 「추흥(秋興)」 등의 시를 지었다.
 
두보의 초당(草堂)
두보의 초당(草堂)
 
그 뒤 두보(杜甫)는 기주(夔州, 사천성 봉절현(奉節縣))에서 그런 대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으나 풍토가 거칠고 친구가 적어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마침 동생 두관(杜觀)의 권고에 따라 백제성(白帝城)에서 배를 타고 구당협(瞿塘峽), 삼협(三峽)을 지나 형양(衡陽)에 도착했으나 반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웠다. 두보는 형양을 떠나 강릉(江陵), 공안(公安)을 거처 악주(岳州 =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에 이르러 얼마동안 머물렀다. 이 때에 등악양루(登岳陽樓)란 시를 지었다.
 
옛날부터 들어온 동정호,
이제야 악양루에 올랐다.
오나라 초나라 땅은 동남으로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물 속에 떠 있다.
친구에게서는 편지 한 장 없고,
늙고 병든 나에게는 배 한 척 밖에 의지할 곳 없구나.
관문 북쪽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끊임없고,
난간에 기대니 눈물만 줄줄 쏟아지는구나.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석문동정수, 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오초동남탁, 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친붕무일자, 노병유고주.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융마관산북, 빙헌체사류.
 

이와 같이 악양에서도 살 수 없었던 두보는 대력(大曆) 5년(770)에 뇌양(?陽 = 호남(湖南) 형양동남(衡陽東南))으로 향하였으나 상강(湘江)에 큰물이 져 강상을 오락가락하다가 배 안에 병져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백(李白)을 '시선(詩仙)', 왕유(王維)를 '시불(詩佛)'이라 하듯 두보(杜甫)를 '시성(詩聖)'이라 하는데, 혼란했던 역사의 현실적인 경험을 시로 썼기 때문에 '시사(詩史)'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존하는 두보의 시는 1,400여 수로 이백의 1,000 수보다는 많으나, 백거이의 3,000여 수보다는 적다.

Isao Sasaki - Ophelia